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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장정일‧한영인 『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 가는군요』, 안온북스 2022
경합의 장을 만드는 비평의 부대낌
복도훈 卜道勳
문학평론가 nomadman@hanmail.net
작가 장정일과 평론가 한영인이 주고받은 비평서간문 『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 가는군요』(이하 『이편저못』)를 읽으면서 우연과 인연이 수놓은 별자리와 같은 책을 누군가와 함께 쓸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상상했다. 제주살이를 하러 온 작가와 제주에 살고 있는 평론가가 우연히 만나 책과 술과 음악이 함께하는 작은 축제와도 같은 만남을 가졌고, 그 만남은 스물네통의 편지로 결실을 맺었다.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해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해주는 턴테이블이었다”(185면). 또래 문청들처럼, 나는 내가 만 열아홉이던 1992년에 출간된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의 문장을 주문(呪文)처럼 외우면서 문학에 입문했다. 2005년에 평론을 써서 첫 원고료를 벌고 한동안은 한영인처럼 “월 60만 원 벌이”(249면) 안팎으로 먹고살았다. 지금은 “대학에 임용된 이후 더는 평론을 쓰지 않는 사람들”(255면) 가운데 한명이 된 것 같다. 책을 펼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정일이 말문을 연다. 더는 전복적이지 않은 “차이를 무한 증식할 게 아니라, ‘우리는 인간’이라고 말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52면). 한영인이 바통을 이어받는다. “차이에 대한 기만적인 인정으로 무언가를 봉합해버리려는 편의적인 행태”를 거스르며 “다름 속에서 한껏 부대껴야 하지 않을까요.”(67면) 나는 이 ‘부대낌’에 붙들렸다. 거기서 비평의 불꽃을 점화할 부싯돌을 보았으며, 동시대 비평가로 부대낌에 동참하고 싶었다. 물론 다름 속의 이 부대낌이야말로 『이편저못』이 절로 보여주는 미덕임을 덧붙여야겠다.
『이편저못』은 일상의 즐거움과 소소한 의례를 함께 나누는 소중한 사담(私談)에서 동시대 한국문학의 여러 주제와 그를 둘러싼 사회현실에 대한 폭넓은 대화를 자유롭게 오간다. “무릎 높이 정도에서 찰랑거리는 바다에 엎드려 양손을 쫙 펴고 열 손가락을 쇠스랑처럼 사용해 모랫바닥을 긁으며 돌아다니”면서 조개를 잡는 제주도민 한영인의 비법(98면)이나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로 둥글둥글한 수박을 씻어주면 수박이 좋아서 웃는 것 같”다는 수박 마니아 장정일의 미끈한 비유(159면)는 책을 읽으면서 덤으로 얻는 즐거움이리라. 그렇게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의 살랑거리는 물결은 때로는 공감을, 때로는 좁혀지지 않는 불협화음을 내면서 일렁이는 파도로 변한다.
참으로 여러 주제들이 두 사람의 대화를 풍성하고 비옥하게 만든다. 같음과 차이뿐만 아니라 제도이자 반(反)제도로서의 문학과 문화, 에로스의 문학과 타나토스의 문학, 위선과 위악, 죄의식과 고백, 작가와 픽션 등. 짤막하게 짚어보면 “‘이불킥으로’ 되돌아오”는 “혁명”(94면)의 코스튬만 선보이는 오늘날의 제도화된 문학(비평)에 대한 일침은 서글픔과 부끄러움을 자아냈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문학은 비록 아이디어 수준이더라도 좀더 진전된 논의를 보고 싶었으며, “자신이 생각하기에 올바르지 않다고 판단되는 누군가의 발언이나 창작물을 공공 영역에서 삭제하기 위해 벌이는 일련의 과격한 활동”(297면)인 ‘캔슬 컬처’(cancel culture)에 대한 비판은 십분 공감이 되면서도 더 밀고 나갔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그럼에도 편지 이곳저곳에 나타난 틈새가 오히려 비평적인 개입을 유도했다고나 할까. 이것이 『이편저못』의 특이함이자 장점일 터. 덕분에 두 저자와 여러 작품을 함께 읽는 듯했으며, 캔슬 컬처에 대해서는 덧붙일 말도 생겼다.
두 사람이 논한 작품 중 김혜진 장편소설 『9번의 일』(한겨레출판 2019)은 주인공(‘9번’)이 직장으로부터 퇴직을 강요받고 막다른 선택에 내몰리기까지의 착잡한 사회적·실존적 상황을 그린 소설이다. 그렇지만 나는 한영인을 따라 이 소설을 “숙명적이고 패배주의적인 세계관”(36면)이 “인물과 상황”(38면)을 압도한, 실패한 ‘노동소설’로 읽기가 다소간 어려웠다. 장정일은 노동소설로는 “온전히 포획되지 않는 이질적인 주제”(53면), 신자유주의적인 조건에서 노동하는 실존이 다다르는 “소진”(60면)에 주목했다. 그러나 회사의 통신탑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주인공의 “상징적인 자살”(58면)을 매정하게 깎아내린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영인과 장정일의 독해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노동소설의 어떤 모델을 상정하는 듯 보였다. 『9번의 일』을 읽고 한동안 내게 남은 잔상은 개의 주인을 찾아주려는 주인공의 집요한 발걸음이었다. 통신탑 설치를 반대하던 주민 중 한 사람인 노인이 기르던 개였다. 개를 치료하고 주인을 찾아주려는 9번의 노력은 회사에 대한 그의 집착이나 일터에 남으려는 오기만큼이나 기이했다. 이 기이함을 서둘러 판단하기보다는 거기에 좀더 머무르고 싶었다.
『이편저못』이 논쟁보다는 배제와 제명을 선호하는 분위기를 거스르면서 작가 김봉곤 사태를 뒤늦게나마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일은 꼭 언급하고 싶다. 작가와 작품의 도덕적 하자를 적발하고 집단적인 사적 제재를 시도한 결과로 남은 것은 결국 무엇이었을까. 책을 절판시켜 그에 대한 논의를 차단했으며, 비평가와 작가가 마땅히 행했어야 할 문학적 판단은 작가와 그의 행위에 대한 사법적 판정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한영인은 작가와 관점의 올바름을 “매섭게 추궁하는 목소리”의 등장을 “억압된 것의 귀환”(418면)을 빌려 추정한다. 픽션에 유령처럼 들러붙어 있던 누적된 의심(‘작가가 실제로 저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이 결국 폭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때 한영인은 자신이 비판하는 캔슬 컬처와 그 불가피함을 결국 용인하는 것은 아닐까. 선행되어야 할 질문도 있지 않을까. 한국문학에서 픽션과 그것의 독립성이 어떻게 구축되어왔는가 하는, 오토픽션은 픽션을 독립적인 가치로 인정해온 문화의 산물인가 하는 질문 말이다.
쉬운 합의와 배제를 경계하고 불협화음이 나더라도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경합의 장(agonistic field)을 만들어내는 것이 비평의 일임을, 또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도 귀한 것인지를 이 책에서 배워보자. 두 저자의 우정으로 탄생한 『이편저못』과 같은 작업이 많아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