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빛의 서사로 써나갈 새로운 질서
말의 위력은 대단하다. 치우친 말은 감정을 격동시키고 현실을 왜곡한다. 2023년 광복절 축사에서 윤석열은 우리 사회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반국가세력이 암약하고 있다고 분노하며 반자유세력·반통일세력의 척결을 선포했다. 그는 지배와 독점의 자유를 추구하다 뜻대로 되지 않자 2024년 12·3 계엄과 내란을 획책했고 연이어 폭동을 유도했으며, 결국 주권자에 의해 역사에서 퇴장당할 운명에 처했다. 자유라는 말을 왜곡하고 오염시킨 자, 그는 자신의 행위에 상응하는 심판과 댓가를 치를 것이다. 강자의 힘에 굴복하는 맹목적 본능의 세계에 자유가 자리할 곳은 없다. 예속과 생존만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는 시민이 스스로 통치하는 자기규율과 질서의 체계이다. 시민의 집단적 통치는 감정과 의지의 자발적 규율 그리고 타인을 배려하고 함께 책임지는 연대의 정신에 뿌리를 둔다. 시민은 공동의 삶을 설계하고 공동의 가치를 지키며 의견을 조율하고 목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한다. 반면 제 감정과 의지를 조율하지 못한 채 자유를 핑계로 무력을 휘두르는 자들은, 이웃의 삶을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존립 기반마저 무너뜨린다. 그들이 적대적 힘에 의존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믿지 않는 그들은 자기 뜻에 동조하지 않으면 다수를 폭정이라고 비난하고, 자신이 힘을 가지면 상대를 적으로 규정해서 배척하고 처단하려 한다.
이른바 민주주의 선진국으로 불리는 유럽마저 심각한 정치위기에 직면했다. 극우정당들의 확산과 우파 대중의 폭력성은 이제 위험수위에 도달했다.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강대국, 패권 국가들은 지금껏 인권과 정의의 이름으로 성전(聖戰)을 벌여왔다. 그러나 오늘날 그들이 더는 명분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우끄라이나전쟁에서도 엿볼 수 있다. 명분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주저없이 말을 왜곡하고 오염시킨다. 트럼프는 우끄라이나전쟁 종식을 공언하는 한편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휴전 합의 후 노골적으로 친이스라엘 정책을 펴며 가자 점령 계획을 발표하는 등 평화 노력을 위협하고 있다. 우리는 철저한 이윤추구 행위가 전쟁을 영속화하고 세계화하는 위태로운 현장을 목격한다.
국제정치 지형의 후퇴 속에서도 한국 시민의 자기규율과 민주적 연대의 노력은 날로 빛을 더한다. 주권자 시민의 정치적 정당성은 민주와 법치의 균형에서 생명과 활력을 지닌다. 민주주의는 자기통치와 이에 기반한 집단적 규율의 원리이므로 스스로 만든 규칙과 질서를 지키려는 대중적 노력이 필수적이다. 또한 시민이 공적 의제를 내세워 공론장을 조성하며 정치와 국가를 추동하는 주권정치는 거대국가가 추구하는 힘의 논리와도 다르다. 20세기 초 한국인의 염원은 조선의 독립만이 아닌 동양평화, 세계평화였다. 한국의 독립과 민주주의가 세계평화와 국제공조의 초석이 되길 바랐다. 문명의 정수는 논쟁하고 겨루되 폭력을 쓰지 않고도 서로 다른 존재가 공존하는 묘법에 있다. 폭력을 막고 전쟁을 종식시키고 종전을 이끌어내서 평화에 이르는 민주주의, 이것이 백년 전 한반도의 염원이었으며 곧 세계에 모범이 될 한국의 선도적 민주주의일 것이다.
천년 전 중국 송나라 승려 도원(道原)은 『전등록』 30권을 지어 진종(眞宗) 황제에게 바쳤다(『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1004년). 이 책은 1372년(공민왕 21)에 고려에서 처음 간행된 이후 조선에서도 두루 읽혔다. 등불을 전수한다는 ‘전등’이라는 말은 불교의 진리, 석가모니 부처의 심안으로 밝힌 불법의 정수를 스승과 제자가 주고받아 계승한 것을 말한다. 『전등록』은 부처로부터 진리의 등불을 전수받은 불교 조사(祖師)와 제자들의 명단 1,700여명을 소개한다. 이곳에 신라와 고려의 학승도 수십명 등장한다. 스승에게서 가사와 발우를 신물(信物)로 받은 제자들은 불법의 정통을 자랑하며 선종(禪宗)의 계보를 이어갔다. 유교도 불교의 ‘전등’을 모방해서 정통 유학자의 계보, 즉 도통(道統)을 만들었다. 성균관 대성전에 유교의 도통을 이은 동국(東國) 지식인 18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들은 진리를 계승한 소수의 인물들이다. 19세기 한반도의 동학에 이르러 비로소 다수의 민중이 진리의 도를 전수하는 도통(道通)의 주인공이 된다. 부녀가 도통한 세상이 올 것이라 말한 해월 최시형, 그는 여성뿐만 아니라 어린이, 사물까지 아우르는 신통방통한 세상을 열어 보였다. 그는 진리의 등불을 수많은 이들에게 건넸다.
이제 천년의 시간을 거친 전등 서사는 촛불시민, 응원봉 주권자의 빛의 서사로 이어지고 있다. 스승과 제자 사이 비밀스러운 등불의 전수를 넘어 수많은 빛의 물결이 암흑의 위기에서 서로를 돕고 지키는 경이로운 장면들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 나와 이웃이 함께 도통한 세상, 빛이 여는 새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선조와 우리, 미래 세대의 수많은 생령(生靈)을 살리는 길, 서로의 삶을 잇고 확장하는 더 깊고 넓은 정신의 광맥, 도맥을 뚫어가는 길이 필요하다. 항거와 저항을 축제의 장, 어울려 함께 즐기는 여민동락의 장으로 만들어낸 우리 시민의 지혜와 재치에 긍지와 자부심을 느낀다. 우리, 지치지 않게 서로 북돋고 경쾌한 걸음으로 마주하며 끈질기게 나아가자. 낡은 언어, 오염된 말의 늪을 지나 시민 주권자가 만들어가는 새로운 말의 권위, 삶을 지키는 말의 힘을 상상해본다. 민주적 시민은 자기 삶의 주인이며 동시에 정치의 주인이라는 점을 우리가 만들어갈 질서있는 세상에서 보여주자.
이번호 특집은 바야흐로 세계정치사에 새로운 모범이 될 ‘K민주주의의 약진’을 소개한다. 내란 폭력의 깊은 어둠을 뒤로하고 우리는 촛불혁명의 힘찬 재출발에 동참했다. 백낙청은 ‘변칙적 사태’를 겪으면서도 촛불혁명이 진화했음을 실감나게 들려준다. 나아가 세대와 계층을 아우른 촛불의 놀라운 행보에도 불구하고 이에 부응할 새로운 사상이 부재함을 지적한다. 그는 한반도 체제변혁과 중도세력의 확장을 도모하는 ‘변혁적 중도’로 촛불시민의 열망에 화답한다. 동학혁명, 3·1운동, 독립과 민주화로 이어진 역사가 ‘중도와 개벽’의 정신으로 일궈낸 민주와 평화의 과정임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이어지는 김소라의 글을 통해서는 촛불광장에서 빚어진 연대와 배려의 민주주의를 만나게 된다. 그는 광장에 새로운 희망을 싹틔운 2030 여성의 활약상을 보여준다. 과거에서 이어진 역사적 시야의 확장, 온·오프라인의 담론과 실천의 연계, 일상과 정치의 재편으로 타인과 함께하는 세상의 모습을 꿈꾸게 한다.
한홍구는 기득권 유지에만 급급한 한국 보수세력이 지금껏 민주주의와 접속하지 못한 이유를 백여년 역사에서 역동적으로 그려낸다. 그는 보수세력의 역사적 DNA를 식민지시대 친일세력의 ‘앞잡이’ 기질로 묘사한다. 주인으로 책임지는 것이 아닌, 강자에 굴복해서 이득을 취한 행태를 꼬집은 것이다. 군사력과 힘을 숭배하고, 반민중적·엘리트적이며, 상대를 박멸하면서 생존했기에 보수세력이 어떤 대화와 타협도 학습하지 못했고 급기야 극우파쇼로 전락했음을 선명히 드러낸다. 이남주의 글은 ‘K담론을 모색한다’ 연속기획의 다섯번째 편으로, ‘변혁적 중도’의 관점에서 김대중사상을 논구한다. 그는 시장경제, 남북관계를 민주주의 진전과 연동해서 사유한 김대중의 선구적 통찰을 소개한다. 촛불시위를 평화가 유지된 직접민주주의로 평가한 김대중 발언에서, 한국 시민의 잠재력이 민주주의 위기에 처한 세계인에게 ‘지구적 민주주의’의 희망을 비추는 장면을 그려본다.
대화에서는 한국이 미국 트럼프 2기 정부와 변화하는 세계질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두고 김준형 김창수 최배근이 밀도있는 토론을 벌였다. 트럼프는 명분이나 가치를 내던지고 철저하게 자국 이익만 쫓는 ‘미국 우선주의’ 전략을 내세우며 긴장과 불안을 고조시키고 있다. 미중경쟁 악화는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우리에게 난제라 할 수 있다. 대담자들은 우리의 민주적 역량을 강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의 전략적 자율성을 높이며 다자 블록 형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자고 제안한다.
논단은 한국경제를 진단하고 과제를 제시한 이동진의 글을 실었다. 그는 2023년부터 내수위축에 따른 경기침체가 심각했는데, 지난 12·3 계엄 이후 정치 불확실성으로 인해 경제 불확실성이 더욱 악화되었다고 우려한다. 가계와 자영업자·소상공인 부채, 금융·외환시장 충격까지 실물경제에 타격이 이어지고 있고 국가신용도 하락 위험도 여전하다. 장기침체에 빠진 내수, 자영업자 부채문제에 정부가 발 벗고 나서야 함을 역설한다. 현장의 홍성수 글은 계엄 이후 국민 분노와 항의가 빗발친 인권위의 실태를 소개한다. 일부 인권위원들이 내란 피의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방어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논란이 일었다. 필자는 인권위에 적합한 인권위원 선정, 인권위의 헌법기구화, 시민의 관심을 통해 무너진 인권위를 바로 세우자고 제안한다.
그간 호평을 받았던 산문 기획 ‘내가 사는 곳’에 이어 이번호부터는 ‘내 삶을 돌본 것’ 연재가 진행된다. 첫 문을 연 조효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오랜 박해와 탄압에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온 삶의 자세인 ‘수무드’를 꿋꿋하고 유쾌한 의연함이라 소개한다. ‘비관과 낙관을 넘어, 함께 행동하면서 의연하게 희망을 만드는 길’, 그것이 우리 삶을 돌보며 기후위기에도 지혜롭게 대처하는 길일 것이다.
문학평론란에는 두편의 글이 실렸다. 염무웅 비평 60년의 내공이 녹아든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을 유희석이 ‘우리 것다운 문학을 향한 사랑과 헌신’으로 풀어냈다. 그는 염무웅의 깊은 자기성찰과 엄밀한 읽기, 비평에서 발휘되는 일깨움의 힘에 주목했다. 엄정함과 유연함과 온기가 응축되어 구현된 염무웅 평문의 힘을 면밀히 밝힌다. 김미정은 소설적 커먼즈의 가능성을 살핀다. 이주혜 소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에서 주인공의 일기를 통해 소유나 권리 개념으로 식별될 수 없는 사건과 존재의 얽힘으로서의 ‘나’의 1인칭 서사가 곧 타인의 다면성을 표현하는 열린 서사임을 설득력있게 전한다.
봄호의 시는 고재종에서 최현우까지 12인 시인들의 깊은 고심으로 빚어낸 다채로운 신작들을 선보인다. 투명하고 밝은, 때로 묵직하면서도 담대한 시어들이 새삼 우리의 사유와 감각을 일깨운다. 소설은 김유나 임솔아 임현 황정은의 단편을 소개한다. 평범한 일상 속 위태로운 문제들을 읽어내는 작가들의 섬세함이 돋보인다. 작가조명에서는 김중일 시인이 『미래의 하양』을 출간한 안현미와 동행했다. 그는 과거와 현재를 딛고 ‘고백하는’ 시인인 안현미가 이제 ‘미래’를 호명하는 데까지 나아간 점을 다정하게 포착한다. ‘하양’은 사랑의 의지로 함께 쓰고 그려낼 미래의 모습, 공감하고 함께 애도하며 연대하는 사랑의 메타포라고 말한다.
신간을 엄선해서 논평하는 문학초점에서는 조대한이 남현지의 첫 시집과 최재원의 시집을, 김주원이 전지영의 첫 소설집과 김유진의 장편소설을 세심하게 살펴본다. 성현아는 서정시의 변혁성과 시의 가능성을 모색한 양경언의 비평 그리고 인아영의 비평을 탐독하여 소개한다. 이번호 촌평란에서도 독자들의 관심에 부응할 만한 의미있는 신간들을 엄선해서 전한다.
제23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작이 독자들을 만난다. 이가인(시), 정이안(소설), 김채은(희곡), 최선재(평론)의 신선한 작품들은 봄호를 읽는 즐거움을 더할 것이다. 수상자분들께 진심 어린 축하의 말씀을 전한다.
한국 시민은 ‘지구적 민주주의’를 진지하게 고민할 시점에 이르렀다. 전쟁과 폭력, 거짓과 선동이 우리를 위협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꿈꾸는 문명한 세상의 모습일 리 없다. 폭정과 무력이 아니라 가치와 이상을 추구한 것이 우리의 전통이자 자산임을 믿는다. 이제 촛불시민의 꺼지지 않는 등불이 민주와 평화의 심지로 타올라 세상을 밝히고 있다. 『창작과비평』도 독자들의 열망과 기대에 부응하며 멈춤없이 정진하리라 다시 한번 다짐한다. 여러분의 엄정한 비평과 따뜻한 관심을 부탁드린다.
백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