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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수상 특별기획│한강의 문학세계
소년은 오고 또 온다
세계문학으로 읽는 한강 『소년이 온다』
유영주 柳英珠
미시간대 아시아언어문화학과 교수, 남한국학센터장. 저서 Writers of the Winter Republic, 공저서 Cultures of Yusin: South Korea in the 1970s 등이 있음.
yjryu@umich.edu
해마다 10월 즈음이면 덴마크의 한 주간신문 기자가 한국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비해 사전 인터뷰를 요청하며 이메일을 보내왔는데, 올해는 그 메일이 오지 않았다. 온라인 베팅 사이트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작가로 중국의 찬쉐(殘雪)가 꼽히고 있고 일본의 무라까미 하루끼(村上春樹)에게도 꽤 큰 관심이 쏠리고 있다는 라디오 뉴스를 들었는데 이와도 무관하지 않으리라 짐작되었다. 내 나름 생각하기로 최근 노벨상 수상자의 면면을 볼 때 올해쯤 아시아 작가에게 기회가 돌아갈 가능성이 높아 보이고 아시아인으로서 이는 마땅히 환영할 일이지만 중국과 일본 작가에게 관심이 쏠리는 상황이라면 한국작가의 수상은 또 한참이나 뒤로 미루어지게 될 듯하여 한국인으로서 다소 아쉬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북유럽을 포함한 서구지역의 반중 정서를 고려한다면 찬쉐보다는 무라까미 하루끼가 수상의 영광을 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예측을 해보기도 했다.
수상자가 발표된 10월 10일,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요란한 진동음에 잠을 깨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덴마크 기자에게서 전화가 여러통 와 있었다. 미처 잠에서 깨지 못한 상태로 부랴부랴 전화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한강의 수상을 예상했었느냐는 질문에 나는, 언젠가는 반드시 수상하게 되리라 생각했지만 그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미처 몰랐다고 답했다. 황석영을 비롯한 많은 작가의 작품들이 외국어로 번역된 바 있고,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창비 2008)처럼 해당 국가의 출판계에서 나름의 주목을 받았던 경우도 더러 있었으나, 진정한 의미에서 언어와 문화의 경계를 넘어 진지한 주목의 대상이 된 한국작가는 한강이 처음이 아닐까 생각한다는 소회를 덧붙였다. 더불어 지난 5, 6년 동안 한강의 작품에 관한 논문이 미국, 스코틀랜드, 인도, 인도네시아, 루마니아 등 여러 나라에서 발표되어왔는데, 이 최근 연구성과들을 통해 뚜렷한 추이를 발견할 수 있다. 즉 한강의 작품이 한국이라는 지역성에 긴박되지 않고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선 문화상품으로서 해당 지역 독자들에게 다양하게 수용·소비되는 한편, 지역학으로서의 한국학이라는 특수한 분야의 연구자들만이 아니라 영문학, 젠더연구, 비교문학, 철학 분야에 속하는 연구자들에 의해 주제론적인 관점에서 다양한 접근이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을 보충하며 한강의 작품이 주는 보편적 소구력에 관해서도 부연하였다.
한강 작품세계의 중핵을 무엇으로 보느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기본적으로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으로 평가한 스웨덴 한림원의 관점에 동의하면서, 이 평가에서 언급한 세가지 요소 가운데 특히 역사적 트라우마의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본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또한 한강의 작품이 한국이라는 국가의 경계를 넘어 보편적 문맥에서 수용되는 흐름과는 별도로 수상 시점이 지금 현재라는 사실 역시 주목할 만하다고 보탰다. 최근 대중문화를 포함하여 한국문화를 향한 세계적 관심이 커지고 있으며 이와 더불어 문화콘텐츠를 통해 접해온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글로벌 수용자들의 이해가 점차 높아지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전했다. 이런 의미에서 한강 작품의 독보적 성격 및 그 탁월한 성취 외에 세계적 문화현상으로서 ‘K신드롬’의 부상이라는 절묘한 ‘타이밍’을 이번 수상의 숨은 주인공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을 덧붙였다. 사족에 가까운 이 말은 도드라지게 인용되어, 덴마크 주간지 기사에서는 “완벽한 타이밍”의 작가 운운한 이야기가 한강은 “운이 매우 좋은 작가”로 옮겨져버리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내가 전하고자 했던 ‘타이밍’은 단순히 작가에게 찾아온 개인적 ‘행운’을 가리키는 것 이상이다. 이는 한강의 작품이 품고 있는 시간성, 즉 역사성의 문제와 연결된다. 이번 한강의 수상을 ‘타이밍’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려는 나의 설명은 작가 개인의 독보적 성취 속에 녹아 있는 한민족이라는 집단의 역사적 굴곡이 오늘날 어떻게 세계인의 관심을 받게 되었는지를 연결시켜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려는 취지에서였다. 노벨문학상 심사위원회를 비롯한 세계 각국 독자들의 진지한 수용과 높은 평가는, 식민지 경험과 동족상잔, 반공냉전 군사독재체제로 점철된 20세기 한국에서 원조에 의존하던 국가로는 유일하게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21세기 초 달라진 한국 상황을 한강의 문학이 어떻게 잇고 또 가로지르는지 탐색해보려는 세계인의 호기심 어린 주목에도 닿아 있으리라.
2014년 늦가을 북미지역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모인 회의가 있었다. 마무리 즈음 담소를 나누다 최근 한국에서 광주를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화제에 올랐다. ‘광주사태’를 북한 특수부대의 소행이라고 왜곡한 지만원의 주장이 종편 곳곳에서 공공연히 인용되고 당사자가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상황, 일부 극우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광주항쟁 희생자의 운구를 두고 모독적 발언이 횡행하던 당시 상황에 재미 한국문학 연구자들은 한목소리로 깊은 우려를 표하면서 이런 참담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기 위해 힘을 모아보자는 데 뜻을 같이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2015년 재미 한국문학연구자 모임 주최로 5·18 35주년을 맞아 문학 속 광주를 주제로 ‘광주학살 35년 후: 목격의 시학과 정치학’(The Kwangju Massacre, 35 Years Later: The Poetics and Politics of Witnessing)’이라는 릴레이 학술회의를 듀크대, 뉴욕 주립 빙햄턴대, 미시간대에서 잇달아 개최했다. 광주를 다룬 무게있는 작품을 발표한 바 있는 임철우와 한강 두 소설가가 행사에 참석했는데, 5·18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세대의 두 작가 사이에 드러나는 시각 차이가 인상적이었다.
임철우의 광주가 뜨겁게 재현되었다면 한강의 광주는 서늘하게 그려졌다. 임철우 세대의 광주가 ‘현장’을 의미했다면 한강 세대의 광주는 ‘기억’이 되어 있었다. ‘현장’과 ‘기억’으로 다소간 양태를 달리하는 두 작가의 광주에 담긴 풍부한 역사적·체험적 함의와 한강의 기억으로서의 광주에 관한 서늘한 이야기 속에 감추어진 내적 강렬함은 청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일부 참여자는 주제가 담고 있는 역사의 무게와 더불어 작가들의 담론이 품은 칼날 같은 긴장을 견디기 힘들다는 듯 발표와 토론 중간중간 연거푸 탄식을 내뱉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참여자들은 이미 어렴풋이나마 근현대사의 트라우마와 그 상처의 무게를 오롯이 견디며 지속해가는 한강의 문학적 작업이 언젠가는 세계적으로 각광받게 되리라 직감했고, 바로 다음 해 맨부커상 수상 소식을 통해 그때의 느낌이 틀리지 않았음을 곧 확인할 수 있었다.
『소년이 온다』(창비 2014) 이후 한강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핵심적 화두에는 기억의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한강에게 있어 광주라는 역사현장은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여전히 현재적인 공간이며 그래서 지나가버린 과거는 지금 여기로 끊임없이 되돌아온다. 온라인 베팅 사이트에서 찬쉐의 수상 가능성을 높게 예측하고 있음을 전한 미국의 라디오 뉴스가 한가지 적중한 포인트가 있다면,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기억의 문제에 천착한 작가일 것이라는 점이다. 2016년 수상자인 밥 딜런(Bob Dylan) 이후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모두 기억의 문제를 작품의 주된 관심으로 삼았다. 2022년 수상자인 프랑스 소설가 아니 에르노(Annie Ernaux)는 작품에서 집요한 자전적·해부학적 태도를 드러내고 2021년 수상자인 탄자니아 소설가 압둘라자크 구르나(Abdulrazak Gurnah)는 식민주의에 의한 대륙간 격차 속 난민의 운명에 거시적 관심을 기울인다. 서사의 차원에서는 서로 극과 극의 전략을 취하는 듯 보이지만, 두 작가는 공히 기억의 전경화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한 태도를 공유한다. 한강의 작품에서 우리는 에르노의 내면성과 구르나의 역사성을 함께 읽어낼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역사와 기억을 대하는 한강 특유의 고집스러움을 발견할 수 있다. 그에게 기억이란 여타의 트라우마 서사에서 볼 수 있듯 화해와 치유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경로로 의미화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정신분석학적으로 고립된 멜랑콜리적 자아가 기억을 매개로 한 애도를 통해 스스로를 주체화함으로써 사회적·실천적 자아로 발전해나가는 이행 역시 거부된다.
예컨대 한강의 작품 속에서 기억의 문제와 긴밀히 연관되기도 하는 침묵은 병리적 현상이 아니라 일정한 윤리성을 담보한 선택이라는 의미가 있다. 광주의 처절함을 온몸으로 겪고 살아남은 딸을 향해 세상은 어머니의 눈물 젖은 목소리를 빌려 “그냥 눈 딱 감고 살아주면 안되겄냐”(『소년이 온다』, 86면, 이하 이 작품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표기) 묻지만, 딸은 침묵이라는 형식의 거절을 통해 ‘그렇게는 살아주지 않겠다’고 세상을 향해 대답한다. 자연스러운 세월의 흐름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행위, 즉 망각의 거절을 통해 기억은 생리의 영역에서 의지의 영역으로 승화되고 이는 하나의 실천으로서 그 자체로 현재성과 현장성을 확보하게 되는 셈이다.
한강의 작품에서 기억이 주는 이러한 실천적 행위성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2년 전 미시간대의 문학수업에서 만난 학생들 덕분이다. 한 학기의 강의에서 『무정』(이광수 지음, 1918) 『태평천하』(채만식 지음, 1940)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 지음, 문학과지성사 1978) 『손님』(황석영 지음, 창작과비평사 2001) 등 여러 한국소설을 영어 번역본으로 함께 읽었는데, 학생들은 기말 리포트에서 다룰 작품으로 『소년이 온다』를 가장 많이 선택했으며 특히 애도의 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102면)는 소설 속 문구가 특히 울림을 주었던 듯, 꽤 많은 학생이 소설의 전체 상황을 하나의 장례식으로 이해하면서 희생당한 소년들의 무덤 앞에서 촛불을 밝히는 에필로그를 일종의 애도의 종결로 읽는 한편, 살아남은 자의 삶 자체가 더이상 끝 모르고 이어지는 장례식이 될 필요는 없으리라는 결론적 해석을 통해 위로를 받기도 하는 듯했다.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작품에 접근하는 학생도 있었는데, 한 학생은 촛불을 밝히는 행위에 내포된 애도의 의미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기도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묵념하지도 않았다”(215면)는 작가의 애도에 대한 일종의 ‘거부의지’에 초점을 맞춰 작품을 분석했다. 이 학생은 특히 3장 「일곱개의 뺨」에서 작가의 일관된 ‘거부의지’를 읽어내면서, 자신이 맞은 일곱대의 따귀를 하루에 한대씩 잊겠다는 은숙의 진술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잊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혀야 하며 “일곱번째 뺨을 잊을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98면)라는 구절 역시, 따귀를 맞은 뺨이 아물어 더이상 잊으려는 노력조차 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표면적 진술 너머 시간의 경과에 따른 자연스러운 치유와 그로 인한 망각을 거절한다는 내포적 진술이 함축된 것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학생의 뛰어난 독해는 한강의 작품을 둘러싼 시간성 문제와 결부된 현장(체험)과 기억 사이의 대립에 새롭게 접근할 실마리를 제공한다. 역사문제를 소재로 한 소설의 중심축이 ‘현장’의 재현에서 재구성된 ‘기억’으로 이동하는 흐름은 세대 및 젠더의 차이에 따른 서술주체의 시점변화와 연관되는 한편, 한국문학에서 역사적 경험의 재현 양상이 보이는 특수성 및 보편성과 연결 지어 이해되기도 한다. 예컨대 역사적 사건을 직접 체험한 세대 혹은 남성중심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5·18과 4·3의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하는 새로운 글쓰기의 시도는 “‘우리’ 역사를 울타리 안에 가두려는 충동에 맞”서 역사적 사건들에 덧씌워진 ‘민족적 상흔’이라는 단일한 해석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변화된 시각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워싱턴대 동아시아언어문화학과 부교수 이지은의 연구를 언급할 수 있다.1 이 논문은 역사적 트라우마의 간접체험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론화한 홀로코스트 연구자들의 성과를 소개하면서, 루마니아 출신 영상예술학자 마리안 허쉬(Marianne Hirsch)의 ‘포스트메모리’(postmemory)2 및 독일의 영문학자 알라이다 아스만(Aleida Assmann)의 ‘2차 증인’(secondary witness) 개념3을 차용하여 한강 소설이 “한국의 비극을 진정한 의미에서 보편성을 확보하게 만들었음”을 강조한다.
한편 브라운대 영미문학과 교수 다니엘 김(Daniel Kim)은 한강의 소설을 둘러싼 번역의 쌍방향성을 분석한 논문에서 미국의 영문학자 데브자니 강굴리(Debjani Ganguly)의 “정동적 목격”(affective witnessing) 개념을 빌려, 한강의 소설이 타인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역사를 재발견하도록 이끄는 지점을 부각시킨다.4 “제주도에서, 관동과 난징에서, 보스니아에서, 모든 신대륙에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유전자에 새겨진 듯 동일한 잔인성으로”(『소년이 온다』, 135면)라는 구절은 폭력의 세계사적 계보에 광주를 위치시키면서,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을 “일찍이 미국에서도 벌어진 바 있는 행태의 한국적 번안”5으로도 볼 수 있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이렇듯 한강의 작품은 한민족 수난의 현대사라는 시공간적 배경을 넘어서서 인류 보편성의 새로운 지평에서 읽힐 가능성을 준다는 것 자체로 소중한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지점이 있다면 한강에게 있어 광주는 초월이 아닌 영원한 귀환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한강이 그려내는 망각을 거절하는 주체의 행위의지로서의 기억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과거의 고통이 야기했던 생생한 현재성이 소멸해가는 장소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되돌아가는 주체의 선택이며, 이미 존재하지 않는 그 현장에서 그때를 기억하는 행위는 스스로가 특정한 역사적 상흔에 대한 2차 증인이 되기를 수락하는 실천이다. 또한 이 기억으로서의 글쓰기는 그것이 쓰이고 읽히는 과정에서 또다른 새로운 2차 증인들을 연쇄적으로 만들어내는 행위이기도 하다. 스스로의 결단을 통해 2차 증인의 역할을 수행하는 이들에게 기억이란 역사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닌 자발적 선택을 의미하며 희생자들과 애도의 과정을 거쳐서조차 작별하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의 표명이다.
한강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새의 이미지는 생명과 죽음, 현세와 저승을 잇는 매개적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 관찰자의 눈에는 날아올라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새는 사실 끊임없이 둥지로 되돌아오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새에게서 읽어내는 상징은 초월이 아닌 귀환이 되며, 한강 소설에서 기억의 문제 역시 초월이 아닌 귀환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새의 상징과 겹쳐 읽힌다. 한강의 작품이 스스로 하나의 사례로서 입증하는 바와 같이 기억의 날개를 단 한국문학은 현장에 아로새겨진 역사의 무게에서 벗어나 초월의 방향으로 보편의 일부가 되어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기보다, 시간이 흐르며 흔적이 희미해져가는 현장으로의 귀환을 통해 제2증인이 되기를 자처하고 다시 다음 세대의 수용자들 가운데 제2증인을 생성해내는 과정을 통해 그 자신이 역사적 현장의 일부가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번역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한글 제목 ‘소년이 온다’는 ‘Human Acts’라는 사뭇 다른 뉘앙스의 제목을 달고 영어권 독자를 만나게 되었다. “인간 삶의 연약함에 대한 이해”라는 스웨덴 한림원의 평가의 한 대목에 적절히 부합한다는 의미에서는 친절한 번역일지 모르겠으나 영문 제목에서 1980년 그 현장을 지켰던 소년이 소거되고 보편의 대명사로서 인간(human)이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못내 아쉽다. 또한 ‘온다’라는 동사 속에 숨겨진 마법, 즉 기억을 매개로 한 행위의 연쇄와 이를 통해 현재를 미래로, 미래를 다시 현재로 만들어갈 가능성이 소실된 점도 아쉽다.
소년은 오고 또 온다. BTS의 팬클럽 아미의 몇몇 팬이 멤버 제이홉이 발표한 싱글 「Ma City」의 가사 속 “062-518”의 의미를 찾아보다 80년 광주의 비극을 알게 되고 희생자를 추모하고자 망월동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기억하는 행위가 어떻게 다음 세대의 제2증인을 낳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과거의 무게를 온전히 담고 있는 현장을 방문함으로써 뜨거운 현장의 열기를 스스로 느끼고 이를 통해 미처 몰랐던 역사와 조우하며 그 경험을 매개로 자기 삶의 궤적에 크고 작은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지은이 지적하듯, 소년의 “도래는 늘 복수(multiple arrivals)”이며 그러한 행위로서 소년은 오고 또 온다.
―
- Ji-Eun Lee, “(Dis)embodiment of Memory: Gender, Memory, and Ethics in Human Acts by Han Kang,” The Routledge Companion to Korean Literature, edited by Heekyoung Cho, Routledge 2022. 이하 번역은 인용자. ↩
- Marianne Hirsh, The Generation of Postmemory: Writing and Visual Culture After the Holocaust,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2. ↩
- Aleida Assmann, “History, Memory, and the Genre of Testimony,” Poetics Today, Summer 2006. ↩
- Daniel Kim, “Translations and Ghostings of History: The Novels of Han Kang,” New Literary History, Spring 2020. ↩
- 같은 글 397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