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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최백규 崔伯圭
1992년 대구 출생. 2014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등이 있음.
qkenr312@hanmail.net
그해 여름에서
더는 커터칼로 주민등록증을 긁지 않을 그해 여름에서
동기들은 도시로 상경하고 서로의 방을 떠돌며 무언가
신기했다 어쩐지 자꾸 두근거리고 쉽던 것이 어려워져 누군가
계속 보고 싶었다 그해 여름에서
모르는 곳들이 줄어들고 수상한 친구들이 늘어날수록
나는 말수가 적어지고 취하지 못했다 그해 여름에서
너는 어두운 복도를 똑바로 걸어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해 여름에서 우리가 선택한
국회의원은 날치기로 법을 통과시켜 집값을 폭등시키고
본인 건물의 보증금과 월세를 몰래 올리다
적발되었다
그해 여름에서 염색공들의 피부도 함께 물들고
용접공들의 화상 자국이 점점 깊고 넓게 퍼져만 갔다
그해 여름에서 전국 화장터에 시체들이 쌓이고
지지하는 정당이 여권인 시대라면 국민들은
누가 죽었는지 얼마나 불행한지
상관없었다
그해 여름에서 길가에 늘어선 가게들이 거짓말처럼 문을 닫고
취객들이 택시를 향해 소리치며 손을 흔들고
그해 여름에서 비행기가 폭파되고 지하철이 불타고 배가
가라앉았다
지겹다 지겨워서 잊히지 않는다
그해 여름에서 멀쩡한 건물과 다리가 무너지고
그해 여름에서 연쇄살인범들이 줄줄이 잡히고
아이들이 유괴되고 노인들이 스스로 실종되었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그해 여름에서 그해 여름에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울리고 주먹으로 벽을 세게 때리고
아무도 내 이야기를 듣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고
모두가 웃었다 옷을 벗고 물을 마시고 바닥에 누워 천장만 노려보았다
그해 여름에서 젊은 어머니는 바닥에 포대를 펼치고 밤을 깎았다
가져온 밤을 다 깎아 돌려주어야 일당을 받을 수 있어
말없이 밤을 깎았다 잠든 나를 가끔 돌아보며
어긋난 손가락을 부여잡으며
신의 미래
이제 네가 신이 되었어
사랑하는 사람들이 바닥에 뉘인 나를 내려다보며 전해주었다
나무로 되어 조용히 망가진 여름의 교실에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서럽게 울면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죽으면 다 끝이라고 반복했다
열린 창을 통해 온몸에 빛이 쏟아지고 손바닥으로 눈가를 쓸어내리듯 바람이 가벼웠다
신은 왜 나에게 신을 주었을까
바다에서 썩지 못하고 다시 밀려온 사람을 바닷가에서 수습하듯
여름 내내 살의와 선한 마음들이 세계를 둘러싸고 일상을 회복하기 위한 긴 싸움이 이어졌던 것이다
나의 몸 위로 수많은 꽃이 쌓이고
환하게 웃으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안아주고 싶었다
미래를 마주하고 온 것처럼
따뜻한 눈물로
더이상 막아야 할 슬픔도 지켜야 할 행복도 없지만 아직도 구름이 흘러서
신이 된 첫날에는 인간들을 죽이고 도망치는 꿈을 꾸었다
죽기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