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조명
끝내지 못한 시간을 껴안는 법
전기화 田己和
문학평론가. 경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주요 평론으로 「(비)인간의 자리로부터」 등이 있음.
octobervoice@naver.com
오래전 두번째 소설집 『국경을 넘는 일』(창비 2005)을 묶으며 작가 전성태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언어는 쓰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다치지 않아야 한다는 믿음이 내겐 있다. 언어를 갈고 다듬는 행위는 칼처럼 날을 세우는 일이 아니라 쓰고 또 써서 날을 무디게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작가의 말’) 문학이란 언어를 날카롭게 벼려 관습화된 무언가를 찢어내는 일에 가깝지 않을까. 그러나 이 작가는 날카로운 것을 거듭 갈아내어 아무도 다치지 않게끔 만드는 일을 자신이 언어를 다루는 방향으로 제시하고 있다. 밖을 향해 날카로운 것을 들이미는 언어는 순식간에 모두의 앞에 전시된다. 반면 그것을 안으로 돌려 수없이 매만져 닳게 만드는 일이란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귀 기울일 이를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진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에도, 그 고됨과 외로움을 알아줄 이는 드물다. 쓰고 또 써서 둥글고 몽글게 언어를 다루는 일은, 그러한 의미에서 크나큰 용기를 필요로 할 터이다.
올여름 9년 만에 전성태의 다섯번째 소설집 『여기는 괜찮아요』(창비 2024)가 출간되었다. 개별 작품으로 치자면 2015년 발표된 「가족 버스」부터 2023년 발표된 「조용한 생활」에 이르기까지 약 8년의 시간에 걸친 아홉편의 소설이 모여 있다. 단편소설집을 묶는 기간이 매우 짧아진 요즘 추세와는 사뭇 다른 모양새지만, 작가의 발걸음을 돌이켜보면 다분히 그다운 선택처럼도 보인다. 그리고 이처럼 시차를 지닌 작품들이 다채롭게 수록된 덕에 우리가 통과해온 시간의 나이테들을 낯설게 바라볼 수도 있게 되었다. 『여기는 괜찮아요』에 실린 소설들은 여순사건과 남북분단부터 세월호참사와 코로나19, 그리고 몽골 이주민과 미얀마의 로힝야족까지, 삶과 세계를 너르게 아우른다. 소설의 품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두 팔을 벌려서 안는 품이 참 크고도 넉넉하다.
이 소설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하여 무더운 여름날 오후 전성태 작가를 만나러 향했다. 작가는 긴 시간 이어진 인터뷰 내내 정성껏 이야기를 풀어갔다. 조급한 궁금증이 깃든 질문에도 소설에 담긴 시간과 담아낸 마음을 차근차근 풀어내 전해주었다. 겸손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르는 태도와 말씨였지만, 작가는 그러한 표현에 대해 “겸손한 게 아니고 진솔하다고 말해주면 좋겠어요. 포장을 할 것도 없이 그래요. 미안해요”라고 답했다. 인터뷰를 마무리할 즈음 작가는 그날의 소회를 이렇게 전했다.
이 작품집이 저한테도 좀 뿌옇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그런데 뿌연 내가 글을 써가면서 이런 과정을 겪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아요. 지금까지 많이 겪어왔으니까요. 이렇게 형식적으로 책이 한번 마무리되면 어쨌든 이제는 다시 앞을 바라볼 수밖에 없고, 그래서 굉장히 홀가분해지면서 또 조금은 명쾌하게 발을 내디딜 수 있는 지점들이 생겼어요. 그런 의미에서 잘했다, 주저하지 않고 책 묶기를 잘했다, 이런 생각도 들어요. 인터뷰를 하니 뭐랄까, 좀더 두꺼운 내 소설집을 안고 돌아갈 것 같아요.
독서란 언제나 대화의 망에 접속하는 행위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전성태 작가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 나는 그간 내가 해온 ‘대화’들을 되짚어 생각해보게 되었다. 누긋하고 부드러운 대화의 여파였을까, 인터뷰 내내 질문을 던지는 입장이었음에도 어쩐지 더 많은 질문을 안고 돌아가는 듯한 느낌은 낯설고도 흥미로웠다. 덜컥 귀한 선물을 받아버린 것처럼도 느껴졌다. 이제 이 글을 통해 미지의 독자들에게 선물을 건네볼 수도 있을까.
이어질 글에는 작가와 나눈 대화의 생생함이 충분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다만 일견 완결된 듯 보이는 이 글에는 여러겹의 대화, 즉 몇차례에 걸친 텍스트와의 대화 및 작가와의 대화 등이 깃들어 있다는 점, 그리고 이 글은 다시금 대화를 걸어보려는 작은 시도라는 점을 적어두고자 한다.
숨구멍을 품은 소설
표제작 「여기는 괜찮아요」는 2020년 팬데믹 초기 풍경을 담은 소설로, 마스크 대란과 함께 공적 마스크 5부제가 시행되던, 어느새 이미 낯설어진 당시의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려준다. 벚꽃이 핀 줄도 모르게 봄을 맞이하던 시절, 함께 걷는 이와 손을 잡는 일마저 주저하게 되고, “둔감하면 죽는다!”(258면)는 마음으로 일상을 건사하던 한 시절이 빼곡히 담겨 있다. 지금 우리는 언제쯤 사람들이 팬데믹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지, 언제쯤 엔데믹에 이르러 마스크를 벗게 되는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이 발표된 2020년만 하더라도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두려움이 팽배했다. 지금 시점에서 다시 이 소설을 읽는 것은 우리가 이미 지나온 시절을 다시, 다르게 살아보는 체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코로나19가 보이지 않는 세계, 말하자면 사람 아닌 것들의 세계를 승인하게 되고, 접경이 무화되는 계기였음은 분명한 것 같아요. 인간과 비인간 또는 물질에 대한 우리 상상력의 문턱이 조금은 더 낮아지지 않았나 싶고, 가상세계나 SF와의 친연성이 강화된 덕분에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상상이고 여기부터는 실제라는 식의 구별감각도 변한 것 같고요. 그게 좋은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팬데믹 이후에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서만큼은 생각해보고 싶어요. 예를 들어서 ‘거리두기’라는 것도 물리적인 거리두기 이상으로 여러가지로 고민해볼 만한 개념이었거든요. 아마 저뿐 아니라 다른 많은 작가들이 고민했을 거예요.
「여기는 괜찮아요」는 ‘전성태’라는 이름의 작가이자 교수인 일인칭 화자의 이야기이다. 소설 속 ‘나’는 팬데믹의 영향 아래 불안 짙은 나날을 통과하며, 가족들을 안심시키기보다는 경각심을 불어넣는 방식으로 일상을 건사해나가고 있다. 그러던 중 ‘나’는 교양수업 과제로 학생들이 제출한 에세이를 읽다가 ‘양경진 학생’의 글을 마주하게 된다. 소설 안에 직접 인용으로 제시되는 그 글은 할머니의 식당에서 마늘을 까는 일과로 시작해, 한참 동안 바다를 바라보다 무서움을 느끼고서는 다시 할머니에게 돌아와 텔레비전을 끄며 하루를 정리하는 내용으로 흘러간다. “과제를 하다보니 더 꿀꿀해진다. 이런 과제를 왜 내주시는지 모르겠다ㅠㅠ”(260면)로 마무리되며 독자들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는 양경진 학생의 에세이는 소설 전반을 끌어가는 ‘나’의 어조와는 상이한 문체로 툭 튀어나와, 위기감과 경각심으로 가득했던 소설의 무거운 공기에 순식간에 구멍을 낸다.
소설 속에서 갑작스럽게 당도하는 완도의 공무원 ‘오동순씨’의 연락 또한 그러하다. 이십년 전 빌려간 책을 돌려달라던 오동순씨의 연락을 받은 ‘나’는 이제는 세상을 뜬 ‘김원보 형’과 함께 청산도의 구들장논 농사 이야기를 조사하러 다니던 기억을 되살린다. 양경진 학생의 글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낯선 이의 숨결을 들이마시게 한다면, 오동순씨의 연락은 내 것이었으나 어느새 낯설어진 과거의 기억을 다시 들이마시게끔 만든다.
「여기는 괜찮아요」 특유의 느슨한 구성은 이질적인 것들, 외부적인 것들, 꽉 짜인 틀에서 보자면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 스멀스멀 틈입하고 끼어들어 함께 숨 쉴 수 있는 구멍들을 허락한다. 소설 속 ‘나’의 가까운 일상은 단절의 감각을 강화하도록 요구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멀리 떨어져 있는 양경진 학생이나 오동순씨는 연결의 감각을 회복하게 만드는 듯 보인다. 그것은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설의 ‘숨구멍’”이라고 일컬을 법하다. 그렇게 소설은 멀리 있는 존재 덕분에 가까운 것과 ‘다시’ 만날 힘을 회복해나간다. 이것은 비단 코로나19 시절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이미 끊어졌다고, 없어지거나 잊혔다고 믿었던 것들과 엉뚱한 계기를 통해 재연결되는 경험은 발굴되기를 기다리며 일상 곳곳에 잠재되어 있으니 말이다.
흐르는 시간에 보내는 씁쓸하고도 넉넉한 미소
이번 소설집에서는 텍스트의 결 사이로 바람이 드나드는 감각이 유난히 돋보인다. 특히 「섬으로 가는 엉뚱한 여행」은 작가 특유의 느긋함과 여유로움이 잘 느껴지는 작품이다. ‘평범한’ 한국인과 달리 이국적인 외모의 한국인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인종주의 문제를 풍자적으로 꼬집은 전작 「이미테이션」(『늑대』, 창비 2009)과 함께 읽으면 더욱 흥미로운 작품이다.
「섬으로 가는 엉뚱한 여행」과 「이미테이션」은 어느정도 연결된 소설이 맞아요. 저도 우스갯소리로 제 외모에 대해 농담도 많이 하고, 또 사람들이 저를 그렇게 농담처럼 놀리기도 하고 그러죠. 워낙 어렸을 때부터 놀림을 받았고 또 스스로가 이 문제를 꽤 의식했기 때문에 항상 궁금함이 있었어요. 우리가 양반이었느냐 상놈이었느냐 이런 궁금함이 아니라, 도대체 어떤 할아버지 어떤 할머니가 내 앞에 있었을까, 그런 궁금증이요.
「이미테이션」은 ‘토종 한국인’이지만 도무지 ‘한국인’ 같지 않은 외모 때문에 어렸을 적부터 차별을 받아왔던 ‘게리’가 원어민 강사인 체하며 새로운 삶을 수행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중학생 시절 게리가 설핏 품는 네덜란드인 하멜과 그의 동료들에 대한 상상은, 「섬으로 가는 엉뚱한 여행」에 이르러 ‘나’의 형이 조사한 집안 내력과 그에 대한 상상력을 통해 한층 구체화된 가설로 변주된다. 17세기 난파된 네덜란드 무역선의 하멜 일행 중 일곱 사람은 조선에 남아 후손을 남겼고, 그 혼혈 후손들이 나주 지방으로 집단 이주했으며, 그중 ‘비화도’라는 섬으로 입도한 한명이 바로 주인공 형제의 조상이라는 가설. 소설은 ‘나’와 형이 아버지로부터 집안의 집성촌이 있다고 들어왔던 바로 그 비화도로 함께 떠나는 여정을 다룬다.
형제가 비화도로 들어가는 길에 겪는 두개의 사건은 소설의 귀한 숨구멍이라 볼 수 있다. 하나는 비화도로 향하는 배편에서 대여섯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와 만난 사건이다.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아이에게 다가간 형은 “와, 우리말 잘하네!”(227면)라며,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는다. ‘구미’라고 답하는 아이를 채근하던 형은 결국 아이의 조부모로부터 ‘우즈베키스탄’이라는 답을 얻는데, 이에 대해 ‘나’는 형이 실수를 했다며 화를 낸다. 동생에게 잘못을 지적받은 형은 자신을 ‘인종차별 하는 꼰대’로 몬다며 토라지고, 늙수그레한 형제의 냉랭한 분위기가 잠시간 이어진다.
뿌리를 찾아 떠나는 여정에 잠시 끼어든 ‘구미 출신 아이’를 둘러싼 이 소동은, 뿌리를 찾는 일의 무망함을 언뜻 내비치는 듯도 하다. 이들 형제가 어렸을 적부터 밝은 눈과 흰 피부 때문에 온갖 차별적 발언을 들으며 자랐음을 상기한다면 이 장면의 아이러니함은 배가 된다. 형제의 여정에 얼렁뚱땅 함께하던 독자들은 잠깐 거리를 두고 뿌리 찾기 욕망 그 자체에 대해 갸웃거리게 되는 것이다. 한편 관심과 애정에서 비롯된 형의 오지랖과, 그런 말이 왜 부적절한지를 지적하며 교정하려 드는 동생 사이의 아웅다웅이란, 이들 형제를 향한 노골적인 차별의 언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통용되던 과거와 상황이 달라진 오늘날의 시차를 부드럽게 가시화하는 듯 읽힌다.
또다른 사건은 비화도에 도착한 형제가 선착장 비탈에서 “은박지 조각을 뿌린 듯”(230면) 파닥거리는 엄청난 멸치떼와 마주하는 장면이다. 선창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달려들어 멸치떼를 주워 담는 가운데, ‘나’ 또한 분위기에 휩쓸려 형과 함께 멸치를 양껏 욕심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선원이 “바다 것은 섬사람들한테 돌려줘야지”(232면)라며 양동이를 들고 돌아다니면서 외지 사람들이 주운 멸치를 수거해간다. 이 인상적인 장면은 작가 자신의 체험이 생생하게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멸치떼 사건은 실제 경험의 반영이에요. 예전에 아주 재밌는 체험을 했었죠. 한 섬에 들어갈 일이 있었는데, 배가 들어가고 파도가 탁 치는 순간에 멸치떼와 딱 만나면 방파제로 올라붙게 되거든요. 엄청나게 반짝반짝해요. 관광객들이 그걸 다 주워 담았는데, 그걸 다시 와서 싹 걷어가더라고요.
멸치떼를 둘러싼 한판의 소동극을 지나며 형제간에 서먹했던 분위기 또한 풀어진다. “시간의 단절, 상황의 무화. 형과 나는 다정하게 차에 앉아 있지 않은가. 조상님들을 찾아가고 있지 않은가”(233면)라고 ‘나’가 읊조리듯, 은빛 멸치떼 장관과 조우하고 주워 담은 멸치를 이내 앗기는 사건이란, 육지에서 비화도라는 낯선 장소로 들어가기 위해, 즉 일상의 리듬에서 벗어나 끊어진 조상들과의 접속을 도모하기 위해 필요한 일종의 의례처럼도 보인다. 이윽고 형제는 배에 선착한 차를 내려 타고 섬으로 들어가게 되는바, 의례라는 것이 사람들을 일상에서 비일상의 상태로 옮겨가게 해주듯이 형제가 멸치떼 소동극을 함께 통과하면서 서사 또한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는 셈이다.
「섬으로 가는 엉뚱한 여행」의 매력은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짐작할 때마다 그 짐작이 보기 좋게 틀린다는 데 있다. 비화도에 이른 형제가 발견하게 되는 비밀이란, 정말로 하멜과 함께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가운데 한명이 그들의 조상이 맞았다거나, 그들 가족의 이국적인 외모의 진실과 바야흐로 조우했다는 것 따위가 아니다. 그들이 비화도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들의 아버지와 큰아버지, 즉 앞선 세대와 얽힌 비밀이다.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생전에 왜 그토록 열성을 다해 그 섬을 드나들었는가에 관한, 그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은 다른 종류의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아부지도 참…… 그걸 가슴에 꼭 묻어두고 가셨냐.”
나는 맞장구를 쳤다.
“두 형제가 참 대단하네. 형, 괜찮아?”
형이 창문을 조금 열고 침을 뱉었다.
“뭐가 대수라고.”
나는 고개를 돌려 형의 안색을 살폈다. 형은 평온해 보였다. 정말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난 이제 형 이야기를 믿기로 했어.”
형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 혼혈 할머니와 할아버지 이야기 말야. 오죽했으면 집안에서 이름을 지웠겠어.”
형이 설핏 웃었다.(245~46면)
이 소설이 마지막에 이르러 자아내는 웃음은 「이미테이션」의 풍자와는 조금 다른 성격을 지닌다. 그 웃음이란 약간의 씁쓸함을 담은 너털웃음에 가까운데, 뿌리 찾기의 허망함을 인정하면서도 아버지와 큰아버지의 욕망 역시 수용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족보나 혈통, 가문이나 조상 같은 계보 위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고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건재하던 시절, 아버지에게는 자신의 세대와 그 후손들이 접속할 수 있는 뿌리를 찾아내는 일은 꽤 절박한 과업이었을 것이다. ‘나’와 형이 농담처럼 찾아나선 ‘뿌리 찾기’와는 다소 다른 의미에서의 ‘뿌리 찾기’가 아버지와 큰아버지에게는 일생의 소명이었으리라는 진실은 비웃을 수 없는 씁쓸하고도 안쓰러운 지점이다.
괜찮냐는 질문에 “뭐가 대수라고”라고 내뱉으며 그 씁쓸함을 애써 털어보려는 형의 말처럼, 그리고 형의 이야기를 받아 쓸쓸함을 산뜻하게 뒤집으려는 ‘나’의 농담처럼, 「섬으로 가는 엉뚱한 여행」이 자아내는 웃음은 앞선 세대의 안간힘을 그럭저럭 인정하며 넉넉하게 품는 미소와 가깝다. 그 넉넉함은 어떤 면에서는 한국사회의 변화와도 무관하지 않은데,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걸 만큼 중요했던 것들도 휴지조각처럼 변하게 하는 시간의 힘이란 무지막지하다. 그러나 과거를 잘 보내주는 일, 시간이 벌려둔 시차 속에서 필연적으로 상대화되는 옛 가치들을 예의를 갖춰 떠나보내는 일 또한 우리가 미래를 잘 맞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 아니겠는가. 「섬으로 가는 엉뚱한 여행」은 그렇게 시간의 강물 위로 속수무책 떠내려가는 것들을 직면한 이가 취할 수 있는 하나의 태도를 보여준다.
생의 아이러니를 넘어 미래로 향하다
한편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다루는 소설 「상봉」 역시 눈여겨볼 만하다. 소설에는 거센 눈발을 뚫고 북쪽의 남동생을 만나러 떠나는 한 노인과 그의 가족이 등장한다. 일흔아홉의 ‘장시곤’은 자식들의 보호와 간섭을 받으며, 얼굴도 보지 못한 채 헤어진 북측의 동생 ‘장시춘’을 만나러 간다. 가족상봉단, 자원봉사자, 취재진 등 수많은 사람이 운집해 서로 다른 속내가 부산스럽게 오가는 가운데 여러 사람의 간절함을 그러모아 마침내 상봉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소설은 감동적인 상봉의 대단원에서 막을 내리기는커녕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각도를 튼다.
「상봉」은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딱 중단되었던 시점에 쓴 소설이에요. 다시 만남의 길이 열리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당사자 세대는 이대로 끝나는가, 이런 생각이 많이 들었지요. 그런데 그 무렵에 기사를 하나 봤어요. 이산가족이라고 해서 만났지만 사실은 가족이 아니었다는 기사였지요. 그걸 보면서 그때 그 사람들 심정은 어땠을까 상상해봤어요.
작가가 우연히 읽은 기사에서 시작된 이 소설은 장시춘과 장시곤 형제의 상봉이 이루어지긴 하지만 아무래도 그들이 ‘진짜’ 가족은 아니었다는 진실을 누설하며 서사의 흐름을 서서히 꺾는다. 장시곤은 장시춘이 건넨 부모의 결혼사진에 가슴이 뜨거워져 눈물을 흘리다가, 이내 미국에 있는 여동생이 보내온 가족사진과 대조하며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차이를 확인한다. 소설은 장시곤의 심리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이 한문장을 더할 뿐이다. “장시곤은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158면) 장시곤으로서는 애초 어머니를 찾으려던 중 본 적 없이 헤어진 동생을 만나게 된 셈이었으니, 여러 우연이 맞아떨어진 덕에 이 만남이 성사된 것일 테다. 가족사가 상당 부분 겹치는 탓에 서로를 형제라 오해하게 된 낯선 이들의 조우가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명목하에 발생해버린 셈이다.
그러나 장시곤은 그 진실을 자녀들에게 털어놓지 않으며, 장시춘에게도 이를 직접적으로 확인하지 않는다. “아우님도 잘 잤는가? 난 마음이 설레서 잠을 설쳤다네”(159면)라며 장시춘을 진짜 아우인 듯 반갑게 맞으며, 예정되어 있던 것인 양 형제간의 우애를 수행할 뿐이다. 장시춘 또한 장시곤과 자신이 형제가 아님을 알아차린 듯 보인다. 그러나 두 인물은 진실을 알고 있음을 서로에게만 은근히 내색할 뿐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면서 서사에 구멍을 남긴다. 그 구멍의 주변을 에둘러 가는 방식으로 두 사람은 내적인 합의에 도달하는데, 그것은 자녀들에게 진실을 알리지 않은 채 상봉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해 가족으로서의 도리를 실천해보자는 것이다. 이 서사의 의도적인 구멍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은 자기들이 형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기억의 유산을 정리하겠다 마음먹지요. 남아 있는 방법도 시간도 얼마 없는 사람들이라면, 이렇게라도 해결하려는 게 그 사람들의 분단 정체성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살다보면 비밀은 비밀대로 묻어두는 경우가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상상력으로 썼지요. 사실 장시곤과 장시춘의 비밀도 비밀이지만, 장시곤의 아들 세대에도 비밀이 있잖아요. 장시곤의 사위가 죽었지만 딸과 아들, 며느리는 아버지를 걱정해서 그 사실을 전하지 못하죠. 때로는 비밀로 하는 것이 삶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고, 그 두가지 비밀의 모양이 비슷한 채로 소설이 끝나기를 바랐어요.
「상봉」은 장시곤과 장시춘 두 사람이 의미심장한 대화를 주고받는 가운데 점차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 금강산을 함께 바라보는 데서 마무리된다. 마지막 대목에서조차 두 노인은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확인하거나 검증하지 않는다. 다소 모호한 말들과 침묵, 그리고 시선을 통해 이들 사이에 오가는 ‘진짜 대화’를 읽어내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두 노인의 대화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이다.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두 노인의 마지막 모습은, 이제 바라보아야 할 것은 각자의 오래된 흉터가 아니라 함께 맞이할 미래임을 암시하는 듯 읽히기도 한다. 때맞춰 흩날리기 시작하는 눈발은 두 사람의 침묵을 메워주는 잔잔한 시각적 소음으로 보이기도 하고, 비밀이나 오래 묵은 상처,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닌 기억마저 모두 덮어주는 가장 푸근한 다독임 같기도 하다. 혈연가족인지가 과연 중요한가 되묻는 듯한 서사의 종결은, 이산가족 상봉을 다루는 소설이라 할 때 즉각적으로 예상되는 상투성에 가볍게 구멍을 뚫고 그 안에 생의 아이러니를 불어넣는다.
소설 속 장시춘의 마지막 말은 처음 발표되었을 때는 없었으나 단행본 작업 과정에서 추가된 대사이다. 원래 장시춘의 대사는 “래일도 같이 보시자요”로 그쳤는데, 소설집에는 “래일도 보시자요. 여기 올 기회가 또 있갔습니까. 자식들 근심이라도 놔주어야디요”(162면)로 바뀌었다. 두 노인의 비밀스러운 약속이 자식들을 향한 염려의 산물임을 좀더 부각하는 방식으로 변화된 것일까? 이 장면에 대해 묻자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두 형제는 자신들이 진짜 형제가 아니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죠. 그 사실을 둘 다 곧장 간파하지만 또 서로가 통하는 게 ‘우리 세대의 문제는 여기서 마무리하자, 자식들한테는 우리 부모님이 결국 형제도 가족도 못 찾고 죽었다는 진실을 남겨놓지 말자’는 지점이거든요. 어떤 세대든 자기 시대의 숙제를 안고 살아가고 그걸 풀어야 되지만서도, 입장이 다 다르단 말이에요. 장시곤이나 장시춘의 몸은 사실 이미 자기 자식들 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요. 미래로 향하고 있는 거죠.
서사의 초반부에서 장시곤이 우연히 마주치는 노파는, 열네살에 헤어져 이제는 일흔아홉살이 된 아들을 만나러 왔지만 생판 모르는 장시곤을 아들로 착각할 만큼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 장시곤 또한 일흔아홉의 노인이다. 그리고 남북분단이라는 문제를 장시곤과 같은 부모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한 자식 세대마저 이제는 “환갑이 내일모레인 사람”(125면)이 되어버릴 만큼 시간이 흘렀다. 소설이 배경 삼은 2018년으로부터도 다시금 시간이 흘러, 이제 작년 말 부로 이산가족 등록자 가운데 생존자는 채 4만명도 남지 않은 상황에 이르렀다.1 이 숫자가 더욱 줄어든다고 하더라도 분단은 여전히 ‘우리’의 문제이고 통일은 ‘우리’의 소원일 수 있을까.
소설 초반부의 장시곤은 대단히 자발적으로 상봉에 나선다기보다는 자식들의 부추김 때문에 얼떨결에 나서게 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노파와의 만남에서, 작가의 말에 따르자면 “나도 절박한 사연을 지니고 있다, 나도 아픈 사람이다”라는 감각을 불현듯 깨우치게 된다. 한편 장시곤의 아들 ‘진호’는 북쪽의 작은아버지를 만날 일이 설레고 호기심도 생기지만 걱정도 된다고 말하며, 며느리 ‘숙경’은 곧 만나게 될 북한 가족의 경제적 상황에 대해 속물적인 걱정을 내비치기도 한다. 아들 부부는 막상 만난 북쪽 작은아버지네 형편이 자신들의 상상과 다르자 안도감과 함께 위화감을 느낀다.
이렇듯 다양한 종류의 거리감과 서로 다른 마음의 모양들을 인정하고 또 품어내는 방식으로 이산가족 상봉을 재현한다는 점이야말로 이 소설의 깊이일 것이다. 무엇보다 장시곤과 장시춘이 ‘진짜’ 가족은 아니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두 사람이 최선을 다해 가족 됨을 수행하며 비밀을 지키려 한다는 점은 이 소설의 의미를 풍부하게 만든다. 두 노인의 밀약은 당장의 당황스러움을 수습하기 위한 모면책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를 잘 덮고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가자는 다짐, 그들 자신과 그들의 자식 세대 모두를 미래로 실어 나르려는 수행적 실천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그 자체로 남북문제에 관하여 취할 수 있는 하나의 태도를 보여주는 듯하다. 나 자신의 것이 아닌 문제와 접속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에 대하여 의제화된 대답, 당위적인 대답은 누구의 마음도 움직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을 인정하면서도, 그 거리에 의해 가능해지는 존중 어린 태도로 오히려 문제와 매우 다르게 접속해볼 가능성을 상상하게끔 한다. 「상봉」 특유의 뭉근한 시선은, 아직은 모호하기만 한 그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보게끔, 인물들의 몸이 기울어지는 그 방향으로 일단 함께 몸을 기울여보게끔 독자들을 이끈다.
작가는 2015년에 펴낸 산문집 『세상의 큰형들』(난다)의 한 글에서, 고2 겨울방학 시절 썼던 한 소설이 이북 실향민 출신 부부의 이산가족 찾기 이야기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2009년 발표한 소설 「로동신문」(『두번의 자화상』, 창비 2015)에서는 새터민 가족이 어떻게 남한사회와 삐걱거리며 그 속에서 자리 잡으려 애쓰는지를 담아내기도 했다. 이러한 궤적을 짚어가다보면 분단이라는 문제가 작가에게 중요한 문학적 화두 중 하나임을 짐작하게 된다.
작가에게는 ‘앎’이라고 하는 것, 무언가를 알아가는 것, 매체를 통해서 공부를 통해서 배우는 것들을 내면화하는 과정이 모두 글쓰기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요. 저한테 분단문제가 체험의 영역은 아니었지만, 1980년대의 저에게는 너무나 중요했던 앎의 세계였어요. 당시에는 통일운동도 굉장히 활발히 진행되었는데요, 실제 나의 삶에서 무언가를 체험했다기보다는 분단 상황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내면화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런 연장선상에서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쓰려고 했지요. 분단문제의 현장으로 돌아가기는 힘들지만, 지금 현재의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어느 순간 틈입해오는 분단에 대해 감각되는 것들을 쓸 수밖에 없고, 또 써야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건 제 표현에 따르자면 ‘의도적 트라우마’ 같은 거예요. 작가가 문제화하는 것, 관심을 두는 문제에 자기 자신을 밀어넣고 동참하는 것, 이것을 반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자기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거죠. 의도적 트라우마를 통해서 몸을 바꿀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을 경계에 세울 수도 있고, 또 경계를 넘어가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나 자신의 앎을 내면화하는 과정으로서의 글쓰기. 그것은 ‘내 것’이 아닌 문제에 자신을 밀어넣는 운동이자, ‘내 것’이 아닌 것들이 내 안으로 침투해오는 과정이다. 이 가운데 쓰는 이의 경계가 끊임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작가에게 있어 고착되거나 답습되지 않는 소설세계란 필연일지도 모른다. 기실 경계와 월경의 상상력은 전성태 문학에서 중요한 비평적 키워드 가운데 하나였다. 평자들은 그의 소설에서 경계 앞에 선 주체의 어정쩡한 비칠거림이나, 삶의 곳곳마다 둘러쳐진 경계에 더욱 첨예하게 다가서는 움직임을 읽어내기도 했다. 그러한 읽기가 쌓일 때마다 ‘경계’란 우리의 짐작보다도 더욱 단단한 것으로 거듭 추인되었다. 그러나 이번 소설집에서 두드러지게 읽히는 것은 그 경계가 흐물대고 뭉그러지는 순간, 경계라는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이미 넘어와버린 순간, 알게 모르게 뚫려버린 구멍으로 무언가가 흘러들어오고 흘러나가는 순간 같은 것들이다. 소설집에 실린 「합석」에서 이국의 청년이 낯선 언어로 읽어나가는 문장이 시라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이 알아채는 순간처럼, 그 순간이란 찰나의 것이다. 이제 전성태는 그 빛나는 찰나를 포착하여 태연하게 서사의 중간에 끼워넣고, 그리하여 서사를 통과하는 이들에게 은빛 반짝거림을 묻히고, 그 반짝이는 것들을 묻힌 채 멀어지는 이들의 뒷모습을 한없이 바라보는 소설들을 짓는다. 미래를 향한 시간을 조금씩 열어 보이고 있다. (2024.7.11 창비서교빌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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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존 이산가족 4만명도 안 남았다… 상봉중단 기간 1만8천명 별세」, 연합뉴스 2023.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