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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조용미 曺容美
1962년 경북 고령 출생. 1990년 『한길문학』으로 등단.
시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기억의 행성』 『나의 다른 이름들』 『당신의 아름다움』 등이 있음.
treepoem@hanmail.net
초록의 어두운 부분
빛이 나뭇잎에 닿을 때 나뭇잎의 뒷면은 밝아지는 걸까 앞면이 밝아지는 만큼 더 어두워지는 걸까
깊은 어둠으로 가기까지의 그 수많은 초록의 계단들에 나는 늘 매혹당했다
초록이 뭉쳐지고 풀어지고 서늘해지고 미지근해지고 타오르고 사그라들고 번지고 야위는, 길이 휘어지는 숲가에 긴 나무 의자가 놓여 있고
우리는 거기 앉았다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람처럼
긴 의자 앞으로 초록의 거대한 상영관이 펼쳐졌다 초록의 음영과 농도는 첼로의 음계처럼 높아지고 다시 낮아졌다
녹색의 감정에는 왜 늘 검정이 섞여 있는 걸까
저 연둣빛 어둑함과 으스름한 초록 사이 여름이 계속되는 동안 알 수 없는 마음들이 신경성 위염을 앓고 있다
노랑에서 검정까지
초록의 굴진을 돕는 열기와 습도로
숲은 팽창하고
긴 장마로 초록의 색상표는 완벽한 서사를 갖게 되었다
검은 초록과 연두가 섞여 있는 숲의 감정은 우레와 폭우에 숲의 나무들이 한덩어리로 보이는 것처럼 흐릿하고 모호하다
봄의 책력
솔수펑이 높드리길 동백숲 해안절벽 어딜 가도 그곳에 당신이 있었소
한나절 청별항에서 보옥리까지 예작도 복생도 기섬을 바라보다 공룡알해변의 매끈한 색색의 둥근 돌을 밟고 지나왔소
길마가지 산자고 부처손 감탕나무 비파나무 만날 때마다 그 눈부심 뒤에 누군가 어른거린 듯하오
부용리 정자리 낙서재 바위 곡수당 앞 물길에서도 당신은 기이하고 다정하게 나의 순간을 나누어 가졌소
참식나무는 새순을 비단처럼 매끈하게 하얗고 보송한 솜털로 피워 올렸소 꽃망울보다 열매보다 더 신비하고 아름답소
예덕나무 붉은 새싹과 육박나무 얼룩덜룩한 줄기가 누군가의 뒷모습처럼 선명하오 누구도 그리지 않고 이 봄을 혼자 왔건만
엽서는 나보다 느리게 더 천천히 아주 느리게 갈 것이오 주소를 조금 다르게 적었기 때문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