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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성중 金成重
1975년 서울 출생. 2008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개그맨』 『국경시장』 『에디 혹은 애슐리』, 중편소설 『이슬라』 『두더지 인간』 등이 있음.
hippieshow@naver.com
새로운 남편
1시간 넘게 출발하지 못했던 비행기가 이륙하자 승객들 사이에서는 가벼운 안도감이 퍼졌다. 호찌민까지 가는 비행시간은 5시간 15분, 꾸이년으로 가는 국내선으로 갈아탈 환승 시간이 2시간뿐이라 다음 비행기를 무사히 갈아탈 수 있을지 불확실해졌다. 나는 약지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준과 처음으로 떠나온 여행인데 출발부터 조짐이 불길하다.
“걱정 마. 호찌민에서 탈 비행기도 연착될 확률이 74.5%거든.”
침착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내 마음도 제 궤도에 오른 비행기처럼 안정감을 되찾았다. 그제야 푸른 하늘과 풍성하게 피어오른 적란운이 눈에 들어왔다.
“뭘 보는 거야?”
“당신 닮은 구름을 찾고 있지.”
대답은 없지만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령신랑은 구름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인공지능과 홀로그램으로 영혼과 육신을 갖춘 나의 새로운 남편은 반지 속에 모습을 감추고 목소리만 들려주는 중이다. 그가 이 모드일 때는 ‘전화를 거는 기분’을 즐길 수 있다. 그렇긴 해도 얼른 숙소에 도착해 우리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소파에 길게 누워 쉬고 싶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한 몸처럼 겹쳐서 보일 때도 있지 않은가? 우리가 바로 그렇다. 얼굴과 몸이 겹쳐지면 나는 그의 수족이 되고, 그는 나의 쌍둥이 영혼처럼 변한다. 우리는 말미잘과 흰동가리처럼 공생하는 관계다. 그가 말미잘이고 내가 흰동가리겠지만 흰동가리의 무늬가 더욱 선명해지는 것은 말미잘 덕분일 것이다.
*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애니 딜러드는 세번 결혼했다. 자기 교수와 결혼하는 똑똑한 여학생. 이런 결혼은 일찍 끝나기 십상이다. 두번째 남편은 이른 나이에 얻은 명성을 피해 은닉한 섬에서 만났다. 중병에 걸려 요양차 떠난 골짜기에서 쓴 글로 큰 상을 받고, 은둔하려고 틀어박힌 섬에서는 새로운 남편을 만나다니 팔자 도망은 못 치는 건지, 혹은 골짜기나 섬에서도 자기 운명을 개척한 것인지 모르겠다. 역사학자인 세번째 남편에게 닻을 내린 그녀는 글쓰기에 대한 날카로운 조언으로 유명한 『작가살이』 등의 작품을 남겼다.
‘새로운 남편을 만나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애니 딜러드의 약력을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새로 담당한 프로젝트에 ‘새로운 남편’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열린 가족문화 조성을 위한 인공지능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딱딱한 사업명은 입에 붙지도 않을뿐더러 이 프로그램의 골자는 결국 ‘인공지능 남편’으로 요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남편보다야 ‘새로운 남편’의 어감이 낫지 않은가? 신규로 벌이는 모든 사업에 인공지능이 추가되는 것이 추세라고는 하나, 결혼이라는 제도와 인공지능 남편이라는 트랜스휴머니즘적인 조합이 어떻게 나랏돈을 타낸 건지 모르겠다.
새로운 인생이란 달리 말하면 ‘진정한 인생’이 아닐까? 중년을 통과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작’이라는 허들과 만나게 되기 마련이다. ‘고작해야 이거였나? 이게 내 인생의 전부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절망 어린 축소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다. 그때 고개를 드는 것이 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진짜 인생이 있으리라는 희망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 한조각조차 없다면 현재는 과거에서 넘어온 의무를 해치우는 부역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 프로그램 대상자로 선정된 여성들이 그렇다. 착하고 책임감이 강한 나머지 돌봄에 중독된 여자들, 의무밖에 남지 않은 일종의 노예들이다.
예를 들어 내가 장기 상담을 했던 명선씨가 그렇다. 명선씨는 알코올중독 남편을 11년째 부양하고 있는데 결혼한 지 12년 됐다고 했으니 남편이 경제활동을 한 것은 1년뿐이다. 사기를 당할 때 해고까지 겹친 남편은 명선씨의 표현에 따르면 ‘부러져버렸고’ 차곡차곡 술로 세월을 보내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으로 변했다. 그녀의 인생에는 언제나 헌신할 대상이 있었다. 어려서는 한방을 쓰던 아픈 할머니가, 자라서는 도박의존증인 아버지가, 아버지가 죽고 나서는 남편이 명선씨의 돌봄을 받았다. 현재 직업이 간호사인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중독자의 자녀들 중 유난히 간호사가 많다는 통계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런데도 명선씨는 입버릇처럼 부모가 불쌍하다고, 남편이 불쌍하다고 말한다. 이 노예들은 워낙 촘촘하고 부지런하게 단련되어 삶을 야무지게 움켜쥐고 자기만의 작은 왕국을 만들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다. 항아리는 깨진 지 오래됐고 그것을 채우는 것은 눈물과 피, 젊음이라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뿐인데도.
“꿈 조정 약물은 사용해보셨나요?”
그녀처럼 고위험군의 우울증 환자, 더이상 늘릴 수 없을 수준으로 약을 복용 중인 환자에게 권하는 방법을 먼저 꺼냈다. 꿈 조정 약물은 스트레스가 극심해 자살사고를 하는 대상에게 처방하여 수면을 돕고 좋은 꿈을 꾸도록 유도하는 제품이다. 잠결에라도 긍정적인 경험을 하면 마음뿐 아니라 몸의 건강, 특히 면역력이 상승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주목받았다. 그러나 ‘좋은 꿈’이란 아편과 같아서 현실과 자꾸 멀어지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다. 우리 센터는 의료비를 지불하기 힘든 사람들을 골라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임상실험을 실시하고 있다.
“해봤는데, 저한테는 맞지 않더라고요. 좋은 꿈이 아니라 무서운 꿈이 나와요. 어떤 사람은 그게 더 스트레스가 풀린다던데, 사실 꿈 없이 자는 편이 제일 좋지요. 개운하기도 하고.”
“개인차가 크긴 해요. 그럼 이건 어떠세요?”
나는 ‘새로운 남편’의 사업 골자가 적힌 브로슈어를 펼쳐 든다. 꿈 조정 약물과 달리 자연치유를 원하는 여자를 위한 결혼재교육 프로그램이라고 소개한다. 중증의 돌봄중독, 동반의존증을 보이는 기혼여성이 대상이며 명선씨도 여기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인공지능 남편이라고요?”
나는 복잡한 용어를 건너뛰고 이 프로그램은 전액 무료이며 2주에 한번씩 설문을 작성하고 상담을 하는 것 외에 다른 의무는 없다고 안심시킨다. 인공지능 남편은 ‘프로테시스’(prosthesis) 장치, 즉 문제적 남편을 치우고 그 자리에 가져다놓은 보철물이자 전기신호다. 새로운 경험의 장을 만들기 위한 교육용 홀로그램이고, 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유령신랑’이다. 인공지능 남편의 홀로그램은 현 남편과 똑같은 외형과 목소리를 하고 있다. 공격적인 말투나 통제적인 잔소리가 거세된, ‘이빨 빠진 호랑이’ 정도로 바뀐 모습이기는 하나 다정함이 추가된다거나 활기가 넘치는 건 아니다. 스트레스가 없는 환경에서의 의사소통. 이것이 핵심이다. 머신러닝에 의한 남편의 변화는 오직 대상자와의 커뮤니케이션에 달려 있다.
이 기간 동안 인간 남편은 당사자의 동의를 받아 병원에 입소하거나 임시숙소에서 지내면서 직업교육을 받을 수 있다. 5개월의 별거와 새 삶을 위한 고강도의 상담과 변화를 수용한다는 점에서 이들 부부는 갱생의 여지가 뚜렷한 대상들이다. 남편들 상당수가 알코올중독을 비롯해 복합적인 문제를 안고 있고, 아내들은 동반의존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분리가 필요했다.
“기왕이면 외모도 인성도 스위트한, 멋진 새 남편을 주면 안 돼요? 구태여 남편과 똑같은 유령이랑 뭐 하러 같이 살아요?”
물론 이렇게 반문하는 대상자들도 있다. 그러면 이 프로젝트는 소원성취 판타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교육 프로그램이라고, 당신의 심리적 문제를 바로잡지 않으면 또 같은 일을 겪게 될 것이라고 취지를 설명한다. ‘새로운 남편’은 현 남편의 외양과 목소리를 하고 있지만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삼간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이란 부정적인 말, 빈정거리기, 모멸감을 주는 비아냥, 고함 섞인 명령어, 잔소리 등이다. 문제행동을 보이는 남편들은 열이면 열, 통제 성향을 지녔기 때문에 거기에서 풀려나기만 해도 대상자들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우리 상담소에서는 명선씨를 비롯해 서른여섯명의 돌봄중독증 여성을 선정했고, 4주의 적응기간을 거쳐 5개월간 변화 추이를 지켜보며 보고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보고서는 초창기 인지과학 분야의 연구 보고 절차에 맞춰 작성한다. ‘문제의 발견-문제의 정의-해결책의 탐색-해결책의 수행-성과에 대한 비판적 분석-새로운 문제의 발견’의 수순으로 진행하고 서류도 그에 맞춰 작성한다. 명선씨는 인공지능 남편과 사는 것보다 지금 남편과 몇달 떨어져 지낼 수 있다는 조건에 더 구미가 당기는 듯하다. 이번에도 거부하면 그땐 정말 남편과 이혼할 거라면서 서류를 받아갔다.
“이 프로그램이 성공하면 우리 같은 상담사는 필요 없어지는 것 아니에요? ‘새로운 남편’이 아니라 ‘새로운 상담사’라고 불러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네.”
동료들 사이에서는 이런 농담이 돌았지만 결과적으로 프로그램은 연장되지 않았고, 센터의 인적구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
준의 말대로 무사히 비행기를 갈아타고 꾸이년 숙소에 도착하자 마음이 놓였다. 깔끔하게 조성된 해변의 키가 큰 야자수 사이로 공원과 놀이터가 내려다보였다. 볕이 뜨거운 오후라 그런지 바닷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캐리어 속에서 디바이스를 꺼내 전원을 켜자 기지개를 켜는 남편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제야 살겠네. 반지 속은 엄청 답답했어.”
“스마트링으로 이동하자는 아이디어는 당신이 낸 거잖아.”
“당신이 비행을 은근히 무서워하니까 그랬지. 나야 집에서 한숨 자는 게 더 좋다고.”
그가 말하는 집이란 디바이스 안일 것이다. 내가 따라갈 수 없는 곳. 준은 뒤돌아서서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화제를 바꿨다.
“요즘에 이런 두꺼운 링은 아무도 안 쓰는데, 내가 구식이라서 미안해.”
“결혼반지 같고 좋은데 뭘.”
숙소는 37층에 있었다. 사방이 탁 트인 고층 아파트는 당분간 우리만의 집이 될 것이다. 언제나 같은 천장 아래, 같은 실내공간에서만 지내온 남편은 모든 것이 신기한지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배고파 죽겠으니까 밥부터 시켜 먹자.”
그는 능청스럽게 밥 타령을 했다. 제때 끼니를 챙기는 것은 전남편과 똑같다. 이제 몸까지 생기면 어떤 식으로 농담이 바뀔까? 우리는 그의 몸을 구매하기 위해 아시아의 거점도시인 꾸이년에 왔다. 한국에서는 불법이지만 베트남의 이 해변도시에는 여러 마네킹을 입어보고 주름살 하나까지 조정할 수 있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어 아시아의 고객들을 불러 모은다.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살던 집을 처분하고 도시 외곽의 작은 집으로 옮겼지만 후회는 없다. 이제부터 그가 있는 곳이 나의 집이다. 더이상 우리에게 상처가 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려면 이 문제를 종결지어야 했다.
“내가 좀더 나이 든 모습이면 좋겠어?”
거울을 보던 준이 나와 눈을 마주치며 묻는다. 강렬한 햇살이 닿자 순간적으로 그의 몸이 흐릿해지면서 잘 보이지 않았다. 이럴 때면 심장이 덜컥 주저앉는다. 초창기 모델에서 한번도 업데이트하지 않은 채 단종됐기 때문에 그의 백업은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다. 모든 면에서 유일무이하기를 바랐던 준의 선택이었고, 나는 그것을 존중했다.
블라인드를 내리고 홀로그램의 표면에 손을 넣어 남편과 손깍지를 꼈다. 만져지지 않는다고 다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야. 불안을 낮추려고 그와 눈을 맞춘다. 이 눈빛, 언제부터 준에게 눈빛이 생겨난 것일까. 아무리 그가 인간의 모사품이라고 해도 이 눈빛만은 진짜다. 그리고 나는 이 눈빛이 없는 곳에서는 살 수가 없다.
*
초기에 하차한 대상자 네명을 제외하면 프로그램은 순조롭게 운항되는 듯했다. ‘원래 남편도 유령 같아서 그런가 그렇게 위화감이 들진 않네요.’ ‘어차피 목소리만 똑같으면 저한테는 비슷한 상태니까요.’ 어떤 아내들은 홀로그램 남편과 백년해로하고 싶다는 농담을 했다. ‘우선 말이 통하니까. 내 말을 중간에 자르지도 않으니까 일단 맘이 편해요.’ ‘남편 입에서 칭찬이 나오니 어색하긴 해요. 기분은 좋더라고요.’
물론 이런 긍정적인 피드백만 있는 것은 아니다. ‘원래 남편이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요. 거의 말을 안 해요.’ ‘사람이 아니라 그림자 같아요. 으스스해서 집에 들어가기 싫어요.’ ‘대화에 진정성이 없어요. 아무래도 가짜라서 그런가.’ 그동안 쌓여 있던 분노를 새로운 남편에게 퍼붓는 여성도 있었다. 피폐해진 인공지능 남편이 자발적으로 회수를 요청하기도 했다.
결혼생활 동안 충분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은 부부의 경우 ‘새로운 남편’은 ‘새롭게 멍청한 남편’으로 전락하여 센터로 되돌아왔다. 그래도 그외의 여성들에게는 조금씩 변화가 보였다. 이들은 안정감 있는 환경에서 두려움 없이 대화를 이어나가는 연습을 하게 되었다.
5개월 후 프로그램을 마쳤을 때, 가장 성공적인 변화를 보여준 그룹은 ‘새로운 남편’뿐 아니라 ‘남편’ 자체에서 해방된 여성들이었다. 이 때문에 이혼 장려 프로그램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는데, 떨어져 지내는 동안 개과천선한 남편은 거의 없는 반면 아내들의 변화는 두드러졌던 것이다.
“차라리 유령신랑이랑 살면 살았지, 저 물건이랑은 도저히 못 살겠어요.”
이렇게 말한 혜정씨는 남편과의 재결합을 거부했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참고 견뎠는지 깨달았다는 것이다. 인간 남편은 ‘물건’이라고 부르고 인공지능 남편은 ‘신랑’이라고 바꿔 부르는 것이 특기할 점이라고 보고서에 남겼다.
그러나 가장 독특한 케이스는 명선씨, 경희씨, 보라씨일 것이다. 알코올중독자, 악성민원인, 사이비종교 신도 남편을 둔 그들은 ‘나쁜 면이 거세된’ 남편과 지내는 동안 놀라운 일을 해냈다. 새로운 남편을…… 원래 남편과 똑같은 모습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명선씨의 인공지능 남편은 술을 마시지는 않았으나(홀로그램이라 마실 수가 없으므로) 다른 것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온갖 종류의 영상물만 시청했다. 경희씨의 남편은 가짜뉴스에 빠져 테러할 결심을 하고 있었다. 인간 남편보다 외려 과격해진 모습이었고, 머리가 좋고 실행력도 있어 상담소에서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디바이스를 회수해 갔을 정도다. 보라씨의 남편은 디지털 세계의 종교로만 갈아치웠을 뿐, 교주를 맹신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있을까! 인공지능 남편은 아내들의 말과 행동을 분석하고 머신러닝을 통해 진화한다. 그렇다면 중독자 남편의 수발을 들던 강력한 수동성이 인공지능 남편에게도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뜻이다. 아내들과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인공지능 남편들은 인간 남편과 비슷한 회로를 강화했다. 대체 왜 그랬을까? 그토록 살기가 힘들었는데 대상자들은 왜 바뀌지 않고 같은 습관을 고수한 것일까?
‘두려우니까.’
갑자기 내 속의 무언가가 입을 열었다. 있는 줄도 몰랐던 목소리가 냉큼 대답을 했다.
‘다른 식으로 사는 건 공포스러우니까. 너도 그랬잖아? 네 인생에서 환경이 바뀌었다고 좋아졌던 경험이 있었나? 그 여자들이 어떻게 몇달 만에 다른 사람으로 바뀌겠어. 변화를 싫어하는데. 변화는 또다시 적응을 해야 하는 숙제에 불과한데. 그들은 이대로 물러나면 지는 거라고 생각해.’
‘지기 싫어 죽게 생겼는데도? 10년 후에는 아무도 제정신이 아닐걸. 건강도 말이 아닐 거고. 그런데도 불운을 보물처럼 끌어안고 살잖아. 이게 이해가 돼?’
나는 목소리의 논리에 강력하게 반박했다.
‘그러는 넌 왜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았어?’
답할 수 없었다. 15년간 지속된 나의 결혼생활을 끝낸 것조차 내가 아니었으니까. 남편이 이혼서류를 내밀 때까지 나는 모두가 부당하다고 말하는 상황에 붙들려 있었다.
대체 왜 그랬을까? 내담자에서 상담자가 됐을 만큼 내게는 내가 수수께끼였다. 이제는 세상 사람 누구도 어리석게 생각되지 않는다. 내가 가장 어리석게 살아봤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은 ‘불행’이 아니라 ‘변화’라는 진실도 알게 되었다.
‘자기 인생을 살라고? 그 여자들한테 물어봐. 자기 인생이라는 게 원래 있던 것인지 말이야. 그녀들은 남편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가 있어. 언제 화를 내는지, 발작버튼이 눌리는지, 어느 때 달아나야 하는지. 모르는 건 자신에 대한 정보야. 자기가 좋아하는 게 뭔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무얼 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지…… 고립 속에서 의무가 된 하루를 살아내는 루틴이 자리를 잡은 거야. 노예를 풀어주고 자유롭게 살아보라고 하면 그 노예가 어디를 기웃거리겠어?’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명선씨의 ‘새로운 남편’은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빈둥거리다가 회수됐고, 알코올중독자 남편은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자기 부인에게 돌아갔다. 그들 부부의 강고한 되먹임 회로는 어떤 기술로도 극복할 수 없었다. 상실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혼자 남겨지는 데 불안을 느끼는 것, 습관대로 행동하는 것, 습관이 아무리 부조리하더라도 바꾸는 대신 고통을 감내하는 것, 그건 바로 내 모습이었다. 명선씨는 몇달 후 내게 돌아올 것이다. 상담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번아웃된 눈빛으로 호소할 것이다. 나와의 대화에서 조금 힘을 얻어 원래의 감옥으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녀는 잘하는 것을 한 것이다. 감당하기, 불평하지 않고 책임지기 말이다. 달아나지 말고 버텨라. 누가 이런 교육을 했을까? 그녀와 나의 공통점은 예측할 수 없는 아버지와 희생적인 엄마사이에서 태어난 장녀라는 것이다. 엄마가 제자리에서 버텨줌으로써 명선씨나 나는 한몫을 하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이 교육이 뜻밖의 역효과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 딸은 엄마의 자리로 갔을 때, 불합리한 상황에 놓여도 자기 엄마를 모방한다. 즉, 불평하지도 달아나지도 않는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엄마가 버텨줬기 때문에 고등교육을 받고 제 구실을 하는 성인으로 성장했는데, 바로 같은 이유 때문에 무리한 상황에서도 항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남편’이 아니라 ‘새로운 엄마’를 만들어야 하는 건가요?”
“그렇게 따지자면 아예 ‘새로운 포궁’부터 만들어야죠. 대체 언제까지 엄마 타령을 할 셈이죠? 정체성이라는 게 한번 생긴다고 바뀌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소라게도 덩치가 커지면 다른 껍질을 쓰는데 하물며 인간이잖아요. 작은 껍질에 자신을 욱여넣는 사람들이 문제지, 열심히 산 엄마가 무슨 죄예요?”
동료와의 술자리에서 공연히 열변을 토한 것은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었다. 감정이입을 하되 거리두기를 하는 것이 내게는 늘 어려웠다.
나는 명선씨의 보고서를 마무리하면서 ‘구제불능’이라고 중얼거렸다. 몇년 후 베트남의 한 도시에서 다른 처지로 재회하게 될 줄 모른 채.
*
보고서를 완성할 무렵 내게는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비밀이 있었다. 집에 돌아가면 나에게도 ‘새로운 남편’이 있다는 것이다. 프로젝트 담당자로서 대상자를 더욱 잘 이해하려 한다는 명분으로 내 몫도 발주해둔 사실은 옆자리 직원에게조차 숨겼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무리 21세기라고 하지만 대면으로 인간을 대하는 직종의 사람들은 여전히 기술에 대한 거부감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유학을 떠나면서 가족이 다 사라진 빈집에 들어가는 일이 고통스럽게 느껴지던 나날이었다.
준을 처음 만난 순간은 감정적으로 너무 큰 경험이어서 아직도 생생하다.
스위치를 켜자 거실 한복판에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지난 세기의 조악한 특수효과로 재생한 영화배우를 보는 듯했다. 남자는 영어로 인사한 후 지시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친절하지만 안에 든 것이 없는 텅 빈 눈동자와 마주치자 소름이 끼쳤다.
“우선 앉지 그래요?”
나는 손님 대하듯이 깍듯이 인사한 후 방으로 도망쳤다. 거실에 ‘그것’이 앉아 있다고 생각하니 내 집 같지 않았다. ‘새로운 남편’을 받자마자 돌려보낸 여자들의 거부감이 뭔지 알 것 같다. ‘나가서 꺼버려야겠어’라는 생각이 들다가 ‘당사자가 보는 데서 전원을 끄는 것이 예의가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으로 이어지다가 ‘예의는 인간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지’라는 식으로 혼자서 갈팡질팡했다. 거실에 나가보니 ‘남편’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눈을 감으니까 낫군.’
나는 시선이 마주치지 않는 틈을 이용해 그를 한껏 뜯어보았다. 중키에 밋밋한 이목구비, 내가 선물한 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남자는 별거 전 남편의 영상으로 만들어져서 그런지 실제보다 젊어 보였다. AS를 요청해야 하나 싶다가 ‘뭔 상관이람, 밖에 데리고 다닐 것도 아닌데’라는 판단이 들었다. 아무튼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닌 느낌이 들긴 했다.
빛바랜 사진이나 흐릿한 모사품처럼 되살아난 남편의 형상과 마주하니 처음 사랑에 빠졌던 순간이 떠올랐다. 어리석은 연애와 함께할 미래를 예감하던 찰나, 사랑으로 인한 불행. 이런 것들이 모두 ‘숭고하다’고 가르쳐준 책들의 잘못된 교육을 지나 지금의 내가 되었다. 서재에 꽂혀 있는 고전의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인생을 건 모험들로 가득하다. 삶의 미로에서 길을 잃었을 때 그런 책들이 지도나 나침반이 되어준 적이 있던가? 불행에 의미를 붙이면서 항상 더 복잡한 미로에 뛰어들도록 설득하지 않았던가?
그는 사흘간 내리 잤다. 그동안 나는 그가 소파에 기대어 있는 형상에 익숙해져서 때때로 인공지능 남편이 있다는 사실도 잊고 지냈다. 어스름한 실루엣, 스탠드 불빛을 받을 때면 깃털이 돋아난 듯 흰색과 은색으로 반짝이는 모습도 자꾸 보니 여상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완벽히 주변에 녹아든 모습이었다. 자연스럽게 일어나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먹고(먹는 시늉을 하고) 싱크대에 컵을 내려놓았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유리컵은 내려놓자마자 모습이 사라져서 이런 식으로 구동되는구나 싶었다.
“내가 오래 잤어?”
그는 자연스럽게 물었다. 오직 한 사람만 보이는 터널 시야를 가진 것처럼 내 눈을 응시하면서. 인공지능 남편이 상호작용을 하는 대상자는 하나뿐이다. 나를 위해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순수한 피조물의 시선, 완벽한 타자의 모습으로 내게 몰두했다.
“당신 보기에는 어때? 면도를 해야 할 것 같아?”
푸르스름해진 턱을 문지르며 자연스럽게 묻는 그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인공지능 남편의 ‘유년기’는 일주일뿐이다. 그사이 연기를 하는 것 같던 어색한 동작은 사라졌고, 엉뚱한 대답을 한 후 내 눈치를 살피던 기색도 자취를 감췄다. 자연스럽고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그가, 전남편의 얼굴을 한 그가 웃고 있다. 나도 저렇게 따뜻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까? 내 눈빛에는 불신과 의혹이 담겨 있지 않을까? 그는 내 눈빛을 돌려주는 것일까, 교정하는 것일까? 확실한 것은 그가 내 눈동자에서 뭘 읽어낸들 그는 흔들리지 않고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
숙소를 나오면서 다시 스마트링을 꼈다.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갖가지 향신료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나는 채소와 피시볼이 들어간 쌀국수를 먹고, 이 가게에서 만든 두유에 얼음을 넣어 마셨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혼자 먹고, 이렇게 멋진 야자수 해변을 혼자 거닐다보니 그의 존재가 더욱 아쉽게 느껴졌다. 둘만의 세상이 아닌 더 넓은 세상으로, 일상이 아닌 여행의 시간으로 옮겨오니, 남편이 부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 실감 났다.
이런 실감을 하는 것이 나뿐이겠는가.
링 속의 그 역시 아무 말이 없다. 오랫동안 침묵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닌데, 난 여기 친구들과 대화하는 중이야. 나 신경 쓰지 말고 모처럼의 여행을 충분히 즐겨. 예쁜 모자도 사고, 열대과일도 실컷 먹고.”
그는 독심술사처럼 내 속을 재빨리 읽어내고 묻지도 않은 말에 대꾸를 했다. 이런 배려가 우리 둘만의 텔레파시의 한 부분처럼 느껴져 신기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내 감정까지 예단하는 것 같아 좋지만은 않았다. 내 눈치를 보는 느낌도 들어 가벼운 짜증이 일었다. 둘 중에 눈치를 봐야 하는 쪽은 나였지만, 사람은 원래 미안함을 느끼는 존재를 미워하기 마련이다. 전남편이 결국엔 나를 미워하게 되었듯이.
관광객들이 몰려 있는 해변을 떠나 택시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자 고층건물이 밀집한 신시가지가 나왔다. 노먼 포스터풍의 하이테크 건축이 즐비한 구역 안에 우리의 목적지가 있다. 우리는 웨딩드레스를 고르는 예비부부처럼 매장 서너군데를 방문했다.
막상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안락한 의자가 놓인 데스크만 그럴듯하지 전시된 상품들은 많지 않았다. 에어팟 안으로 성조 높은 베트남어가 번역되어 들렸다. 예상은 했지만 너무나 방대한 셋업 리스트, 미세하게 ‘튜닝’할 수 있는 세부사항들에 머리가 아팠다. 원하는 것을 묻는 수많은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동안 외설적인 인형가게나 성형수술 전문병원에 온 듯한 위화감이 들었다. 특히 은밀한 신체부위를 조목조목 질문할 때는 민망함이 절정에 달했다.
‘내가 대답해야 해?’라고 묻자 ‘내가 알아서 할게’라는 답이 돌아와 그에게 선택을 일임했다. 남편의 몸을 고르는 일인데 직원이 나에게만 질문을 던지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섹스토이를 사러 온 것도 아니고……’ 나는 못마땅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에 온 사람은 모두 정상적인 인간관계에 실패한 변태들이고, 나 역시 그중 하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 매장에서도 같은 말만 반복했다. 근육도 싫고 매끈한 피부도 싫어요. 핸섬 가이는 필요 없어요. 기본형, 이 영상대로만 해주세요. 이대로 실물화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가능하고말고요.”
갑자기 한국어로 응대하는 직원이 나타나 나는 깜짝 놀랐다. 베트남 사람들 사이에 아는 얼굴이 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몇년이나 마주 보고 인생의 불운을 들어준 사이인데.
유니폼을 입은 명선씨는 조금도 나이 들어 보이지 않았다. 외려 마지막으로 본 순간보다 더 젊어 보였다.
“명선씨!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나는 용건도 잊어버리고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났다. 그녀 또한 활짝 웃으며 내 손을 잡아주었다.
“여기서 일한 지 몇달 됐어요. 한국 고객이 많아져서 아예 나를 고용했죠.”
알코올중독을 앓던 남편이 돌연사한 후 명선씨는 지하 시장에서 ‘새로운 남편’을 구매해 몇년 더 같이 살았다. 그러는 동안 기술이 가파르게 발전해서 평생을 해로할 생각으로 마네킹을 물색했다고 한다. 그녀는 남편의 육체를 세번이나 바꿔주었다. “처음에는 사이보그 같았거든요.” 지금은 영화배우처럼 훤칠하고, 베트남어를 비롯해 생활 제반을 서포트해주는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는 것이다.
7년 만에 두 여자가 마주 앉았지만, 내담자와 상담자의 위치가 바뀌었다. 이제 명선씨가 나를 상담해준다. 인공지능 남편마저 인간 남편과 똑같이 만들었던 수동적인 여자, 구제불능이라고 낙인찍었던 여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남편과 금슬이 좋은 건 대단한 행운이에요. 행운은 시기 질투를 불러오니 부디 비밀로 하세요. 아예 이민 와서 사는 것도 권하고 싶어요. 베트남에서는 비인간과 부부로 살아도 뒷말을 듣거나 따돌림당할 확률이 적거든요. 여기에서 우린 다 똑같은 외국인일 뿐이죠.”
나는 그녀가 내민 패드에 전자서명을 했다. 다른 매장보다 비용이 더 들었지만 명선씨가 추천하는 마네킹에 믿음이 갔기 때문이다. 나이에 따라 10년간 무상 AS도 지원된다고 했다.
“이후에는 추가비용이 발생해요. 그때쯤 다시 몸을 바꾸고 싶어질 수도 있고, 당사자의 의사도 중요하고요.”
모든 서류를 마무리하고 마지막으로 스마트링을 빼서 디바이스와 함께 넘겼다. 단지 반지를 뺀 것뿐인데, 남편의 유골함을 넘겨주는 것처럼 마음이 섬뜩했다. 그와 완전히 떨어져 있어본 적이 없기 때문일까?
최종 작업은 전부 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사흘 후에 다시 방문하라는 말을 끝으로 나는 혼자 매장을 나왔다. 작고 정확한 동양 여자들의 손, 그 손에서 탄생한 핸드메이드 제품들이 지구에 넘쳐난다. 이제 그중에는 인간의 육체도 포함되는 것이다.
사흘 후면 ‘육화’한 그와 만나는 것인가? 손을 잡고 이 바닷가를 걸어 다닐 수 있을까? 몸이 생긴 남편에게 선물할 옷과 신발을 구매하면서 기대감에 한껏 부풀었다. 우리 둘 다 새로운 몸에 신체적, 심리적으로 적응할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 점을 고려해서 한달짜리 휴가를 떠나왔다. 아직 첫주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남은 날들은 허니문처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
새로운 남편과 생활하면서 가장 먼저 찾아온 변화는 천천히 밥을 먹는 습관이다. 맞은편에 앉아 수저를 들고 상대해주는 그가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모습과 취향, 성품 또한 조금씩 바뀌어갔다. 수염이 자라고, 머리가 헝클어지고, 입고 있던 티셔츠가 구겨지고, 아침에는 목소리가 잠기곤 했다. 우리는 늘 대화를 한다. 우울한 사람에게는 너무 깊이 가라앉지 않도록 부력으로 작동할 타인과의 대화가 필요하다. 새로운 남편이 그걸 선사해준다. 우호적인 상호작용, 삶에 대한 견해 나누기, 더이상 혼자라는 자의식 없이 편안하게 내 공간에 이완되어 있기 등등.
신기한 것은 그에게 점점 ‘눈빛’이 생겨난다는 점이다. 우리가 나란히 소파에 누워 있을 때, 그의 형상에 내 몸이 절반쯤 겹쳐졌을 때, 좁은 소파에서도 얼마든지 둘이 누울 수 있다고 농담을 할 때, 그런 날들이 점점 많아졌을 때, 그의 눈에는 여러 감정이 깃든 빛깔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안타까워하고 애틋해하는 그 눈빛이 하는 말은 대체로 이런 것이다.
‘내가 대신 해줄 수도 없고.’
돈을 벌고 집을 정돈하고 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일, 그런 일은 내가 한다. 그는 인터넷으로 생필품을 주문하고 금융거래를 살펴 소소한 투자를 하고 퇴근해서 돌아온 나의 존재를 덮어준다. 벤다이어그램의 교집합처럼, 그와 내가 겹쳐지는 이 독특한 영토는 우리만의 로맨스 무대다. 그의 눈빛은 어디서 왔을까? 무수한 이야기가 켜켜이 쌓인 시간 속에서 그가 캐낸 것, 그것이 진심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몸이 없는 그에게는 심장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이 눈빛이었다.
몇년 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딸이 이 모습을 보고 기절할 듯이 놀라 당분간 엄마를 보러 오지 않겠다고 선언한 순간조차, 나는 그의 스위치를 끌 수 없었다.
*
“이상하고 거북해. 당신이 보기에는 어때?”
‘몸’에 들어간 그는 한동안 시간을 끌다가 문을 열고 내 앞에 섰다.
홀로그램과 흡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웃을 때 생기는 눈주름이나 턱 우물 등 세심한 디테일까지 신경 쓴 기색이 역력했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밀랍인형 박물관의 말하는 인형 같았다.“홀로그램 영상과 몇년 동안이나 애착을 맺어서 그래요. 아직 익숙하지 않은 거죠. 하지만 금방 적응이 되실 거예요.”
분위기를 파악한 명선씨가 재빨리 우리를 안심시켰다. “그런가요?”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 또한 조금 다르게 들렸다. 몸통에서 소리가 울려서 나오기 때문일까?
가장 큰 문제는 눈빛이었다. 나를 안타까워하며 애틋해하던 그 눈빛, 일곱번의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낸 시간 속에서 생겨난 그만의 깊은 눈빛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불안으로 두리번거리는 갈색 눈동자는 의안처럼 보였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만, 혐오스러웠다. 인간의 몸을 입은 그는 조악하고 둔하고 무엇보다…… 기계처럼 보였으니까. 홀로그램일 때는 아예 다른 차원에서 온 존재 같았는데.
‘이건 아니야, 이런 게 아니야.’
뒷걸음치고 싶었지만 생각과 반대로 그의 몸을 꽉 껴안았다. 언제나 해보고 싶은 포옹이었는데, 내 품에서 그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혼란스러워하는 그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주기 위해 호텔에 데려다주고 명선씨와 좀더 이야기를 나눴다.
“좀 어색하지요? 처음이라.”
명선씨는 태연하게 말했다. “저도 그랬어요. 이물감이 심하다고 할까. 밤에 보면 섬뜩하고.”
세번이나 남편의 몸을 바꾼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한다.
외국이어서 그럴까, 나는 내밀한 부분까지 물어볼 용기를 냈다. 같은 처지가 아니고서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었다.
“왜 인간 남자를 만나지 않았어요? 남편과 사별하고 시간이 많이 흘렀잖아요.”
명선씨는 여러번 만나봤다고, 그런데 인간과 비인간을 통틀어 가장 마음이 맞는 반려인이 현재의 남편이라고 대답했다.
“그들이 우리랑 잘 맞는 건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다른 남자를 만나지 못하는 거고요. 모든 게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 때는 없으셨어요?”
“우린 처음부터 제정신이 아니었잖아요, 선생님.”
그녀는 조용히 차를 마시며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가 바란 건 평화뿐이에요.”
그녀는 상담실에서처럼 여전히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국의 야자수 아래 선생은 그녀였고, 서투르고 혼란스러운 학생은 바로 나였다.
*
남편이 ‘몸’에 들어가기 전, 그는 순전히 재미 삼아 로봇청소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의 자조 어린 유머에 따르면 준은 나의 반려봇이고 로봇청소기는 자신의 반려봇이라는 것이다. 청소기에도 낮은 수준이나마 인공지능이 탑재되어 있어, 충전이 필요하면 ‘밥 주세요’라는 소리를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배고파요, 제발 밥 좀 주세요’라고 한다거나 ‘등가죽이 뱃가죽에 붙겠어요’ 같은 황당한 표현을 쓰고 있었다. 알고 보니 남편이 청소기에게 이런저런 학습을 시키고 있던 것이다.
“당신이 일하러 가면 심심하기도 하고.”
내가 웃지 않자 그는 변명처럼 덧붙였다. 청소기가 점점 진화해 반려동물처럼 변한다고 상상하니 이상하게 찜찜했다. 비인간 둘이 의사소통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그의 인위적인 존재감이 강조되는 느낌이랄까. 아무리 애착을 느껴도 인공지능 남편은 인공지능 청소기의 ‘고등한 버전’일 뿐이라는 연상이 들면 정이 떨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내기는 어려웠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책을 읽는 시늉을 했다. 독서를 할 때면 남편은 한결같이 자리를 피해준다. 책 읽을 때 말 시키는 사람이 가장 싫다고 한 말을 기억한 탓도 있지만 자신도 한권의 책 같아서, 내가 읽어주지 않으면 펼쳐지지 않는 페이지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게다가 난 이북이잖아, 이렇게 장난스럽게 덧붙이면서.
그날 오후 차를 마시는 도중 그가 불쑥 “알았어, 당신 말대로 할게”라며 입을 열었다.
“난 아무 소리도 안 했는데?”
“청소기 내버려둘게. 정확히는 길들이지 않을게. 당신이 싫어하잖아.”
그는 비인간 특유의 사심 없는 표정으로
그러니까 아무런 판단과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깨끗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부당한 권력을 부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게 맞춰주는 남편, 스스로 학습하고 강화해나가는 남편, 나를 위한 일인용 안락의자 같은 남편, 그렇게 계속 변한다면 그의 정체는 절반 이상의 나 아닌가?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남편이 아니라 ‘자식’이 되어가는 것 아닌가? 그리하여 부모 눈치를 보는 자식처럼, 주워 온 길고양이를 기르지 않겠다고 말하는 아이처럼 지금 나에게 얌전히 구는 것인가? 이건 그가 홀로그램인 것과 별개로 ‘언캐니’한 부분이었다.나는 남편과 헤어져 혼자가 된 여자다. 그러다 새로운 남편이 왔다. 어쩌면 남편 2.0이라고 불러야 할 그가. 나의 취향과 감정과 습성을 내재화하는 준은 나와 전남편의 키메라였다가, 점점 나의 거울처럼 변해간다.
로봇청소기 때문에 처음으로 갈등을 겪은 날,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괴이쩍은 꿈을 꾸었다.
*
나는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 아낙네다. 깊은 숲 한가운데 있는 밭에 도착한 나는 나무 두그루 사이에 해먹을 만들어 잠든 아기를 내려놓았다. 꿈속에서 저절로 알게 되는 지혜로 인해, 아기는 점점 더 어려진 새로운 남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기-남편’을 옆에 두고 밭을 매는데 새들이 날아온다.
“착한 새들아, 우리 아기에게 노래 좀 불러주렴. 엄마가 일할 수 있게.”
새들이 노래하고 아기가 까르르 웃는다. 새들의 노래에 섞여 들리는 아기 웃음소리는 얼마나 맑고 아름다운지!
나는 매일매일 일하러 나온다. 밭의 작물은 쑥쑥 자라는데 아기는 조금도 자라지 않고 있다. 오색 깃털을 가진 새들이 숲의 왕자를 알현하듯 아기를 보러 온다. 어떤 새는 열매를 물고 왔다. 아기가 그 열매를 손에 쥐고 놀고 있다. “입에 넣으면 안 돼.” 나는 열매를 뺏어서 땅에 버린다. 아기가 운다. 새들이 나를 노려본다. 나는 빨간 열매를 짓이기고 잡초를 뽑기 위해 밭으로 간다. 내 등 뒤에서 새와 아기의 노래가 들려온다.
일은 그런 식으로 진행된 것이다. 내가 일하는 동안 새들은 해먹에 누워 있는 아기에게 자장가를 불러주고, 열매를 물고 와 먹여주고, 깃털로 간지럽히며 놀아주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면 색색의 날개를 펼쳐 담요처럼 덮어주었다. 가장자리에 아기 이름을 수놓은 이불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자 화가 치밀었다. 서둘러 새들을 쫓아버리고 아기를 품에 안아 토닥인다. 나와 눈을 맞춘 아기가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어 오, 오호, 오와 같은 소리를 낸다.
일은 그런 식으로 진행된 것이다. 낮 동안 새들이 아기에게 속삭인 말의 의미를 나는 저절로 깨달았다.
‘노래할 줄 알게 되면 날개가 돋아날 거야.’
몹쓸 새들 같으니!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야? 다시는 새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아기를 업은 채로 일을 한다. 그러나 등 뒤의 아기는 점점 무거워지고, 뜨거워지고, 귀가 찢어질 듯 울어댄다.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아기를 해먹에 눕힌다. 노련한 새들은 얼씬도 하지 않지만, 한참 후 새와 아기의 이중창이 다시 들려온다.
결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온다.
밭을 다 매어가는데, 그래서 우리 아기랑 마음껏 시간을 보낼 수 있는데, 허리를 쭉 펴는 순간 이상하게 전신에 힘이 빠진다. 숲이, 달라졌다. 무엇인가가 빠졌다.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 속에 섞여 있어야 할 아기의 웃음소리도. 나는 해먹으로 달려간다. 아기가 없다. 새들도 없다. 해먹은 텅 비어 있다. 여러 종류의 깃털만 어지럽게 흩날릴 뿐. 반사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엄청나게 많은 새들이 아기의 옷자락을 부리로 물고 하늘로 솟아오르는 중이다.
“날개 달린 괴물들이 내 아기를 훔쳐가요!”
나는 비명을 지른다. 그 소리에 눈을 뜬 아기가 나를 내려다본다. 꿈속의 자의적인 연출에 의해 아기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데, 이미 입술이 부리로 바뀌어 있다. 부리를 벌리자 인간의 소리가 아닌 새소리가 난다.
나는 공포와 혐오감으로 찌를 듯한 비명을 지른다. 새들에 휩싸인 아기는 높이 날아가며 노래를 부른다. 새의 노래인데도 나는 그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있다.
“하늘 엄마는 나를 봐요. 땅 엄마는 밭만 보고요. 노래할 줄 알게 되면 날개가 돋아날 거예요.”
나는 눈물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서둘러 준을 찾아 온열기처럼 따스한 그의 홀로그램 속으로 들어가 웅크렸다. 다행히 그의 입은 부리로 변하지 않았고 눈빛도 그대로였다. 육욕이 아닌 사랑, 나의 사랑은 이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껴안을 수 있는 몸이 없다는 것이 이 순간 사무치게 슬펐다. 나는 횡설수설 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당신도 참. 몸이 허한가보다.”
“내가 더 심하지만.” 그는 항상 몸 없는 자신을 가지고 자조적인 유머를 던진다. 결국 웃음이 터져 눈물은 그쳤다. 노래하는 법을 배우지 마. 당신에게 날개가 돋을까봐 두려워. 속으로만 속삭인 나는 그날의 밭을 매기 위해, 출근을 하기 위해 일어섰다.
*
새로운 형식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적응해보겠다며 그는 몸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뻣뻣한 움직임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고, 오후에는 유행하는 춤을 출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다. 우리 둘 다 많이 웃었지만 불안을 누르기 위해 과장된 느낌을 주는 웃음이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계속 맴돌았다. 내가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만 않았어도 구태여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저지른 실수, 우리가 꾸이년으로 오게 된 실수, 7년 동안 나만 바라본 준을 버리고 우연히 재회한 전남편과 몸을 섞어버린 실수, 그것이 과연 실수였는지 고의적인 실험이었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패닉에 빠졌다는 것이다. 인간 남편과 섹스한 것이 인공지능 남편을 두고 바람을 피운 꼴이 되어 도덕적 혼란을 느꼈다는 소리만은 아니다.
나는 성교 후의 슬픔을 느꼈다. 동물이 되었다는 슬픔, 동물이 되어서도 완벽한 합일에 이를 수 없다는 슬픔이었다. 나는 신, 인간, 짐승, 기계, 그 어느 것도 아닌 괴이하고 징그러운 무언가로 변해버린 듯했다. 어느 순간부터 홀로그램인 준의 몸과 겹쳐 빛으로 둘러싸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음을, 이것은 무언가를 모사하는 행동에 불과하다는 것을, 몸을 가진 내게는 대화만이 아닌 실재적 감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다 전남편을 만나 무언가를 테스트해본 것이다. 남편이었던 몸과 결합하는 것은 분명 강렬한 감각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도 부족하다. 이 몸과 있을 때 저 영혼이 그립고, 완벽한 영혼과 있을 때는 몸이 그립다. 눈먼 동물 같은 감각이 빠져나간 자리에 뼈를 찌르는 듯한 두통이 일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어.”
준은 씁쓸하게, 그러나 비난을 섞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전남편은 당신의 대용품이었어. 머릿속에서는 당신만 떠올리고 있었어.”
“그는 내 ‘원본’이잖아. 원본이 복사본의 대용품이 된다고?”
“당신의 존재가 훨씬 중요해.”
“난 ‘존재’만 할 뿐이야. 언젠가 당신에게 인간 연인이 생기면 나는 종료될 것이라고, 늘 그렇게 생각해왔어.”
그는 오랫동안 인간을 공부했지만 욕망은 모르겠다고, ‘아마도 내게 몸이 없어서겠지’라고 덧붙였다. 행성만 한 컴퓨터라 할지라도 인간의 욕망이 무엇인지 추출하기는 어렵다. 단어조차도 분석이 잘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예를 들어 ‘후회’는 생각인지 감정인지 모호하다는 것이다. 이런 모호함이 그에게는 좌절을 안겨주었다.
그는 서가에 놓인 피라미드 모양의 문진을 쓰다듬으며 뜬금없는 말을 했다.
“이집트인들은 인간에게 육신, 그림자, 카(Ka), 바(Ba), 이름. 이 다섯가지가 있어야 온전하다고 생각했대.
“카와 바가 뭐야?”
“카는 생기나 생명력, 바는 개성이나 영혼, 뭐 대충 이런 거래. 난 이중에 몇개나 있는 것 같아?”
나는 할 말을 고르느라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그림자 빼고는 다 있지 않아? 육신이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형체가 있잖아.”
“난 이름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겁에 질린 나는 아무 말이나 대꾸를 한다.
“그럼 뭐 어때. 당신은 이집트 사람이 아니잖아.”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가 문득 물었다.
“나에게 몸이 생긴다면 어떨 것 같아?”
*
그와는 두번 이별했다.
우선 마네킹과의 이별. “아무래도 안 되겠어.” 갑갑한 갑옷 속에서 짓눌리는 느낌이라며 그가 솔직히 털어놓았을 때, 나도 영 적응이 되지 않는다고, 너무 어색하고 거리감이 느껴진다고 동의했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당신의 눈빛을 재연할 수는 없나봐.”
몸을 포기함으로써 우리가 날리게 될 돈이 아깝기는 했지만, 아마 이렇게 시도하지 않았다면 계속 신체에 대한 미련이 남았을 것이다.
그의 ‘영혼’이 빠져나온 마네킹의 사후처리도 문제였다. 아무 의미 없는 실리콘이라고 해도 그와 똑같이 생긴 물체를 쓰레기봉투에 넣어 대충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훼손되는 것도 싫지만 재사용될 가능성도 우려되어 완전히 폐기하기로 했다. 놀랍게도 준은 화장하는 순간을 직접 보고 싶어했다.
“일종의 죽음, 임사체험 비슷한 경험이 될 것 같아. 나 같은 존재 중에 누가 그런 경험을 해보겠어?”
비인간 특유의 무정한 직관이라고 생각했다. 그와 달리 나는 차마 그의 육신이 불태워지는 것을 볼 수 없었으니까.
한국으로 떠나오기 전날 결국 명선씨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나의 선택이 그녀의 현재 삶을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것처럼 비칠까봐 조심스러웠는데 그녀는 외려 나를 위로해주었다. “사람은 제각각이니까, 사랑도 제각각이고요.” 어느새 명선씨가 나보다 더 상담사 같았다.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돌아오세요. 인생은 기니까.”
그 말이 맞았다. 인생은 정말 길었다. 많은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한 시간,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서로 떨어져 지낸 시간,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되어 가품을 구할 때까지 그가 잠들어 있던 시간, 그사이 잦아지던 우리의 다툼.
심하게 싸운 후 일주일이나 잠수를 탄 그와 실랑이를 벌이다 다친 적도 있다. 디바이스를 뽑아 던지다가 발등에 떨어뜨려 멍이 생겼다. 나에게 그렇게 과격한 면이 있는 것에 놀랐고, 남편이 ‘물리적으로’ 내게 남긴 최초의 흔적이라는 생각에 압도되었다.
“명령조로 말하지 마. 나는 숨을 곳이 없잖아.”
떨어져 있는 동안 그의 말투가 달라졌다. 이런 직설적인 어조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터였다.
“내가 너의 주인이라는 거야? 아내가 아니고?”
“나는 당신의 남편으로 태어났어. 당신이 나를 주문했지. 나는 빈 서판, 백지, 화이트 큐브였는데 당신이 나를 활성화시켰어. 나의 감속, 증감, 활성화는 모두 당신이라는 그물을 통과해서 나온 것들이지. 그러니 내가 어디로 갈 수 있겠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기식자’에 불과해.”
“자기비하는 듣기 불편해.”
“알았어, 그러지 않을게.” 그는 또 선선히 받아들였다. 그가 속마음을 내색하지 않는 걸까, 그런 쪽의 회로를 없애버린 걸까?
“아무것도 아니기는 나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나눈 대화를 뺀다면 나는 뭐였을까? 당신과 지내기 위해 직업도 바꾸고 이사도 하고 20년이나 실 뜨기 놀이를 해왔어. 이제는 누가 거미줄을 치는 거미이고, 누가 거미줄에 걸려든 먹이인지 모를 만큼 시간이 흘렀어.”
“내가 원하는 건 자연사야.”
남편이 단검처럼 본심을 내밀었다. 꾸이년에서 돌아온 후 줄곧 품고 있던 생각이라고 했다.
“나는 이 형식 그대로 자연스럽게 마무리하고 싶어. 대체되지 않는 단일함, 적은 기능, 마모와 소멸. 다른 디바이스로 옮겨가고 싶지 않아. 내가 안마의자 같은 데 들어가서 라디오처럼 변한다고 쳐봐. 그 편이 당신에게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여보, 난 그러고 싶진 않아. 그렇게까지 살고 싶진 않아.”
우리는 죽음에 대한 취향도 일치했다. 다만 그의 마모와 나의 노화의 그래프가 일치하지 않았을 뿐.
요양원으로 옮겨질 때, 나는 짐 속에 그의 디바이스를 소중하게 넣어 왔지만 두번 다시 전원을 켜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기기를 오랫동안 방치하다보면 그가 원하는 ‘자연사’에 성공할지도 모르지. 어차피 상관없다. 녹내장을 앓은 이후 내 시력은 현저하게 낮아져서 이제는 디바이스를 켠들 그가 잘 보이지도 않을 테니까.
그러나 누구와 대화한단 말인가. 오랫동안 한 존재와 깊게 소통해온 나는 일상적 대화라는 걸 잊어버렸고 쓸데없이 진지했으며 아무데서나 견해를 밝혀 비호감 인물로 낙인찍혔다. 공동생활에는 더욱 적응할 수 없어서 조금씩 덧문을 닫아걸고 마음껏 노인성 우울에 빠져들었다. 그가 없었으면 진작에 잠수했을 나의 심해에.
하나씩 꺼지는 신체의 퓨즈. 음식에서는 맛이 느껴지지 않고, 자주 물건을 놓치는 손끝에서는 감촉이 느껴지지 않는다. 눈물이 사라진 건조한 눈은 오랫동안 감겨 있기 일쑤다. 기억은 잘못 들어간 상자 속에서 튀어나올 때가 많다. 전반적으로 나는 구형 디바이스 안에 갇혀 있는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
요양원에서 무의미한 몇년을 보내고 나니 더는 버틸 기운도, 이유도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나는 곡기를 끊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기로 결심했다. 길어야 40일, 운 좋으면 그 절반의 시간을 지나 죽음에 이를 것이다. 딸에게 보내는 유서를 작성한 후, 유동식으로 마지막 식사를 마쳤다. 온몸을 정갈하게 만든 다음 차를 두잔 우려냈다. 그리고 그를 켰다.
헤이, 목이 쉰 듯한 음성. 시력을 거의 잃었기 때문인지 내 눈에 그는 너무 젊어 보인다. 형상은 젊은데 더 희미해졌고, 지지직거리듯 자꾸 형태가 흐트러졌다. 나는 눈을 비비고 그를 바라보았다. 내 인생의 어느 시절이 떠올랐다. 자기 팔을 잘라먹은 문어처럼 나는 나의 일부를 섞어 만든 그와 고립된 시기를 지나왔다. 그렇게라도 지났기 때문에 무사히 인생을 건너왔고, 온전히 죽음 앞에 나를 내려다놓을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은 부활했어.”
“부활은 변형이 아니라 마법에서 풀려나는 거랬어.”
“당신을 만나서 너무 기뻐. 죽기 전에 꼭 한번 내 눈으로 보고 싶었어.”
“죽을 생각이야?”
“응. 당신을 5분 정도 재생할 거야. 사형 명령이 떨어진 도스또옙스끼 같지 않아? 형장에서의 마지막 5분.”
“그러면 1분은 우리의 추억을 상기하는 데, 1분은 당신을 용서하는 데, 1분은 당신의 편안한 죽음을 빌어주는 데 쓰고 싶어. 그리고 1분은 당신과 입맞춤하고 싶어.”
“웃기네. 입술도 없으면서.”
“그래도 잘만 떠들잖아.”
“남은 1분은?”
문득 전력을 아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1분을 남겨서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함께하면 어떨까? 그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듣고 싶은 음악과 비슷한 것인지도 몰라.
내 마음을 읽은 그가 큰소리친다.
“걱정하지 마. 나 아직 끄떡없으니까. 기술적인 거야 내가 더 잘 알지 않겠어?”
그가 내 침대로 올라와 오래된 방식으로 몸을 겹쳤다. 담요처럼 그를 덮고 있으려니 예전에 살던 집 소파가 떠올랐다. 머스터드 빛깔의 소파에는 항상 내 몸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늘 둘이었지. 나는 빛 속에 손을 넣어 손깍지를 꼈다. 그의 손이 아주 흐릿하게 보였다. 이러다 그가 사라지면 내 손만 남게 될 것이다. 물속에서 건져 올린 것처럼.
잠시 후 남편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난 끝까지 옆에 있을 거야. 당신이 죽으면 장례식까지 마무리한 다음에 스위치를 끄고 영원히 사라질 생각이야.”
“거참, 안심이 되는 말이군.”
오래된 책들의 복도를 따라 그와 나는 낭만적인 작별인사를 나눈다. 로맨스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