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이하윤 李霞玧
2004년 서울 출생. 2023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hayun0124@naver.com
개조
아무도 살지 않았다
그 말을 듣자마자 여기에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옥상에는 난간이 없고 바닥이 없고 우리를 위한 천장이 없고
비상계단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네가 나온다 아무리 덧칠해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살피며 빛은 물감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색을 가졌다고 말한다
마침 새가 날아간다 잠시 드리웠다가 숨어드는 그림자 그건 가장 현실 같다 우리가 그 새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나는 페인트를 마저 칠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정말 빛의 색일지 의심하는 순간에도 좁고 기다란 틈이 반복적으로 페인트를 뱉어낸다
없었던 것이 되지 않고
아주 높은 곳에서 옥상을 내려다보면 온갖 식물들이 우거진 것처럼 아름다워 보인대 정작 화분을 가꾸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겹겹이 태어나는 벽과 바닥을 거스르고 싶다 이 집이 완전히 새것처럼 된다면 새는 지저귀는 일을 멈출 것이고 우리는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깨어날 일도 없겠지
두 발로는 갈 수 없는 곳의 이름을 읊조리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지? 그곳에, 사실과 사실처럼 여겨지는 것들 사이로 한뼘만큼의 숨이 지나간다
구석에 묶여 있던 빛이 흩어진다 몸을 환하게 훑고 간다 이전의 상태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지나와버린 거야 우린 이렇게 잠시 지워져도 좋겠지 함께 닳아가도
우리가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서 눈을 감는다
법칙처럼
꿈을 꾼다
말 없는 아이들이 가득 뛰어다녀서 페인트 자국이 오래 마르지 않는 꿈 그들의 걸음을 쫓고 방향을 잃고 옥상에 잠겨버리는 그런 꿈
이곳에서 가장 높은 것이 우리뿐이어서 아무리 위를 올려다보아도 가리킬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멀리서 새소리가 들려온다
어떤 지저귐은 너무도 사람의 목소리 같아서 그것이 새의 것인 줄 알면서도 자꾸만 뒤돌아보게 된다
그들이 우리에게 남겨두고 간 것이다
기울면서 열리는
넘어지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지나가던 사람의 팔을 붙잡았다
문이 없어도 갈 수 있다고 믿었지
뒷모습이 가까워질수록 그랬다
눈을 감게 되니까 너머의 품을 믿고 싶어지니까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아주 작은 구멍으로 통하는 세계를
꼭 본 것 같았거든
정말 봤어?
언덕을 내려가던 사람들이 동시에 멈춘다
기억해야지
모르는 사람의 발목 매만지지 않기
어긋나는 체온에 놀라지 않기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책임은 옮기어진다는 걸
그러나 언덕 위에서는 누구도 꼿꼿한 허리를 가질 수 없고
이렇게 자꾸만 기울어진다면
당장이라도 앞사람의 등허리를 감쌀 것처럼
커다란 원을 이룬다면……
구르지 않을 거야 똑바로 서지 않을 거야 안을 수 있는 것들은 전부 안아볼 거야
도무지 아래로 꺼지지 않는 언덕을 디디면서도
낮은 지나가고 있다
사람들이 각자의 발등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기도의 모양 같아
모두 같은 걸 빌고 있을 것 같아
속으로 무서워하면서
우리는 점점 세계의 끝에 다가서고 있는 것 같다는
직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나는 이렇게나 많은 경사들이
곳곳에서 유지되는 풍경이 이상하고
그럼에도 모두가
한번도 반대편에 도착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
작게 속삭일 수 있는 목소리를 가졌다고 생각하니
어떤 적의에도 아파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