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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세기 李世起
1963년 인천 출생. 1998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먹염바다』 『언 손』 『서쪽이 빛난다』 등이 있음.
halmibburi@hanmail.net
아열대식물
이웃한 무허가 집 슬레이트 건축물
석면 해체 처리 문제로 시 환경국 주무관과
전화를 붙잡고 언성을 높인 후
새삼 놀라울 일은 아니지만
우리 집 마당 동백나무가 얼어 죽지 않았다
남방계 출신답게 싱싱하게 자랐다
새롭게 가족이 될 호랑가시나무와 함께
무성하게 뿌리를 내렸다
남향은 빛이 잘 들어 하고 아내는 말했고
나는 이마를 들어 북향을 보았다
암녹색이 부풀어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넝쿨과
이제 막 식생을 마친 팔손이는 늠름하구나
지칠 줄 모르는 자생력에 탄복하며
잉잉거리는 벌과 함께 땡볕 아래 서 있는 동안
신고를 받고 구청 자원순환과에서 나온
젊은 직원은 면적이 작은 평수는 담당이 아니니
노동청으로 연락하라고 발뺌을 했다
석면 철거를 위해 방진복과 방독면도 없이
폐기물처리 해체를 하다 들킨 삼부자는
자신들의 불법을 반성이라도 하듯
손자가 셋이라는 작업반장 아버지가
다소곳이 두 손을 단전에 두고
땡볕 아래 검게 탄 얼굴로 공손을 보였다
습도가 푹푹 올라가는 아열대의 한낮
동백잎이 자신이 떠나온 곳을 보듯
막내아들은 담장 아래 쭈그려 앉아 있고
큰아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뒤늦게 노동청 산재예방지도과에서 나온
감독관의 지시를 받는 동안
나는 내가 서 있는 발밑에
죽은 지렁이를 물고 가는 개미떼와 함께
삼부자와 쫓기듯 여기까지 온
왕성하게 자라는 무화과나무를 바라보았다
대풍양곡상회
요즘 도토리와 산책을 다닌다
불볕더위를 피해 아침나절과 해거름
어린 것이 헐떡이며 끌고 가는
가파른 언덕을 오를 때나
오토바이나 자동차의 경적에
소스라치게 놀랄 적에도
도토리와 나는 씩씩하게 거리를 걸으며
이제 막 시멘트 바닥 틈에
뿌리 내린 청오동과 만나고
수족관 밑바닥에 갇힌 먹장어
눈빛을 마주 보다
건널목 옆 노상 좌판에 오단으로
공들여 쌓은 햇사과를 보며
붉은 신호등에 멈춰 서서
아, 인연은 모질다는
고타마 싯다르타의 고행을 되새김질하며
함께 물을 먹고
함께 팔천보를 걷는다
사방으로 문이 나 있는 집 감옥에서
텔레비전도 싫고
신문은 더더욱 사절인 채
아, 이래서는 안 되지…… 자리를 떨쳐 일어나
오늘은 아내가 부탁한
쌀을 사기 위해 대형마트에 갔다가
회원 할인을 받지 못한 처지를
인정하지 못한 채
쌓아놓은 쌀부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넘치는 것은 쌀이 아니라
오르막으로 치솟는 물가가 아니라
비회원으로 허깨비 취급하는
믿지 못할 이 나라 공화국에 있다며
끌려가는 것은 내가 아니다
집 없는 고양이나
곤줄박이나 텃밭의 깻잎도 인정할
내일도 오늘도 걸어갈
우리 동네 쌀가게 대풍양곡상회로
서슴없이 발길을 옮겼다
쌀을 팔러 생활이 뜨겁게 타들어가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