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김개미 金芥眉
강원 인제 출생. 2005년 『시와반시』로 등단.
시집 『앵무새 재우기』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악마는 어디서 게으름을 피우는가』 『작은 신』 등이 있음.
anypoem@hanmail.net
옥수수밭의 소녀들
이 밭의 이름은 지겨움
한낮이면 화약 냄새가 난다
우리는 바다에 가본 적 없지만
우리 섬은 초록파도가 빼곡하다
우리는 아기를 업고 다닌다
아기를 업고 놀다 자기도 한다
며칠에 한번은 숨어야 하는 때가 있는데
그때 아기가 자면 행운이다
아기가 안 자면 입을 막아야 한다
우리 손은 작아서 위험하지 않다
어른들 중에도 숨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
그중엔 배가 큰 여자도 있다
얼마 전 한 여자가 아기를 낳고
태반을 들고 여길 지나갔다
우리는 며칠 동안 고양이들을 쫓아냈다
우리 중에도 여기서 태어난 아이가 있다
오래된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오늘 일도 알록달록하다
어제는 몸만 어른인 남자가 수음하는 걸 봤다
우리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도망쳤다
벌레들의 소리가 커질 때
여기서 다시 만나자
오늘 밤도 심심하지 않을 거야
가벼운 신발을 신고 와
해 피 버 스 데 이 투 유
여러해 전
우리 집에 잠시 머무른 이웃의 아이는
고양이처럼
창틀에 앉아 있곤 했습니다
밥 먹을 때가 되어도 내려오지 않아
접시에 밥과 반찬을 담아
히어리가 노랗게 핀 창가로
가져다주고는 했습니다
그 아이는 아주 천천히 밥을 먹었지만
그 아이가 씹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아이는 나뭇가지에 앉은 새가 날아갈까봐
걱정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 아이가 어디 아픈가 많이 슬픈가 해서
가끔 병원에 가보자는 말을 종이에 여러겹 싸서
건네보기도 했습니다
자주 창틀을 닦았지만
그 아이 발은 언제나
까맸습니다
양말을 신어서 발을 볼 수 없을 때 빼고는 늘 까맸습니다
더러 내가 음악을 틀고 책을 읽을 때면
그 아이가 주방 간이책상에 앉아
복사용지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주 아름답고 복잡한 무늬였습니다
그 아이는 내 물건 중 유일하게
만년필을 마음에 들어했습니다
비스듬히 들고 바라보곤 했습니다
두어달이 못 되어
그 아이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아이는 아직 이웃에 삽니다
이제는 건강한 그 아이 엄마가
종종 우리 집에 커피를 마시러 오는데
그 아이는 한번도 같이 오지 않았습니다
빵집이나 까페에서 마주쳐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 아이에게는
내가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아이가 그러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하지만
그 짐작이 맞는지는 모릅니다
수십년 동안 살아오면서
짐작만큼 부정확한 게 없다는 걸
정확히 알게 되었으니까요
오늘 날씨 따뜻하고
그 아이는 열다섯살이 되었습니다
저기,
아지랑이 어리는 골목
그 아이가 꽃을 들고 지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