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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이애주 『이애주의 춤 생각』, 개마서원 2023

온몸으로 쓴 역사 서사시

 

 

성기숙 成基淑

한예종 교수, 무용평론가 choomsk@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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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타계한 ‘시대의 춤꾼’ 이애주(李愛珠, 1947~2021)가 『이애주의 춤 생각』으로 불현듯 우리 앞에 섰다. 이애주 생전의 글 모음집으로, 유신과 군사독재의 엄혹한 시절 온몸으로 쓴 역사 서사시라 할 수 있다. 이애주는 1947년생으로 한국전쟁과 산업화, 민주화를 관통했으며 그의 춤 역시 정치적 지형에 따라 몹시 출렁였다. 이 책에서 그의 춤 학습 내력과 1980년대 민주화운동 현장에서 이른바 ‘시국춤’으로 시대에 저항한 역사의식, 그리고 전통춤에서 창작춤에 이르기까지 춤꾼 이애주의 삶의 궤적과 춤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그 여정을 시대별로 살필 수 있음은 이 책의 소중한 미덕이며, 그의 내면에 투영된 춤에 대한 생각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없이 긴요하다. 이애주를 한국(춤)의 역사적 지평 위에 온전히 그리고 당당히 자리매김해가는 단초이자 원천자료로 유용한 기록이라 하겠다.

1장은 이애주 춤의 씨앗이 된 근대 전통무악의 거장 한성준과 그의 손녀딸 한영숙 그리고 궁중정재의 대가 김보남 등 춤 스승들과의 인연을 다루고 있다. 한국춤의 근대화를 모색한 빛나는 인물들을 스승으로 둔 이애주의 예사롭지 않은 배움의 내력이 드러난다. 2장에서는 춤꾼 이애주의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을 가늠할 수 있다. 그는 “참된 춤꾼은 자기 장단을 갖고 태어난다”(143면)는 인식으로 육체의 해방, 삶의 해방을 노래했다. 그에게 있어 춤을 춘다는 것은 곧 살아 있음의 징표였다. ‘나의 춤 나의 칼’이라는 다소 섬뜩한 소제목이 암시하듯 그는 ‘한판춤’으로 역사 앞에 승부수를 던졌는데, 1987년 6월 서울대에서 개최된 민주화대행진 출정식과 그해 7월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서 「바람맞이」를 선보인 것이다. 민주화운동의 분수령이 된 「바람맞이」는 당시 국립대 교수 신분이었던 그에게 좌파 프레임이 씌워지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으며, 춤의 ‘순수와 참여’ 논쟁에 불을 댕긴 ‘문제작’이기도 했다.

이애주는 1987년 어느날 한복 차림으로 민중후보로 나선 백기완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러 텔레비전에 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춤이란 역사를 일궈나가는 몸짓이라고 인식하며 억압에 맞서고 죽음을 살리는 시대의 춤꾼으로 남고자 했으니 그가 일평생 민주화투쟁에 헌신한 백기완을 공개 지지하고 나선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런 그가 1988년 돌연 민중문화운동 진영과의 결별을 선언한다. 민주화를 위한 원초적 물음 혹은 당위론적 과제 앞에 진정 ‘예술다운 예술’로서의 문화운동을 표방한 그는 회의감에 휩싸인다. 내적 성찰은 ‘거리의 춤꾼’ 행보를 멈추게 했고 나아가 긴 ‘침묵의 시간’을 촉진했다. 엘리트 춤꾼인 제자 이애주가 반정부 저항세력으로 내몰려 쫓겨다니는 모습을 가슴 졸이며 지켜봐야 했던 스승 한영숙은 이를 무척 반긴 반면, 운동권으로부터는 배반자 혹은 변절자로 낙인찍히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본디 그 모습’의 근원으로 회귀한 이애주는 이후 순수 전통춤꾼으로 일가를 이뤘다. 결정적으로 1996년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 반열에 오르며 춤의 명인으로 우뚝 섰으나 제도권 무용계는 여전히 냉소적이었다. ‘운동권춤꾼’ 혹은 ‘시국춤꾼’이라는 프레임이 견고하게 덧씌워진 탓이다. 각종 매체와의 대담 및 인터뷰를 수록한 3장은 역사 앞에 그 누구보다 치열했던 이애주 춤 인생의 굴곡과 경계넘기를 마주하는 장으로 손색이 없다.

4장은 몸짓의 원류를 찾아 떠나는 춤의 여행기로, 이애주의 우주적 생명관을 엿볼 수 있다. 이애주는 일찍이 자연과 우주와 하나 되는 생명의 춤, 국토 이곳저곳에서 마주한 순간순간의 떨림과 전율의 몸짓을 사진집 『우리땅 터벌림』(김영수 사진·이애주 춤, 예술과사진 2012)에 수록한 바 있다. 태평무의 ‘사방치기’ 춤사위를 펼쳐내듯 울릉도 백령도 한라산 백두산 등 한반도의 동서남북을 사방치기로 돌면서 돌과 풀과 이름 없는 꽃과 교감한 흔적들이 가슴에 와닿는다. 나아가 우리 춤의 원류를 찾아 홍산문화의 뿌리와 발자취를 따라간 중국 탐방기는 춤꾼 이애주의 사상적 발원 및 사유의 지평 확산의 요체를 읽게 한다. 5장에는 이애주 춤활동에 대한 연대기적 기록이 집적되어 있다. 첫 작품 「땅끝」(1974)부터 활동을 결산한 「천명(天命)」(2014)에 이르기까지 40여년간 생산된 각종 공연자료를 묶었다. 민주화운동의 현장에서 섬뜩한 전율을 안겨주는 몸짓들, 우리 춤의 시조 한성준에서 손녀딸 한영숙 그리고 다시 이애주로 이어지는 소위 중고제 무맥(舞脈)을 가늠케 하는 풍부한 시각자료가 시선을 압도한다.

관찰하건대 『이애주의 춤 생각』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6장에 집약돼 있는 듯싶다. 특히 「인문학으로 풀어보는 우리춤 이야기」라는 글이 주목되는데, 2020년 국가무형문화재 전승활동의 일환으로 기획된 이애주의 ‘살아 있는 우리춤 이야기’의 내용을 수록했다. 특히 그가 인생 후반기에 천착한 「영가무도(詠歌舞蹈)」가 눈에 띈다. 단군 이전 시기로 소급하여 가무의 근원을 탐사하고 물음을 던진다. 「영가무도」는 우주적 생명의 자연스러운 몸짓, 자연과 정신과 과학이 혼융된 기화(氣化)의 몸짓으로 이른바 통섭의 산물이라 하겠다. 우리 민족의 전통적 소리와 몸짓을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원리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춤에 대한 이애주의 사유는 좀더 근원적이다. 그는 몸짓의 탄생을 동양사상과 연관 지어 진단한다. 한편 일상의 ‘절 드림’이라는 동작에 민족의 정신과 사상이 투영되어 있음을 포착하고, 이를 통해 유가의 예(禮)를 강조한 점도 이채롭다. 다만 아쉽게도 고대 한국인들의 몸짓이 바탕이 되어 한성준의 본춤 내지 본살풀이춤이 생겨났다고 보는 시각은 논리적 비약이 없지 않다.

주지하듯 시대의 춤꾼 이애주는 현대 한국무용사에 기념비적 업적을 남겼다. 1970,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최전선에서 현실비판적 춤으로 반정부투쟁에 앞장서며 치열하게 저항했다. 춤의 본질과 근원 탐색에 천착하여 「영가무도」를 정립했고, 한성준에서 한영숙으로 이어지는 우리 춤의 정통 예맥을 계승한 최고의 명무였다. 요동치는 정치현실에 온몸을 내던지며 지식인 혹은 예술가의 대사회적 역할에 충실했다. 그의 보기 드문 행보가 낳은 예술적 성취는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춤꾼 이애주의 부재는 우리 무용사의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뼛속까지 춤꾼의 유전자를 타고난 이애주는 2021년 7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는 “허무의 텅 빈 판으로 돌아가는 미래의 예감”(178면)에 대한 물음을 던졌고 해답은 미완으로 남아 있다. 그 답과 함께 현대 한국무용사에서 이애주의 위치를 온전히 자리매김하는 일은 이제 우리 모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