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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수명
1965년 서울 출생. 1994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 『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 『붉은 담장의 커브』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마치』 『물류창고』 『도시가스』 등이 있음.
smlee712@gmail.com
성묘객들은 밝은 옷을 입는다
그는 컵에 담긴 아이스커피를 빨대로 휘휘 저으며 성묘를 가자고 한다. 성묘객들은 모자를 쓰고 밝은색 옷을 입는다. 손에 꽃을 들고 있다. 무덤을 빙 둘러 서 있다.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서 절을 한다.
그는 컵을 휘휘 젓는다. 컵 속을 들여다보며 세상을 떠난 사람의 성묘를 가자고 한다. 공원묘지에는 성묘객들이 많아서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전개된다. 미리 성묘한 사람들과 미리 성묘하려는 사람들이 벌초를 권장한다. 무덤을 정리하고 벌집을 숨긴다. 벌초를 하는 사람이 있고 벌초하고 잔디를 입히는 사람이 있고 벌초하고 잔디 입히고 다시 와서 벌초하는 사람이 있다. 올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벌초를 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컵을 계속 열심히 휘젓는다. 학교를 그만두고 직장을 그만두고 그는 밝은색 옷을 입는다. 운동을 그만두고 성묘를 가자고 한다. 컵 속에는 아직도 얼음이 둥둥 떠 있다. 그는 컵을 들어 올린 채 성묘에 접속한다. 성묘 문화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성묘객들이 무리를 이루어 나란히 걷는다. 입은 옷을 넓게 펼치며 벌떼를 스쳐 지나간다. 벌들이 전부 다른 무덤에서 기어 나온다. 성묘객들은 서로의 존재를 비밀에 부친다.
성탄절이 이상하다
캐리어 상점에 들른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캐리어들로 빼곡하다.
내가 찾는 기내용 캐리어가 있다.
주인이 없다.
잠깐 자리를 비운 것이라 생각하고 기다린다.
하지만 이렇게 빈 상점에 서 있으면 퇴짜를 맞은 기분이 든다.
가방들 사이를 돌아다닌다.
건강이 나빠지면 가방을 산다. 더 나은
깨지지 않는 캐리어를 사야 한다. 그런 것은 없지
흠집이 너무 쉽게 나는 것이다. 한번 생긴 흠집은 꿈쩍하지를 않는다.
반짝거리는 가방들
당장 반짝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을까 마음을 졸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쳐다본다.
상점 안에서 두리번거리고 서 있는 게 이상하다는 표정이다.
나도 이상하다.
다가오는 성탄절이 이상하다. 성탄절에 여행하려고 계속 가방가게를 찾아다니는 것이 이상하다.
지나가다가 아무 정보도 없는 이 상점에 들른 것이 이상하다.
아직 건물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새 가방들을 바라본다. 가방 뒤로 숨는
두리번거리는 벌레를 맥없이 눈으로 좇는다.
추운 겨울 시내 한복판을 걷다가 오토바이족에게 가방을 빼앗겼던 기억이 난다.
그 가방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가방 내놔, 악을 쓰며 쫓았었지
내가 짐이다.
이 짐을 계속 옮기는 자가 누군지 모른다.
유행하는 폴리카보네이트 재질의 캐리어를 고른다.
주인을 기다린다.
주인이 캐리어를 팔지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