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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금희 金錦姬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너무 한낮의 연애』 『오직 한 사람의 차지』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 『복자에게』, 연작소설 『크리스마스 타일』 등이 있음.
장편연재 1
대온실 수리 보고서
이 열매는 지난해 시월 상달, 우리 둘의
조그마한 이야기가 비롯될 때 익은 것이어니.
작은 아씨야, 가녀린 동무야, 남몰래 깃들인
네 가슴에 졸음 조는 옥토끼가 한 쌍.
—정지용 「자류(柘榴)」 부분
1. 원서동
처음에 배운 건 수리의 종류에 관한 용어들이었다. 중수와 중창과 재건의 차이 같은 것. 면접을 끝내고 받아 온 『고건축용어사전』에서 가장 먼저 찾아본 말들이었다. 면접은 친구 은혜가 소개해준 자리였다. 건축사사무소인데 문화재 공사 백서 기록담당자를 채용하고 싶어한다고.
“내가 너 석모도 헤밍웨이라고 자랑 많이 했다. 저번에 시청이랑 해서 낸 저서도 보내주고, 그 독수리 책.”
시에서 지원을 받아 작업한 그 책은 강화에서 겨울을 나는 철새 흰꼬리수리와 흰죽지수리에 관한 일종의 홍보자료였다. 같은 맹금류라도 그 둘은 독수리와는 다른 종이고 홍보책자 역시 내 저서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은혜에게 애썼네, 하고 인사했다. 나와 여러모로 다른 은혜는 어떻게든 일은 되게 만들어야 한다는 신조로 항상 뭔가를 추진 중이었다. 주로 사람과 사람을 엮는, 녹록지 않은 일을 맡았고 그래서 섬 친구들 사이에서도 별명이 추진체였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보내고 며칠 뒤에 파주에서 면접을 봤다. 면접 자리에 나온 사람은 사무소 소장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동업자라고 했다. 동업자라고 해도 회사 내 무슨 직함이 있겠지 싶었는데 그런 건 없고 부를 때는 ‘소목수’라고 하면 된다고 했다. 커피를 가져다준 젊은 직원도 “소목님, 여기” 하며 잔을 두고 갔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낼 때마다 왜 일반 대학이 아닌 학점은행제로 학위를 땄는가를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여왔지만 그는 그런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은혜가 보낸 책자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고 하더니 줄곧 그 얘기만 계속했다. 특히 어린 흰죽지수리가 교동도 평야에서 다른 수리 떼와 까치, 까마귀들과 경쟁하다 산 정상을 차지하는 부분이 감동적이었다고 했다. 책자를 쓰면서 그저 관공서 유인물로 사용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누군가의 그런 소감을 듣는 일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살아 움직이는 수리는 아니지만 저희가 하는 집수리도 수리는 수리이니까, 이 일에서도 그런 장면들이 발견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그는 그 말을, 아까부터 반복하고 있는 두 팔을 활짝활짝 벌리는 과장된 제스처와 함께 했다. 나는 공사 백서를 건조하게 기록하는 일이 감동과 무슨 상관있을까 생각하면서도 감사합니다,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목수의 방은 건축사사무소라고 하면 떠오를 만한 세련되거나 모던한 구석이 전혀 없었다. 그저 너무 많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갖가지 것들이 쌓여 있었다. 철제로 된 선반, 진열장이 공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어디서 뜯어냈는지 모를 고목재와 건축 부속품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나무 냄새는 거기서 난 모양이었다.
“석모도에서, 매일 나오시는 건 아니지만 오가기 어렵지 않으실까요?”
“이제 다리가 개통해서요. 서울은 좀 걸려도 여기까지는 한시간이면 옵니다.”
“아.”
소목수는 탄식하듯 말하더니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나는 뭐가 잘못됐나 싶어 당황했는데 “그러면 이제 예전 석모도가 아니네요” 하는 소목수의 말이 이어졌다. 변화는 대교 공사가 시작되기 전부터도 있어왔다. 교량 건설 소문이 돌고 공사 계획과 무산이 거듭되는 동안 섬에서 그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모래 한톨도 없을 것이다. 육지와 이어진다는 사실은 기후가 바뀌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예측할 수 없는 혼란 아래 섬의 많은 것들이 생기거나 사라졌고 살거나 죽기도 했다.
“하다못해 갈매기들도 곤란하죠. 페리가 안 다니면 뱃전에서 사람들이 주는 새우깡도 못 먹으니까.”
소목수가 내 말에 동의하면서 갈매기들도 재취업이 필요해졌네요, 하고 웃지도 않고 대답했다. 나는 백서 작업을 하는 곳이 어디냐고 말을 돌렸다.
“창덕궁이랑 같이 있는 창경궁, 그 안에 대온실 있는 거 아시죠? 그 보수공사입니다.”
밑줄을 긋듯 그가 힘주어 대답했다. 모처럼 큰 공사를 맡아서 담당자들이 기대하고 있다고. 이런 대공사와 함께 온 걸 보면 영두씨가 운이 좋은 것 같다고.
하지만 나는 창경궁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아주 축축하고 차가운 이불에 덮인 것처럼 마음이 서늘해졌다. 내가 십대 시절을 보냈던 곳이 창덕궁 담장을 따라 형성된 서울의 동네, 원서동이었기 때문이다.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면 더 짙고 선명해지던 검은 기와들의 윤기가 생각났고, 하숙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 당시 3번 마을버스를 타고 안국역과 빨래터와 정독도서관을 하염없이 돌던 열네살 때의 막막함이 또렷이 떠올랐다.
빨래터는 실제 정류장 이름이었고, 궁에서 흘러나오는 개울이 있는 곳이었다. 여름이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고 동네 고양이들도 목을 축이며 빨래터 수문을 통해 창덕궁을 드나들곤 했다. 비탈을 내려가 자세히 보면 빨래터 물길은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걸어갈 만한 지하 통로로 계속 이어져 있었다. 어린 나는 이 물은 어디로 향하는지 궁금해했고, 그것이 한강으로 강화로, 석모도의 서해바다로 흐르는지를 생각했다.
뜻밖의 장소가 나와 망설여진 나는 기대보다 적은 작업비를 핑계로 들더라도 면접을 그만 끝내야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소목수는 “차차 배우시겠지만 그래도 요런 사전 정도는 가지고 계셔야겠죠”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작도야, 그거 어딨지? 그거.”
아까 커피를 가져다준 직원이 아주 느리고 천천히 슬리퍼를 질질 끌며 다가왔고 얼굴만 쏙 내밀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작도 너 어제도 밤새웠냐?”
작도라고 불린 그의 얼굴에는 불면과 과로 그리고 오래된 피로가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뭐가 필요하세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묻자 소목수는 “내가 할게, 여기 인사드리고” 하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문간에서 느릿느릿 걸어 들어온 그는 희미하게 웃더니 “제가 대온실 담당입니다” 하고 인사했다.
“작도는 제가 작도의 신이라 붙은 별명이고, 은세창 대리입니다.”
“세창, 가서 마저 작도해라. 오늘은 집에 꼭 가고.”
“어차피 못 가요.”
그렇게 남자가 사라지고 나서도 어지러운 사무실을 오가며 뭔가를 열심히 찾던 소목수는 이내 새의 눈처럼 또렷한 옹이가 진 나무판을 들춰내고 책 한권을 꺼냈다. 가죽 양장의 그 책에는 ‘고건축용어사전’이라는 글씨가 크게 쓰여 있었다.
그날 섬으로 돌아가자마자 은혜에게 연락이 왔다. 면접 결과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할 수 없이 차를 몰고 은혜네 부동산으로 갔는데 정작 은혜는 오늘 이사 들어온 집이 있다며 바로 또 나가버렸다. 맡을까 말까. 하지 않을 거라면 빨리 연락을 해야 은혜도 난처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부동산에 앉아 대교 너머로 해가 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붉은 기운이 돌더니 얼룩덜룩한 까치놀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돌아보면 항상 어떤 장소를 지워버림으로써 삶을 견뎌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어야겠다 싶은 장소들은 아예 발길을 끊어서 최대한 망각할 수 있게 노력해왔지만 이 일을 맡으면 그곳에 대해 생각하고 더 알게 될 것이었다. 거기에는 일년 남짓의 내 임시 일자리가 있었고 600년 전에 건축된 고궁이 있었고 잊지 않으면 살 수가 없겠구나 싶어 망각을 결심한 낙원하숙이 있었다.
“이모, 엄마 또 나갔어요?”
문이 열리더니 은혜의 딸 산아가 헤드폰을 쓰고 들어왔다.
“누가 이사 들어온다고 나가던데 누가 왔니?”
“아, 걘가보네, 우리 반으로 전학 온다더라. 말을 안 하는 애라던데?”
“말을 못하는 친구라고?”
나는 그렇게 되물었다.
“아니, 안 한대요.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한대. 일년 넘게 말을 안 하고 있대. 엄마가 신경 쓰래. 엄만 왜 나한테만 그러는지.”
“산아가 어린이회장이니까 그렇지.”
“아니야, 엄마 부동산 손님들이니까 그렇지. 우리 엄마 돈 찐으로 좋아하잖아. 하느님, 용서하소서.”
나는 진지한 산아의 표정이 재미있어서 사전을 덮고 웃고 말았다. 은혜가 추진체라면 산아는 그 위에 얹어진 빛나는 인공위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똑똑하고 야무져서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섬에서 가장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고 그만큼 조숙해서 다른 사람을 헤아릴 줄 알았다. 누군가 전학 올 때마다 그 아이가 잘 섞여들도록 돕는 것도 산아의 몫이었다. 물론 그런 역할이 주어질 때마다 본인은 투덜거렸지만 지금도 말은 그렇게 하고 태블릿 피씨로 구글에서 말 안 하는 아이를 검색하고 있었다.
“그 사전은 뭔데, 이모?”
필요한 내용을 찾았는지 한동안 집중해서 읽던 산아가 사전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오늘 면접에서 받아 온 옛날 건축에 관한 사전이라고 설명하고 몇몇 용어를 알려주었다. 중수는 손질하여 고치는 것, 중창은 다시 짓는 것, 재건은 크게 일으켜 세우는 것이라고. 한옥에서 문은 창살무늬에 따라 이름이 다 달라서, 세로살을 꽉 채우고 가로살은 위아래와 중간에만 넣은 건 세살문, 가로살과 세로살을 다 채운 문은 만살문, 문 중간에 빛이 들어갈 수 있도록 사각형이나 팔각형으로 작은 창을 낸 문은 불발기문, ‘完’ 자 형태로 살을 짠 문은 완자문, ‘亞’ 자 무늬가 있으면 아자문이라고 한다고. 산아는 정말 흥미가 가는 건지 설명을 유심히 듣더니 그러면 이모가 고치는 문은 어떤 거냐고 물었다.
“거긴 유리 온실이라 이런 문은 없어.”
“그러면 왜 보고 있는 거예요? 시간 아깝게.”
산아는 정말이지 그렇게 시간을 허투루 쓰면 안 된다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맞아, 사실 이모 이 일 안 할지도 몰라.”
나는 가방에 사전을 넣고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은혜가 오지 않으면 산아랑 밥을 먹어야 할 텐데 외식할 곳도 없는 여기서 뭘 먹나 생각하면서. 섬 식당들은 해가 지면 대체로 운영을 마쳤다. 연륙교가 생기면서 관광객들이 늘기는 했지만 여전히 섬에서는 해가 일상을 열고 해가 하루를 닫았다.
“왜 안 하려고 하는데요?”
산아는 태블릿 피씨에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모르겠어.”
“그럼 하면 되잖아.”
“모르겠으면 하면 되는 건가?”
“나는 모르겠으면 그냥 하거든. 아까 인사한 선생님인 것 같은데 또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싶으면 그냥 해. 자기 전에 양치를 했나 안 했나 헷갈릴 때도 그냥 하고.”
“그럼 나도 그냥 해야겠네.”
“그래, 해요. 이모는 너무 돈에 관심이 없어. 이모랑 우리 엄마를 반반 섞었어야 했는데.”
산아는 일단 일을 시작해보고 자기에게 어떤지 말해달라고 했다. 자기도 그 말 안 하는 아이를 어떻게 대할지 연구해보고 나에게 상의를 하겠다는 거였다. 주일에 성당 미사 끝나고 자기랑 만나서 차를 한잔하자고, 자기는 돈이 없으니까 차는 이모가 사고 대신 자기는 간식을 준비해 오겠다고.
“간식도 이모가 준비할게. 산아는 몸만 와.”
“싫어요. 이모가 다 쓰는 거 과소비예요.”
과소비는 은혜가 뭘 사주고 싶지 않을 때 산아에게 자주 하는 말이라서 나는 또 피식 웃었다. 은혜가 어디서 났는지 화분 두개를 얻어 들고 부동산으로 돌아왔고 우리는 은혜네 집으로 가 삼겹살을 구워서 저녁을 먹었다. 은혜는 펜션이나 까페 자리를 알아보러 다니는 사람들이 꼭 외지 부동산중개인들을 끼고 와 동네 물을 흐려놓는다고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자기 이제 서울에서 왔다고 매물 좀 보여주시겨 하면 없시다 해. 딱 그 차림이 있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번지르르하고 인사도 잘하고 싹싹하게 굴다가 이쌈네저쌈네 보여주면 나중에 뒤통수친다니깐?”
은혜가 말했다. 그리고 산아가 자러 가자 작업비는 얼마나 주더냐고 물었다. 매일 출근은 아니어도 교통비 빼면 한달에 백만원이나 남을까 싶다고 하자 실망한 눈치였다. 자기는 괜찮으니 돈이 걸리면 하지 말라고 말렸다.
“나 중학교 때 서울 가서 살았잖아? 거기가 창경궁 근처였거든. 못난 소리지만 그것도 내키지가 않네.”
그때 얘기가 나오자 은혜는 조심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출생신고하면서부터 친구였던 우리는 내 전학으로 잠시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줄곧 친구로서 서로의 삶을 지켜봐왔다. 그런 은혜에게도 서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뭘 숨기고 싶었다기보다 어려서는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커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어떤 시간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떠올리거나 반추하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생각을 거듭하다보면 그 시절의 모든 것은 결국 창백하게 축소되어 초라해지기만 했다.
“조건 안 맞으면 안 해도 돼. 너 어디 문화센터 강좌 일 시작할지도 모른다며.”
은혜가 배웅하며 말했다. 찬 밤바람 속에서도 여름으로의 진입은 분명히 느껴졌는데, 그건 공간이 훤하게 열리는 개방감 같은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에너지를 성성하게 드러내도 될 정도로 공기가 바다가 하늘이 열리고 있었다. 나는 밤의 바다에서 아마도 낚시꾼들을 태우고 나갔을 어선들의 피로한 불빛을 살펴보다가 손을 흔들며 차에 올라탔다.
그 당시 석모도 아이들은 중학교를 마치면 섬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상급 학교가 없어 강화 읍내나 가까운 대도시 인천으로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강화 읍내든 인천이든 돈이 드는 건 마찬가지였고, 아빠 형편으로는 도움을 받지 않으면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중학교 1학년을 마쳐갈 때쯤부터 아빠는 그 일을 걱정했다. 자취방을 나눠 써줄 섬 졸업생을 찾거나 집에서 지내게 해줄 먼 친척들을 수소문해봐야 했다.
그런데 아빠는 엉뚱하게도 서울의 낙원하숙을 떠올렸다. 하숙집 주인인 안문자 할머니는 외할머니의 둘도 없는 친구였고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아빠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주로 쌀이나 젓갈, 고구마 같은 걸 주문하기 위해서였다. 강화에도 사셨다고 했지만 내게는 가끔 섬을 찾아와 식사하고 갔다는 정도의 기억만 있었다. 얼굴이 달걀처럼 갸르스름하고 체구가 작아 마치 아이처럼 느껴지는 노인이었다.
아빠의 고민을 들은 할머니는 의외의 말을 했다. 서울로 고등학교를 다니려면 차라리 빨리 전학을 오라고 한 거였다. 리사라는 이름의 자기 손녀도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전학 와서 그나마 적응이 빨랐다고. 나는 할머니가 우리 집 형편을 모르고 하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더이상 배를 타지 않는 아빠는 섬에서 손 닿는 대로 일하며 살고 있었다. 불성실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안정적이거나 주기적이지 않았다는 말일 뿐이다. 아빠는 봄가을에는 새우 건조장에서 일하고 관광객이 많은 여름에는 횟집에서 주차 관리를 하거나 때론 외포리 모텔촌에서 공사 인부로 일하기도 했다. 엄마의 옛 친구가 하는 염전에서도 가끔 트럭으로 소금 배달을 했다.
“낙원집 할머니가 공부를 많이 하셨더랬거든.”
어느날 아빠는 우리의 가장 큰 문제—돈의 없음—는 건너뛰고 그런 뜬금없는 얘기를 꺼냈다.
“그럼 오잘머니랑 할머이서껀 학교 친구였나봐.”
나도 싱겁게 응수했다. 누가 들으면 쓸모없게 느껴지는 얘기를 하면서 핵심을 적당히 피해 가는 데 우리는 죽이 잘 맞았다. 그렇게 눈앞에 놓인 너무 어렵고 뜨겁고 슬픈 문제는 에두르고 각자 할 수 있는 만큼의 걱정을 했다.
“영두야, 섬에서 학교 나온 할머이가 어딨냐? 건저 시장에서 일만 하는데 학교를 언제 갈 수가 있어?”
하기는 그랬다. 외할머니도 다른 마을 할머니들처럼 포구에서 하루를 보냈으니까. 마을 할머니들은 거기서 바다에서 끌어 올려진 죽은 것들과 싸우고 있었다. 엄청난 양의 새우며 밴댕이며 하는 것들을 옮겼고 소금 포대를 쏟아부었다. 포구에 나가보면 그런 할머니들이 신고 다니는 고무장화와 고무앞치마 그리고 고무장갑에서 뻐걱뻐걱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밤 풀숲에서 들리는 두꺼비 소리나 여름 바다를 차지한 민어 떼들의 우렁찬 울음과도 비슷한 소리였다. 물론 그렇게 우는 민어들은 외할머니가 들려준 젊은 시절 이야기 속에만 있었다.
“영두는 근데 서울은 좋아하나?”
“서울이 뭐 사람인가 좋아하게.”
“서울 가면 잘할 수 있나? 혼차?”
“지금은 뭐 혼차 아닌가. 아까 아침에 아빠 들어오는 거 보고 나 어서 오시겨 인사할 뻔했잖아. 옆집 아저씨인 줄 알고.”
“아부지가 낯이 없네.”
“낯 없는데 어떻게 말은 하네.”
그렇게 대화하는 동안 우리는 마당 장대에 널려 건조되고 있는 가오리를 올려다보았다. 연처럼 꼬리가 긴 그 생선은 밑에서 쳐다보면 눈코입이 늘 웃는 듯 보여서 문제였다. 마주하고 있으면 많은 것들이 시시해졌다. 바람이 한번 불고 지난 뒤의 모래사장처럼 마음의 표면이 평평하게 균형이 맞춰지는 게 느껴졌다. 고작 그 시시함으로.
“너 서울 가서 잘할 수 있지?”
이윽고 아빠는 진지하게 물었다.
“돈이 어딨어서 내가 거길 가서 살아?”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의 대화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다는 말은 없었다. 그러니 아빠는 내 마음을 읽었을 것이다. 내가 해보고 싶어한다는 걸, 수면에 드리웠던 낚싯대를 들어올려 아빠와는 다른 미래를 낚고 싶어한다는 걸.
“돈은 아부지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마시겨.”
아빠는 누구에게도 전학 얘기는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당연히 그럴 생각은 없었다, 안 믿었으니까. 하지만 아빠는 노력했고 트럭을 몰고 서울을 몇번이나 오간 끝에 나는 낙원하숙으로부터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결정된 날, 안문자 할머니가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차분한 어조였지만 노인이라 목소리는 떨렸고 에, 음, 하며 자주 말을 끊었다.
“차멀미를 하는가?”
그게 첫 물음이었다.
“아니요.”
할머니는 손녀 리사와 방을 같이 써야 한다는 점, 학교는 3호선을 타고 한시간 정도 가는 강남에 있다는 점, 새벽 여섯시에는 일어나 등교 준비를 해야 늦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주말에는 하숙집 일을 좀 도와주어야 한다는 점을 알려주었다. 나는 어쩌면 그게 내가 서울에서 지내기 위한 방법이구나 싶어 서글퍼졌지만 뒤이은 할머니 말에 마음이 풀렸다.
“내가 너무 늙어갖구 주말에만 아주 조금 도와줬으면은 좋겠다는 거야. 다른 날에는 딩여사가 와서 문제가 아니지만.”
나는 어차피 집안일이야 섬에서도 지겹게 하니까 상관없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영두는 음…… 말이 많은가?”
“……네.”
나는 할머니가 마음에 들어할 답이 뭘까 고민하다가 사실대로 말했다.
“별명은 깨죽이고요.”
“깨죽?”
“네, 주근깨가 많아서요.”
나는 나에 대해 뭔가 설명이라는 걸 하고 싶어 허둥대다가 맥락도 없이 고백했고, 할머니는 조금 웃었다.
“명랑한 구석이 있는 친구라서 잘됐어. 리사는 너무 말이 없어서 시토시토 이렇게 조용하게만 말을 하거든. 둘이 반대면 제일 좋지.”
할머니는 서울에 오면 처음에는 힘들어도 좋은 일이 많을 거라고 덕담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차가운 돌이라도 삼년을 앉아 있으면 따뜻해지는 법이니까. 나는 나중에서야 시토시토가 비를 가리키는 일본어라는 것을 알았고 할머니가 리사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는 생각을 했다. 리사는 비보다는 눈에 가까운 아이였고 그 침묵은 얼음에 가까운 것이었다.
지금도 리사를 생각하면 한번도 본 적 없는 LA의 한 빙상장이 상상된다. 낙원하숙을 떠나 유학을 간 열여덟의 리사가 비행기에서 내린 지 48시간 만에 스케이트 부츠를 신고 묵묵히 얼음을 지치고 있는 장면이. 무릎을 굽히고 주먹을 쥔 채 빙상장 얼음 끝을 쏘아보고 있는 리사에게는 당연히 말도, 웃음도 없다. 그렇다고 음울함이 드리워지지도 않았는데 그런 건 리사의 영향권 밖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자주 침울해지기는 했지만 리사의 우울에는 뭐랄까, 위축된 서글픔 같은 게 없었다. 내면의 커튼을 열어젖히면 흐느껴 울고 있는 여린 영혼이 아니라 히치콕의 영화 「사이코」에서처럼 무법자가 달려들 듯한 공격적인 우울이랄까.
하지만 할머니는 내가 낙원하숙을 떠나와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결말의 어느 장면에서도 리사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거였다. 그런 회상을 하며 나는 시동을 끄고도 한동안 차에 앉아 있었다. 그 시절을 회상하는 것도 오랜만이었지만 할머니를 떠올리는 것, 내가 할머니를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짚어내는 것 모두 너무 오래고 아득한 일이었다.
그해 12월 섬을 떠나게 된 나는 가장 친한 은혜에게 그 사실을 바로 알렸는데, 그러자마자 절교를 당하고 말았다. 나는 걔의 돌연한 분노가 도저히 이해 가지 않았다. 은혜는 지루한 학교 일과를 내게 편지 쓰는 일로 견딘다는 애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메신저와 전화로 싸워대다가 다니던 성당 앞에서 만났고 그런데도 화해하지 못한 채 뒷산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을 맞으며 절교를 확인했다. 뭔가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눈가가 따끔따끔했는데 그것이 눈물 탓인지 바람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친구 하려면 무조건 한동네에 살아야 하는 거야?”
나는 따졌다.
“그래야 한다고 말 안 했는데, 물정 몰르는 애 취급을 하네.”
은혜는 내 얼굴은 보지도 않은 채 비꼬는 투로 말했다.
“그러면 뭔데? 왜 나랑 절교하는데?”
은혜는 해송들 위로 낮게 비행하는 쇠기러기들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앉을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날개를 길게 편 채 호를 그리고만 있는 새들.
“이달에 가는데 니는 이달에 말했지. 남겨지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없었다. 매정하기가 쏜물 같은 년이다.”
우리는 주먹다짐만 하지 않았지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녹아웃시키고는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학교 친구들이 모여 있는 ‘버디버디’에서도 탈퇴하고 의기소침한 채 12월을 보냈다. 영원한 친구가 되자며 매일같이 맹세하던 애에게 그런 모진 말을 들었으니 다른 애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할 수 있는 일이란 겨울이라 해가 더 일찍 지는 해변에 나가 추위를 참으며 노을을 바라보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다 입을 벌려 소리를 좀 질러보는 것. 그렇게 끙끙 앓다 새해가 되어 이삿짐을 쌌고 낙원하숙으로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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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 때는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건축사사무소는 홈페이지 소개에 나온 대로 책장을 형상화한 건물이었다. 겉은 나무 마감을 했는데 거기에 한켜 한켜 붙여진 목재들이 책의 페이지들을 연상시켰다.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동안 디딤판에서는 내내 삐걱삐걱 소리가 났다. 누가 드나드는 걸 소리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오전에 업무 소개를 비롯한 절차들을 마치고 나자 출판사에서 일했던 때가 떠올랐다. 신입사원 채용을 했는데 오전만 일하고 바로 그만뒀던 사람이 있었다. 들은 얘기지만 동료들은 그가 어딘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고 대체 뭘 하려는 건지 다른 사람들이 눈치챌 겨를도 없이 그 길로 나가버렸다고 했다. 그 직원을 뽑고 기분 좋아하던 사장도 낙담했지만 남은 직원들도 의문의 일패를 당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첫 출근 날 갑자기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업무에 대해 알게 될 때마다 도망쳐,라는 경고가 머릿속에서 점멸했고 그때마다 부루퉁한 표정으로 오늘도 어린이회장직을 수행하고 있을 산아가 떠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이번 주일에 가서 한주 만에 포기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지는 않았다.
수리 보고서는 그냥 수리 과정 자료를 취합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실측과 현황조사에도 참여하고 역사적 고증 같은 전문학예사가 해야 할 것 같은 부분도 내가 스스로 방향을 정해 진행해야 했다. 오전에 출근했을 때도 여전히 새집 같은 머리로 컴퓨터를 보고 있던 은세창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내 책상으로 와서 고백하듯 말했다.
“영두님 오셔서 너무 좋아요. 너무요.”
은세창은 그동안 사람이 없어 보고서 제작을 사실상 자기 혼자 해왔다며 신세한탄부터 늘어놓았다. 보고서에는 공사시방서나 설계도면 같은 건축 설계상의 정보와 함께 수많은 썰—은세창의 표현이었다—을 풀어내야 하는데, 완전한 이과 인간인 자신은 사실상 그 부분을 위키 검색으로 겨우 해왔다고 고백했다.
“위키요?”
나는 문화재에 대한 역사적 고증을 어떻게 인터넷 검색으로만 작성했다는 건가 싶어서 되물었다.
“네,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
“저는 종이로는 뭘 오래 읽지를 못하거든요. 종이는 연봉계약서 쓸 때랑 사직서 낼 때만.”
나는 차에 시동을 걸고 자유로를 달려 강화로 가는 48번 국도를 타는 상상을 했다. 은세창은 사실 수리 보고서 작업은 설계사무소가 아니라 시공사에서 담당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했다. 건축사사무소에서는 시공 전 필요한 설계도서까지만 공급하지만 이번에는 최종 수리 보고서까지 발주처로부터 수주받았기 때문에 나를 뽑을 수 있었다고. 대온실 공사는 그 건물이 처한 상황이 복잡했기 때문에 역사적 고증 작업이 중요해졌다고 했다.
“대온실이 국가등록문화재이긴 한데 좋은 마음으로 안 보게 되잖아요. 일제 잔재라고. 창경궁 복원공사 때 다른 시설 다 철거되는데 겨우 살아남았죠. 생존 건물인 셈이에요. 기관에서는 그런 면을 강조해서 써달라고 하더라고요.”
“살아남은 거요?”
“네, 그리고 실측이 진행 중인데 지하 공간이 발견됐거든요. 좀 흥미로워졌어요.”
“그 공간이 뭐였는지 제가 알아내야 하는 거예요?”
“아니요, 저랑 같이 알아내시는 거죠. 일단 발주처에서는 좋아해요. 예산 들여 수리공사하는데 성과 많으면 좋으니까.”
“자문회의 같은 것도 없이 저희가 그걸 한다고요?”
“자문회의는 예산 때문에 최종 검토 때나 열게 돼요. 그게 뭐 특별한 공간 같지는 않아요. 창고나 보일러실이었을 것 같은데, 걱정 마세요. 제가 작도의 신 아닙니까.”
그건 작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영역처럼 느껴졌지만 힘을 내자는 사람에게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사무소 문이 열리더니 두 사람이 들어왔고 사람들이 “소장님 오셨어요?” 하고 인사했다. 이목구비 선이 굵고 얼굴이 약간 각진 여자 소장은 오십 정도 된 듯했고 키가 큰 편이었다. 어딘가 이국적인 인상을 풍겼는데 가무잡잡한 피부결 때문에 더 그랬다. 긴 팔을 들어 직원들을 향해 허위허위 인사한 소장은 바로 소목수 방으로 들어갔고 뭔가 흥분에 차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같이 들어온 젊은 여자 직원은 무거워 보이던 여행용 백을 책상에 놓더니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못 잡았네, 못 잡았어.”
은세창이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볼펜으로 자기 팔을 가볍게 쳤다. 그리고 물을 다 마신 여자 직원이 자리로 돌아오자 “제갈도희님, 여기 와서 인사해. 이번에 우리랑 대온실 작업해주실 분이야” 하고 불렀다. 짧은 커트 머리에 앞머리를 길게 길러 히피펌을 한 그 직원은 앉은 채로 자기 의자를 발로 굴러 가까이 왔다. 그리고 명함을 내밀며 “제갈도희 디자이너입니다” 하고 인사했다.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어서 그런지, 호기심과 장난기가 깃든 눈빛 탓인지 어딘가 캐릭터 같은 인상이었다.
“이름이 길면 제도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저분은 작도, 저는 제도.”
그 말에 나는 “강영두입니다” 하고 웃으며 인사했다.
“줄이면 저는 강도가 될 텐데 그건 좀 그렇네요.”
“아니요, 좋은데요. 파괴될 때까지 견디는 응집력이 건축에서의 강도니까. 단위로는 파스칼, 1평방미터에 1뉴턴의 힘을 받을 때의 압력.”
“대온실 모형, 최종은 어딨지? 소목님 방에 있나?”
“지금은 소목님 방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제갈도희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폼보드로 만든 대온실 외형 모형을 자기 자리에서 가져왔다.
“강릉 일은 어떻게 됐는데?”
“도망갔습니다. 미장도 도망, 싱크대도 도망, 외장도 도망.”
제갈도희가 한마디씩 할 때마다 배경음처럼 소목수 방에서 소장의 욕설이 들려왔다. 공사 대금만 받고 도망간 하청업체 인간들을 잡는 날에는 자르고 부수고 갈아버리겠다는 내용이었다. 은세창은 사실 자기네가 하는 일이 흥신소랑 다를 게 없다고 했다. 다만 그 주체가 건물일 뿐, 사람이 살면서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듯 건물에도 모든 신상 문제가 동일하게 일어난다고. 탄생부터 죽음까지, 그러니까 설계부터 완공을 거쳐 건물로서 사는 내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다 겪는다고.
“어떻게 보면 사람보다 더하죠. 사람은 백년을 살지만 건물은 그쯤은 우습게도 사니까요.”
“오, 대리님, 철학 하시네요. 가우딘 줄.”
제갈도희가 얼굴에 마른세수를 하며 말했다. 그리고 대온실 모형을 손으로 가리키며 “정부 도급이니 요건 도망 안 가겠지” 하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모형을 살펴보았다.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장방형 건물 정면과 양쪽에 돌출된 출입구가 나 있고 뒷편에는 작은 부속건물이 곁붙어 있었다. 전체가 유리로 된 실제 대온실에는 수백개의 창문이 나 있었는데 그 창살들까지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저걸 하나하나 작업하다니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창틀 꼭대기의 모스크형 창살과 건물 용마루의 배꽃 장식이 진짜인 듯 생생했다.
나는 모형에서 출발해 지금 여기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은 대온실 앞의 전경을 떠올려보았다. 프랑스식 정원과 대리석 분수대를. 거기를 지나 좀더 가면 긴 8자형 연못인 춘당지가 있고 바람이 크게 불면 휜 가지를 연못물에 씻곤 하는 버드나무들이 있었다는 것을. 겨울이 되면 두꺼운 얼음으로 연못이 닫힌 듯하지만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천천히 움직이는 잉어들이 그 폐쇄의 풍경에 빗금 같은 균열을 내고 있었음을.
춘당지 빙판은 리사와 내가 우리 앞에 나타난 불행을 해결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어떤 ‘모색’을 함께해본 장소이기도 했다. 그 괴로웠던 해의 마지막 장면에 리사는 어느 밤 나를 깨웠고 스케이트를 들고 따라오라고 했다. 나는 리사를 믿을 수 없었다. 그런 일을 벌여 나를 곤경으로 몰아넣은 너를 믿다니. 하지만 나는 점퍼를 챙겨 입고 조용히 스케이트를 챙겨 리사를 뒤따랐다. 하숙집 나무계단에서도 언제나 소리가 났기 때문에 우리는 최대한 무게를 싣지 않고 내려갔다.
대문으로 나간 리사는 아무 말 없이 앞장서 걸었다. 한쪽 어깨에 멘 스케이트가 리사의 등에서 흔들렸다. 밤의 도시는 너무 조용해서 마치 하나뿐인 촛불이 꺼져버린 뒤 같았다. 우리를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듯 느껴졌다. 그래서 그때 리사와 내가 겪고 있는 이 이상한 불행에 대해서는 아무도 상관하지 않을 것 같았다. 도시의 밤길을 걷는 어린 우리에게는 출구가 없고 결국 서로를 완전히 나쁜 미래로 몰아넣을 날들만 남은 것 같았다. 그런 내 무거운 마음과는 상관없이 리사는 성큼성큼 걸었고 관광객들이 표를 사는, 하지만 밤이니까 당연히 닫혀 있는 창경궁의 홍화문을 지나 주차장 쪽으로 한참 갔다. 대체 어디까지 가야 해, 소리치고 싶어질 무렵, 리사가 주차장 관리부스를 지나 ‘월근문(月覲門)’이라고 쓰인 문까지 갔다. 평소에도 닫혀 있는 그 문은 관람객에게는 개방되지 않았다. 하지만 리사는 어깨로 나무문을 밀었고 문은 열렸다.
“어떻게 한 거야?”
먼저 말 걸고 싶지는 않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어서 물었다.
“마법.”
리사가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하더니 나도 배운 거야,라고 말했다.
“주차장 관리 노인네가 여기로 화장실을 드나들거든. 그러다보면 열어두기도 하고.”
누구한테 배웠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할머니일 것 같았다. 리사에게 동네의 그런 사정을 가르쳐줄 사람은 할머니밖에 없으니까. 월근문을 통과한 우리는 솔숲을 지나 간밤에 내린 눈이 군데군데 솜털처럼 내려앉아 있는 춘당지까지 갔다. 소나무가 심긴 작은 섬을 중심으로 얼어붙은 연못 빙판에는 어떤 힘이 있는 듯 느껴졌다. 차고 얼어붙는 것에도 힘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추위와 동결이 만들어낸 막을 수 없는 기세가 느껴졌다. 연못 가까이 걸어간 리사는 둔덕에서 스케이트를 한발씩 갈아 신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나는 찬바람에 살결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빠질 수도 있어. 하지 마.”
하지만 리사는 내 말을 듣지 않았고 스케이트 줄을 꽉 잡아당겨 묶은 다음 연못으로 발을 내밀었다. 나는 리사가 원망스럽고 미운 가운데에서도 정말 저러다 빠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서 불안했다.
“무서워?”
리사가 연못이 텅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물었다. 밤에도 궁에는 지키는 사람이 있을 텐데 붙잡히면 어쩌나 싶었다. 리사는 빙판을 긁는 소리를 내며 조금 갔다가 멈춰 선 다음에 다시 말했다.
“그 정도 용기도 없으면서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거야? 다시 강화도로 가겠다는 거야?”
그렇게 말하고 리사는 내가 서 있는 연못가에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고 나중에는 내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스케이트를 치고 나갔다.
“이렇게 된 건 다 네 탓이잖아.”
나는 항변했다.
“뭐라고? 안 들리잖아.”
리사가 곡선을 그리며 뒷걸음으로 다가와 말했다. 나는 가방에서 스케이트를 꺼내 신고 얼음판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빙판을 지치고 나갔다. 연못가에 서 있던 리사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는 그애를 앞질러 나아갔다. 다리에 힘을 주어 양발을 교차해 나아갔다. 사각거리는 불행의 촉각을 느끼며 나아갔다. 여기에 남는 것과 강화로 돌아가는 것 그 둘 중에 무엇이 더 큰 불행인지 가늠해보고 싶었다. 이 연못이 한가운데까지 완전히 얼어 있다는 것과 아직 어딘가는 얼어붙지 않았다는 것. 그에 대한 긴장과 두려움을 모두 느끼며 질주했다. 구름이 달을 통과하자 달빛이 쏟아졌고 거기서 떼어낸 투명한 빛들이 내가 내달리고 있는 방향으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낙원하숙은 원서동 초입에서 창덕궁 담장 쪽으로 난 골목길에 있었다. 골목에는 여러 가구가 모여 사는 단층집들이 연이어 있고 그 맞은편이 낙원하숙이었다. 원서동의 집들이 대개 그렇듯 그 집 또한 아주 오래된 집이었다. 나는 자려고 누웠다가 일어나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종이를 꺼내 앞에 두었다. 그날 내내 손으로 설계도면을 그리던 제갈도희가 점심시간에 밥도 안 먹고 체력단련실로 달려가 러닝머신을 뛰었던 게 생각났다. 제갈도희가 뛰는 소리가 사무실까지 들렸는데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쟤, 스트레스받아서 저래요. 은세창이 그냥 놔두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대체 현장에서 쓰지도 않는 손 도면은 왜 그려야 하는 거냐고요!”
땀에 젖은 머리칼로 제갈도희가 은세창 자리로 오더니 말했다.
“글쎄, 나랏일이라서?”
“그럼 다른 작업도 손글씨로 하라고 그래요. 영두님도 붓글씨로 보고서 써요.”
나는 나도 모르게 풋, 하고 웃었다가 심각한 제갈도희 얼굴을 보고는 표정을 수습했다.
“어차피 건축사자격증 시험 보려면 연습해야 하잖아. 좀 포지티브하면 안 되니?”
“저 건축사 딸지 안 딸지 모릅니다.”
“택시운전사가 면허증 안 따겠다는 얘기네. 철없는 소리 좀 그만해.”
캐드 프로그램으로 충분한데도 발주처에서는 손 도면을 요구한다고 했다. 간이 실측을 한 뒤에 작성하는 손 도면은 앞으로의 계획을 짜는 데 필수요소라고 은세창이 다시 설명했다.
“이런 게 적폐잖아요. 적폐, 요식행위.”
제갈도희는 그러면서도 다시 제도판 앞에 앉았다. 퇴근 무렵 제갈도희가 야근을 위해 식사를 하러 가다가 갑자기 “아, 맞다” 하면서 종이봉투에 든 걸 내밀었다.
“환영 선물요.”
집에 와서 꺼내보니 알루미늄과 나무가 어우러진 15센티미터짜리 자와 포켓용 붓펜이었다. 쪽지에는 ‘아까 억지 부려 죄송합니다. 절대 붓글씨로 쓰시면 안 돼요’라고 웃음 표시와 함께 적혀 있었다. 낮의 일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제갈도희는 곤줄박이와 비슷한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새 가운데 아마 가장 사람 친화적일 곤줄박이는 사람과 사람의 집에 궁금한 것이 많아서 조금만 친해지면 아예 집 안으로 들어와 날아다니기도 하니까. 머리의 흰줄, 목덜미의 감색 깃털, 아담한 몸까지 정을 주지 않을 수 없는 그 새를 닮아 있었다.
나는 선물받은 자와 붓펜을 보고 있다가 낙원하숙의 몇가지 장면들을 그려보기로 했다. 그 집은 일제시대 북촌에 우르르 생겨났던 개량한옥과는 다르고 일본식 적산가옥과도 달랐다. 그 집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나는 기억을 해내기 위해 팔짱을 끼고 책상에 기대 머리를 숙였다. 그렇게 머리를 떨구면 어쩐지 생각이라는 것이 마치 진득한 꿀처럼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으니까. 동네 집수리를 도맡아 하던 태동설비 아저씨가 떠올랐다. 내가 살고 있는 동안에도 그 오래된 집에는 고칠 곳이 많아 아저씨가 노상 들락거렸는데, 귀한 2층 한옥이라 지원금 신청을 하면 보조금이 나올 거라고 종종 조언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손을 내저으며 거절하곤 했다.
“관청에는 안 알려요.”
“등록만 하면 돼요, 할머니.”
그러면 태동설비 아저씨는 나라에서 나오는 돈이 적지 않은데 왜 굳이 개인 돈을 들이려고 하느냐고 혀를 찼다. 기왓장 고치는 돈도 다 나온다고 했지만 할머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러다 기와 다 내려앉아요.”
아저씨는 마당에 서서 낙원하숙의 지붕을 올려다보며 걱정했다. 2층 지붕은 함석으로 되어 있고 1층 지붕만 다갈색 기와였는데 부풀듯이 일어난 부분이 많았다. 그때의 낙원하숙이란, 나는 생각하다가 책장에 끼워놓았던 『고건축용어사전』을 펼쳐보았다. 하숙집 건물은 일자 형태였지만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실이 앞으로 튀어나와 있어 전체적인 모양은 ‘ㄱ’ 자에 가까웠다. 지붕은 네면이 경사진 우진각 지붕이었고 처마는 다른 한옥과는 다르게 짧고 좁은 홈통이 설치되어 있었다. 건물 전면에 ‘用’ 자 모양으로 살을 넣은 네짝짜리 미닫이 유리문이 있고 들어가면 중문과 실내였다. 1층은 입식으로 개조되어 있었고 우물마루가 깔린 2층은 완전한 옛 형태였다. 1층에는 거실과 부엌 그리고 방 세개가 있고 2층에는 마루 그리고 하숙생 중 유일한 남학생이었던 삼우씨가 묵는 방이 있었다. 2층은 난방이 안 돼서 삼우씨는 전기장판을 썼다.
나는 2층에 잘 올라가지 않았지만 리사는 그 마루에서 시간을 자주 보내곤 했다. 마루 한쪽에 깔린 다다미 평상에서 잡지책을 읽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다이어리를 쓰며 자기가 원하는 모든 일들을 했다. 때로는 마치 수면에 떠 있는 사람처럼 팔다리를 벌리고 멍하니 누워 있었다. 자는 것도 뭔가를 생각하는 것도 아닌 무감각한 얼굴로, 가는 살대가 끼워져 있는 일식 창문 너머 창덕궁의 단풍나무들을 건너다보는 것이었다.
우리가 각자 가지고 있었던 스케이트는 할머니가 리사와 내게 한켤레씩 사준 것이었다. 이사 간 지 얼마 안 돼서 받은 선물이었다. 마을 논둑에 얼음이 얼면 썰매나 좀 타봤을까, 내 스케이트를 가져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할머니는 얼마나 부자라서 이런 비싼 선물을 줄까 했더니 리사가 기성제품을 산 것이 아니라 구둣방에서 맞춘 거라고 심드렁하게 알려주었다. 동대문에서 스포츠화와 날을 따로따로 사다 붙이면 돈을 꽤 아낄 수 있다고.
“아,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래도 선물하는 마음은 대단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구둣방에서 맞췄든 완제품을 샀든, 선물인데. 하지만 그 말까지는 못했고 리사처럼 눈을 조용히 내리깔고 밥을 오물오물 씹었다. 그때까지도 사실 난 젓가락질을 잘 못하는 애였다. 강화에서 하숙집으로 이사할 때 포크 숟가락도 가져왔지만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꺼내지는 않았다. 리사를 보니 뭐랄까, 긴장이 들었다.
“몰르면 옆 사람들 적당히 따라 하고, 안 되겠시면 홈자 긍매지 말고 도와달라 그러고.”
아빠는 서울에서의 생존법을 그렇게 당부했지만 조력을 구하려 해도 누가 날 도와줄 수 있을까 싶었다. 처음에는 리사가 기댈 수 있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학년은 나와 같은 중2였지만 실제로는 한살 더 많다고 했으니까 더더욱. 하지만 리사는 첫 만남에 언니라고 부르는 내게 “그냥 리사라고 불러”라고 한 것 말고 개인적인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같은 방을 쓰는 사람들끼리 규칙을 정하자고 했을 뿐이었다. 낮에도 커튼을 쳐놓는 것에 찬성하는지, 어디에 누구 책상이 놓이는 것이 좋은지, 잠옷 이상의 편한 옷차림은 하지 않고 속옷은 절대 방에서 갈아입지 않는 것이 어떤지. 나는 아무래도 좋으니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했고 리사는 자기 혼자 방을 썼을 때처럼 그대로 생활했다.
법대생이었던 삼우씨는 뭘 하는지 종일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었고 그러면서도 세상에 모르는 것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식사 때가 되면 내려와서 그동안 방에서 묵언수행하느라 참았던 말을 쏟아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대체로는 음모론에 가까운 얘기들이었다. 9·11테러 때 납치범과 승객들의 난투 끝에 추락한 것으로 알려진 비행기가 사실은 나사 기지로 보내졌다든가, 현재 서방세계 지도자들은 ‘렙틸리안’이라고 불리는 파충류형 외계인의 지배를 받고 있다든가, 마야력에 따르면 2012년에 지구가 멸망한다든가 하는 얘기들이었다.
100킬로그램에 달하는 덩치로 식탁 의자에 앉아 그런 우울한 미래 전망을 늘어놓는 삼우씨는 두려움과 공포라고 하는 거대한 힘에 경도된 가련한 존재, 이를테면 아이들 손에 잡혀 파닥거리는 개구리 같은 것처럼 느껴졌다. 세상이 정말 그러기를 바라는 건지, 그럴까봐 무서운 건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만큼 그 흥분과 열의는 목적성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숙집 식구들은 모두 여섯명이었고 나, 삼우씨, 연극을 했던 유화 언니, 리사와 할머니 그리고 집을 드나들면서 일을 봐주는 딩 아주머니가 있었다. 그 무렵 대학 하숙집을 배경으로 한 시트콤이 인기였는데 그와는 전혀 다르게 분위기는 아주 침울했다.
낙원하숙으로 온 지 며칠 되지 않아 나는 이 집의 사람들이 기이하게 불행하다는 생각을 했다. 누가 보면 강화 석모도에서 혼자 전학 온 중2짜리 여자애가 그 집의 최약체였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하숙집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어떤 병든 습벽 같은 것은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서울로 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나는 늘 그렇듯 미래를 낙관했다.
식탁에서는 주로 삼우씨만 떠들고 있는 때가 많았는데 어느날은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해 할머니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해 1월은 북한이 핵확산방지조약을 탈퇴하면서 뉴스마다 북핵 위기를 떠들 때였다. 할머니는 삼우씨에게 그런 얘기가 지금 신문에 나고 있느냐고 물었고 삼우씨는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는 기사들을 골라 할머니에게 보여주었다. 신문의 헤드라인들은 당장 내일이라도 전면전이 일어날 것처럼 긴박했다. 할머니는 삼우씨가 가져다준 기사들을 안경을 쓴 채 밑줄을 그으며 찬찬히 읽었다. 그후로 한동안 하숙집에는 번거로운 변화들이 일어났다.
일단 이불 빨래가 시작됐다. 할머니는 오후 내내 이불 빨래를 했다. 오래된 하숙집 세탁기는 소음과 진동이 심해서 저렇게 탈수하다가는 언젠가 자기 스스로 욕실을 벗어나 길바닥으로 나갈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뿔 달린 동물이 세탁통을 들이박거나 농구공이 세탁통 안에서 맹렬히 드리블하는 듯한 엄청난 소음이었다. 우리는 모두 이어폰을 낀 채 견뎠다.
그리고 할머니는 2층으로 올라가 다다미 평상을 들어내고 바닥문을 열었다. 1층과 2층 사이에 일종의 다락이 있었다. 체구가 작은 할머니밖에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은 좁은 다락이었다.
“도울까요, 할머니?”
내가 그렇게 묻자 할머니는 괜찮다고 사양하다가 기름통을 들고 주유소를 다녀올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기름이요?”
“아직 길도 모르는데 아무래도 어렵겠지.”
할머니는 금세 말을 거두며 물러섰다.
“아뇨, 할 수 있어요. 다녀올게요.”
리사는 할머니에게 협조할 마음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전쟁 뉴스가 날 때마다 그런 준비들을 한다는 거였다.
“그런데 어떻게 돼? 전쟁은 안 나. 지겹게도 안 나고 준비도 지겹게 안 끝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리사는 할머니에게 냉랭했고 약간은 적대적이었다. 나는 어쩌면 잃어본 적이 없어서 저러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부산에 부모님이 계신다고 했고 할머니도 있으니까, 가족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가족 아쉬운 줄을 모르게 마련이었다. 명절이면 섬 밭두렁에 도시 차들이 열 지어 주차되어 있고 거기서 내린 껄렁한 아이들이 자기 사촌들을 따라 마을 구경 다니는 모습들까지, 그 모든 게 마음 서늘하도록 부러운 사람도 있다는 걸.
할머니는 주황색 자바라 호스가 달린 석유통을 건네며 사려는 사람이 많아도 물결처럼 차분히 기다리다가 사 오라고 일렀다. 하지만 주유소에 갔더니 할머니가 걱정한 것과 달리 등유를 사려고 기다리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다 채워?”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르바이트생이 반말로 물었다.
“응, 채워.”
나는 기분이 나빠서 반말로 응수했고 그런 내 도발에도 아르바이트생은 들어오는 차들에만 신경을 쓰더니 오른쪽에 대세요, 하고 소리 질렀다. 그렇게 소리치느라 고개를 돌린 모습이 당시 내가 좋아하던 대만 배우 금성무를 닮아 있어서 놀랐다. 금성무는 호스를 꽂고 통을 채우다가 잠깐 다른 차들에 신경을 파느라 잡고 있던 호스를 놓쳐버렸고 내 쪽으로 등유가 튀었다. 내가 소리 지르자 금성무가 놀라서 밸브를 잠그고 사무실에서 걸레를 가져다가 코트를 닦기 시작했다. 물론 하나도 닦이지는 않았다. 주유소 사장이 무슨 일이냐고 소리치자 금성무는 “진짜 미안한데 내가 물어줄 테니까 나중에 연락 줄래?” 하고는 자기 번호를 적어주었다. 처음 보는 사람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게 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016’으로 시작되는 그 글자들은 엉망으로 휘갈겨 써서 더 그랬겠지만, 누군가의 길고 미스터리한 이름 같았다. 나는 일이 이렇게 되어 상당히 곤혹스럽다는 태를 물결처럼 은은하게 내면서 쪽지를 받아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등유를 사 가자 할머니는 목장갑을 끼고 안을 정리하고 있다가 통을 받아서 다락으로 들어갔다. 마치 제비나 벌 같은 것이 자기 집을 부지런히 드나들듯이. 나는 들어가볼 수 없고 할머니만 드나드는 그곳은 마치 할머니만의 통로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뭐가 굴렀는지 둔탁한 소음이 나고 물건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바상, 빗꾸리시따네, 하는 할머니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괜찮으세요?”
나는 무릎을 꿇고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할머니에게서 한동안 답이 없이 조용하더니 나더러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좀 가지고 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리사에게 빗자루가 어디 있느냐고 묻자 창가에 앉아 있던 리사는 아무 말 없이 아래층을 가리켰다. 내려가서 딩 아주머니에게 물었더니 벽장에서 치울 것들을 꺼내주었다.
할머니는 오랫동안 비질을 하더니 문가에 서 있는 내게 쓰레받기를 들어올렸다. 받아보니 등유에 젖은 종이봉투들이었다. 옛날식으로 약봉지를 접듯이 하나하나 접혀 있고 글자가 다 번지기는 했지만 펜으로 분류를 적은 흔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내게 대문 밖의 쓰레기통이 아니라 마당 화단에 그걸 버리라고 했다. 쓰레기를 화단에 버리라고? 그런 의문을 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화단으로 내려가 쓰레받기를 털려고 하는데, 딩 아주머니가 “그걸 왜 거기 버려? 김장독도 묻혀 있는데?”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할머니가 시켰다고 설명하는데도 딩 아주머니는 막무가내였다. 나이 많은 할머니가 헷갈려서 그런 거라며 당장 문밖에 내다 버리라고 했다.
나는 그 기억에 이르러서야 그 집의 대문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낙원하숙에서 내 관심을 가장 끌었던 건 네쪽짜리 유리문도 기와도 다다미 평상도 아닌 대문의 손잡이였다. 황동으로 된 장식용 판금 위에 자리한 그 문손잡이는 한옥 대문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유리 손잡이였기 때문이다. 푸른색 유리에 다면체로 세공한 그 손잡이는 드나들 때마다 신경을 날카롭게 했다. 대체 왜 나무 대문에 그런 손잡이를 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쉽게 깨질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특히 리사처럼 문을 쾅 닫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게 겨울을 보내고 개학할 때가 되자, 리사는 가야 할 데가 있다고 했다. 할머니가 외출하면서 ‘벤지네’ 다녀오라고 시켰다고.
“벤지가 누군데?”
“강아지야.”
“강아지를 보러 가는 거야?”
내가 그렇게 묻자 리사는 “아니?” 하며 약간 어이없어했다. 우리는 버스를 탔고 몇개의 정류장을 지나 한강을 건넜다. 가는 도중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리사가 수영을 배웠느냐고 물었다. 나는 수영을 배운다는 말이 생경하게 느껴져서 “수영을 배우다니 무슨 소리야” 하고 웃었다. 실제 내 머릿속에는 수영을 배운 기억이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늘 바다 언저리에 있었으니까. 내가 느낀 중력은 바다와 육지의 것이 반쯤은 혼재되어 있는 채였을 것이다. 바다에 나가면 언제나 놀 만한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수영을 했느냐는 말은 네 첫 친구가 누구였냐는 말과 같았다. 머릿속에 없어도 그뒤로 기쁨은 계속되었기에 상실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망각이었다.
“나는 열살 때 동네 스포츠센터에서 수영을 배웠거든. 스포츠센터는 알지?”
리사가 그렇게 물었을 때 나는 어디 차가운 것에 손을 댄 느낌이었다. 아무리 내가 섬에서 왔다고 스포츠센터를 모를 리가. 기분이 상해서 대답할 의욕도 느끼지 못하다가 리사가 정말 내가 모른다고 생각할까봐 우리 오삼춘이 피트니스 강사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너 네가 좀 이상하게 말하고 있다는 거 아니?”
리사는 더 냉랭한 말로 나를 몰아붙였다. 그건 내가 또래에게서 처음으로 느껴본 압력이었다. 머리 위로 뭔가가 씌워지는 느낌이었다. 깊숙한 모자 같은 것이. 정수리를 덮고 이마를 덮고 눈까지 덮어서 시야가 어둠에 잠기고 마는 것 같았다. 서울에 가면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라고, 별스럽게 튀지 말고 무난하게 묻어가라고 한 아빠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이 이상하면 안 되지, 이제 새 학교에 가서 새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데 이상한 사람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상하지 않은데 이상한 사람이 그 반에 갑자기 끼어들면 아이들이 얼마나 싫어할까. 나는 그래서 리사가 이렇게 충고하는 것이겠지 하고 이해하고 싶었다.
“사투리는 고칠 수 있어. 조심할게.”
“아니,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야. 나도 부산에서 왔고 내 말에 사투리가 있지만 아무도 무시 못해. 문제는 네가 너무 자주 웃는다는 거야.”
섬에서 친구들과 안 좋게 헤어지고 여기 와서 딱히 웃을 일도 없었던 것 같은데 내가 얼마나 웃었다고 얘가 이러나. 하지만 왠지 따질 수가 없었다. 섬에서라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한판 붙었을 듯한데 몸이 굳어 딱히 뭘 할 수가 없었다. 버스가 생전 본 적 없는 낯선 풍경들을 자꾸 통과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강변도 낯설었고 공원도 대교도 낯설고 건물들은 고개를 한참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로 높았다. 그런 마천루들의 화려함은 앞으로 내가 감당해야 할 미래의 무게를 지나치게 축소하는 동시에 앞으로 이루고자 하는 욕망들의 값없음을 예견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파트단지에서 내린 우리는 109동을 찾아갔다. 리사가 아파트로 향하는 길을 잘 기억해두라고 했다. 그리고 학교가 끝나면 일주일에 한두번은 이 109동까지 왔다가 다시 원서동으로 돌아오라고 시켰다. 학교를 가기 위해 위장전입을 했기 때문에 우리 주소지가 그 아파트로 돼 있는 것이었다.
“친구들이랑 여기까지 걷게 되면 어떡하지?”
리사는 흰 이마에 인상을 쓰며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교를 꼭 애들이랑 같이해야 되니? 혼자 오면 되지.”
리사는 벤지는 흰털을 가진 밥솥만 한 개인데 자기도 딱 한번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몇해 걸러 한번씩 정말 사는 집이 맞는지 선생들이 나와서 대대적으로 조사하기도 한다고도 덧붙였다.
“여기 3층이야, 알았지?”
나는 내 주소지로 되어 있지만 나는 갈 일이 없는 그 아파트의 3층을 올려다보았다. 벤지라는 밥솥만 한 강아지가 살고 있는 집, 서울에서 누구나 가고 싶어한다는 학교를 다니기 위해 일주일에 한번씩 누구를 속여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가운데서도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 들렀다 가야 하는 집. 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2. 옮겨다 심은 종려나무 밑
창경궁 대온실의 공사 책임자 후꾸바 하야또(福羽逸人)는 3세에 불행하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형의 손에 양육되었다는 말로 자신의 회고록을 시작한다. 독서와 숫자를 특히 싫어해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치고 형제와 다투는 악동이었던 이 소년은 1869년 13세 나이에 가진 것 없이 형을 따라 토오꾜오로 왔다가 현재의 시마네현에 해당하는 고향으로 돌아간 뒤 1872년 16세 때 국학자 후꾸바 미시즈(福羽美静)의 양자가 된다. 그해에 다시 상경해 학교를 다니며 독일어 등을 배우고 1874년 공부성 공학 기숙사 소학교(현재의 토오꾜오대 공학부 전신인 공부대학교의 예과 과정)를 마친 그는 신주꾸 시험소, 학농사 농학교, 내무성 권농국 시험장과 미따육종장 등을 거치며 본격적인 농업 원예가의 길을 걷게 된다.
일급 30전을 받으며 농장의 잡다한 일을 하는 견습생으로 시작했지만 서양의 수목과 화초들을 옮겨놓은 그곳은 후꾸바 하야또에게 경험한 적 없는 신세계였을 것이다. 이국의 살아 있는 문물이 모인 경이로운 광장이자 파종과 배양과 식생으로 이룰 궁극의 낙원. 메이지 시대 전세계로 나아간 일본의 관리와 유학생들은 종자와 묘목들을 구해 본국으로 가져왔고 그것은 후꾸바 하야또와 같은 젊은이들의 손을 통해 전일본에 이식되고 있었다.
북미에서 삼나무과의 낙우송을 들여와 심었고, 박람회단이 프랑스 마르세유항에서 배에 실어 보낸 유칼립투스 씨앗을 번식시키는 데 성공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온 호두 및 살구 종자는 온대 지역에 배포되었고 인도네시아 자바의 버섯과 영국공사가 기증한 인도산 기린초와 러시아정부가 제공한 포플러 씨앗 그리고 아카시아류,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전달받은 커피 묘목과 스웨덴에서 수입한 포플러 종자, 유럽의 가문비나무, 흑단풍나무, 느티나무, 신갈나무, 기나나무, 종려나무, 보리수, 뽕나무, 느릅나무, 히말라야 백향목, 백합나무, 월계수, 플라타너스, 포포나무, 이딸리아 사이프러스, 애리조나삼목 등 셀 수 없는 이국종 식물들이 옮겨왔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이식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고 더러는 취약하게 자라거나 썩었다. 그중 후꾸바 하야또가 주목한 건 1874년에 미따육종장에서 오렌지, 레몬, 유자와 함께 심었다가 한번 실패한 포도였다. 그는 포도야말로 국가 이익에 진정 도움이 되는 작물이라고 믿었다.
“이 땅에 포도나무를 재배하여 포도주 양조사업을 환기시키고 안으로는 쌀술을 포도주로 대신하고 더 나아가 수출한다면 대대의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일으키리라 기대한다”라고 회고록에 역설했다. 특히 프랑스에 주목해 “프랑스의 포도 재배사업은 마치 본국의 벼농사와 같아서 프랑스인들의 음료는 모두 포도과즙으로 빚은 술로 이루어지며 또한 포도주는 쌀술에 비하여 위생상 유공(有功)이 많다”고 보았다. 그는 구미와 전유럽인의 파티 테이블에 일본산 포도주가 올라갈 미래를 그렸다. 그런 희망과 포부로 써 내려간 장편의 논문 「포도원개설론」이 정부 고위관리의 눈에 들면서 일개 하급관리에 지나지 않았던 후꾸바는 1880년 5만 평방미터가 넘는 국립반슈우(播州)포도원을 개설하고 그 관리를 맡는 “환희”를 누린다. 그 환희는 포도원이 문을 연 지역의 주민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포도원을 유치한 효고현(兵庫県) 반슈우(播州) 인나미신촌(印南新村)은 수리가 나빠 벼농사 대신 면화를 생산하던 곳이었으나 개항으로 값싼 외국산 면화가 밀려들면서 더욱 궁핍해진 지역이었다. 집과 땅을 버리고 도망가는 주민들도 생겨났다.
그 건조하고 암담한 땅에 심어진 프랑스산 포도 묘목 3천그루는 후꾸바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게도 눈부신 내일의 징표들이었다. 모두의 희망이 효모처럼 부풀었다.
1882년 소량의 결실을 얻은 후꾸바는 고품질의 포도는 궁중과 관리대신들에게 진상하고 이후 2만 7천 리터가 넘는 포도주를 양조할 정도로 재배에 성공했다. 이렇게 성과가 가시화되자 정부 고위관료들이 시찰을 위해 자주 내려왔다. 전례 없이 많은 마차가 동네를 오가면서 동서로 쭉 뻗은 ‘마차길’이라는 새로운 도로가 생겨났고 마을 최초로 우체국이 설치되기도 했다. 마을에 수리시설을 건설할 보조금까지 중앙정부로부터 내려왔다. 1884년 후꾸바 하야또는 이곳에서 일본 최초로 포도 온실을 탄생시켰다. 6평의 작은 공간에 포도나무를 이식해 좋은 결과를 얻은 것이다. 미래는 더 밝은 곳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정식으로 등록된 반슈우포도원 와이너리의 상표는 커다란 천사의 날개였다.
주일 미사가 끝나고 드디어 나와 마주쳤을 때 산아는 무척 곤란해하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나와 대화하고 싶은데 자꾸 친구들이나 동생들이 따라붙었기 때문이었다. 저 나이 때는 가장 철든 아이가 가장 괴로운 법이었다. 많이 보고 느끼고 알게 되니까. 마침내 은혜까지 성당에서 점심을 먹고 가자며 불렀을 때 산아는 뛰어들듯이 내 차 안으로 들어와 얼른 달리라고 했다. 그래 봤자 가는 곳은 우리 집이었다. 일주일 동안 뭘 알게 되었냐고 물어서 후꾸바 하야또 이야기를 해줬더니 예상외로 흥미로워했다.
“그래서 해피엔딩이야?”
“응?”
“이모가 조사한 포도밭 얘기 해피엔딩으로 끝나느냐고?”
“아직은 모르지, 이제 시작했는데 다만 복병이 있었어.”
“복병이 무슨 뜻인데?”
산아는 그렇게 묻고는 자기가 검색해서 그 답을 찾아냈다. 적을 기습하여 적이 지나갈 만한 길목에 숨긴 군사,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경쟁 상대. 그러고는 어떤 군사가 포도밭에 숨어 있었냐고 글자 그대로를 해석해서 물었다. 나는 정확히 말하면 포도밭에 숨어 있지는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 복병은 아주 작은 것이었어. 1밀리미터도 되지 않는 포도뿌리혹벌레.”
그것은 1885년 6월 29일 오후 다섯시 후꾸바의 그 영예로운 유리 온실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진딧물의 일종인 포도뿌리혹벌레는 포도나무의 잎과 뿌리에 혹을 만들어 영양분을 빨아들이고 개체수를 번식시켜 결국 나무를 고사시키는 악명 높은 해충으로 이미 흑사병에 비견되는 엄청난 재앙을 유럽에 몰고 온 바가 있었다. 1862년 남프랑스의 작은 와인상에서 미국산 포도 묘목을 수입해 심었다가 시작된 그 불행은 이후 10년간 프랑스 전역의 포도밭을 황폐화시켰다. 포도뿌리혹벌레는 미국산 포도에 자생하는 종으로, 미국산 포도종은 내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유럽의 포도나무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 작은 복병은 뽀르뚜갈,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 이딸리아까지 확산되었고 마침내 반슈우포도원의 유리 온실에서도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후꾸바는 살충 효과가 높은 이황화탄소를 뿌리에 주입하고 석회와 유황을 섞은 용액을 만들어 뿌렸다. 그리고 5천그루에 달하는 포도나무를 뽑아 그 지지대까지 모두 불살라버렸다. 그러나 포도원을 덮친 이해의 포도뿌리혹벌레의 재앙에 대해 이상하게도 후꾸바는 회고록에서 언급하지 않는다. 1882년에 “무서운 포도 해충인 포도뿌리혹벌레를 발견하였으나 다행히 큰 해를 끼치지는 못하였다”라고 기록해놓았을 뿐이다.
그 대신 그 여름에 불어닥친 태풍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적어놓았는데 태풍이 바다를 지나면서 빨아들인 바닷물을 포도밭에 쏟아부었고, 궂은 날씨가 개면서 내리쬔 강한 햇볕에 그 젖은 잎들이 순식간에 타버리면서 썩어갔다고 묘사했다. 후꾸바는 이러한 천재지변은 전혀 예기치 못하고 방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천추의 한이 된다고 적었다. 반슈우포도원은 완전한 실패였다.
“왜 포도뿌리혹벌레 얘기는 안 해? 그게 복병이었잖아.”
인터넷으로 벌레를 검색해본 산아는 징그럽게 생겼다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글쎄, 잘 몰라서?”
“벌레가 포도밭을 다 먹어치우는데 어떻게 몰라.”
“그럼, 너무 잘 알아서? 너무 잘 알면 오히려 무서우니까. 책임져야 되거든.”
산아는 다음에도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고 했다. 일주일 동안 후꾸바 하야또 회고록과 논문들, 인터넷 자료를 뒤져서 알아낸 이 사실은 정작 대온실과 연관이 없어 보였다. 아니,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아주 깊숙이 연관이 있어도 보였다. 그래서 정리해두었을 뿐 과연 최종 보고서에는 실릴 수 있을까 생각했던 이야기들이었다. 그런데 정작 산아가 한주 동안 일어난 일들을 물어오자 그런 이야기들만 나왔다. 이번에는 네가 이야기해보라고 하자 산아는 한숨을 쉬더니 태블릿 피씨를 꺼냈다. 자기가 PPT로 정리를 해보았다고 했다.
산아에 따르면 그 아이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조회시간이면 줄도 서고 점심시간에도 가장 늦게 급식실로 오기는 했지만 차례를 기다렸다가 밥을 먹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말을 걸면 그 얼굴을 빤히 쳐다보거나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지목하면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선생님을 멀거니 보고 있다고 했다.
“안쓰럽네.” 내가 말했다.
“보통은 대답 못하면 쑥스러워하거나 창피해하거나 그래야 하잖아? 근데 그 아이는 그런 게 없어. 뭐랄까, 그냥 칠판이나 담장 같은 게 된 것 같아.”
칠판이나 담장 같은 아이. 어쩌면 아이는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일들은 외부의 두드림에도 응답이라는 것을 내놓을 수 없는 심한 무기력을 만들어내니까. 나는 서울에서 돌아온 이후 내가 보냈던 시간을 떠올렸다. 그때 성당을 통해 소개받은 데서 상담치료를 받았지만 결정적으로 나를 우울증에서 구해낸 건 섬에서의 시간이었다.
적어도 섬에서 나는 이상한 아이가 아니었다. 집에 틀어박혀 있다가도 나쁜 생각들이 못 견디게 우글거리면 밖으로 뛰쳐나가곤 했는데 막상 그렇게 나가보면 거기에는 내 불안과 긴장 그리고 해리 상태를 붙잡아줄 근친처럼 가깝고 친숙한 풍경들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 민머루해수욕장 쪽 염전까지 버스를 타고 나간 적이 있었다. 지금은 문을 닫은 그 염전 주인이 엄마의 친구였다. 나는 뙤약볕이 쏟아져 얼굴이 까맣게 타는 것도 모른 채 염전 둑에 앉아 있다가 엄마 친구 눈에 띄었다.
“영두야.”
아주머니는 밀짚모자를 쓰고 내 편으로 건너왔다. 나는 손차양을 만들며 인사했다.
“아픈 건 다 나았냐?”
섬에 소문이 어떻게 났을까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주머니는 자기 모자를 벗어서 내 머리에 씌워주며 올해가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위로했다.
“올해 비가 어찌나 많은지 염전도 다 망했다.”
나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그러면 어떡해요? 하고 물었다.
“장마가 그런데 어쩔 것이야, 다음을 기다려봐야지. 그런다고 바다에 소금이 어디 가버리는 것도 아니고. 사는 게 말이야, 영두야. 꼭 차 다니는 도로 같은 거라서 언젠가는 유턴이 나온다. 아줌마가 요즘 운전을 배워본 게 그래.”
“유턴이요?”
“응, 그러니까 돌아올 곳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알고 있으면 사람은 걱정이 없어. 알았지? 잘 왔다, 잘 왔어.”
이제 그 염전에는 골프장이 들어섰고 아주머니는 강화 본섬에서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허위허위 걸어 염전으로 갔던 그날은 분명 나를 바꿔놓았다. 아주머니에게 모자를 돌려줄 생각도 못한 채 너무 투명해서 여름 하늘을 그대로 되비추는 염전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돌아온 그날은.
“내가 찾아본 결과로 말 안 하는 아이를 고치는 방법에는 이런 것들이 있어. 약물치료, 상담치료, 그림치료, 놀이치료.”
산아가 그렇게 설명할 때마다 해당하는 이미지들이 화면에 나타났다. 산아는 이 중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했다.
“그걸 네가 어떻게 해? 다 전문가 선생님들이 배워서 하는 거야.”
“그림은 나도 잘 그리잖아. 그래서 해봤어.”
쉬는 시간 그 아이에게 다가간 산아는 자기가 그린 그림 한장을 선물이라고 주었고, 자기도 네가 그린 그림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아이는 손가락으로 산아의 그림을 끌어당기더니 아무 말 없이 책상만 내려다보았다. 알아들은 건지 그림을 그려줄 건지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산아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왔고 금요일에 자기 책상에 놓여 있는 아이 그림을 발견했다.
“이거야.”
산아가 그림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연필선이 너무 흐릿해서 산아와 나는 화면을 확대해 살펴봐야 했다. 두개의 원에서 선들이 양쪽으로 뻗어나와 있고 아래 동그라미는 연필선으로 채워져 있었다.
“뭐지?”
“이모도 모르겠지?”
“넌 뭘 그려줬는데? 혹시 그것에 대한 답이 아닐까?”
산아는 자기가 그린 그림을 보여주었다.
“이게 뭐야?”
“보면 몰라? 흰죽지수리잖아. 이모랑 같이 가서 본 거.”
산아는 내가 알아채지 못하자 약간 새초롬해져서 답했다. 흰죽지수리는 하늘에서 쏘듯이 대지로 날아 내려와 사냥을 하는데 그때 모여 있던 쇠기러기들이 놀라 날아오르는 모습을 산아와 함께 관찰한 적이 있었다. 사냥 장면을 무서워할 줄 알았는데 새끼 때부터 봤던 새라서 그런지 산아는 “멋지다!” 하고 감탄했었다. 그리고 그 흰죽지수리에 산아가 좋아하는 걸그룹 이름인 ‘마마무’를 붙여주었다.
“겨울에 마마무 다시 오겠지?”
“그럼, 여기가 집인데.”
“지금 가 있는 거기가 너무 좋으면, 그러면 안 올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럴 리는 없어. 사실 마마무는 쇠기러기 떼 때문에 여기로 오는 거거든.”
“왜?”
“잡아먹으려고. 그러니까 살고 싶어서라도 올 거야. 꼭.”
나는 그런데 왜 마마무를 그려줬냐고 물었다. 산아는 그냥, 하고 얼버무리더니 “가장 용기가 있으니까”라고 속내를 내비쳤다.
열흘 뒤로 잡힌 대온실 상세 실측 전에 소목수는 동궐관리청 담당자에게 인사를 가라고 했다. 전화로 약속 잡으면 오히려 귀찮아하거나 번거로워질 수 있으니 그냥 들이닥치는 쪽을 추천했다.
“차라리 좋은 방법일 것 같기도 하고 무모한 방법 같기도 하고 그렇네요.”
점심시간에 그 얘기를 했더니 은세창은 그렇게 말하며 콩나물국밥을 우적우적 씹었다.
“영두님, 그 담당과장 공문성애자예요.”
“제도, 성애자라는 말 좀 여기저기 붙이지 마. 요즘 사람들은 뭐만 있으면 성애를 붙여, 성애를. 그냥 공문주의자 정도로 해두자.”
“대리님, 벌써 잊었어요? 그건 신념도 원칙도 아니고 거의 페티시죠.”
제갈도희는 후추를 국밥에다 잔뜩 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기본 실측 한번 나가려다가 공문을 수차례, 적어도 열번은 바꿔 보냈다고 했다. 왜 반려당하는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줄 간격, 들여쓰기, 사소한 용어 실수들이었다고 했다.
“그게 드문 경우예요?” 내가 물었다.
“당연하죠. 저희가 몇개 공사해봤지만 아무리 기관이라도 그렇게는 요구 안 해요. 날짜, 시간, 귀 기관의 무궁한 발전을 빕니다, 땡이죠.”
그런 사람을 무작정 만나러 가라니 나는 입맛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불친절하기밖에 더하겠어, 하는 오기도 생겼다. 사는 게 친절을 전제로 한다고 생각하면 불친절이 불이익이 되지만 친절 없음이 디폴트라고 생각하면 불친절은 그냥 이득도 손실도 아닌 ‘0’으로 수렴되는 일이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제갈도희는 먹던 숟가락을 놓으며 “아, 정말 명언이다. 저 언니라고 부르면 안 돼요?” 하고 독특한 감탄을 했다. 그러면서 상세 실측 날에 괜한 시비 안 걸게 자기도 눈도장을 찍으러 가겠다고 나섰다.
“음료수라도 사 갈까요?”
내가 묻자 제갈도희는 “절대 안 받아요” 하고 손사래를 쳤다. 언젠가 사무실 찾아간다고 케이크를 사 갔더니 정색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다른 직원들은 이왕 사 오신 거니까 먹을게요, 했는데 과장은 입에도 대지 않고, 김영란법에 안 걸리는 가격 맞습니까? 하더니 결제 문자까지 확인했다고.
“장과장 그 사람한테 필요한 건 음료수가 아니라 협조 공문일 거예요.”
나는 제갈도희의 충고대로 그간 동궐관리청과 주고받은 공문—정말 많긴 했다—들을 살펴보며 공문 작업을 했다. 사실 명시할 내용은 ‘보고서 자료 협조’ 이 세 단어였지만 공문성애자라고 하니 어떻게든 형식을 맞춰야 할 것 같아 그럴듯한 말을 만들어볼 수밖에 없었다.
귀 청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가. 제안 사항
창경궁 대온실 수리 보고서 작성을 위한 설계도서 내 연혁 및 원형 고증 작성과 관련한 소장 자료 열람 협조를 요청드립니다.
나. 제안 사유
성종 15년 1484년 9월 27일 낙성된 창경궁은 태종 때 건설된 창덕궁과 함께 동궐(東闕)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사실상 조선 역사의 중심지 역할을 했음. 태종은 자신이 왕자의 난을 벌인 경복궁 대신 창덕궁에서 주로 정사를 보았고 이후 왕들 역시 일상적인 정사나 생활공간으로 창덕궁을 더 선호했음.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궁궐이 소실되었을 때 재건의 대상이 된 궁 역시 창덕궁과 창경궁이었던 데서 그 중요성이 확인됨. 하지만 이후 1907년 즉위한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동궐은 일제 통감부의 계획에 따라 훼손되기 시작함.
1908년 이또오 히로부미는 식물원 설계자이자 일본 원예학자인 후꾸바 하야또에게 창경궁 온실 계획 수립을 명하며 ‘한왕이 신체가 허약하고 건강이 좋지 않아 신체의 운동과 정신의 위로를 필요로 한다’라고 취지를 설명, 1909년 공원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이해 11월 1일 동물원과 식물원이 설치되고 시민에게 개방됨. 해방 이후 복원돼 2004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으며 동궐관리청의 주관 아래 보수공사를 앞두고 있음. 설계도서는 대온실 수리 공사의 기초가 되는 자료로서 청이 직접 관리하는 문화재의 성공적인 문화재 수리와 역사 고증을 위한 필수자료로 확보되어야 함. 이로써 문화재 수리 과정에서의 원형 보존 및 복원 상징성을 확보하고 향후 발생 소지가 있는 부실공사 논란 등을 사전에 대응해 창경궁 대온실의 문화재적 가치를 제고하고자 함.
다. 주요 내용
(1) 신청인: 바위건축사사무소 수리 보고서 담당자 강영두
(2) 대상 자료명
조선총독부 『조선고적도보』 제10집, 1930.
조선총독부농상국 『경성 원예』, 1944.
이철원 『왕궁사』, 구황실재산사무총국 1954.
『궁내 이왕가세습재산유서조』, 문화재관리국 1964.
『창경궁 중건 보고서』, 문화재관리국 1985.
『창경궁 발굴조사 보고서』, 문화재관리국 1985.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건조물』, 서울특별시 2003.
『동궐도 해제』, 동궐관리청 2005.
『창경궁 대온실 기록화 조사 보고서』, 문화재청 2007.
『창경궁 온실 운영 개선 자문록』, 동궐관리청 2012.
(3) 신청 내용: 위 자료에 대한 열람 및 대출 허가
본 건에 대한 검토 바랍니다. 끝.
사무소 직인을 받기 위해 은세창에게 보여주었더니 창과 방패의 대결이네요, 하는 답이 돌아왔다. 공문발신주의자와 공문수신주의자의 대결 같다는 뜻이었다.
“시다누리 잘하고 와, 이렇게 말씀 전해달랍니다.”
소장실을 다녀온 은세창이 그렇게 전했다. 아직 소장과는 대화조차 제대로 나눠본 적이 없었다. 늘 현장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같은 건축사라도 소목수는 주로 회사 내에서 실무를 보고 소장은 거의 밖에서 건축주를 만나거나 시공 현장들을 옮겨다니며 외근하는 것 같았다.
“시다누리가 뭐지?”
사무실을 나서며 중얼거리는데 제갈도희가 알려주었다.
“공사장에서 초벌칠하는 거요. 초면에 잘하고 오라는 뜻이죠, 뭐.”
그렇게 공문을 가방에 넣고 자유로를 타고 가는데 열어놓은 창에서 강물 냄새가 들어왔다. 어려서 서울로 갔을 때 나는 봄이 되자 곤혹스러운 느낌을 받았었다. 나를 둘러싼 물의 세계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사실이 실감 나서였다. 맡게 되는 물 냄새가 너무도 달랐다. 주방의 수돗물 냄새, 골목 하수도의 구정물 냄새, 지붕 홈통에 고인 빗물 냄새, 마당 수돗가에 푸릇한 이끼들과 함께 고여 있는 잔물 냄새, 그리고 가장 크게는 한강의 냄새가. 3호선 전철을 타고 한강을 건널 때 종종 플랫폼에 고여 있다가 들어오는 강물 냄새에는 바닷내음에서 나는 알싸한 상승감 같은 것이 없었다. 그건 어쩐지 콧속을 너무 보드랍게 문질렀다.
“일 재밌어요?”
차창에 기대고 있는 제갈도희에게 물었다.
“아직 일년밖에 안 돼서 잘 모르겠어요. 근데 그건 마음에 들어요. 안 멋있는 거. 실제로 건축사사무소에서 일해보니 아 정말 하나도 안 멋있구나 싶어서 좋아요.”
“안 멋있어서 좋다니 그 또한 멋있는 일이네.”
“아니, 영두님은 말을 왜 그렇게 잘하세요? 글 쓰시는 분이라 그런가, 원래 그쪽 분들은 다 그래요?”
“내가 말을 잘해요? 나 한때 말을 너무 안 해서 사람들 걱정시키기도 했는데.”
“언제요?”
“열여섯, 열일곱?”
“고등학생 때요?”
“저 고등학교 안 다녔어요. 검정고시 봤어요.”
“야, 그것도 멋있네. 영두님 멋짐의 강도가 아주 메가파스칼이네. 좋다.”
제갈도희가 창을 끝까지 열어 차 안 가득 강변 바람을 몰아넣었다. 서울로 진입하면서 차가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까 나는 시간을 잠깐 확인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