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위기의 한반도, 긴장의 동북아
‘선제타격’ 독트린의 득세와 전쟁의 가능성
서재정 徐載晶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저서 『한미동맹은 영구화하는가』 『한국지성과의 통일대담』(공저) 등이 있음.
suh@icu.ac.jp
한반도가 위태롭다. 동북아시아가 아슬아슬하다. 선제공격에 대한 근거없는 믿음, ‘선빵의 미신’이 이 지역을 횡행하고 있다. 모든 국가가 공세적 전략을 채택하여 군사력을 개발·배치하고 있으며, 이제는 선제타격 능력을 공개적으로 연습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마치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발칸반도와 유럽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다. 작은 사건 하나가, 사소한 실수 하나가 불씨를 붙일 수 있다. 한반도라는 화약고에.
한반도의 오래된 군비경쟁이 이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 것이다. 남북한이 모두 평화를 말하면서 선제타격을 추구하고 있으며, 일본은 반격능력이라고 쓰고 적기지 타격능력이라고 읽고 있다. 미국은 오래된 확장 억제를 개편하여 “(북한)정권의 종식”을 지향하는 한·미·일 통합 억제력으로 확대하고 있다. 중국은 군사력을 현대화하고 핵군사력을 증강하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그 이름이 무색하게도 태평양에서 군사활동을 늘리고 있는 한편 한국·미국·일본 대 북한·중국·러시아 사이의 긴장이 가팔라지고 남북한이 그 첨단에 서 있다.
잠시 숨을 돌리고 현 상황을 짚어보자. 이러한 긴장상태는 사고의 가능성을 높이고, 불의의 사고는 급속히 전쟁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현실도 확인하자. 위기를 인지한다면 가장 긴장감이 높을 때에도 평화를 만들어낼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선제공격으로 치닫는 한반도, 진영화하는 동북아시아
20세기 초 유럽 강대국들은 선제타격만이 자신의 안전을 지켜줄 것이라는 ‘선빵의 미신’을 신봉하다 자신의 발을 찍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그 미신의 결과였다. 야만의 시대였던 20세기가 종식된 지도 20년이 넘었지만 ‘선빵의 미신’은 여전하다.
우선 미국 조지 W. 부시(George W. Bush) 정부가 21세기를 선제공격으로 열었다. 대량살상무기를 미리 제거한다며 이라크를 침공했고, 테러리스트를 제거한다며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유럽에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를 계속 확장하고 그 동쪽 끝에 미사일 방어체계와 미사일을 배치해 러시아를 선제적으로 타격할 능력을 추구해왔다. 바이든(J. Biden) 정부 들어서도 미국은 미사일 방어체계와 극초음속 미사일 등 선제공격 능력을 향상시키는 무기체계를 계속 개발·생산하고 있다. 핵무기 선제사용은 없다던 바이든 대통령의 안보 공약은 핵무기 선제타격이 가능하다는 ‘전략적 모호성’으로 급전환했다. 2022년 핵태세검토 보고서에서 “(북한)정권의 종식”을 목표로 명기하더니 2023년 워싱턴선언에서는 확장핵억제를 강화한다며 북에 대한 핵사용 위협의 강도를 높였다. 전임 트럼프 대통령과는 달리 동맹을 중시하겠다던 공약은 동맹을 러시아 및 중국 대치선의 앞으로 모는 정책으로 나타나는 상황이다. 설리번(J. Sullivan) 국가안보보좌관은 “미국은 중국의 팽창에 맞서도록 국제사회를 집결시킬 수 있다. 미국의 동맹국들이 그렇게 하도록 할 것”이라고 이미 속내를 드러낸 바 있다.
중국의 시 진핑(習近平)정부도 서두르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타이완과 통일이 어려워지고 영토완정의 꿈이 멀어진다고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 우려는 전략적 불균형에도 뿌리를 둔다. 중국은 핵전력에서 미국에 한참 뒤지고 있는데 미국이 전략무기의 압도적 우위에 기대어 타이완 독립세력에 힘을 실어주고 있으니, 자신들도 전략적 군사력을 확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중국은 핵군사력을 확대하는 동시에 군을 현대화하여 적어도 국지적 선제타격이 가능한 능력을 확보하며 지금까지의 ‘최소적 핵억제’ 전략에서 이탈해 영토완정을 가능하게 할 전략적 환경 조성을 추구하고 있다.
러시아의 뿌찐(V. Putin) 정부는 선제공격을 실행에 옮겼다. 물론 군사작전을 계획대로 수행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우끄라이나를 폐허로 만들고 인도적 위기상황을 만들기에는 충분하다. 핵무기 선제사용 가능성을 시사하고, 우끄라이나를 상대로 첨단무기를 시험하고 있다. 경고장을 받은 유럽은 오히려 국방비를 증액하고 전쟁준비를 강화하는 등 ‘몸만들기’에 나서고 있다. 유럽에서 ‘선빵의 미신’이 부활하는 것이다.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키시다(岸田文雄)정부는 작년 연말 소위 ‘3대 안보문서 개정안’을 채택하여 ‘반격능력’을 새로운 전략목표로 채택했다. 이에 따라 2023년부터 국방비를 매년 늘려 2027년에는 2022년의 2배인 10조엔 수준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국방비를 과감하게 증액하는 핵심 목적은 적국의 기지를 공격하기 위한 타격능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아베(安倍晋三)정권이 2015년 집단자위권법을 채택해 자위대가 해외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다면 키시다정부는 이 문을 실제로 박차고 나갈 군사력 확보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일본은 즉시 미국의 토마호크 미사일을 구입하는 한편 자위대가 보유하고 있는 12식 미사일을 개량할 계획이다. 토마호크 미사일은 1990년 이후 미국의 모든 선제공격에서 가장 먼저 사용됐던 무기체계다. 은밀히 날아서 정확히 타격하는 이 순항미사일은 사거리가 1600킬로미터다. 일본 본토에서 발사해도 북한 전지역뿐만 아니라, 베이징과 상하이를 비롯해 중국 해안을 타격할 수 있다. 12식 미사일은 현재 사거리가 200킬로미터인 방어용 무기체계이지만, 이 미사일을 개량하여 사거리를 1500킬로미터까지 늘리려고 한다. 12식 미사일의 개량계획에는 군함이나 전투기에서 발사 가능한 모델을 개발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이 계획이 완료된다면 중국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미사일이 될 것이다.
한반도에서도 남과 북이 모두 20세기의 미신을 쫓고 있다. ‘선제타격’을 공언하는 윤석열 대통령만이 아니다. 사실 문재인정부도 4·27판문점선언과 9·19남북군사합의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군비확대를 계속했고, ‘3축체계’의 이름만 바꾸었을 뿐 선제타격 능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나마 문재인정부는 ‘힘을 통한 안보’를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와 동시에 추진했지만, 윤석열정부는 ‘힘을 통한 안보’만을 추구하고 있다. 2018년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에도 한동안 핵무기·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을 실시하지 않던 북한도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결과물들을 하나씩, 또는 한꺼번에 선보이고 있다. 2021년 10월만 해도 “우리의 주적은 전쟁 그 자체”라며 군사력의 목적이 자위라고 했던 김정은 총비서도 2022년 3월 ‘화성-17형’ 발사 이후 발언이 더 강경해졌다. “진정한 방위력은 곧 강력한 공격능력”이라고.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알프레드 폰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 독일제국 육군 원수의 발언과 판박이다.
북은 핵선제타격을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2022년 9월 ‘핵무력정책에 대하여’라는 법령에서 이를 공식화했다. 적국이 핵무기나 대량살상무기로 공격을 감행하면 핵무기로 대응하겠다는 방침뿐만 아니라 “비핵공격이 감행되었거나 임박하였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도 핵무기를 사용하겠다고 천명했다. “국가의 존립과 인민의 생명안전에 파국적인 위기를 초래하는 사태”까지도 핵무기 사용조건에 포함시켰다. 공격이 임박했다고 자의적으로 판단되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고, 군사적 위기가 아닌 ‘파국적 위기’를 명분으로도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법령을 집행할 능력을 개발·배치하고 있다. 자국에 핵무기나 비핵무기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능력이 있는 미국을 겨냥한 핵무기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핵탄두는 이미 개발했고 미국 본토를 핵탄두로 타격할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배치하고 있다. 고체연료를 사용해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불시에 미사일을 발사할 능력을 이미 과시했으며, 탄두부에 다수의 핵탄두와 위장물을 탑재할 능력을 개발하고 있기도 하다. 일본이나 괌, 하와이 등을 타격할 중거리 미사일도 이미 배치되었고,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는 소형 핵탄두를 개발해 다양한 투발수단에 장착하고 있다. 한반도 전장에서 사용될 수 있는 단거리 전술핵무기는 그 종류와 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렸다. 한국과 미국이 개발하고 있는 미사일방어체계를 회피·기만할 수 있는 능력 또한 구비하고 있다.
북이 핵선제타격 능력을 추구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외의 군사력이 열세이기 때문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까지 상대해야 하지만 미·일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에도 상대가 되지 못한다. 미 국무부의 추산에 따르면 한국의 국방비는 북한의 10배 이상으로 이는 북한 국내총생산(GDP)의 세배에 가까운 액수다.1 2019년 시점에서 북한이 경제생산활동을 100퍼센트 군사활동에 집중해도 한국의 국방비를 따라잡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사실 한국은 1970년대 초부터 북을 능가하는 국방비를 지출하기 시작한 데 이어 그 격차를 계속 벌려 이제 북을 압도하고 있다. 2023년 글로벌파이어지수에서 한국이 6위, 북한이 34위인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압도적 열세를 핵무기라는 ‘한방’으로 만회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북한에 대응해 한국은 북의 핵능력을 무력화할 수단을 강구해왔다. △킬체인(kill chain) △한국형 미사일방어 △압도적 대응이라는 3축체계가 바로 그것이다. 킬체인은 그 자체로 이미 선제타격 능력을 지칭한다. 북이 미사일을 발사하기 전에 ‘킬’하겠다는 것이다. 그래도 혹시 미사일을 발사한다면 미사일방어체계로 요격하고 압도적으로 보복할 군사능력을 추구하고 있다. 유사시 북의 지도부를 제거하기 위한 ‘참수작전’을 작성하고 이 임무를 특수임무여단에 맡겼다. 정밀한 타격을 위한 자폭형 무인기를 운영하고 있고, 지하 깊숙한 기지를 타격하기 위한 ‘고위력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다. 이러한 ‘3종 세트’ 군사력으로 북의 핵군사력을 무력화하면 한국은 여전히 압도적 군사적 우위를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윤석열정부는 이도 모자라서 ‘발사의 왼쪽’을 운운하고 있다. 북이 발사 시도도 하기 전에 사이버 및 전자전을 구사해서 북의 군사력을 무력화하겠다는 것이다. 한국의 이러한 군사력은 미국 및 일본의 군사력과 일체가 되어 북을 선제적·입체적으로 타격할 구조를 이루고 있다.
지난 3월은 잔인한 봄이었다. 한반도는 선제타격을 위한 군비경쟁이 타오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 선제타격의 시연장이 됐다. 3월 13일 한미 연합연습 ‘자유의 방패’가 시작됐다. 북한은 그 하루 전인 12일 함경남도 신포 일대 잠수함에서 전략순항미사일 2발을 발사했다. 이어서 ‘핵반격 가상 종합훈련’을 포함한 일련의 훈련이 실시됐다. 북한의 선제타격 훈련이었다. 사실 한국과 미국의 특수전 부대는 북한이 선제타격 훈련에 들어가기도 전인 2월 초부터 ‘참수작전’을 포함한 ‘티크 나이프’ 훈련을 실시했다. 한미 연합연습 이전에 북은 선제타격 훈련을 했고, 북의 선제타격 훈련 이전에 한미 선제타격 훈련이 있었던 것이다.
3월 20일부터는 ‘적지역’ 상륙을 위한 한미의 쌍룡훈련이 시작됐다. 북은 하루 전 대응을 시작했다. 19일 사일로(지하 격납고)에서 핵미사일을 발사해 핵탄두 공중폭발을 연습했다. 28일 미 항공모함 니미츠호가 부산에 입항해 상륙훈련이 정점을 찍기 전, 북은 25일 ‘해일-1형’이라는 핵무인수중공격정을 발사해 27일에 수중폭파하는 방식으로 니미츠호의 ‘환영식’을 거행했다. 한미 연합훈련 기간에 북이 선제타격 훈련을 실시한 것이 전례없는 일이라면, 한·미·일은 전례없는 통합훈련을 보여줬다.
이렇게 모든 국가들이 선제공격을 향해 매진하는 동시에 한미일 대 북중러의 진영화도 굳어지고 있다. 백악관은 한미일 3국 정상회담이 8월 18일 워싱턴 인근 캠프데이비드 대통령 별장에서 열린다고 7월 말 발표하며 “인도·태평양 지역을 넘어서 전지구적 안보 과제에 대응하고 규칙 기반의 국제질서를 증진하는 방안을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미일이 북한 문제뿐만 아니라 중국, 러시아까지 염두에 둔 지정학적 협력을 의미하는 ‘3자 관계의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예고한 것이다. 선제타격 능력을 구비한 사실상 ‘한미일 3자동맹’의 등장이다.
북한은 7월 말 정전협정 70주년 기념행사를 통해 중국, 러시아와의 연대를 과시했다. 중러 대표단이 지난 27일 열병식에서 김정은 위원장 옆에 서서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8형’을 지켜보는 장면은 의미심장했다.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의 핵·미사일을 용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러 정상들은 각자 김정은 위원장에게 보낸 친서를 통해 북한과의 협력 관계를 잘 유지하겠다는 메시지를 발신했다. 중국과 러시아는 양자 군사협력과 훈련을 강화하고 있기도 하다.
이제 모두가 선제타격 능력을 확보하고, 이를 연습하는 상황이 됐다. 통일부조차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에 맞서는 북중러 연대 구도”를 우려하는 상황이다. 지금 동북아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유럽과 유사하지 않은가. 이제는 전쟁 자체를 우려해야 하지 않는가.
사고로 발생한 제1차 세계대전, 사고가 되풀이되는 한반도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 축구나 권투 시합 중계에서 자주 듣는 이 말은 1891년부터 1905년까지 독일제국 육군 원수로 복무했던 슐리펜의 발언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와 프랑스라는 잠재적 적을 동서에 둔 독일의 지리적 불안감이 출발점이었다. 독일군의 기동력과 전투력에 대한 신뢰가 뒷배가 됐다. 결국 먼저 프랑스를 공격해서 제압한 후 바로 군사력을 돌려 러시아를 공격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슐리펜 계획’으로 이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슐리펜에게만 뒤집어씌울 수는 없지만 슐리펜 계획은 전유럽을 전쟁에 끌어들이는 도화선이었고 독일 패망의 일차적 원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주요 유럽국들은 선제공격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딸리아왕국은 삼국동맹으로 이어져 있었고, 영국과 러시아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은 삼국협상을 맺고 있었다. 한 나라의 군사동원은 적대국의 선제타격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동맹관계에 있는 국가까지 끌어들여 순식간에 유럽 전체로 전쟁이 확산될 여건을 갖추고 있던 셈이다. 여기에 불을 붙인 건 1914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왕위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 대공이 세르비아 국민주의자 가브릴로 쁘린찌쁘(Gavrilo Princip)에게 암살당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침공하자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발동했고, 독일이 바로 프랑스로 진격하자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며 순식간에 전유럽이 전쟁의 불구덩이에 빠졌다.
그런데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은 실수와 사고의 연발이 낳은 결과였다. 페르디난트 대공이 세르비아 기차역에서 시청까지 가는 길에 암살자 여섯명이 배치됐었지만 실수를 연속하는 바람에 단 한명도 성공하지 못했다. 무사히 시청에 도착한 페르디난트 대공은 환영식에서 “암살시도의 실패에 기뻐하는 사라예보 시민”에 감사를 표시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환영식 이후 돌아가는 길에도 예기치 않은 실수들이 있었다. 특히 페르디난트 대공이 탄 차의 운전사가 길을 잘못 들어섰고, 당황해서 차를 후진하려다 자동차 시동을 꺼뜨렸다. 하필 바로 그곳에 가브릴로 쁘린찌쁘가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원래의 암살계획에 실패한 그가 낮술을 마시다 마침 그때 그 길거리에 나왔다고 한다. 결국 그는 바로 앞에 있는 페르디난트 대공을 권총으로 암살할 수 있었다.
암살 자체는 실수와 우연이 누적된 결과였지만 이 암살이 세계대전으로 비화된 것은 필연이었다. 유럽에서 전쟁준비와 긴장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선제공격 독트린과 경직된 동맹구조가 사고를 필연으로 만들었다. 아무도 전쟁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전쟁을 방지하겠다고 구축한 안보체제가 모두를 전쟁으로 끌고 들어갔다.
21세기 동북아시아는 어떠한가. 당시 유럽과 같이 모든 국가가 선제공격 독트린을 추구하고 있고, 동맹으로 서로를 더욱 얽어매며 대양세력과 대륙세력 간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긴장이 높아질수록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도 커진다. 핵무기와 첨단무기체계로 전쟁을 예방하겠다고 모두가 공언하고 있으나, 우발적 사고가 순식간에 아무도 원치 않는 결과를 부를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지난 1년 사이에도 아슬아슬한 사고들이 여러차례 있지 않았는가.
“국민 여러분께서는 대피할 준비를 하시고, 어린이와 노약자가 우선 대피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2023년 5월 31일 오전 6시 41분경 서울 시민들은 요란한 경보음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대피 준비를 하라고 했지만 무엇으로부터의 대피인지, 어떻게 어디로 대피하라는 것인지 내용도 없는 경보였다. 40여분이 지난 7시 25분 발송한 위급재난문자에서 서울시는 “북한 미사일 발사로 인해 위급 안내문자가 발송되었습니다”라며 원래의 경계경보가 ‘북한 미사일 발사’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여러모로 명백한 오발령이었다. 행정안전부가 발령한 경계경보를 잘못 이해한 부분도 문제였지만 당시 북이 발사한 것은 정찰위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6시 27분 북은 군사정찰위성을 탑재한 로켓 ‘천리마-1형’을 발사했고, 이틀 전인 29일 인공위성 발사를 사전에 통보했기 때문에 이런 경계경보가 나갈 이유가 없는 상황이었다.
경계경보 오발령은 이미 일본에서는 수차례 있었던 일이다. 예를 들어 2022년 11월 3일 오전 7시 50분경 북이 미사일을 발사했으니 미야기현, 야마가따현, 니이가따현 주민은 건물 안이나 지하로 대피하라는 경보가 발령됐다. 이후 8시에는 미사일이 태평양으로 넘어갔으니 안심하라는 통보가 발령됐다. 둘 모두 잘못된 경보였다. 북은 이날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고각도로 시험발사했지만 탄두부는 일본열도를 넘어가지 않고 한국과 일본 중간 정도 지점에 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2 시험발사가 실패였는지의 여부는 차치하고 중요한 문제는 일본 당국이 이 미사일을 일본 본토를 겨냥한 것이라고 착각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많은 질문을 제기한다. 일본이 당시에 ‘적기지 공격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면 과연 어떻게 대응했을까? 북의 미사일 탄두가 일본 열도를 향해 비행한다는 것을 확인한 시점에서 미사일을 발사했을까? 앞서 지적한 것과 같이 토마호크 미사일이나 제12식 미사일은 탄도미사일보다 비행속도가 훨씬 느리므로 북이 미사일을 발사하기 전에 먼저 타격을 시도했을까? 지금 모든 정부가 추구하고 있는 AI가 도입된다면 자동적으로 반격이 이뤄졌을까? 인간이 정보를 확인하고 대응을 통제할 수 있는 범위와 시간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일본은 이미 토마호크 미사일을 주문했고 조만간 배치를 시작할 예정이다. 더구나 이미 한국군에서 미사일 사고가 있기도 했고, 한국군과 북의 인민군이 미사일을 주고받기도 했다. 2022년 10월 4일 한국군이 발사한 현무-2C 미사일이 사고를 일으켜 탄두가 공군 기지 안에 낙탄하는 사고가 발생했고, 그 직후인 5일에는 동해상으로 쏜 ATACMS(전술지대지탄도미사일) 2발 중 1발이 비행 도중 갑자기 추적 신호가 끊겼다. 다행히 이 사고들은 한국 영토 안에서 발생했고 인명피해도 없었다. 하지만 사고가 영토 안에서만 일어나라는 법은 없다.
사고 직후인 11월 2일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아직 전모가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아슬아슬한 위기였다. 당시 한미는 10월 31일부터 F-35A, F-35B 스텔스 전투기 등 240여대를 동원해 대규모 연합공중훈련 ‘비질런트 스톰’을 진행하고 있었던 한편 북은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일련의 미사일 발사로 대응을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2일 오전 북이 발사한 미사일 중 1발이 동해 북방한계선(NLL) 이남 공해상에 떨어졌다. 한국은 사상 처음으로 동해상 북방한계선 이남에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며 이에 맞서 공군 F-15K, KF-16를 동원, NLL 이북 공해상으로 공대지미사일 3발을 발사했다. 그러자 북은 한국이 도발했다며 ‘전략순항미사일’(핵탄두 장착 가능성을 시사)로 보복타격을 가했다. 북의 탄도미사일 → 한국의 공대지미사일 → 북한의 전략순항미사일로 치솟던 대응과 맞대응은 일단 여기서 일단락됐다. 북은 순항미사일의 탄착지점 좌표까지 공개했지만 한국군이 이를 ‘허풍’이라고 치부하며 더이상 대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이 거짓말을 한 것인지 한국군이 순항미사일을 탐지하지 못했던 것인지, 다른 무슨 이유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출발점은 한미군사훈련으로 긴장이 팽팽한 상황에서 북이 발사한 미사일 추진체가 NLL 이남으로 떨어지는 ‘사고’였다. 북한의 의도적 ‘사고’였을까, 의도하지 않은 진정한 사고였을까? 한국은 그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대북강경 자세를 취하고 있던 윤석열정부 입장에서는 대응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긴장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이 전쟁으로 비화되는 경로가 바로 그런 것이다.
지난 7월에도 위태로운 상황이 있었다. 북한이 ICBM을 발사한 다음 날인 7월 13일 핵탑재가 가능한 미군 전략폭격기 B-52H가 한반도에 전개돼 한국 전투기와 연합공중훈련을 수행했고 또한 일본과도 연합훈련을 실시했다. 그런데 바로 전날 오전 10시 22분경 B-52H가 ‘비행 중 정비’를 이유로 요꼬따기지에 불시착하는 사고가 있었다.3 그 바로 직전인 오전 10시경에는 북이 화성-18형을 발사해 약 74분의 비행 후 11시 13분경 홋까이도오 인근에 낙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평양 공군사령부가 이 전폭기는 미국 노스다코타 마이놋기지 제5폭격항공단 소속으로 “인도-태평양 지역의 훈련연습”을 지원하기 위해 비행했다고 밝혔지만 여러가지 의문이 남아 있다.4 이미 제23폭격항공단 소속 B-52H 4기와 제20원정폭격항공단 소속 B-52H 4기가 괌 앤더슨 공군기지에 배치된 상태에서 무슨 이유로 이 시점에 전폭기가 추가파견됐을까? 평양은 미사일을 발사했을 때 B-52H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까? B-52H는 당시 무슨 작전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을까? 전폭기에 문제가 있었다면 무슨 문제였을까? 미국은 미사일 발사를 감지하고 서둘러 B-52H를 착륙시키지는 않았을까? 이러한 질문들에 답을 찾을 수는 없다. 한반도와 동북아시아는 또 한번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모면했을지도 모른다.
긴장이 높아지는 것과 비례해서 우발적 사고도 늘어나고 있다. 사고가 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커지고 있는 반면 사고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단은 전무하다. 북은 2019년 이후 미국과의 협상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장기전’ 모드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문재인정부와의 관계도 소원해졌었지만 윤석열정부와는 아예 상종을 하지 않고 있다. 외교 협상의 채널이 닫힌 것뿐만 아니라 남북간의 군사 핫라인, 유엔사와의 소통라인조차 가동되지 않는 ‘절대단절’ 상태에 빠졌다. 불의의 사고가 발생해도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사소한 사건이 순식간에 불길로 번지고 걷잡을 수 없이 확전될 수 있는 상황인데도 이를 초기에 방지할 수단이 없는 것이다. 국교도 맺고 있었고 핫라인도 가동하고 있던 미·소 냉전시기보다도 위태롭고, 한반도에서 정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소통채널이 있었던 시기보다도 위험한 상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찐 평화’를 꿈꾸기 시작하자
윤석열정부가 이전 문재인정부의 정책을 ‘거짓 평화’라고 한 것은 맞는 말이다. 단 그 이유는 잘못됐다. 북한의 선의에 의존한 평화였기 때문에 거짓 평화라고 하는 것은 틀린 말이기 때문이다. 문재인정부는 대화와 협상을 대북정책의 한 축으로 삼았지만 ‘힘을 통한 평화’를 또다른 축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대화를 하고 정상회담을 가졌지만 동시에 무기체계를 개발·생산하고 군사력을 강화했다. 윤석열정부가 힘을 통한 평화의 일환으로 구축하고 있는 ‘3축체계’는 문재인정부에서도 진행되고 있었다.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과 판문점선언에서 ‘군비감축’에 합의했지만 국방비를 증액하는 등 군비를 확산했다. 말과 행동이 다른, 말 그대로 ‘거짓 평화’였다.
지난 1990년대부터 시도됐던 대화와 협상이 그랬다. 1994년 제네바합의가 북의 몰락을 염두에 두고 체결되었는지 검증할 길은 없다. 하지만 김일성 주석은 사망했고 당시에 한국과 미국의 많은 전문가들은 김일성의 사망이 북의 혼란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제네바합의나 그 이후의 6자회담합의가 결렬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북은 물론 한국과 미국도 이 결렬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대화와 협상이 대북정책에서 항상 주된 전략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정부 예산의 불균형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올해 통일부 예산이 일반회계와 남북협력기금을 합해 1조 4358억원인 데 비해 국방부 예산은 57조 143억원이다. 윤석열정부 들어 통일부 예산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원래부터도 통일부는 국방부 예산의 2퍼센트 정도만을 배당받는 초라한 신세다. 이는 문재인정부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 「판문점선언」 이행 및 지속 가능한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사업”을 중점 투자방향으로 잡았던 2019년 통일부 전체 예산이 1조 3262억원이었다. 이에 비해 그해 국방부 예산은 46조 6971억이었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명목의 사업이 있었던 2005년에 1억 500만원, 2006년에 9300만원이 여기에 집행됐다. 국방부 예산은 2005년에 20조 8226억원, 2006년에 22조 5129억원이었다.5
이러한 예산의 불균형은 대한민국의 우선순위를 의심의 여지없이 보여준다. 한국은 한반도의 평화보다는 전쟁준비에 압도적으로 많은 예산을 쓰고 있다. 앞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한국이 이미 북한의 국방비를 압도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러한 예산의 불균형은 시정되지 않고 있다. 심지어 북과 정상회담을 갖고 평화체제의 구축에 합의한 문재인정부에서도 예산의 압도적 불균형은 수정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북한과의 대화와 협상이 실패한 것은 ‘거짓 평화’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한국 자체가 평화적 전환을 이루지 않는다면 정상회담만으로, 또는 정상 간의 합의만으로는 한반도 평화를 이룰 수 없다는 당위적 명제를 배우는 데 30여년이 걸렸다.
현재의 위기상황은 그에 걸맞은 대응조치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힘을 통한 평화’도 ‘거짓 평화’도 아니다. ‘찐 평화’다. 진짜 평화는 무엇인가? 지금부터, 우리부터 만들어가는 평화가 필요하다. 한국이 ‘선도적’으로 긴장 완화 조치를 취할 수 있고, ‘일방적’으로 군비동결과 군사훈련 동결을 선언하고 당장 실천해야 한다. 문장렬이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한미가 선도적으로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 조치들을 취할 수 있다”며 구체적인 조치들을 예시한 바 있다. 그가 제안한 것과 같이 3축체계를 재조정하거나 한미연합훈련의 근거인 ‘연합작전계획’의 목표를 재설정하는 일은 당장 실시할 수 있는 현실적 조치들이다. 특히 “북한지역을 점령 수복하여 군정을 실시하는 것”이던 연합작전의 목표를 “침략 격퇴 후 조속한 평화 회복”으로 전환하고 이에 따라 훈련 방식도 최소 규모로 하자는 제안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되살리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6
이보다 당장 시급한 것은 우발적 사고나 실수가 위기로, 나아가 전쟁으로 비화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다.7 남북간의 핫라인 및 유엔사와 조선인민군 간의 군사핫라인 재가동이 절대적으로 시급하다. 민간 차원에서도 군사활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감시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말한 미 공군 B-52H의 불시착은 요꼬따기지를 감시하는 일본 시민활동가들 덕분에 알려졌다. 지난 30년간 요꼬따기지에 착륙하지 않았던 B-52H기가 발견되자 활동가들이 사진을 찍어 이를 공개했기 때문에 태평양 공군사령부가 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경계경보 오발동 사례들이 보여주듯 경계경보 발동을 정부에만 맡겨두는 것도 위험하다. 시민사회가 경보에 즉각적으로 대응하여 잘못된 경보는 바로잡고, 정부가 경보를 발동하지 않는 위험상황에는 시민사회가 예방적으로 경보를 울릴 필요가 있다. 이미 개인 차원에서 알음알음으로 연락하는 것을 좀더 사회화하고 체계화하는 것이고, 이러한 시민사회 경보체계를 초국가적으로 연계하기도 해야 한다.8 일본정부가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를 오인하며 오끼나와에 경계경보를 울려 불안감을 조성한다면 한국 시민사회와 연결하여 이를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대는 동북아시아의 군비경쟁을 견제하는 강력한 힘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장기적으로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을 전망하며 이에 걸맞은 조치들이 취해져야 한다. 내년부터 국방비를 감축하고 ‘평화활동’을 늘려야 한다. 국방비는 이미 적정수준을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비대하다. 통상적으로 방어에는 공격에 필요한 군사력의 3분의 1 정도가 요구된다고 하는데 한국이 북한보다 10배가 넘는 국방비를 쓰는 것 자체도 비합리적이고, 그런 국방비를 쓰면서도 안보불안을 말하는 상황은 비정상적이기까지 하다. 북한과 일촉즉발의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면서 최소한의 위기예방 및 군비통제 조치조차 없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다. 국방예산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가 시급하고, 이를 위해서는 국방비의 근거가 되는 전략개념과 작전계획 자체도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평화활동은 남북관계를 평화적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활동 및 우끄라이나 등 해외의 평화를 위한 활동일 수 있다.9 그렇지만 평화는 국가 간, 또는 남북 정부 사이의 활동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다. 정부는 선언이나 조약과 같은 평화의 틀을 만들 수 있지만 그 틀 안에 평화를 채워넣는 것은 시민사회의 몫이다. 역으로 시민사회 안에서 평화적 삶을 만들어나가면 정부도 평화의 틀을 짤 수밖에 없기도 하다. 예를 들어 한반도 비핵지대화라는 ‘거창한’ 목적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지만 대한민국에서 비핵지대를 선언한 지방자치단체는 한군데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여러 지역과 분야의 시민사회가 평화 만들기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이유다. 이와 동시에 한국에서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평화롭게 하는 활동들이 진행되어야 한다. 정전협정 이후 북한군의 총에 죽은 한국시민은 손에 꼽을 정도이겠지만 작년 한해에도 874명이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었다. 삶이 말 그대로 ‘전쟁터’인 일반 시민에게 정상들의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이 다른 나라 얘기처럼 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업장에서 죽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 환경을 만들고 학교가, 직장이, 가정이 더 평화로울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시급한 과제다. 이제는 일상이 된 기후온난화와 미세먼지 등 환경재난을 해결하기 위해 환경정의를 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사활이 걸린 일임을 알아야 한다. 동시에 내 삶에서의 평화 만들기가 평화국가 만들기와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겠다. 국방비로 대표되는 ‘죽임의 비용’을 ‘살림의 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이야말로 일상의 평화와 국가의 평화를 연결하는 핵심고리일 것이다.10
이미 북한을 압도하는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한국은 이러한 조치를 취할 수 있고, 취해야 한다. 이러한 평화활동과 함께 북에도 ‘평화체제’를 만들자고 손을 내밀어야 할 것이다. 많은 이들이 북은 절대로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북과 군축을 논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손을 내젓고 있다. 하지만 사실 조선인민공화국 스스로는 그러한 가능성을 닫은 적이 없다. 김정은 위원장이 2022년 9월 8일 최고인민회의에서 “우리로서는 절대로 핵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 주목을 받고 있지만 그는 같은 연설에서 “우리의 핵정책이 바뀌자면 세상이 변해야 하고 조선반도의 정치군사적환경이 변해야 한다”며 비핵화를 위한 필요조건을 명시했다. 뒤집어서 말하자면 한반도에서 평화적 환경이 조성되면 북도 핵무기를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그가 방점을 찍고 싶었던 내용일 수 있다.
그러면 같은 날 핵무기 선제사용을 천명한 법령을 최고인민위원회에서 채택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 법령이 핵무기의 사명에 “영토완정”을 포함시킨 것을 두고 일각에서는 이를 무력통일을 시사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들은 과거에 김일성이 ‘국토완정’을 언급했고 이를 위해 한국전쟁을 벌였다는 것을 근거로 내세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틀렸다. 우선 북은 공식적으로 영토완정을 “territorial integrity”로 번역하며 영토수호의 의미임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핵무기의 사명이 무력통일이었다면 법령의 내용에 반영되었어야 할 텐데 무력통일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 핵무기의 사용원칙은 ‘외부의 침략과 공격에 대처’한다는 방어적인 것으로 되어 있고, 핵무기의 사용조건도 ‘공격이 감행되었거나 임박한 경우’로 제한되어 있다.
북한이 소위 ‘조국통일 3대헌장’에서 내세우는 공식적인 통일원칙은 평화통일이다. 핵무기로 통일을 이루겠다고 하면 북이 신성화하고 있는 원칙과 완전히 배치된다. 오히려 북은 최근 들어 한국 일각에서 우려하는 ‘적화통일’ ‘무력통일’을 불식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21년 당규약을 개정하며 당면 목적 중 기존에 남반부 혁명론을 의미했던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 과업’ 표현을 삭제하고 ‘전국적 범위에서 사회의 자주적이며 민주주의적인 발전’ 실현을 제시했다. 북이 ‘적화통일’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근거로 제시되었던 것이 노동당 당규약이었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전향적인 변화였다. 김태경과 이정철은 “민족자주의 기치, 민족대단결의 기치를 높이 들고 조국의 평화통일을 앞당기고 민족의 공동번영을 이룩하기 위하여 투쟁한다”라는 새로운 규정에 주목하며 “‘조국의 평화통일’ 단계 이전에 ‘민족의 공동번영’ 단계를 새로 설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해석하고 있기도 하다.11 최근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담화에서 “대한민국” 표현을 사용한 것,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방북 거부 발표를 통일전선부가 아닌 외무성을 통해 전한 것도 이러한 변화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반도와 동북아시아가 선제공격의 긴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이 앞장서야 한다. 대한민국 사회의 평화를 위해서도 ‘찐 평화’는 당장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 평화가 가능해서가 아니라, 지금 평화를 추구하지 않으면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 이 글은 2022년 3월 30일자 창비주간논평에 발표한 「‘선빵’의 미신, 21세기의 야만」을 보완·발전 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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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국무부의 추산에 따르면 2019년 한국의 국방비는 440억 달러, 북한의 국방비는 43억 달러였다. 북의 국방비가 GDP의 26.4%라고 평가하고 있으므로 역산하면 북의 GDP는 163억 달러로 추정된다. “World Military Expenditures and Arms Transfers 2021 Edition,” U.S. Department of the State 2021.12.30.↩
- 한미일 군사당국은 미사일 2단계 추진부에 문제가 있어 탄두가 공해상에 추락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북 총참모부는 “적의 작전지휘체계를 마비시키는 특수기능전투부” 시험이었다고 주장했다.↩
- Yokota Air Base, “B-52 Stratofortress Lands at Yokota,” 2023.7.11.↩
- Seth Robson, “Air Force B-52 bomber makes rare landing in Tokyo due to maintenance issue,” Stars and Stripes, 2023.7.12.↩
- 「국방예산 추이」, 국방부 홈페이지 참조; 「남북협력기금 통계」, 통일부 기획조정실 2023.7.10; 「2023년도 세입·세출예산 개요」, 통일부 2023.1; 「2019년도 세입·세출예산 개요」 통일부 2019.1; 「2006년도 통일부 세입세출예산 개요」 통일부 2006.5.3.↩
- 문장렬 「한반도 핵전쟁, 가능한 상상과 불가능한 대책」, 『창작과비평』 2022년 겨울호, 354~55면.↩
- 전쟁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억지’라는 군사조치에만 의존하는 대신 ‘안심공여’(reassurance)를 위한 적극적 외교가 필요하다는 제안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新外交イニシアティブ(ND) 「戦争を回避せよ」, 2022.11.↩
- 한국과 일본 시민사회에서 이런 활동을 시작하고 있다. 피스모모 「동북아시아 무력갈등 위험에 대한 피스모모의 조기경보」 등 참조.↩
- 홍민·이재영·황수환·김영준·정욱식 『북한의 대북적대정책 철회론과 대북안전보장 방안』, 통일연구원 2023.↩
- 필자는 이러한 제안을 피력한 바 있다. 졸고 「당신은 안녕하십니까」, 한겨레 2019.12.1.↩
- 김태경·이정철 「조선노동당 제8차대회 당규약 개정과 북한의 전국 혁명론 변화」, 『통일정책연구』 30권 2호,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