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경위
만해문학상 운영위원회는 2023년 6월 5일에 회의를 열고 박승민 박준 오연경(이상 시 부문) 양경언 정용준 정주아(이상 소설 부문) 및 『창작과비평』 상임편집위(기타 부문)를 예심위원으로, 공선옥 백지연 장철문 한기욱을 본심위원으로 위촉해 심사진을 구성했다.
예심위원들은 7월 19일까지 각 부문에서 그 성취가 인정되는 대상작을 선정하여 심사를 진행했다. 만해문학상 규정에 따라 등단 10년 이상 또는 그에 준하는 경력을 가진 이의 최근 2년간의 한국어로 된 문학적 업적을 대상으로 한 예심에서 시집 5종, 소설 5종, 기타 2종(총 12종)을 본심 진출작으로 선정했다.
이어서 4인의 본심위원들은 8월 8일 1차 본심을 열고 다음 5종을 최종심 대상작으로 선정했다. 손택수 시집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 정끝별 시집 『모래는 뭐래』(이상 시), 권여선 소설집 『각각의 계절』, 정지아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이상 소설), 고명섭 지음 『하이데거 극장: 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기타).
8월 31일 열린 2차 본심(최종심)에서 더 본격적인 논의가 재개되었다. 우선 심사자들은 토론 끝에 고명섭의 『하이데거 극장』(한길사 2022)을 특별상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데 합의했다. 하이데거의 삶과 사유를 풀어낸 이 책이 문학·역사·철학을 아우르는 저자의 인문학적 치열성을 통해 하이데거 사상의 깊숙한 지점까지 나아가는 동시에 장편소설을 방불케 하는 흡인력을 갖춘 뛰어난 저서라는 데 심사위원 모두 흔쾌히 동의했다.
곧바로 문학작품을 대상으로 본상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심도있는 논의를 거쳐 심사진은 정지아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창비 2022)를 본상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한반도의 어두운 현대사를 다룸에도 유머러스한 어법과 개성 넘치는 인물을 통해 웃음과 슬픔을 엮어 감동을 전하는 빼어난 작품으로, 소설적 재미와 더불어 장편소설이 역사와 성공적으로 결합한 압도적인 성취라는 데 심사위원 전원이 뜻을 같이했다.
심사평
공선옥(孔善玉) 소설가
몇년 전인지 아득할 정도로 세월이 지난 뒤 오랜만에 만해문학상 후보 작품들을 읽는 내내, 한국에 아직 문학을 하는 사람이, 그리고 시와 소설을 쓰는 사람이, 그것을 읽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새삼스레 고마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이 아무리 이렇네 저렇네 해도 아직은 살아 있고 우리 주변에서 생산되고 즐기는 한, 세상이 또한 아무리 이렇네 저렇네 해도 아직은 숨을 쉴 만하다, 하는 기분이랄까. 세상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시와 소설을 읽고 시와 소설을 애호하는 삶을 산다면 분명히 더 좋은 삶이 될 것임을 나는 믿는다.
권여선의 『각각의 계절』을 읽는 동안 나는 이 작가의 ‘우울한 정조의 매력’에 푹 빠졌다. 권여선 언어의 날카로운 칼날에 베이는 느낌에 놀라기도 했다. 특히 「사슴벌레식 문답」에서 시간 속에서 바스러지는 존재들에 대한 회한의 정조를 생생하게 구축해내는 작가의 솜씨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앞으로도 권여선 언어의 칼날이 당도할 최종의 지점은 어디가 될지, 그 깊이는 또한 얼마나 치명적이 될지 작가의 다음 행보를 가슴 두근거리며 기다리게 될 것이다.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전에는 어땠을지 모르나 후에는 없을 것이 확실한, 빨치산 아버지에게 바치는 절절한 사부곡이다. 또한 이 소설은 구례 사람 아버지와 아버지 옆엣사람들과 섬진강과 지리산과 구례 읍내에 바치는 헌사처럼도 읽혔다. 구례 사람 아니고는 결코 쓸 수 없지만 구례 사람 아니어도 다 알아먹을 수 있는 구례말로 이루어진 장엄한 소설의 산이요 소설의 강 같다. 아름답다는 말 이외에 더 무슨 말을 보태랴.
정끝별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뭔지 모를, 그러나 사실은 알기도 하는 ‘시 읽는 기쁨’을 누렸다. 언어로 들려주는 음악 같다고나 할까. 시어가 주는 천진한 감동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모래는 뭐래』에 수록된 시들을 두번째 읽기 시작할 때부터 나는 처음과는 다른 감정을 자각했다. 처음에는 통통거리는 물방울의 이미지로 다가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천진한 얼굴을 한 어린아이의 고독’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지치지도 않고 반복적으로 묻고 또 묻는 아이들처럼 정끝별은 묻고 있다. 모래는 뭐래?
특별상 후보로 추천된 고명섭의 『하이데거 극장』은 제목 그대로 하이데거의 세계를 펼쳐 보여주는 장대한 시네마스코프 같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이해하기 쉽고 유려한 필치의 철학 해설서를 본 적이 없다. 손에 들었을 때 그 두께만으로 겁나는 책이 이리도 술술 읽히는 ‘착한 마음씨’를 지녀도 되는 건가? 아, 지닐 수도 있구나! 하이데거 선생이 한국의 고명섭에게 고마워할 것만 같다.
특별상 본심 후보작에 올랐던 유형근의 『분절된 노동, 변형된 계급』을 ‘특별히’ 언급하고 싶다. 울산 대공장 노동자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 그들의 생활공간, 개인 역사까지 세밀하게 살핀 저자의 공력 덕분에 소설 쓰는 나 같은 사람들이 세상에 대한 ‘생각거리’들을 내 품 팔지 않고도 제공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런 책과 저자들이 고맙고 감격스럽다.
백지연(白智延) 문학평론가
만해문학상 특별상으로 선정한 고명섭의 『하이데거 극장』은 시대를 가로질러 현재로 육박하는 철학자의 질문을 생생하게 체감하게 하는 역작이다. 저자는 기존 연구성과들에 대한 성실한 독해를 바탕으로 한국적 현실에서 하이데거 철학의 의미를 생산적으로 읽는 고유한 해석의 맥락을 보여준다. “하이데거를 넘어서 더 멀리 나아”(1권 48면)가려는 저자의 열망은 존재와 존재자의 구별이라는 주제로 하이데거 철학이 시대와 대결하고자 했던 지점들을 강조한다. 특히 맑스와 하이데거, 니체와 하이데거를 각각 맞세우면서 근대의 시대정신과 서구철학이 부딪힌 곤경을 함께 읽어내려는 대목이 무척 흥미진진했다. 전기비평과 철학사적 해석이 행복하게 결합한 이 두터운 책은 고전의 이해를 넘어 지금 이 시대에 왜 철학이 필요한지, 나아가 참다운 비평적 사유란 어떤 것인지를 매력적인 문체로 일깨운다. 비평적 사유의 힘을 현재적으로 환기하는 뜻깊은 독서체험을 선사한 이 저서에 깊은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정끝별의 『모래는 뭐래』는 부드럽고 활달한 말놀이의 감각으로 읽는 이를 끌어당기는 시집이다. 생태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세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비인간적 존재에 대한 형상화가 흥미로웠으며, 그것을 주체의 실존적 성찰로 자연스럽게 이끄는 흐름이 탁월하였다. 「모래는 뭐래?」의 발랄한 시선과 더불어 시집 후반부의 「언니야 우리는」과 「응암동엔 엄마가 산다」에 오래 시선이 머물렀던 것도 그 때문이다. 손택수의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에는 시대에 대한 고민과 일상의 감각의 접점에서 포착된 정밀한 시어들이 놓여 있다. 「이력서에 쓴 시」가 압축해서 보여주는 담담한 정서는 「바다 무덤」처럼 고통과 애도의 정서를 촉발하는 다양한 시대적 사건으로 연결된다. 시인이 오랜 시간 단련하고 직조해온 서정적 언어는 일상과 역사가 만나는 지점을 찬찬히 살피고 사유하는 미덕을 보여준다.
두 시집의 개성과 장점을 음미하면서도 이번 심사에서는 소설들의 성취에 마음이 기울었다. 권여선의 『각각의 계절』을 읽으며 우리 시대 기억의 정치학이 도달한 소설의 심연을 만날 수 있었다. 인물들이 싸우는 과거의 기억이란 소설 속의 말처럼 “우리가 지나온 행로 속에 존재했던 불가해한 구멍, 그 뼈아픈 결락에 대한 무지와 무력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인물들은 겹쳐진 기억과 싸우는 과정에서 외면할 수 없는 삶의 결정적 순간을 만나게 된다. 다소 균열적인 이음새를 보이는 이 과정은 삶의 진실을 포착하려는 소설의 지난한 분투로 감동을 준다. 특히 ‘어디로든 들어와 어디로든 갇혀버리게 되는’ 「사슴벌레식 문답」의 주제와 상징은 망각의 흐름에 맞서는 기록으로서 진한 여운을 남겼다.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데 마음을 더한 이유는 이 작품이 보여주는 시대인식의 문제가 우리 시대 장편소설의 압도적인 성취로 와닿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의 신념으로 평생을 살아온 아버지의 험난한 생애를 압축적으로 그려내는 이 작품은 분단의 질곡이 뿌리 깊은 압력으로 여전히 존재하는 지금 이곳의 현실을 성찰적으로 조망한다. 조문객들의 회고를 통해 모자이크되는 아버지의 고단한 생애는 경직된 이념주의자의 삶이라는 편견을 벗어나 풍성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관찰자로서 딸의 목소리가 소설에서 차지하는 서술적 위치도 절묘한데, 이야기가 도착하는 현재적 시간의 고민과 성찰을 알려주는 의도적 장치로 다가온다. 그동안 우리가 잊고 있던 민중적 심성과 덕성을 소중하게 환기하는 이 소설은 기존의 소설사에 새겨져온 분단현실의 의미를 또다른 층위에서 쇄신한다. 구례 지역의 공동체와 풍습에 대한 풍부한 소설적 재현은 지역서사의 가능성과 성취를 실감하게 하는 중요한 덕목이다. 무엇보다도 사회주의자로서 아버지가 꿈꾸었던 공동의 삶에 대한 희망과 신뢰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적 시간으로 숨쉬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세계에 대한 좌표를 일러준다. 정지아 작가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장철문(張喆文) 시인
시를 읽을 때와 소설을 읽을 때는 다르다. 시는 한행 한행 울림이 있다면 재차 되짚어 읽게 되고, 그래도 남은 게 있다면 전체적으로 한두번 더 읽게 된다. 이 두세차례 읽는 것을 한번 읽은 것으로 친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쭉 따라 읽게 된다. 장편은 앞쪽과의 연결 때문에 해당 부분으로 돌아가서 확인해보는 경우도 있지만, 단편은 대개 그렇지 않다. 이것이 한번 읽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면, 마음이 가는 시는 두세번 읽게 되고, 그 시들에 표시를 남긴다. 두번 읽을 때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표시된 시들을 주로 읽으면서 그와 연관성을 가진 시들을 뒤적이게 된다. 소설은 다르다. 처음부터 끝까지 쭉 다시 읽게 된다. 소설집이라면 표시된 작품을 읽게 되지만, 그래도 그 작품들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는다.
이번에 두번 읽은 시집은 손택수의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와 정끝별의 『모래는 뭐래』였다. 나는 책에 대한 경외가 없는 탓인지 간지를 끼우지 않고 귀퉁이를 접는다. 두번째 읽을 때 울림이 전과 같지 않으면 귀퉁이를 편다. 두 시집 모두 열편 내외의 시가 마지막까지 귀퉁이가 접혀 있었다. 그중에서 시집을 다시 펼치지 않고 기억되는 시는 손택수의 경우 「바다 무덤」 「지붕 위의 바위」 「밥물 눈금」 「함평」이었다. 시적 대상에서 연상을 통해 호출되는 사물들의 상상적 연결의 장력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간난한 삶의 환기와 번짐이 손택수의 시가 가진 강점이라고 여겨졌다. 정끝별의 경우 「고양이 시간」 「이건 좀 긴 이야기」 「청파동 눈사람」 「언니야 우리는」 「응암동엔 엄마가 산다」가 시집을 덮어둔 채 기억되었다. 말놀이와, 반복과 변주를 통한 리듬의 즐거운 감각, 그 가운데 삶의 그늘이 스치는 환기력이 정끝별의 시적 책략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두번 읽은 소설은 권여선 소설집 『각각의 계절』과 정지아 장편 『아버지의 해방일지』였다. 권여선의 경우 「사슴벌레식 문답」과 「기억의 왈츠」였다. 힘겹게 건너온바, 그 삶을 이리저리 일삼아 뒤집어 돌아보는 시선이 진지했고, 대상과의 거리의 완급이랄까 긴장과 이완의 갈마듦이 밭은 심리적 고삐가 화자를 다시 다치게 하지 않을까 은근 가슴 졸이는 때도 있었다. 「사슴벌레식 문답」은 일인칭 시점이면서도 네 인물의 관계의 역학을 통해 다각적으로 조명되는 과거의 삶에 대한 집요한 되감기와 성찰의 에너지가 있었으며, 「기억의 왈츠」는 거기에, 일을 그르친 것이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뼈아픈 반성과 그를 딛고 나아가려는 기투가 더해져 있었다.
정지아의 경우 다시 읽으면서도 문장에서 잠시 눈을 떼고, 읽고 있는 나 자신을 읽게 되거나 밀려오는 울컥함을 눌러야 하는 때가 있었다. 아버지의 장례라는 무대를 통해 그 자신들 또한 독립된 무대를 마련해 부족함이 없는 인물들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섬진강 같은 서사는 가슴에 눌려 있는 것들을 건드려 터트리고 바라보게 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냉소적 거리를 갖는 화자를 통해 인물들이 겯고틀면서 합수치는 현재적 과거의 격랑은 결코 빨치산 출신 아버지를 보내는 딸의 헌사에 머물지 않았다. 특히 같은 뿌리를 두고 양 극단에 선 박선생과 아버지의 생을 건 밀당, 찔린 창날을 그대로 가슴에 간직한 채 몸부림쳐온 작은아버지의 뒤틀린 삶의 내력은 지리산 둘레에 머물지 않고, 한국현대사를 감당한 우리 주변의 인물들의 삶을 되짚어보게 하고, 읽는 주체로 하여금 거기에 얽혀서 억눌러온 것을 헤집어내 바라보게 하는 서사적 환기력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이념 이전의 사람, 혁명 이전의 삶의 의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경직된 우리 사회에 던지는 파장이 크다고 생각했다.
인문서적의 읽기는 대체로 서문과 차례, 프롤로그를 읽으면서 그 방식이 결정되지만, 고명섭의 『하이데거 극장』은 묵직한 대하소설을 읽는 것에 방불했다. 쉬이 엄두를 낼 수 없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생애와 저작을 비평적으로 차곡차곡 읽어나가는 방식, 살아 있는 삶의 철학을 해나가는 방식과 근기를 뻐근하게 보여주었다. 하이데거의 삶과 사상적 편력을 따라가면서 그와 대화하고, 그와 관련된 다른 저자들을 불러들이면서 그 대화를 입체화하고, 다시 객관화하여 하이데거의 사상을 통하여 우리의 삶과 역사와 담론을 되돌아보게 하는 사상적 서사의 과정이 묵직했다. 하이데거의 사상적 고투가 문학·예술적 고투와 멀지 않다는 점에서도 주목되었지만, 장소를 옮겨가며 겉핥기를 되풀이하는 작금의 인문학 시장에 대한 도저한 저항의 글쓰기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고 생각했다.
두분 수상자에게 축하의 말씀을 드린다.
한기욱(韓基煜) 문학평론가
최종심에 오른 5종의 작품들은 자본주의 말기 생명탈취-생태파괴의 방식과 이로 말미암은 각종 차별과 혐오에 시달리는 현재적 삶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탐구한다. 이 시대를 사는 개개인의 내부로부터 나오는 자성의 목소리와 이야기에 주목한다.
특별상 최종심에 오른 고명섭의 『하이데거 극장』은 서양 형이상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특유의 존재론과 진리관을 펼친 하이데거의 삶과 사유의 궤적을 면밀하게 추적한다. ‘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이라는 부제가 함축하듯 철학적 사유의 깊이에다 1648면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때문에 철학 전공 학술서처럼 보이지만, 하이데거가 주인공인 장편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읽히기도 한다. 자상한 설명과 품평으로 하이데거 철학의 안내서이자 평전의 역할을 훌륭히 해낸 것인데, 미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친절한 안내자이되 하이데거 ‘사유의 숲’의 깊숙한 지점까지 나아가고자 하는 연구자의 신심이 느껴지니, 문사철을 아우르는 인문학적 치열성이야말로 이 저서의 가장 주목할 성취다. 그런데 하이데거 이후에도 푸꼬, 데리다, 들뢰즈, 라뚜르 등 요즘 훨씬 많이 호명받는 서양 철학자들을 제쳐두고, 왜 하이데거를 붙잡았을까? 나는 고명섭이 이 시점에서 하필이면 하이데거를 붙잡고 치열하게 분투한 점을 높이 사고 싶고, 그 점에서 만해문학상 특별상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본상 심사에 오른 2종의 시집과 2종의 소설은 우리 시대 문학의 다양한 스펙트럼과 높은 수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손택수의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는 시인이 만난 자연과 사람과 언어에 관한 각별한 이야기를 읊조리듯 풀어놓는데, 눈썰미있고 곡진한 가락 속에 깊숙한 자기성찰이 아프게 스며든다. 여성주의·생태주의 쪽으로 나아간 정끝별의 『모래는 뭐래』는 도발적인 발상과 경쾌한 화법이 눈길을 끄는데, 개성적인 화자의 변화무쌍한 이야기에 묻어나는 사유는 자못 묵직하다. 두 시집이 우리 시대 시문학의 괄목할 성취임은 분명하나, 권여선 소설집과 정지아의 장편소설이 심사위원들의 관심과 논의를 더 끌었다. 두 소설가는 작품 성향과 스타일은 사뭇 다르지만, 2000년대 이래 한국 소설문학의 현실주의 흐름을 튼실하게 만드는 데 이바지해왔다. 권여선의 『각각의 계절』은 그 특유의 빼어난 언어감각과 시대와 관계성에 대한 통찰이 어우러져 한 개인의 삶에서 맞이하는 형언하기 힘든 진실의 순간을 날카롭게 비춘다. 「사슴벌레식 문답」과 「기억의 왈츠」는 독재정권 치하의 젊은이가 암울하고 비장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도 미래로 열린 삶을 도모하려는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하여 그 의미를 되새기는 명편이다.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사회주의자인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딸이 아버지의 새로운 면모를 재발견하는 이야기인데, 새삼 실감하는 것은 장편소설의 서사가 역사와 성공적으로 결합될 때 생겨나는 ‘막강한’ 힘이다. 단편으로는 충분히 담아낼 수 없는 역사의 영역이—국가·지역·가족 공동체 여러 세대의 역사가—소설서사를 휘감으며 독자는 상상력의 광활한 지평에 들어서게 된다. 장편서사와 역사의 결합이 이렇게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이 소설도 일인칭 화자인 딸과 아울러 빨치산 부부가 주요 인물이고 한반도 분단, 좌우파 갈등과 투쟁, 민간인 학살, 빨갱이 탄압 같은 어둡고 처참한 역사가 등장하느니만큼 진지하고 무거운 역사소설이 될 소지가 다분했었다. 하지만 작가는 화자의 유머러스한 어법과 장례식이라는 현재와 과거가 마주하는 공동체 무대를 도입함으로써 밝음과 어둠이 뒤섞이고 슬픔과 웃음이 교차하며, 그러면서도 개개인의 아픈 삶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놀라운 작품을 써냈다.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인 아버지의 이면에서 발견하는, 모든 이념보다 인간을 더 중히 여기는 휴머니즘적 면모와 아울러, 아버지의 빨치산 활동으로 치명적인 내상을 입은 작은아버지와 큰집 오빠의 이야기가 특히 울림이 크다. 장례식을 치르는 과정은 아버지와 관계한 구례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를 자연스럽게 살피는 계기가 되며, 역사를 과거지사가 아니라 미래를 도모하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이념으로 나뉜 경계를 가로지르며 ‘항꾼에’의 삶을 일궈낼 가능성으로 살려냄으로써 작품은 어느새 생동하는 현재적 서사로 탈바꿈한다. 구례 지역의 자연과 개개인의 삶의 태도가 묻어나는 ‘오죽흐먼’이나 ‘하염없다’ 같은 언어는 이런 중요한 공동체적 가능성에 필수적인 요소로서 소설적 재미를 한층 더 높인다. 만해문학상에 잘 어울리는 수작이라는 생각이다.
수상소감
아버지의 단단한 마음으로
만해 선생은 조선 말기에 태어나 조국의 패망을 목도했으며 끝내 해방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때는 동지였던 사람들이 일제의 강압을 견디다 못해, 혹은 일본의 힘에 압도당해, 혹은 일신의 안위를 위해 등을 돌릴 때 선생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해방 꼭 일년 전, 조선총독부와 마주 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성북동 집에서 숨을 거둘 때 선생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선생이 투옥과 고문과 죽음 앞에서도 끝내 버리지 못했던 꿈은 조국의 독립이요,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불교계의 혁신과 대중화였습니다.
보통 사람인 저로서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지향을 세우기도 어렵고, 살아가는 내내 그 지향을 지켜내기는 더욱 어려우며, 절망 앞에서 절망하지 않기란 꿈처럼 아득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소설을 잘 쓰기도 어려운데 잘 살아내는 일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굴곡진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존엄과 숭고를 잃지 않은 만해 선생의 이름을 딴 상을, 제가 감히 받을 자격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대로 쓰고 제대로 살라는 채찍질 같아 상을 받는 즐거움보다 부담이 더 크기도 합니다. 무엇도 자신할 수 없습니다만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기는 하겠습니다. 더디고 둔한 걸음일지라도요.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저 혼자 쓴 소설이 아닙니다. 만해 선생처럼 인간의 진보를 확신하고 절망하지 않았던 제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이 작품은 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버지는 ‘빨치산’이나 ‘빨갱이’ 이전에 사람이었고, 사람으로서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자신이 선택했던 이념의 몰락을 묵묵히 지켜보고 실패를 인정하였으되, 진보에 대한 확신만큼은 절대 거두지 않았던 아버지를 여전히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아버지의 그 단단한 마음이 제 마음 어딘가에도 유전으로, 학습으로 스며 있다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아버지, 그리고 구례와 그 인근에 사는 아버지의 사람들에게 제 분에 넘치는 수상의 영광을 돌립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구례에 사는 동안 그분들의 조건 없는 사랑이 세상의 차별 때문에 얼어붙은 제 마음을 녹여 비로소 따스한 눈으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진 것 없고 배우지 못했으나 온몸으로 생의 고통을 묵묵히 헤쳐나온 그분들 모두 제 스승이고 은인입니다.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극복한 사람의 마음은 그 누구보다 따스하고 넓고 깊다는 것도 그분들을 통해 배웠습니다. 구례에서 요즘 그런 마음을 배워가는 중입니다.
아직 살아 든든한 의지가 되어주는 어머니에게도 감사를 전합니다. 더 오래 제 곁을 지켜주시길. 때로는 쓴소리를 아끼지 않지만 누가 들출세라 못난 제 허물을 감싸주는 친구들, 선후배들, 제자들, 당신들이 있어 제 삶도 소설도 존재합니다. 만해문학상의 부담은 저 홀로, 기쁨과 영광은 저의 모든 사람과 함께하겠습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사랑해주신 독자분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鄭智我 1965년 전남 구례 출생. 1990년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을 펴내며 작품활동 시작.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소설집 『행복』 『봄빛』 『숲의 대화』 『자본주의의 적』,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등이 있음. 이효석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심훈문학대상, 5·18문학상, 요산김정한문학상, 오영수문학상, 한무숙문학상, 노근리평화문학상 등 수상.
수상소감
만해의 님, 하이데거의 존재
만해가 『님의 침묵』을 쓰던 1925년으로부터 10년 뒤 하이데거는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횔덜린론을 강의합니다. 그 강의에서 하이데거는 횔덜린의 시 「마치 축제일처럼……」에 나오는 구절에 주목합니다. 횔덜린의 시는 시인의 사명을 두고 이렇게 노래합니다. “신의 뇌우 아래, 맨머리로 서서,/아버지의 불빛을 몸소 제 손으로 잡아/그 천상의 선물을 노래로 감싸/민족에게 전해주는 것이리라.” 하이데거는 횔덜린을 시인 중의 시인이라고 부릅니다. ‘시가 무엇인가, 시인이 무엇 하는 사람인가’ 하는 물음을 시로 지었기에 시인 중의 시인이라고 합니다. 횔덜린론을 따라 말하면, 만해야말로 횔덜린이 말한 시인, 신의 뇌우를 제 손으로 잡아 민족에게 전해준 시인입니다.
만해가 말하는 ‘님의 침묵’을 하이데거의 언어로 바꾸면 ‘존재의 부재’입니다. 님의 침묵은 님의 없음입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만해의 이 구절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떠남을 가리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시구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회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부재하는 존재에 가까이 다가가 존재의 말을 듣는 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회상입니다. 님이 떠났지만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님이 부재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떠난 님, 떠난 존재는 떠난 적이 없으므로 불현듯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하여 만해는 『님의 침묵』 중 「오셔요」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오실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당신의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이 구절이야말로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와 ‘현존재’의 만남을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구절입니다. 나, 곧 현존재가 기다릴 때만 당신 곧 존재는 옵니다. 내가 기다리지 않으면 존재는 오더라도 자신이 왔음을 알릴 길이 없습니다.
집합적 실존으로서 ‘우리’에게 존재는 역사로 나타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함석헌이 소리 높여 부른 ‘역사의 뜻’으로 나타납니다. 역사를 볼 때 우리는 뜻으로 봅니다. 뜻은 생각이고 의미이고 의지입니다. 역사의 뜻은 우리가 의지를 품고 찾으려 할 때만 드러납니다. 그럴 때 깨뜨려야 할 것, 지켜야 할 것, 세워야 할 것이 제 모습대로 떠오릅니다. 역사의 뜻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입니다. 역사 속에 머무르고 역사를 이끌어가고 역사의 배후로 자신을 감추는 존재입니다. 그, 존재는 역사를 이루는 사람들, 역사를 지어나가는 집합적 현존재와 함께 그 현존재의 염원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기다려야만, 다시 말해 간절히 염원해야만 님은 오십니다.
지금은 어처구니없는 반동의 시대입니다. 반동은 저 촛불의 함성, 님을 그리워하는 저 촛불들의 함성이 일으킨 거대한 물결의 반동입니다. 반동의 물결이 들이칠 때 님은 떠나고 뜻은 사라지고 존재는 자취를 감추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므로 뜻은 살아나고 존재는 돌아올 것입니다. 만해의 이름을 딴 문학상에 제 책이 한자리를 얻은 것은 볼품없는 노고에 견주어 큰 영광입니다. 님을 향해, 뜻을 향해, 존재를 향해 제 마음과 생각을 더 벼리라는 뜻으로 새기겠습니다.
高明燮 언론인. 한겨레신문 선임기자로 재직 중. 저서 『황혼녘 햇살에 빛나는 구렁이 알을 삼키다』 『지식의 발견』 『담론의 발견』 『광기와 천재』 『즐거운 지식』 『니체 극장』 『이희호 평전』 『숲의 상형문자』 『하이데거 극장』 『생각의 요새』 『만남의 철학』(공저)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