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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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시에 이르는 두 갈래의 길

 

 

조대한 趙大韓

문학평론가. 평론집 『세계의 되풀이』 등이 있음.

blackdooly16@naver.com

 

 

 

빛과 어둠, 미와 추, 안과 밖 등의 이분법적 알레고리는 대상을 양 극단으로 단순화하는 위험을 품고 있지만 동시에 그 명료한 구분에 힘입어 모종의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특히 그것은 낯설고 생소한 영역을 탐사하는 이들에게 좌표를 가늠하는 선명한 종횡의 축이 되어준다. 신형철은 시사(詩史)를 관류하는 두개의 근원적 기질로서 ‘시 아닌 것’들을 솎아내는 ‘야금술’의 길과 ‘시 아닌 것’들을 긁어모으는 ‘연금술’의 길을 언급한 적이 있다(신형철 「황병승」, 『느낌의 공동체』, 문학동네 2011). 이같은 비유 역시 도식화의 위험성을 지니고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언어예술인 시의 작동방식을 간결하게 설명하는 데 탁월한 면이 있다. 우선 ‘야금술’이란 말 그대로 광석에서 금속을 골라내는 방법이나 기술 일반을 뜻한다. 이는 비단 순수하게 정제된 시어만을 가리키는 표현은 아닐 것이다. 일상 속 매장되어 있는 시적 순간들의 발견과 불순물을 체로 거르며 그 언어들을 다시 제련하는 긴 조탁의 시간들까지 모두 포함할 것이다. 이에 비한다면 연금술은 추출과 정제보다는 변환과 생성의 과정에 가깝다. 그것은 비금속을 금, 은 따위의 귀금속으로 변화시키려 했던 옛 시절의 꿈처럼, 생소한 활자들의 조합을 통해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새로운 언어의 탄생을 갈구한다. 그러니까 한쪽에 오염된 단어들을 솎아내고 정련화한 시어와 여백만을 모아 시적 정수의 구심으로 향해가는 길이 있다면, 다른 한쪽에는 시에 어울리지 않는 낯설고 기이한 낱말을 접합하고 증식하여 제한된 시의 언어 바깥으로 뻗어나가려 하는 원심의 길이 존재하는 셈이다. 지난 계절 보석처럼 반짝이는 수많은 시집들 중에서 이같은 상반된 시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두 사례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최재원 『백합의 지옥』(민음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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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원의 이번 시집에는 수십 페이지의 장시와 여러 시편이 결합된 연작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대표적으로 언급해볼 작품은 첫번째 이야기로 제시되는 ‘목련 나무 아래에서’이다. 이 작품은 하나의 시상을 단계별로 연쇄, 확장하여 종국에는 커다란 덩어리의 시적 세계를 축조하는 시인의 특장을 잘 보여준다. 흐름상 작품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1장에서 6장에는 소중한 이의 죽음을 대면한 ‘나’가 살인범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긴 여정을 떠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친애하는 “블랙홀”의 몸 정중앙에 박힌 가시를 보며 복수를 다짐한 나는 곰팡이, 실잠자리, 여름, 무뢰배 등을 만나며 그이를 찔러 죽인 가시를 찾아나선다. 이후 7장부터 마지막 11장까지는 범인의 정체에 대한 탐문의 과정을 조금 더 본격적으로 그리고 있다. 나는 민달팽이를 만나 가시처럼 긴 발톱을 분실했다는 돌연변이 자라의 증언을 듣고 그를 찾아간다. 민달팽이의 몸에서 나온 가시는 자신의 범행 일체를 자백하고, 가시의 사연과 푸념을 들은 내가 그것을 삼키며 시는 마무리된다.

화자의 기나긴 발자취와 다채로운 상징적 시어들이 어우러진 이 시는 해석의 진폭을 크게 열어둔 텍스트이다. 하지만 상실 이후 더욱더 커져가는 존재의 흔적을 뒤쫓는 여정이라는 점에서도, 상처를 곪게 만든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음에도 “살이 베이”고 “으깨질 때 비로소 뭔가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열망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서로를 찌르게 만드는 이들의 어리석은 생의 궤적이라는 점에서도, 이 작품이 그리는 ‘나’와 가시의 시적 형상은 아마도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밖에 없을 듯하다. 물론 이러한 단출한 명명은 이 작품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목련나무에서 한없는 심해로 이어지는 나의 애처로운 마음의 여정과, 해학적인 입말부터 추상적인 기호까지 모두 아우르는 기이한 “무형의 행렬”들을 조금도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끊길 듯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시집 속 작품들의 기다란 여로는 정확한 ‘이름’을 찾아나서는 과정의 일환인 듯싶기도 하다.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언어와 관습에 의문을 던지며 그것으로부터 애써 멀어지려 하는 과정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새벽의 다른 이름은 없나요」라는 작품에서 시인은 “새벽/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새벽을 안다고 말하지 마세요”라고 거듭 외치며 ‘새벽’이라는 이름에 들러붙어 있는 습관적인 이미지와 제한된 상상력을 거부하려 한다. 왜냐하면 그가 느끼는 새벽은 “아침 살을/갈라 내 집을/나서는 핏덩이”이자 “흐드러진 쇳노래 봄바닥 위/흐르는 반동강 꽁초”이고, “아직 푸른 어스름”의 시간이자 “그림자까지 운전석에 다/구겨 넣고 나서야 낙엽과 박스가 함께/춤추는 봄밤의 아찔한 목련” 내음이며, “살 고기 그림 자 비 뼈 밤 다귀 방 닫힌 불 꺼진 문 떨어진 빛”의 어름인 까닭이다.

새벽이라는 단일한 이름으로 지칭이 완료되는 순간 시인이 감각한 이 아름다운 새벽의 편린들은 모두 한순간에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러니 이 시집 속에서 끝없이 계속되는 과잉의 문장들과 무한히 이어지는 환유의 연쇄들, 보통의 문법에서 조금씩 어긋난 시어의 서순과 배치들, 세로로 된 오선지에서 다중창처럼 겹쳐 쏟아지는 텍스트들은 단순히 형식적 실험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말할 수 없는 것들의 이름을 말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시인이 형상화하고자 하는 ‘이름’이란 하나의 이름으로 지칭되지 않는 이름, 무한한 아름다움과 영원의 체적을 담을 수 있는 이름, 이 세상에 “없는 이름”(「너를 그리는 데 이름은 필요 없으니」)인 듯하다. 잔인하게 유폐된 이름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언어의 불가능한 바깥을 향해 시인은 고집스레 명명을 유예하며 “이름이 있는 것에서 다른 이름이 있는 것으로 가는”(「이름 없는 바람의 여행」)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이번 시집의 표제 ‘백합의 지옥’을 돌아보자. ‘지옥’이라는 이름과 함께 쉬이 떠오르는 문학작품은 아마도 단테의 『신곡』일 것이다. 작가이자 주인공인 단테가 지옥, 연옥, 천국을 차례로 방문한 이야기를 담은 이 장편서사시는 지금껏 서구 문화권에서 지옥의 이미지를 전유하는 대표적인 텍스트로 남아 있다. 한국문학 내의 인상적인 지옥도 또한 여럿 거론 가능하겠으나 시집과 겹쳐 반복되는 ‘목련’과 ‘나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춘다면 최은미의 「목련정전(目連正傳)」(『목련정전』, 문학과지성사 2015)을 언급해볼 수 있겠다. 현세의 끔찍한 지옥도의 한 풍경을 그려낸 이 작품은 잘 알려진 것처럼 검수지옥, 화탕지옥, 아비지옥 등이 등장하는 불교의 설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매혹적인 이야기들의 주인공들은 낯선 지옥의 모습과 이방의 존재들을 현실의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매개자로 남았다.

『백합의 지옥』의 시적 주체 또한 이질적인 존재들과 마주하며 깊은 바다보다 더 깊고 뜨거운 별들의 강으로 나아가거나(「별늪」), 시어를 찢고 쪼개고 갈라 세상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의 장소를 찾아 나선다(「목련은 죽음의 꽃」). 시인은 지옥의 선구자들이 으레 그러했던 것처럼 낯익은 현실의 문법 너머로 나아가 그곳에서 만난 미지의 풍경을, 시 바깥의 시를, 이름 아닌 이름들을 우리에게 전해주려는 듯하다. 물론 바깥의 언어를 대면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일 터이다. 현실의 중력과 냉소는 전위의 옷자락을 거듭 잡아당길 것이고 꿈의 크기와 등가로 교환되지 않는 결과물은 매번 커다란 고통을 수반할 것이다. 하지만 과거 연금술사들의 허무맹랑했던 시도가 그 수많은 실패와 좌절에도 의도치 않은 성과를 남겼던 것처럼, 익숙한 언어의 바깥으로 나아가려 하는 시인의 발걸음은 어떤 방식으로든 현실의 장을 넓혀갈 것이다. 한국시사에 펼쳐질 새로운 이방 세계의 풍경은 지금 여기에 있다.

 

 

남현지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창비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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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원의 시집이 말을 덧붙이고 증식하여 언어의 생소한 잉여를 만드는 방식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면, 이어서 소개할 남현지의 시집은 불필요한 말과 감정을 줄이고 덜어내어 자신과 주변의 풍경까지도 간결하고 투명하게 정련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시의 무대는 두렵고 낯선 지옥이 아닌 기시감이 들 정도로 익숙한 우리의 일상이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보기 드물게 정돈된 시어의 호흡과 배치이다. 「호수공원」을 보면 벤치에 앉아 고요히 주변 정경들을 바라보는 ‘나’가 등장한다. 나는 무언가 특별한 상념을 떠올리거나 감정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생각이 없”이 그저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다. “삽심분 전에 본 사람”은 영상이 반복 재생되듯 “다시 옆을 달리고 있”고, “큰 개가 묶여 있”는 것처럼 “고요하게” “호수는 잘 묶여 있”다. 나는 조용한 이 순간에 썩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비슷한 분위기가 다른 작품에서도 되풀이된다. 「중앙공원」에서 ‘나’는 여행을 떠난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어딘지 묘하게 생동감이 없다. 익숙한 장면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묘사는 구체적이지 않고” 그곳에서 들려오는 소음 또한 “짐작할 수 있지만/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 어느 도시에나 하나쯤 있을 법한 중앙공원처럼, 이 시는 현장의 구체성과 소음이 제거된 담담한 풍경 하나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다만 그것은 고유의 울퉁불퉁한 굴곡을 지닌 유화라기보다는 매끈하고 부드럽게 인쇄된 이미지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이 현실과 완전히 격리된 침묵의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방 바깥에선 몇년째 공사의 소음과 커다란 음악 소리가 멈추지 않고 있다(「골목의 증식」). 좁은 지하철에서 사람들과 이리저리 부대끼는 나는 바깥으로 밀려나지 않으려 여전히 “발가락에 힘을 주”고 일상을 견딘다(「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 그러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이 혼란스러운 세계에 적당히 적응하게 되었나보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음악 좀 꺼달라는 말을/제일 잘하게 되었”(「골목의 증식」)고, “귀를 막고 투명한/해파리가 떠다니는 영상을 재생”하거나 즉각 사랑할 수 있는 “개, 고양이” “판다”(「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의 알고리즘을 활용하여 너절한 세계와 나 사이의 문을 간편하게 닫을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나’는 안전한 일상과 무탈한 건강을 지키기 위하여 자신의 일면을 부러 마모시켜 둔감하게 만든 것 같다. 이는 일종의 자발적 제약이자 구속일 것이다. ‘나’가 터득한 그것은 목줄을 차고 있는 개와 잘 묶여 있던 호수처럼 이 세계를 안정적으로 작동하게 하는 무형의 끈에 다름 아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이나 금지된 개천에 들어가지 않는 일, 시기마다 꼬박꼬박 세금과 정기후원을 납부하는 일은 시민으로서 나의 위치를 공고하게 할 것이다. “언제 같이 밥 먹어요”(「거래처에서 배운 것」)라고 건네는 의례적인 인사나 “좋은 말” “하나 마나 한 말” 누구에게도 상처주지 않고 “어떤 마음에도 남지 않”는 “달콤”하고(「철수」) 텅 빈 상징적 제스처는 타인과의 관계를 보다 부드럽고 편안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고뇌, 열망, 후회”와 같은 거칠고 열띤 감정의 토로가 아니라, 크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잔잔한 “미풍 같은 시”(「피서」)이다. 그것은 “바깥에서” 쉽게 “안을 확인할 수 없”(「사양합니다」)는 사적 공간이자 외부에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으려 하는 내 마음의 건축물인 듯하다.

현실의 소음이 크고 거셀수록, 타인과의 관계가 복잡하고 불안할수록 우리 역시 담백하게 정제된 이 언어의 직조물에서 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같은 미감은 시의 호흡과 형식을 통해서도 증대되는데 “여름을 좋아합니다/야구를 좋아합니다//아마도/늙어가고 있습니다”(「버드나무와 오리」), “슬픔 있어도 됩니다/앉아도 됩니다/의자 샀어요”(「공휴일」) 같은 정형적인 음보 단위의 호흡과 안정적인 행의 구조는 읽는 이의 심리적 평정과 이어져 조화로운 쾌의 느낌을 가속화한다.

한데 이토록 담담하고 무감한 그 세계가 마냥 평화롭고 행복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빛의 생산」이라는 작품 속엔 담배를 끊었다고 말하는 ‘나’가 등장한다. 나는 불타오르는 모든 물건을 집에서 없앴다. 이제 내 생활의 온도를 뜨겁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전기뿐이다. “만두 없는 세계”는 슬프지만 감내할 수 있고, 직접 본 적도 없는 “종달새”의 멸종 또한 나와는 크게 관련이 없다. 심지어 “나 없는 세계”도 지금껏 그래왔듯 별문제 없이 굴러갈 것이라 여기지만 “전기 없는 세계”는 “상상할 수 없”다. 전기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처럼 어느덧 “자연”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송전탑과 전신주, 우라늄과 화석원료, 노동과 산재, 잊혀진 기억들이나 “누구인지 당장 떠올릴 수 없”는 “당신의 죽음”(「바깥으로」)이 아닌 요금명세서의 숫자로만 그 실물감을 드러낸다. “미세 플라스틱”이 섞여 “남극에 내리는 눈”(「축적과 이동」)과 “지금도 자연적으로/녹아서 무너지고 있”는 “희고 푸른 빙하”는 추상화된 “광물”(「실내장식」)이나 그림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바야흐로 세계는 안전하고 무해하게 축소되었다.

어쩌면 당신도 이 일상의 단면과 정련된 이미지에서 어떤 섬뜩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유계영 시인이 정확하게 지적했듯(추천사)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깨끗한 물을 보면 갑작스레 찾아오는 두려움과 비슷한 감정일 것이다. “이웃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도/아침이면 연어가 도착”하고 “파업을 해도/택배는 멈추지 않고 도착”(「전자랜드」)하는 이 편리한 세계에서 문득 이곳이 멀쩡하게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에 일순간 느끼게 되는 기괴함 같은 것 말이다. 투명하게 제련된 칼과 귀금속 이면에 피와 전쟁의 역사가 숨어 있는 것처럼, 시인의 맑고 담담한 이미지들은 더이상 “고통 없는 세계”(「빛의 생산」)를 상상할 수 없고 타인의 신음마저 백색 소음처럼 취급되는 이곳의 둔감함을, 모두가 아픈데도 아무도 병들었다 여기지 않는 우리들의 이상한 건강함을 되비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독해일 따름이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근래 흔치 않은 고요한 시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환호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패배한 주체와 무기력한 젊음을 찾아내어 한숨을 내쉴 수도 있다. 혹자는 화자의 단정한 독백에서 작은 평온함과 개운함을 체감할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마음에 작은 일렁임이 남았다면 그것은 투명하게 정제된 시어와 여백들 사이에서 당신이 지나쳤거나, 꿈꿨거나, 기도했던 무언가와 대면했기 때문일 것이고, 이는 시인의 시가 명백히 성공했다는 뜻일 터이다.

조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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