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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 다시 읽고 싶은 책

 

 

신동원 『호환 마마 천연두』, 돌베개 2013

개념과 번역의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병’의 근대성

 

 

최은경

崔銀暻 / 경북대 의과대학 교수 qchoie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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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학과 근대 서양식 의료가 공통의 의학체계이자 언어가 된 오늘날 사회에서는 질병, 병원, 의료, 의사 등이 하나의 개념을 지칭하는 것으로 오해되기 쉽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서는 어떤 용어나 지칭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논쟁과 경합이 곧잘 벌어진다. 일례로 간호법 논쟁을 생각해보자. 최근에 입법 추진 중인 간호법은 기존의 의료법에서 ‘의사의 지도하에 시행하는 진료의 보조’로 정의되어 있던 간호사의 업무 및 행위를 확대하여 해석하는데, 인접 의료직의 반박과 재정의에 부딪치고 있다. 그러나 간호 개념은 규범적으로 역사-사회에 선행하기 어렵다. 간호 개념은 역사적으로 병원 제도의 도입 및 의료행위자들의 형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 의료에서 개념들이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볼 때, 의료 개념 역시 다양한 행위자들의 해석과 번역의 과정을 거치는 작업이라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나 근대 이후 탄생부터 죽음까지 인생 전과정에서 의료적 개입의 영향을 받는 생의료화의 시대, 의학적 개념이 가지는 권력이 큰 상황에서 그것은 일종의 권력적 쟁투의 장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코로나19 팬데믹 시대 전염병에 대한 방역은 규범적으로 매우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무엇을 ‘전염병’이자 ‘보균자’로 해석하는지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며, 그렇기에 이들 개념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것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의료체계의 지형, 그 개념적 권위와 영향력을 낯설게 보는 작업이 된다.

『호환 마마 천연두』의 부제인 ‘병의 일상 개념사’는 다르게 말하면 병을 앓는 몸의 개념사이다. 의학사의 관점에서 보면 병의 개념사를 통해 무엇을 병으로 표상화하고 규정했으며 의료적 개입을 정당화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병의 어휘사의 경우 전염병을 비롯한 각종 질병들의 연대기적 용어를 이해할 수 있기에 질병사에서도 중요한 기초자료가 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한의학과 서양의학 이원체제하에서 이같은 질병 어휘들의 번역 가능성이 아직 충분히 고찰되지 못했으며, 많은 연구를 거쳤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한국 의학역사 연구에서 제도사 이외의 문화사·일상사 연구의 기초적 작업에 가깝다. 감사히도 나 역시 동일 분야에서 연구작업을 해나감에 있어 선배 연구자의 광범위한 작업에 많이 기대었으며, 매우 유익한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저자 신동원이 위생 개념과 병 개념 둘 중에 어느 쪽으로 책을 집필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밝히고 있는 점은 자못 흥미롭다(1장). 개인적으로 근대 의학사에서 병 개념사가 지니는 잠재력은 위생 개념사의 그것보다 더 크다고 생각한다. 근대 위생 개념이 주로 국가의 규정력이나 지향성을 내포한다면, 병 개념은 더 근본적이고 일상적인 문화부터 예방 및 치료의 영역에까지 두루 걸쳐 있는 까닭이다. 위생 역시 중요한 개념이나 특정한 질병을 방지하고 예방해야 한다는 인식, 나아가 어떤 ‘건강’ 상태를 영위해야 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성립된 개념에 가깝다. 물론 의학사 차원에서 위생 개념이 동아시아 근대사회에 대한 규정력을 지닌다는 점에서는 매력적이나, 병 개념만큼 일상적인 영향력을 갖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위생과 병 이외에도 건강, 정상, 치료, 돌봄 등의 개념들의 역사적 탐구가 더욱 필요하다.

병의 개념사적 접근이 지니는 잠재력을 잘 알고 있는 저자는 특정한 질병의 표상이나 환자의 사회문화적 재구성이라는 측면을 넘어 ‘한국 근대사 전반의 병 개념’을 다루고자 한다. 이는 병 개념을 둘러싼 층위를 구성하는 차원에서부터 드러난다. 저자에 따르면 신체, 치병, 예방, 인구 집단방역, 사회적 개입이라는 다섯가지 층위가 병 개념과 연결된다. 저자는 이 다섯 층위가 병 개념을 중심으로 얽혀서 ‘근대성’을 만들어내는 지점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병 개념은 위생학 및 서양의학 세균설 체계와 만나면서 새로이 개념 지어졌는데 호질이 콜레라로, 두창이 천연두로 명명된 것이 대표적이다. 뇌와 장기를 근간으로 한 신체 개념이 들어오면서는 육체적인 질병과 정신적인 질병이 구분되고 장기를 비롯한 신체 국부를 표상하는 병 개념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병을 치유하는 행위(치료), 주체(치료자), 장소(병원), 예방과 방역 개념의 변천 역시 이러한 병 개념의 변화와 연결된다. 여기서 치료, 치료자, 병원의 개념은 병의 네트워크 자장 속에 편입될 만한 요소일뿐더러 개념사의 또다른 주제가 될 만하다.

이 책은 이들 요소를 장별로 따로 다루지는 않으며, 어떤 장은 저자의 이전 연구성과에 많이 기대고도 있다. 1부는 병 개념 어휘의 변천을 실증적으로 추적한다. 우선 『훈몽자회』 『17세기 국어사전』 『방언유석』 『동의보감』 등의 문헌을 통해 19세기 이전 전통적인 병 개념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좇는데, 이 과정에서 우리가 전통적으로 명명해오던 병에 대한 고유어가 한문의 일상화와 한의학의 도입과 함께 전문 한의학 용어로 대체되었음이 드러난다. 이어서 저자는 19세기 근대화 전후로 서양의학적 병 개념이 도입되고 국가가 이를 규정하는 형태로 전환되어간 국면을 살핀다. 구한말의 각종 외국어사전 등재어뿐 아니라 한국 최초의 근대식 의료기관인 제중원의 환자 분류표, 일본어 병명과 조선어 병명을 대조한 내선병명대조표 등 번역 어휘를 아울러 살펴보고 있어 시기별 어휘의 변천을 망라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1부가 병 개념 어휘의 일상적인 변천사라면 2부는 방역 개념의 변천사이다. 콜레라와 두창을 큰 축으로 전통적인 역병에서 전염병으로의 의미 변화를 추적하고, 전통적인 양생 개념이 위생 논리로 전환되는 과정을 살핀다. 이러한 내용은 저자의 예전 연구성과들을 토대로 한 것이지만, 역병과 전염병을 둘러싼 전근대적 이해를 살피는 데 여전히 참고할 만한 부분이 많다.

3부는 치유 행위, 주체, 장소의 변천을 다룬다. 특히 서양의학 시술기관으로서 병원이 등장하는 과정, 전통적인 점과 무속을 배제하면서 치병자인 의(醫)가 재편되는 과정을 다룬다. 병원과 의·치술 행위의 변천 과정에 대한 기본적인 참고가 되는 내용이다. 다만 병원의 등장에 관해서는 개항 후 다양한 약방·의약국·의원의 등장을 아울러 다루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다. 당시 전통적인 의원 중에는 생활공간과 진료공간이 분리되지 않은 경우나 약방과 분리되지 않은 채 진료를 하는 의원들이 있었는데, 개항 후 이들이 상호 경합하며 다양하게 상존했던 것이다. 병원 역시 1899년 대한제국 정부의 국립병원(이후 광제원) 설치 당시 민간 차원에서도 일부 수립되었기에, 이들 병원의 규정이나 인허가 기준을 치(治)의 규제 과정으로서 함께 논의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의 개념의 재편에 대해서도 저자는 유사한 개념의 탈락과 한의학의 배제만을 다루고 있는데, 그 과정에 새로이 등장한 약업자·약종상·약제사 등 각종 의술업자에 대한 설명이 있었어도 더 풍성했을 것 같다.

3부에서 저자는 병 개념에 깃든 우국담론과 서사 속 병에 대한 표상 변화를 다루기도 한다. 책의 구성에서는 다소 빗겨나 있는 것처럼 보이나 병의 사회문화적 함의라는 본래적 의문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 많아 흥미롭다. 병을 낫게 하는 일이 작게 보면 의술이나 크게는 우국행위로 이해되었던 시절, 당대의 시대적 고통 역시 ‘병’으로 이해되었다고 한다. 신문 연재소설 「병인간친회록」(1909)에서 그려지듯 병인은 고통을 앓는 이이자 지배층의 타락이나 나라의 명운을 걱정하지 않는 정신적 불의를 고발할 수 있는 주체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 가지 않아 ‘조선병’으로 일컬어지며 수치심을 내포한 병적 표상으로 전환되고 말았다. 이 역시 근대화·식민화 과정에서 이루어진 병 개념의 연속 및 단절 중 하나일 것이며, 추후 연구가 더 필요하다.

저자 신동원은 이 책을 일종의 ‘소사전식 구성’으로 소개했지만(「책을 펴내며」) 내가 보기에 ‘질병의 개념사’라는 연구는 단지 각종 개념을 사전으로 집대성하고 근대성을 중심으로 정리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근대화 과정에서 새로운 신체관, 질병관 등이 어떻게 대두하고 번역되었는지를 살피며, 때로는 우발적이었던 이해와 독해 혹은 새로운 규범의 창발을 두루 탐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이 책을 읽어내는 독자들의 몫이자 이 책의 성과를 이어갈 다른 연구자들의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