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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승희 金勝凞
1952년 전남 광주 출생.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태양 미사』 『왼손을 위한 협주곡』 『미완성을 위한 연가』 『달걀 속의 생』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냄비는 둥둥』 『희망이 외롭다』 『도미는 도마 위에서』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등이 있음. sophiak@sogang.ac.kr
이 뜨거운 시
뜨겁게 달궈진 프라이팬 위에서
달걀의 흰자위와 노른자위가 익어가고 있다는 것이 시가 될까
펄펄 끓는 프라이팬에 달걀을 깼을 때
갑자기 털이 몇가닥 붙은 병아리 한마리가
지글거리는 프라이팬을 밟으며 앗 뜨거 앗 뜨거
가녀린 발을 하나씩 번갈아 밟으며 뛰쳐나왔다고 해야
시가 되겠지
많이 무서웠지?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런 시
그 뜨거운 무쇠 프라이팬에서 두 발을 번갈아 밟으며 간신히 도망쳐 나온
눈도 못 뜬 노란 병아리
양수가 찢어진 듯 눈과 얼굴에 줄줄 흘러내리는 흰자위 같은
반투명한 양막을 뒤집어쓰고
앗 뜨거 앗 뜨거
인생을 알기 전에 화상부터 입었네
온통 불붙은 세계의 스크린이 얼떨떨한 그런 시
양막은 포유류의 태아를 싼 반투명의 얇은 막
그럼 병아리가 포유류야? 포유류였어? 닭이 젖을 먹였어?
뜨거운 프라이팬 위에서 병아리가 젖을 먹었나? 닭이 젖꼭지를 물렸나?
그림은 자비롭지만
닭이 포유류가 아니니까 시가 되지
시는 그런 거지
그런 시
이 액체의 정체성
금방이라도 머리카락 줄줄 흐르는 물에서
소복 입고 머리 푼 여인이 나올 것만 같은 그런 시,
지글거리는 프라이팬에 물이 뚝뚝 떨어지고
하얀 수증기로 살이 익어가는 고통
시인은 아프다는 말도 못하고 웃고 있어
맥락이 끊어진 뼈의 고통
전신화상으로 수포가 벌떼처럼 일어나
두개골 속에 하얀 찔레꽃이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나네
그렇게 돌발적인 것이 있어
그저 어안이 벙벙한 우연
돌발성의 황홀이라는 것
거대한 윤회의 바퀴가 돌아가다 끊어져 전복되고 굴러가니
그런 것이 시인
그런 시
호박의 단상
아, 다르고 어, 다른 여름 햇빛 아래
아기 머리통만 한 호박이 줄지어 익어가고 있다
그늘 속에 사는 것
땡볕 속에 사는 것
운명의 지리학에는 완충선이 없다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오로지 빨간불
빨간불의 타는 고독 속에
아, 다르고 어, 다른 여름 호박의 소나기 아래
배보다 더 큰 배꼽을 내놓고
피가 단순해지는 늘어지는 낮잠
너는 살아도 호박, 죽어도 호박
억지로 하는 것과 저절로 되는 것,
호박, 억지로 익지 마라
저절로 되는 것이 잘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