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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채인숙 蔡仁淑
2015년 오장환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여름 가고 여름』이 있음.
zemmachaejkt@gmail.com
자와어를 쓰는 저녁
동네에는 담장이 없는 집들이 오래된 나무 창문을 달고 나란하게 서 있다. 사람들은 하루에 다섯번씩 사원에서 들려오는 아잔 소리를 들으며 발을 씻는다. 바틱 문양 타일 위에 둥글게 앉아 꾸란을 읽는다. 해가 저물면 긴 사롱을 걸친 남자들이 등나무 빗자루를 들고 흙마당을 쓴다. 입꼬리를 올리고 우물거리며 이국 여자에게 저녁 인사를 한다. 젊은 남자는 앞니가 하나도 없고, 아침에 죽은 아버지를 해가 지기 전에 묻었다고 낮은 돌담이 서 있는 동네 묘지를 가리킨다. 묘지를 둘러싼 캄보자나무에서 노란 꽃 무더기가 툭툭 떨어져 내린다. 자바에선 초상이 나면 대문 앞에 노란 깃발을 걸어둔다. 우리는 작고 노란 삼각 깃발을 함께 거두고 때 묻은 나무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남자가 찌그러진 은색 포크를 들어 판단잎으로 쪄낸 쿠에를 건넨다. 검은 아렌설탕 냄새가 입안 가득 퍼진다. 어린 날 내 아버지가 입에 물려주었던 박하사탕처럼 속이 환한 슬픔이 고인다. 우리는 서로에게 닿아본 적 없는 언어로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버지의 이름이 노란 깃발처럼 접히고 접혀서 부호 하나로 사라진다. 앞니가 없는 남자와 이국 여자는 서로의 어깨를 짧게 두드린다. 바나나나무 그림자가 의자 위로 털썩 주저앉는다. 저녁 아잔 소리가 묘지 쪽으로 흘러간다.
아라의 조선공
울린나무를 싣고
소년은 바다로 간다
세상천지 바람이 가지 않는 곳은 없다고
아버지는 말했지만
배는 깊고
노란 돛은 무거워
간신히 바람을 껴안는다
거대한 폰티아낙 밀림 속에서
아버지는 시를 읽다가
자주 울음을 터뜨렸는데
나무로 이은 마룻바닥을 열면
누런 강물이 발끝에 닿고
나는 거기에 몰래 똥을 누곤 했었는데
뱃머리에 자스민꽃 문양을 그리다 말고
아버지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우리는 서로를 원망했을까
눈먼 새처럼
어둠이 솟구쳐 오르면
나무는 제 몸을 파내어
바다를 떠돌겠지만
바람 뒤로
바람이 불어오고
나는 태어나기 위해
아버지를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