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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최태현 『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 창비 2023
작은 자들의 공동체를 위하여
이관후 李官厚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kwanhu.lee@gmail.com
이 책의 의미를 한문장으로 말하라면, 구조주의와 제도주의가 오랫동안 지배해온 사회과학에서 행위자의 역할과 중요성, 그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해 역설하고 있는 보기 드문 저작이라 하겠다. 사회과학에서 구조주의와 제도주의적 경향의 이론 사조가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이유는 행위자 중심의 담론들이 국가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구조에 비해 너무나 미약해 보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토대환원론, 경제결정론, 구조결정론, 역사결정론같이 행위자들이 설 자리가 전혀 없는 이론들도 전개된다.
이런 이론들은 한편으로는 기득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어떤 지점들을 결절점으로 삼아야 하는가라는 비판적 관점에서 제기된 것이기는 하지만,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서 이미 주체의 자율성이 무기력해지는 딜레마를 안고 있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그람시(A. Gramsci)의 헤게모니 이론이 현대 이론치고는 꽤 오랫동안 끈질기게 살아남은 이유도 구조에 가까워 보이는 맑스와 행위자의 자율성을 극대화한 레닌 사이에서 균형적 설명을 제시하려고 했던 것 때문이 아닌가 싶다.
보통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적극적인 행위주체를 말할 때 우리는 ‘시민’을 거론한다. 시민적 덕성에 기반을 둔 공화주의, (주로 시장 영역에서의) 방법론적 개인주의 등이 이러한 행위주체의 당위성과 가능성을 요구하는 이념이자 체제다. 그런데 정당정치가 약화되고 ‘대표의 위기’가 제기된 1980년대부터 강하게 타올랐던 참여민주주의와 심의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는 1990년대 이후 주춤했다. 그 틈을 파고든 것은 신자유주의가 남긴 양극화를 배경으로 개별 국민국가들의 정체성과 사회통합 정책에 공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포퓰리즘이었다. 돌이켜보면 ‘월스트리트 점령운동’(Occupy Wall Street)이 미국 민주당 좌파 그룹을 형성했다면, 포퓰리즘은 아예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어냈다. ‘대표제’ 정치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시민’들의 직접 참여 역시 언제나 양가적이다. 우리가 하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들이 하는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새로운 행위자론 서설이라고 할 만하다. 이 책은 아감벤(G. Agamben)이나 파머(P. Palmer), 스피박(G. Spivak) 등의 담론에 힘입어 한국적 맥락의, 그러나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행위주체를 제시한다. ‘작은 자들’(the least)이다. 저자 최태현은 「마태복음」에서 이 용어를 가져온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23면, 「마태복음」 25:40에서 재인용)
여기서 작은 자는 사회적 약자와 다르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들은 반드시 약하다기보다는, 겸손하고 적게 소비하고 많은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가기를 원하는 존재들이다. 즉 이것은 ‘삶의 모습’을 의미한다. 이들은 또한 성서 속 수혜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주체가 된다. 그러나 이는 과거 한때 우리가 더 강한 역사적 주체로 호명했던 ‘민중’이나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상징으로서의 ‘민초’ 같은 개념과는 분명히 다르다. 이 작은 자들은 그렇게 큰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또 우리가 한때 자조적인 맥락을 포함해 명명했던 ‘소시민’과도 다르다. 작은 자들은 개별자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작은 자들’에 주목하는 이유를 “뭉뚱그려진 추상적인 국민 혹은 전체 시민보다, 이 세계에 조금 존재하여 서로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존재로서 동료 시민들의 이름을 서로 구체적으로 불러야 한다는 감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 특히 감춰진 세계가”(23~24면)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럼 ‘작은 자들’의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저자가 “처방적 권력자”(26면)로 부르는 철인왕들이다. 물론 이것은 봉건시대로의 역행은 아니다. 현대 포퓰리즘은 물론 민주주의 일반에서도 나타나는, 현재의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줄 것 같은 ‘백마 탄 선지자’에 대한 바람을 갖는 현상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기 위해 ‘정치적 대표’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로 이 책의 서두를 풀어나간다. 특히 대표의 원초적 의미는 물론 책임성, 대표성, 반응성, 투명성 등 현대 대표제의 문제점들을 빠짐없이 명료하게 설명한 후에 다시 당사자성과 마음의 문제로 돌아가는 서술은, 대표 개념의 중요성을 역설해온 내 입장에서 매우 감사하고도 흥미로운 것이었다.
이 책은 이렇게 대표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해 국가, 행정, 리더십, 민주주의라는 주제를 넘어 ‘마음’의 문제로 돌아온다. 마음과 더불어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것은 공공성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 공공성 문제에서 국가나 행정의 수준의 ‘공(公)’을 말하지 않는다. 아마도 ‘공/사’ 구분의 문제, 또 현실적으로 ‘작은 자들’의 일이 사적영역을 넘어서는 데 대한 여러 부정적 견해가 있으리라는 점을 감안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 저작의 특별함은 기존 정치학에서 많이 언급되어왔던 ‘공(公)’이 아닌, ‘공(共)’을 그 대안으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공(公)’이 목적과 가치로서의 공이라면, ‘공(共)’은 공간과 관계로서의 공이다. 저자는 특히 ‘작은 공(共)’을 강조하면서, 그것들은 하나로 보면 작지만 전체로 보면 전지구를 덮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권력과 지배를 지향하지 않고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작은 자들의 자유로운 공동체다.
이 책의 미덕 중 하나는 저자가 직접 겪은 경험들을 포함해 다양한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꼭 저자의 개념과 주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또 그것을 다 이해하지 못할지언정 제시된 여러 사례에 대해 깊게 생각해볼 기회를 갖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이 글에서는 일부러 ‘마음’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이 책의 정수인 ‘마음’을 말하면 스포일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 책이 매 장과 전체 결론에서 말하고 있는 ‘마음’에 대해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그것이 어떤 정념의 상태인지, 시민종교인지, 공동체의 윤리인지 아직은 알기 어렵지만, 그 ‘마음’에 대한 후속연구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