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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시의 커먼즈를 향한 비평의 고투
장은영 張恩暎
1975년 서울 출생. 201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평론집 『슬픔의 연대와 비평의 몫』 등이 있음.
pome01@hanmail.net
독일의 철학자 안젤름 야페(Anselm Jappe)는 250년 전 처음 등장한 자본주의적 생활방식, 생산방식, 사고방식이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인간과 세계 사이에 끼어든 공허하고 추상적인 가치형태, 다시 말해 화폐의 위기가 자본주의의 파국이자 우리가 직면한 근본적 위기임을 지적하는 말이다.1 세계의 파국을 상상하게 만드는 재앙이자 이미 강력한 현실이 된 기후위기 역시 자본의 위기에 연루되어 있다. 지속가능성에 관한 어떤 통념과도 대립되는 자본주의체제에서 생태 재앙이 필연적임은2 이미 지적된 바 있다. 이상기후 현상으로 인한 생태난민의 증가는 자본의 양극화와 맞물린 기후불평등의 확산을 증명한다.
기후위기를 야기한 문명을 비판하며 인식론적 전환을 꾀해온 문학의 실천은,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재구성하고 물질의 존재론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시도로 이어지고 있다. 한편 생성언어예술의 영역에서는 인공지능을 도구로 활용하는 문학의 가능성과 한계를 지속적으로 성찰하며 “인간적 언어”(자연언어)에서 “인간의 언어” 전체로3 탐색의 범주를 넓히고자 한다. 삶과 문학의 전환이라는 과제는 사유의 영역을 인간이라는 범주 밖으로 이끌고 인간과 비인간의 공존과 공생을 구상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만드는 중이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제기된 문학 커먼즈에 관한 논의도 이러한 맥락에 있다. 사회학적·인류학적·생태학적 커먼즈 담론의 확산과 함께 “언어를 매개로 하며 지식, 규범, 정보, 정동 등 모두와 관계하는 문학”이 “오늘날 가장 중요한 커먼즈”4 가운데 하나라는 인식은 위기의 시대에 맞서 문학적 연대의 대안적 모델을 모색하는 한국문학의 현실적 고민과도 맞닿는다.
서로 다른 입장에서 ‘현재의 시’5를 조명하는 세편의 글을 시의 커먼즈6를 사유하는 맥락에서 읽어보려고 한다. 지금 문학이 안고 있는 과제를 염두에 두고 커먼즈로서의 시가 무엇이며 어떻게 가능한가를, 시를 통한 커먼즈가 가능하다면 그 조건과 전제는 무엇일까를 탐색해보기 위해서이다.
최다영 「동시대 가속류 시의 생산 조건과 가능성」 「망각지—채굴 불가」7
문학평론가 최다영은 디지털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의 시적 발화 패턴에 주목하며 ‘가속류’라는 명명을 제안한다. 가속류는 “객관적·사실적인 단문의 진술 활용이 두드러”지고, “특정 패턴을 자동적으로 반복”하는 시적 발화 현상을 일컫는다(「동시대」, 84면). 그는 최근 시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발화의 패턴이 인공적 생성언어와 유사하다고 분석하며 인간의 욕망과 주체성이 제거된 기계적 발화가 시인과 독자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호응을 얻는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디지털화된 자본주의가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내면화하게 만들어 시쓰기를 마치 문장 생성기계에 의한 자동발화와 같은 자동 창작으로 견인한다는 논지를 펼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가치평가가 목적은 아니라고 덧붙이지만 최다영의 비평은 가속류가 보여준 플랫폼 알고리즘 문법이 독자를 (시)쓰기에 참여시킴으로써 “발화의 특권성이 광장에 있는 모두의 몫으로 돌려질”(132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하기에 이른다. 유한한 존재로서 인간이 지닌 경험과 정서에 기초한 시적 발화를 거부하면서 기계화된 자동발화를 생성하는 플랫폼 알고리즘을 문학적 민주주의의 기반으로 삼은 셈이다.
그런데 플랫폼 알고리즘에 기반하여 전개된 최다영의 해석과 전망은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생각하게 한다. 먼저 이 글이 출구 없는 인지자본주의를 현실로 인정하면서도 플랫폼 알고리즘을 중립적으로 다룬다는 점이다. “축적된 데이터가 커먼즈로서 공유된다는 가정하에, 특권적 창작 주체가 소거되고 익명의 시쓰기가 보편화되는 미래를 상정해볼 수 있”(131면)다는 그의 주장은 플랫폼 알고리즘을 소유한 자본의 개입을 생략함으로써 가속류와 플랫폼 알고리즘의 대치점을 스스로 놓쳐버린다. 데이터 노동을 회수하는 자본을 생략하고 플랫폼 알고리즘의 산출물인 데이터가 플랫폼 알고리즘의 외부에 있는 커먼즈로 공유된다는 가정 자체가 모순을 안고 있다. 디지털공간이 기술-사회적 인터페이스들을 약호화하고 사회적 상호작용의 신경회로와 틀을 생산하며 집합적 두뇌를 조직하는 자본에 장악되어 있다면8 플랫폼 알고리즘의 생산물과 커먼즈의 생산물은 구분되어야 한다. 전자는 기업의 이윤으로 흡수되지만 후자는 사회에 증여된다.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의 데이터 인클로저(data enclosure)9에 대항할 전략이 없다면 가속류는 자본의 예속화로부터 탈주하는 미학적 형식으로 채택되기 어렵다.
“광장’으로서의’ 시”(132면)라는 문학적 연대의 가능성을 생각할 때 짚어야 할 또다른 문제는 최다영이 현재 문학제도의 장벽으로 지적하는 “발화의 특권성”(같은 면)이다. 이 글의 논지에 따르면 현재 문학장은 시에 대한 가치평가를 진입장벽으로 세워두고 공식적으로 승인된 시인에게만 발화의 특권을 부여한다. 이 한계를 뛰어넘어 시인과 독자가 평등한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게 하는 장치가 가속류이다. 최다영은 문학이 “수용자로 하여금 시대적 명령을 체화하고 그 형식을 학습, 모방하도록 하는 재생산 장치”라고 전제하면서 가속류가 독자들의 “인지 회로를 자동화하여 시 창작에 알고리즘 체계를 도입하도록 권유한다”(같은 면)는 주장을 편다. 한마디로 가속류는 광장에 참여한 모든 이에게 발화의 권리를 분배하는 형식인 셈이다. 물론 분배는 의미의 독점을 거부한다는 뜻도 있지만 시의 의미가 발생하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창작 주체가 지닌 발화의 특권이 무엇인지는 모호해지고 만다. 적어도 현대예술이 작품을 텍스트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이래 미적 생산물이 지닌 가치와 의미는 수용자에 의해 향유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하나의 예술 작품은 실로 반은 예술가의 활동의 결과이고, 다른 반은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읽고, 혹은 그것을 듣는) 대중의 활동의 결과물”10이라고 볼 때, 예술적 원동력은 커먼즈의 창조와 실현에서 작동하기 마련이다. 시의 향유 또한 이미 정해진 의미와 가치를 소비하는 과정이 아니라 감각의 불일치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산출해내는 창조적 과정이다. 독점될 수밖에 없는 상품과 달리 시는 불화 속에서 그 의미를 누구도 소유할 수 없을 때 풍요로워진다.
요컨대 문학적 연대 혹은 시의 커먼즈를 구상할 때 유의할 것은 발화(쓰기)가 시의 커먼즈에 참여하는 한 방식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점이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지만 소유할 수 없으며 참여한 이들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 되기를 경험하게 하는 시의 커먼즈에서 시인과 독자의 경계는 유동적이고 불안정하며 임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모두가 시인이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시를 매개로 시인과 독자가 함께 시의 의미를 산출하고, 시를 통해 사물과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를 경험하는 일이다. 최다영의 논의는 디지털공간을 장악한 플랫폼 알고리즘의 내면화 현상을 시적 발화와 긴밀히 연결시켜 성찰해보게 한다. 그러나 동시에 ‘현재의 시’를 마주하는 비평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플랫폼 알고리즘 외부의 현실이며, 또한 시를 통해 현실을 보는 새로운 눈을 발견하는 일이다.
송종원 「되찾은 ‘님’의 시간」
‘시의 공동영역’을 탐색하는 문학평론가 송종원의 「되찾은 ‘님’의 시간: 커먼즈로서의 한국시와 시비평」(『창작과비평』 2024년 여름호)은 시의 커먼즈에 대한 본격적인 비평을 시도한다. 시가 현실 사회와 접속해온 독특한 역사성을 읽어내면서 인간의 경험과 감정이 응축된 삶의 면면을 들여다보고 그로써 시의 커먼즈를 증명하고자 한다. 송종원이 시의 커먼즈를 증명하기 위해 텍스트로 삼은 것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거나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강렬한 삶의 감각을 발화함으로써 독자를 현실과 대면하게 만드는 시들이다. 물론 시적 언어의 의미가 재발견되도록, 달리 말해 시어들이 다시 생기와 활력을 얻도록 재특이화(resingularization)11를 견인하는 일 역시 시를 읽고 의미를 발견해내는 비평의 역할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송종원에게 비평의 대상으로서 ‘현재의 시’란 유한하고 취약한 존재가 역사적·사회적 맥락 위에서 삶을 제약하는 힘과 불화를 겪으며 경험하는 삶의 감각을 표출하는 시이다. 살아 있음을 위협하는 세계의 질서와 통제에 맞서 그것을 돌파하고자 하는 긴장을 품은 시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다룬 이수명과 박노해의 시가 말해주듯이 시인이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이나 세계를 보는 눈은 불일치할 수밖에 없고, 이것은 공동영역이 탄생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송종원은 다양한 삶의 흔적이 새겨진 한국시라는 세계에서 “시인들은 각자의 꿈과 시 속에 그려진 꿈을 겹쳐놓고 사유할 영역을 얻었”(27면)다고 지적하면서 한국시가, 역사적 시간성과 언어를 매개로 형성된 삶의 공통감각 위에 창조된 ‘시의 공동영역’이라고 명명한다. 보편적 담론의 차원에서 논의되는 시의 커먼즈를 한국시라는 영역에서 구체화하기 위해 그는 이수명의 시와 박노해의 시가 교차하는 지점을 발견한다. 시인들의 작업을 성실히 읽어내며 “민주적 대화의 공간을 열어 협업하는 일”(같은 면)을 비평의 역할로 설정한 이 글에서 우리는 시의 커먼즈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확인하게 된다.
시의 커먼즈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송종원이 강조하는 것은 ‘역사적 시간성’이다. 자칫 과거의 기억을 강조하는 태도로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시의 커먼즈에서 역사적 시간성이 고려되어야 하는 이유는 시적 의미와 가치를 발굴하고 공유하는 과정인 커머닝(commoning)이 경험의 지배를 받으며 역사적 맥락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12 창조적 과정으로서 커머닝에 초점을 두고 한국시를 논의하려면 삶이 축적된 시간을 배제할 수 없고, 비평 역시 역사적 맥락을 두텁고 풍부하게 읽어내야 하는 임무를 맡아야 한다. 그러나 송종원은 민주화 이후 한국 시문학의 난해화 앞에서 시비평이 그러한 작업에 충실하지 못했다며 비판한다. 삶이 빠져 있는 비평의 언어가 “시의 두터운 언어에 내포된 의미는 발굴하지 못한 채 방어적 개념들로 시에 깃든 우리 삶을 고립시”(18면)키기에 이르렀다는 성찰을 바탕으로 송종원의 글이 조명하는 것은 현대사의 질곡과 삶의 풍경이 만나는 고유한 시들이다. 그의 글에서 섬세하게 분석되는 이세기 시가 드러내는 고유한 장소성과 역사적 감각은 ‘잃어버린 시의 커먼즈’를 회복하려는 비평의 지향성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더불어 송종원의 글에서 커먼즈와 ‘님’이라는 한국시의 대표적인 시어를 연결하는 지점은 여러모로 주목된다. 그의 논지를 따라 추론해보면 ‘님’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꿈이자 현실의 외부지만 이미 현실 안에 예정되어 있는 공백이다. 이것을 창조적 열망이라고도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일반적인 커먼즈가 ‘자원, 공동체, 일련의 사회적 규약’이라는 세 항으로 구성된다면13 창조적 열망이 강조되어야 하는 시의 커먼즈는 ‘언어, 시인/독자, 문학장, 님’이라는 네가지 항으로 구성해볼 수 있다. 이를 토대로 형성되는 한국시의 공통감각은 동질성에 기반한 문화적 정체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운동성을 지닌다. 부연하면 시의 커먼즈를 가능케 하는 한국시의 공통감각이란 선험적 동질성에 기반하거나 외적인 준거로 작동할 수 없고, 고정적이거나 불변하는 것도 아니며, 심지어 과거에만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도 관여하는 힘이자 내적 긴장이다. 그것은 하나의 이념이나 가치로 수렴될 수 없지만 감각의 영역을 통해 분명히 공유되고 있으며 현재의 삶을 통해 재창조된다. 이것을 다양한 시적 발화로 구현해내고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삶의 가능성들을 실험하는 것이 바로 시의 커머닝이다.
송종원의 논의는 시의 커먼즈에 대한 선언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시의 커먼즈가 어떻게 구성되고 작동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특히 이수명과 박노해 시의 문학사적 맥락이 교신하는 지점을 새롭게 겹쳐 읽으며 시의 관계 맺음을 사유하는 부분은 커머닝으로서의 시와 거기에 참여하는 비평의 역할을 제시함으로써 이에 관한 후속 비평의 등장을 기대해보게 한다. 물론 역사적 시간성과 언어를 공통감각의 조건으로 삼고 있는 이 글이 더 부연해야 할 점도 없지는 않다. 문화정체성과는 다른 한국시의 공통감각이라는 난제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님’이라는 자리가 무엇인지 면밀하게 설명될 필요가 있다. 시의 커먼즈를 탐색하는 비평이 더욱 예리해져야 하는 대목은 커먼즈로서의 문학이 언어적·역사적·정서적 동질성을 지닌 문화적 산물이나 이미 주어진 실체가 아니라 매순간 갱신되어야 하는 유동적이고 지속적인 실천의 현장이라는 것을14 증명해야 하는 순간이다. ‘님’은 바로 그 실천의 장소에서 경험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광장‘으로서의’ 시를 위한 조건으로 디지털 플랫폼 시대의 발화 형식을 살피는 최다영의 비평과 커머닝으로서 한국시의 가능성을 짚으면서 역사적 경험과 창조적 열망 속에서 재해석되는 삶의 의미를 조명하는 송종원의 비평을 살펴보았다. 문학장에 참여한 이들이 새로운 문학적 연대의 모델을 희망한다면 시(문학)의 커먼즈를 말하고자 하는 비평의 고투는 계속되어야 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새로운 길을 찾으려면 언제나 길을 잃을 각오가 필요하듯이 시의 커먼즈에 다가가는 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아직까지 비평이 사유하지 못했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기 위한 ‘협동적 창조’의 과정이라면 그것을 위한 분투는 비평의 소진이 아니라 비평의 활성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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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젤름 야페 『파국이 온다』, 강수돌 옮김, 천년의상상 2021, 137면 참조. ↩
-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박진철 옮김, 리시올 2018, 40면 참조. ↩
- 김언·권보연·허희 좌담 「우리는 왜 인공지능으로 문학을 꿈꾸는가?」, 『현대시』 2024년 10월호 참조. 인용은 128면. ↩
- 황정아 「문학성과 커먼즈」, 『창작과비평』 2018년 여름호, 17면. ↩
- “현재로부터 탈주하는 것이 아닌, 현재에 압도되는 것도 아닌, ‘현재의 시’는 어디에 있을까”(최원식 「자력갱생의 시학」, 『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 22면)라는 질문에 담긴 비평의 태도를 잇기 위해 사용한 표현이다. ↩
- 시의 커먼즈란 시라는 장르를 매개로 한 커먼즈(commons)라는 맥락에서 쓴 표현이다. 시적 커먼즈, 시-커먼즈라고 불러도 무방하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시의 커먼즈로 통일해서 사용했다. 여기서 다루는 글에서 송종원은 ‘시의 공동영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
- 최다영은 현재의 시를 ‘가속류’라 명명하며 두편의 글을 연달아 발표했다. 여기서는 「동시대 가속류 시의 생산 조건과 가능성」(『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 이하 「동시대」)과 「망각지—채굴 불가 : 가속류 시 현상에 반영된 인지 자본주의의 (비)상상력」(『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이하 이 글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표기) 두편을 함께 살핀다. ↩
- 조정환 『지구 제국』, 갈무리 2002, 166~67면. ↩
- 데이터 인클로저는 디지털공간의 데이터 활동을 이윤으로 가치화하고 그것을 사유화하는 것을 말한다. 인클로저의 형태로서 플랫폼 기업은 알고리즘을 이용해 이용자의 데이터 활동(노동)을 포획하는 자동화 기계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광석 『피지털 커먼즈』, 갈무리 2021 참조. ↩
- 마우리찌오 랏짜라또 「자본-노동에서 자본-삶으로」, 질 들뢰즈 외 『비물질노동과 다중』, 서창현 외 옮김, 갈무리 2021, 267면. ↩
- 문학·철학 연구자 정남영은 프랑스 철학자 펠릭스 가따리(Félix Guattari)의 논의를 빌려 재특이화(resingularization)란 “예술이 ‘전례 없는, 예상치 못하고 생각하지 못한 존재의 질을 생성’하는 원리이며 미적 패러다임에서 모든 것이 계속적으로 재창안되고 처음부터 시작되는 원리”라고 설명한다. 정남영 「현대 자본주의와 미적 생산」, 『비물질노동과 다중』, 350~51면. ↩
- 데이비드 볼리어 『공유인으로 사고하라』, 배수현 옮김, 갈무리 2015, 189면. ↩
- 같은 책 40면. ↩
- Michael K. Bourdaghs, A Fictional Commons, Duke University Press 2021, 174~75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