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김채은 金採恩
서울예술대학교 극작전공 2학년. 1999년생.
chaeee0130@naver.com
0의 궤도
등장인물
최세은
김강현
영
채지훈
야구 캐스터
아나운서
장소
각각 4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동아리실, 옥상, 야구장, 우주.
1장. 동아리실
최세은이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모습으로 동아리실에서 혼자 빙빙 돌고 있다. 야구 중계가 시작된다.
캐스터 자, 이제 마운드에는 오늘의 선발투수, 오원식 선수가 오릅니다. 오원식 선수는 이번 시즌 매 경기 안정적인 피칭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오늘 경기에서도 좋은 모습 보여주리라 믿습니다. 상대 팀의 1번 타자, 전의환 선수가 타석에 들어옵니다.
김강현이 동아리실에 들어온다. 최세은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김강현 ……안녕하세요.
최세은 어! 뭐야?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요?
김강현 방금 들어왔어요.
최세은 아, 미안해요. 온 줄 몰랐어요.
김강현 괜찮아요.
최세은 여긴 무슨 일로 왔어요?
김강현 저, 동아리 들고 싶어서요.
최세은 정말요? 잠시만요.
캐스터 오원식 선수가 공을 던졌습니다. 역시 전의환 선수, 초구부터 힘차게 배트를 휘둘렀는데요. 공이 높게 떴습니다. 중견수! 공을 잡으러 달려가는데요. 아, 공이 글러브를 스치고 떨어지네요!
최세은 아악! 안 돼!
김강현 ……네? 동아리 신청기간 지났어요?
최세은 아, 아뇨. 미안해요.
김강현 ……괜찮아요. 아, 그리고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제가 후배예요.
최세은 그래요. 그래. 응. 우리 동아리 들어오고 싶다고?
김강현 네.
최세은 자, 이거 쓰면 돼. 동아리 신청서야.
최세은은 종이 한장을 건네준다. 김강현은 종이에 이것저것 쓴다.
최세은 근데 뭐 하는 동아리인지는 잘 알고 온 거지?
김강현 별 보는 동아리 아니에요?
최세은 어, 아닌데…… (뜸을 들이다가) 우리 동아리 이름만 ‘특별똥별’이고, 여기 야구 보는 동아린데……
김강현 야구요?
최세은 응.
김강현 ……
최세은 나갈 거야?
김강현 ……
최세은 아니지?
김강현은 동아리실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그때, 최세은이 ‘동아리 입부 신청서’를 뺏어든다. 두 사람은 동아리실 안을 둥글게 뛰어다닌다.
김강현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최세은 다른 애들 다 공부한다고 나가서 지금 우리 동아리 망하게 생겼거든. 12월까지 동아리부원 더 못 모으면 동아리실도 뺏긴대. 미안!
김강현 아니, 아무리 그래도!
최세은 별 보자. 별도 보고, 야구도 보면 되지.
김강현은 달리기를 멈춘다.
김강현 일단 좀 멈춰봐요.
최세은 우리 동아리 들어온다고 약속하면.
김강현 ……알겠어요.
최세은 고마워. 근데 너 야구 룰은 알지?
김강현 하나도 모르는데요.
최세은 (사이) 괜찮아. 내가 알려주면 되지.
김강현 근데 저 진짜 야구에 관심도 없고, 가만히 별이나 좀 보고 싶어서 동아리 들려고 했던 거라서요.
최세은 아, 맞다. 별! 별 보자! 여기 위에 옥상 가면 진짜 잘 보여. 너 옥상 가본 적 있어? 한번도 안 가봤지?
최세은은 퇴장한다. 김강현은 멍하니 서 있다.
최세은 뭐 해? 왜 안 와?
2장. 야구장
채지훈 어! 먼저 가! 나 조금만 더 있다가 갈게!
채지훈은 야구장에 혼자 남아서 컨디셔닝 훈련을 한다. 일정한 자세와 속도를 유지한 채로 원을 그리며 반복적으로 돈다. 그러다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채지훈 깜깜하네. 왜 별이 하나도 없냐.
3장. 옥상
최세은과 김강현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최세은 없긴 뭐가 없어. 잘 봐봐. 저기 있잖아.
김강현 어디요?
최세은 저기 저쪽에 엄청나게 밝은 거 있잖아.
김강현 아.
최세은 찾았어?
김강현 네.
최세은 저거 뭔지 알아?
김강현 북극성이잖아요.
최세은 맞아. 북극성 기준으로 저 별이 1루, 저건 2루, 그리고 저건 3루. 그럼 북극성은 뭐게?
김강현 4루.
최세은 ……홈.
김강현 아.
최세은 저 하늘이 야구 경기장이라고 치고, 설명해줄게. 우리 팀 투수가 공을 던지면 상대 팀 타자가 배트로 공을 쳐. 그럼 공이 날아가겠지? 그 공을 우리 팀 수비수들이 바로 잡으면 상대 팀 타자는 아웃. 근데 만약에 못 잡으면? 타자가 1루로 달려가. 이런 걸 안타라고 하는 거야. 이렇게 계속 안타 쳐서 2루 가고, 3루 가고. 홈까지 들어오면 1점 얻는 거야. 선수 한명이 홈으로 들어올 때마다 1점씩. 윷놀이해봤지?
김강현 네.
최세은 윷놀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 이해돼?
김강현 되는 것 같아요.
최세은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
김강현 음…… 그럼 수비수는 공 놓치면 뭐 해요?
최세은 자기반성.
김강현 네?
최세은 선수가 공을 놓치면 안 되지. 그게 그 사람들 일인데.
김강현 실수할 수도 있잖아요.
최세은 실수하면 안 되지. 프로잖아. 아마추어도 아니고, 프로.
김강현 왜요? 사람이잖아요. AI도 아니고, 사람.
최세은 ……아주 만약에. (사이) 수비수가 공을 놓치면, 최대한 빨리 잡아서 베이스로 던져야 돼. 타자보다 공이 베이스에 먼저 도착하면 아웃시킬 수도 있거든.
김강현 그래서 홈런이 좋은 거구나. 아예 밖으로 나가버려서 수비수가 못 잡으니까.
최세은 오! 똑똑한데. 맞아. 펜스 밖으로 공이 넘어가면 그냥 편하게 홈까지 들어오면 되니까. 홈런!
김강현 그럼 열심히 안 뛰어도 돼요?
최세은 응. 그냥 편하게 들어오면 돼.
김강현 옆돌기하면서 들어와도 돼요?
최세은 ……옆돌기?
김강현 네. 안 돼요? 퍼포먼스.
최세은 그런 건 아직 본 적 없는데.
(사이.)
김강현 아! 홈런 치면 최대 몇점까지 줘요?
최세은 맞춰봐. 몇점이게.
김강현 음…… 15점?
최세은 ……4점.
김강현 에이. 너무 짜다. 홈런 어려운 거 아니에요? 근데 왜 4점밖에 안 줘요?
최세은 (하늘을 가리키며) 저기 봐봐. 만약에 1루에 안타 친 사람이 한명 있어. 그리고 그다음 타자가 홈런을 쳤어. 그럼 1루에 있던 사람 들어오고, 홈런 친 타자가 들어오겠지? 그럼 총 몇점이야?
김강현 2점이요.
최세은 그치. 북극성이 홈이면 홈으로 나갈 수 있는 사람 몇명이야?
김강현 1루, 2루, 3루…… 세명이요.
최세은 3 더하기 1은?
김강현 4.
최세은 그러니까.
김강현 아! 그래서 4번 타자가 중요하다. 이런 말이 있구나.
최세은 맞아! 이제 야구에 대해서 좀 이해하네. 근데 너 이름이 뭐야? 우리 같은 팀 됐는데 아직 이름도 모르네.
김강현 같은 팀이요?
최세은 아, 같은 동아리.
김강현 ……
최세은 왜?
김강현 아니에요. 김강현이에요.
최세은 뭐? 김강현? 진짜로?
김강현 네.
최세은 진짜로 김강현이야? 거짓말이지?
김강현 이름으로 거짓말을 왜 해요. 그것도 김강현이라는 평범한 이름으로. 만약에 제가 거짓말을 했으면 더 멋있고 유명한 이름으로 했겠죠. 뭐, 예를 들면 차은우나 박보검 같은.
최세은 와, 미쳤다. 너는 어차피 우리 팀에 들어올 운명이었어.
김강현 갑자기요? 왜요?
최세은 우리 팀 리빙레전드 중견수랑 이름 똑같애. 와, 말도 안 돼.
김강현 리빙레전드 중견수가 뭔데요? 멋있는 거예요?
최세은 ‘중견수’는 수비수 포지션 이름이고, ‘리빙레전드’는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전설이라는 뜻이야. 엄청 멋있는 거지!
김강현 그럼 죽으면 다잉레전드예요?
최세은 ……그냥 레전드겠지.
김강현 아.
최세은 춥다. 이제 들어가자.
최세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퇴장한다. 김강현도 뒤따라 나간다.
김강현 근데 선배 이름은 뭐예요?
4장. 우주
영은 망원경을 들고, 누군가를 쳐다보고 있다.
영 내 이름은 영이에요!
(사이.)
영 이곳 인공위성에서 살고 있어요.
5장. 동아리실
아나운서 다음 소식입니다. 오늘 새벽 1시 30분에 작은 소행성 하나가 발견돼 천체학자들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육안으로도 관측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자리잡고 있는데요. 천체학자 인터뷰 연결해보겠습니다.
최세은이 동아리실로 들어온다.
최세은 네, 최세은 연결했습니다. 소행성? 그런 건 잘 모르겠고요. 그냥 야구나 보시죠?
김강현 ……
최세은 어제 내가 야구 룰 많이 알려줬잖아. 이제 실전으로 들어가야지.
캐스터 오원식 선수가 마운드에 오릅니다. 그리고 첫번째 투구를 준비하는데요. 던졌고. 전의환, 쳤습니다.
김강현 우와! 홈런이다!
캐스터 파울입니다.
최세은 저건 파울이야. 정해진 홈런 구역이 있는데, 그외에는 파울이야.
캐스터 오원식, 다시 공을 던지고. 타자는 쳤습니다! 중견수 쪽으로 날아가는데요. 아…… 중견수가 공을 놓쳤습니다. 충분히 잡을 수 있었던 공 같은데요. 아쉽습니다.
김강현 방금 우리 팀 수비수가 한번에 잡았으면 아웃시킬 수 있었는데! 맞죠?
최세은 ……실수한 것 같아. 그럴 수도 있지.
김강현 뭐예요?
최세은 뭐가?
김강현 저번에 선배가 그랬었잖아요. ‘실수하면 안 되지. 프로잖아. 아마추어도 아니고, 프로.’
최세은 그게 뭐. 그때 너도 그랬잖아. ‘왜요? 사람이잖아요. AI도 아니고, 사람.’
김강현 ……
최세은 ……아, 오늘 느낌이 안 좋다. 왠지 질 것 같애. 너 처음 보는 경긴데 지면 좀 그러니까, 오늘 경기는 안 본 셈 치고 그냥 별이나 보러 가자.
김강현 네? 아직 1회 초인데요.
최세은 내가 야구 한두번 보는 것도 아니고. 느낌이 딱 왔어.
김강현 ……
최세은 빨리 가자. 소행성 보인다며.
김강현 아직 해도 안 졌어요.
최세은 아, 곧 지겠지.
김강현 해도 지고. 경기도 지고?
6장. 야구장
채지훈 또 졌네.
채지훈은 또다시 컨디셔닝 훈련을 한다. 일정한 자세와 속도를 유지한 채로 원을 그리며 야구장을 반복적으로 돈다. 그러다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채지훈 여전히 깜깜하네.
7장. 옥상
최세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니야. 진짜 밝잖아. 잘 좀 봐봐.
김강현 보고 있어요.
최세은 저게 그 소행성 맞지?
김강현 맞는 것 같아요.
최세은 근데 저거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은데, 여기로 막 떨어지는 거 아냐?
김강현 당연히 아니죠.
(사이.)
최세은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김강현 아뇨.
최세은 ……
김강현 장난이에요. 뭔데요?
최세은 너는 별이 왜 좋아?
김강현 그냥 예쁘잖아요.
최세은 그럼 좋아하는 별자리 이런 것도 있어?
김강현 네.
최세은 뭔데?
김강현 천칭자리요.
최세은 천칭자리? 왜?
김강현 특별한 이유는 없는데, 제 생일 별자리라서요.
최세은 생일이 언젠데?
김강현 10월 23일이요.
(사이.)
김강현 저도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최세은 아니.
김강현 복수하는 거예요?
최세은 응.
김강현 ……
최세은 장난이야. 뭔데?
김강현 야구가 왜 좋아요?
최세은 그냥 재밌잖아.
김강현 그게 다예요?
최세은 너도 특별한 이유 없었잖아.
(사이.)
최세은 사실 나 야구는 그렇게 안 좋아해.
김강현 네?
최세은 나는 우리 팀 중견수의 독기가 좋아.
김강현 ……?
최세은 내가 운 좋게 홈커존에 간 적이 있거든.
김강현 홈커존이요?
최세은 홈런커플존.
김강현 아.
최세은 친한 언니가 애인이랑 가려고 예매했던 자린데, 경기 당일에 차여서 급하게 날 데리고 갔거든. 나는 야구 룰 하나도 모르는데. 아무튼 갔는데, 홈런커플존이 중견수랑 진짜 가깝다? 여기서 한…… 저기쯤?
최세은은 채지훈이 있는 쪽을 가리킨다.
최세은 그래서 신기해서 계속 쳐다봤어. 그러다가 중견수랑 눈이 마주쳤는데.
타이밍 좋게 옥상 아래 야구장에 있던 채지훈이 최세은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관객들에게는 두 사람 눈이 마주친 것처럼 보인다.
최세은 그 순간, 어딜 봐야 할지 모르겠더라. 나 원래 사람 눈 진짜 잘 보는데. 이상했어. 내 눈이 잘못된 줄 알았다? 온 세상이 새하얘지는 것 같았거든.
김강현 반한 거예요?
최세은 아니. 그런 건 절대 아니야.
김강현 그럼 뭔데요?
최세은 사실 나도 아직 뭔지 정확하게 잘 모르겠는데, 그냥 그 사람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너무 멋있었어. 뭔가를 해내고 말겠다는 독기. 공 하나 잡겠다고 죽도록 달려가고, 베이스 하나 더 밟아보겠다고 이 악물고 달려가고. 그런 게 너무 멋있어 보이더라. 나는 살면서 단 한번도 뭔가에 그렇게 진심이었던 적이 없거든.
김강현 ……
최세은 그리고 그날 경기에서 졌는데, 그 사람이 너무 서럽게 울더라. 나는 내가 잘 안 우는 게 멋있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아니었어. 뭔가에 진심인 적이 없었으니까, 울 일도 없었던 거야.
김강현 그 이후로 다시 야구장 간 적 있어요?
최세은 아니. 무서워서 안 갔어.
김강현 뭐가요?
최세은 이러다가 야구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될까봐.
김강현 그게 왜 무서워요?
최세은 아무튼.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마음이 편해.
김강현 대충 알 것 같긴 한데, 신기하네요. 우연히 한번 본 이후로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된 게. 사실 그 중견수는 선배한테 뭐 해준 게 없잖아요. 그냥 자기 할 일 열심히 한 거지.
최세은 너도 별 좋아하잖아. 별은 너한테 뭐 해준 거 있어?
김강현 아뇨. 딱히 해준 건 없는데……
8장. 우주
영 해줄 수만 있다면 뭐든 다 해주고 싶다는 사실을 당신은 아나요? 아마 모를 거예요. 저는 인공위성 위에 올라탄 채로 깜깜한 우주 속을 방황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당신을 발견했죠. 당신을 발견한 그 순간, 섬광이 보였어요. 저는 제 시각 처리 기능에 오류가 생긴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믿을 수 있나요? 이 까맣고 광활한 우주가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새하얗게 변했다니까요. 이쪽을 향해 고개를 55도쯤 들고, 하늘을 응시하는 당신의 모습은 아름다웠어요. 하나의 예술작품 같았어요. 하지만 제 데이터베이스 속에 이런 예술작품은 없어요. 당장 당신에게 날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바로 이런 게 인간들이 말하는 ‘꿈이 생겼다’는 감정인 건가요?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감정과는 분명 달라요. 당신은 인공지능인 내가 가장 습득하기 어려웠던 감정을 단 한순간에 깨닫게 해주었어요. 유능하다던 과학자들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을 당신이 해낸 거예요. 당신은 나에게 꿈을 알려줬어요.
9장. 동아리실
아나운서 한국우주국은 이전에 소행성으로 추정되었던 천체가 조사 결과, 인공위성 ‘영’으로 밝혀졌다고 알렸습니다. 인공위성 ‘영’은 3년 전 발사된 위성으로 인공지능을 탑재하고 있으며, 외계인 탐사 및 새로운 행성 관측을 하기 위해 우주로 보내졌습니다. 하지만 발사 직후 통신이 끊긴 채로 궤도를 돌고 있었다고 합니다. ‘영’은 최근 궤도를 이탈해, 일정한 속도로 지구와 가까워지고 있으며 정확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 속도대로라면 한국 날짜로 10월 23일경 지구에 추락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과학자들은 인공지능을 가진 인공위성 ‘영’이 도착한다는 사실에 많은 기대감을 품고 있습니다.
최세은 봐봐! 내 말이 맞았잖아. 어쩐지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더라니까.
김강현 어떻게 알았어요?
최세은 눈에 보이니까.
김강현 진짜 신기하네요.
최세은 나도 신기하긴 하다. 어떻게 그걸 봤지? 대박이다. 개대박이다. 진짜대박이다. 삼진대박이다. 근데 10월 23일이면 네 생일 아니야?
김강현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요?
최세은 저번에 말해줬잖아.
김강현 와, 그걸 기억했어요? 감동이다. 개감동이다. 진짜감동이다. 삼진감동이다.
최세은 오버하지 마.
김강현 네.
최세은 딱 네 생일날 별이 떨어지네.
김강현 그러게요.
최세은 생일 선물인가봐.
(사이.)
김강현 근데 인공위성도 별이에요?
최세은 인공위성 할 때 마지막 ‘성’이 ‘별 성’ 아니야? 그럼 별이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별.
김강현 듣고 보니 맞는 거 같네요.
최세은 근데 쟤, 궤도 이탈 왜 했을까? 정해진 대로만 빙빙 돌면 편할 것 같은데.
김강현 재미없었나보죠.
최세은 뭐가.
김강현 정해진 대로만 빙빙 도는 게요. 아니면 가고 싶은 데가 생겼을 수도 있죠. 꿈이 생겼거나.
최세은 별이?
김강현 인공지능 있다면서요.
최세은 아, 맞네.
(사이.)
최세은 소원 빌면 되겠다.
김강현 소원이요?
최세은 별똥별 잡으면 소원 이루어진다는 말 몰라?
김강현 별똥별 떨어질 때 소원 빌면 이루어지는 거 아니에요?
최세은 에이, 그건 가짜고. 잡아야 진짜 이루어진대.
김강현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보는데요.
최세은 그래? 안 유명한 말인가봐.
(사이.)
김강현 믿어요?
최세은 뭘?
김강현 별똥별 잡으면 소원 이루어진다는 말. 믿냐고요.
최세은 음…… 응. 믿어. 근데 그냥 안 믿을래. 어차피 못 잡잖아.
(사이.)
김강현 선배. 만약에 저 인공위성이 지구에 더 가까워지다가 떨어지면 그게 별똥별인 거죠?
최세은 그치.
김강현 제가 잡아드릴까요?
최세은 뭐? 네가 무슨 수로.
김강현 중견수처럼?
최세은 하하하. 네가 잡으면 네 소원이 이루어지겠지.
김강현 제가 잡아서 선배한테 송구하면 되잖아요. 우리 같은 팀이니까. 팀플레이.
최세은 오. 좋은데?
김강현 근데요.
최세은 또 뭐.
김강현 소원 빌 수 있으면 뭐 빌 거예요?
10장. 야구장
채지훈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도하고 있다.
채지훈 우천 취소. 이게 바로 제 소원이에요. 제발요. 내일 경기 우천 취소되게 해주세요. 비도 오고, 바람도 불고, 천둥도 치고, 아주 벼락까지 떨어지게 해주세요. 경기장 위에 있는 시간이 너무 끔찍해요. 어떻게든 버텨보고 싶은데, 너무 힘들어요. 근데 또 여전히 야구가 좋아요. 그냥 애초에 야구를 좋아하지 말 걸 그랬나봐요.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일단 내일 경기라도 안 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이렇게 간절하게 빌게요. 내일 경기 우천 취소되게 해주세요, 제발요.
11장. 동아리실
캐스터 화창하고 선선한 오늘 날씨, 정말 야구하기 딱 좋은 날씨네요. 오늘 날씨처럼 우리 선수들도 좋은 경기 펼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운드에는 선발투수 오원식이 오릅니다. 첫번째 공. 스트라이크. 두번째도…… 스트라이크! 오늘 컨디션 좋아 보이는데요?
김강현 여기서 한번만 더 스트라이크 하면 삼진아웃이죠?
최세은 맞아.
캐스터 오원식, 공 던집니다. 아쉽게도 살짝 빠지네요. 볼. 다시 던집니다. 아, 이번에도 볼. 다시 던지는데요…… 이번에도 볼이네요. 투 스트라이크에 쓰리 볼. 오원식 선수, 이 상황을 잘 대처할 수 있길 바랍니다. 오원식. 다시 공을 던집니다. 타자는 안 치고 그냥 흘려보냈는데요. 아…… 볼이네요. 볼넷으로 타자에게 1루 진루를 허용해주고 맙니다.
최세은 아……
캐스터 상대 팀 2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타자, 공 쳤습니다. 굉장히 잘 맞은 것 같은데요. 중견수 앞쪽으로 떨어진 공. 중견수가 빠르게 잡아서 송구합니다. 안타네요. 1루타. 괜찮습니다. (사이) 이어서 3번 타자. 투수, 공 던지고. 타자, 쳤습니다. 이번에도 꽤 잘 맞은 공으로 보이는데요. 중견수와 좌익수 사이로 날아가네요. 중견수, 공을 쫓아 달려가는데요. 어? 좌익수도 달려갑니다.
최세은 아, 안 돼. 안 돼. 안 돼. 싸우지 마.
캐스터 아…… 이럴 수가. 중견수와 좌익수가 뒤엉켜서 공을 놓치고 마네요.
김강현 지금 이거 그거죠?
최세은 뭐?
김강현 삼진오버.
캐스터 수비 에러입니다.
김강현 수비 에러요?
최세은 응. 수비에서 실수를 말하는 용어야.
김강현 사람도 에러 나네요.
캐스터 명백한 중견수의 실수입니다. 좌익수가 잡아야 했을 공으로 보이는데, 중견수가 무리하게 따라갔네요.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만루인데요. 이제 4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투수! 안 좋은 상황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더욱 침착해야 합니다.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좋습니다! 오원식, 공 던졌습니다. 타자, 쳤습니다. 공이 중견수 쪽으로 날아가는데……
최세은 설마.
김강현 설마. 설마. 삼진설마.
캐스터 담장을 넘어갑니다. 홈런. 중견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저 공을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김강현 그냥 별이나 보러 갈까요? 안 본 셈 치고.
최세은 좋은 생각이다.
김강현 가요.
최세은 ……이번엔 진짜 잘할 줄 알았는데.
12장. 야구장/우주
채지훈은 야구장에 혼자 앉아 야구공을 만지작거린다.
채지훈 나도 이번엔 진짜 잘해내고 싶었는데.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열심히 하려고 그런 건데. 뭐가 이렇게 다 꼬이고 잘 안 되냐.
영은 우주에서 김강현 쪽을 바라본다.
영 잘해낼 수 있겠죠? 어떻게든 해낼 거예요. 당신은 무의미하게 원을 그리며 궤도를 돌던 제게 새로운 목적지를 만들어줬어요. 아, 목적지가 아니라 꿈이 맞는 말이죠. 저는 이 세상 모든 언어로 ‘꿈’이라는 단어를 말할 수 있어요. ‘드림, 수에뇨, 레브, 트라움, 소뇨, 드롬, 유메, 서뻐나, 지억 머, 빵아랍, 루야, 알롬, 드룀, 오네이로, 밈삐.’ 얼마가 걸리든 당신에게 날아갈 거예요. 그리고 이 모든 말들을 전해줄 거예요.
채지훈 야구를 잘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는데.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려도 기다릴 수 있는데.
영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최대한 빨리 갈게요. 기다려줘요.
13장. 옥상
김강현 괜찮아요?
최세은 뭐가.
김강현 기분 안 좋은 거 아니에요?
최세은 ……솔직히 안 좋지. 근데 뭐 어쩌겠어. 다음에 잘하길 바라야지.
김강현 왜 선배는 유독 수비를 못할 때 더 속상해해요?
최세은 몇번을 말해야 돼. 난 우리 팀 중견수를 좋아한다니까.
(사이.)
최세은 그리고 난 수비가 제일 멋있고 중요한 일 같아.
김강현 왜요?
최세은 ‘야구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야구는 8회 말부터 시작이다’ 이런 말 들어본 적 있지?
김강현 네.
최세은 그만큼 야구는 역전이 가능한 스포츠거든. 그래서 홈런이나 안타로 득점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 팀한테 점수를 내주지 않는 것도 중요해. 공격을 잘 막아내는 일. 호수비. 물론 개인 취향이겠지만, 나는 수비가 조금 더 멋있는 것 같아.
(사이.)
최세은 그리고, 어, 이 인생이라는 게 말이야.
김강현 갑자기요? 인생?
최세은 들어봐. 이거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는 얘기니까.
김강현 와, 영광이다. 말해봐요.
최세은 살다보면 홈런이나 안타처럼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잖아. 매번 홈런이나 안타만 치고 살면 좋겠지. 좋은 일만 생기면 사는 게 행복하겠지. 근데 절대 그럴 순 없고, 안 좋은 일도 분명 생기잖아. 힘든 일도 너무 많고. 나는 이런 것들을 잘 이겨내는 게 더 중요한 것 같거든? 그러니까, 나는 호수비가 너무 멋있는 것 같아. 본인한테 날아오는 공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면서 잡아내기 위해서 달려가는 게.
김강현 듣고 보니 꽤 그럴싸한데요.
최세은 인정이야?
김강현 네. 삼진인정.
최세은 (웃으며 혼잣말로) 아,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김강현 네?
최세은 벌써 12시 지났다고.
김강현 ……
최세은 들어가자.
14장. 우주/야구장
영 드디어 오늘이에요.
채지훈 오늘이네.
15장. 동아리실
캐스터 드디어 신인 드래프트 지명 날이 왔습니다.
김강현 신인 드리프트요?
최세은 아니…… 드리프트는 카트라이더 할 때나 하는 거고. 지금 하는 건 드래프트.
김강현 그게 뭔데요?
최세은 프로 구단에서 잘하는 고등학생 선수들 데려가는 거. 고교 지명. 엄청 중요한 거야.
김강현 그럼 지명 못 받은 사람들은 어떡해요?
16장. 야구장/우주
채지훈은 야구장에 주저앉아 울고 있다. 야구 장비를 다 내팽개친다.
채지훈 그러니까요. 저 진짜 어떡해요? 야구밖에 한 게 없는데. 뭐 해먹고 살아요? 다 때려칠래요. 더이상 못하겠어요. 여기서 제가 뭘 더 할 수 있어요? 대학교? 대학교는 입학해서 뭐해요. 가면 뭐가 달라지는데요. 대학교 간다고 해도 졸업 때 지명받을 수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잖아요. 다시 신입생으로 입학하면 고등학교 1학년 때처럼 빨래하고, 청소하고, 이런 거 어떻게 전부 다 다시 해요. 저 못해요. 그렇게 4년 개고생하고 아무것도 못되면 어떡해요? 저 너무 무서워요. 사실 하라면 할 수 있어요. 이전에 다 해봤던 건데, 왜 못하겠어요. 근데 했는데도 안 될까봐. 그게 너무 무서워요. 그냥 안 할래요. 앞길이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여요. 그냥 다 끝난 것 같아요.
영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다 챙긴다.
영 이제 정말 다 끝났어요. 모든 준비를 끝냈어요. 이제 막 출발하려고 해요. 지금 출발해야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이 저를 실제로 보면 좋아해줄까요? 제가 사는 이 인공위성은 멀리서 볼 때는 반짝거리고 예쁘지만, 가까이서 보면 그냥 기계일 뿐인데. 그래서 실망하면 어떡하나 걱정도 돼요. 제 추측에 당신이 저를 좋아할 확률은 50.6퍼센트거든요. 절반을 겨우 넘긴 확률이죠. 매일 밤마다 하늘을 올려다봤다는 걸 저는 알고 있어요. 그리고 저는 당신이 어떤 걸 좋아하는지 잘 알아요. 데이터베이스가 쌓여 있으니까요. 이제 당신과 저는 만날 일만 남았어요. 당신이 여기로 올 순 없으니까, 제가 갈게요.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17장. 동아리실/옥상/야구장/우주
최세은이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모습으로 동아리실에서 혼자 빙빙 돌고 있다.
캐스터 오늘도 선발투수는 오원식입니다. 상대 팀 1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김강현이 옥상에 들어선다. 손에는 야구 글러브가 들려 있다.
아나운서 드디어 오늘 인공위성 ‘영’이 지구로 귀환합니다. 한국우주국에 따르면, ‘영’이 한국 시각 기준 10월 23일 오후 8시경에 대기권으로 진입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국우주국은 여러 기후변화로 인해서 위성의 정확한 추락 예상 지점을 파악하기는 어렵다고 전했으며, 현재 대략적인 추락 예상 지역은 대한민국 경기도라고 밝혔습니다. 이때까지 인공위성 파편 추락으로 인한 직접적인 인명피해가 발생한 사례는 없고 이번에도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이나, 위험 발생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상황이기에 여러 기관들이 예의주시 중입니다.
영은 비장한 표정으로 김강현을 바라본다.
영 제가 지구로 떨어진다고 온 세상이 난리라고 들었어요. 혹시 당신은 제가 오늘 가는 이유를 알고 있나요? 당신의 생일에 맞춰서 지구로 날아간다는 사실을요. 궤도를 이탈해서 지구로 향하는 이유가 바로 당신 하나 때문이라는 걸요.
김강현은 옥상에서 비장한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본다. 채지훈은 야구장에서 자신의 글러브를 멍하니 바라본다.
캐스터 투수, 공 던집니다.
김강현 할 수 있어.
채지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글러브를 주워서 낀다.
캐스터 타자가 공을 쳤고, 공이 빠른 속도로 날아갑니다.
영은 김강현에게로 날아간다.
영 지금 우주를 건너서 당신에게 날아가는 중이에요. 제 추측보다 거리가 더 먼 것 같아요. 거리 계산을 잘못한 것 같아요. 지금 이곳 우주의 온도는 영하 170도예요. 우주는 너무 깜깜하고 추워요. 지구까지 가는 게 쉽지 않아요. 고장이 나버릴 것만 같아요. 그래도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어요.
캐스터 공이 좌익수 쪽으로 날아갑니다.
영 이제 거의 다 와가는 것 같아요. 어? 저기 당신이 보여요. 우리가 처음 만난 그날처럼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어요. 날 마중 나와준 거군요.
채지훈은 글러브를 낀 자신의 손을 멍하니 바라본다.
채지훈 할 수 있을까.
김강현 할 수 있어. 이쪽으로 위성이 날아오면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면서 잡아내기 위해 달려가면 돼. 그리고 소원을 비는 거야. 세은 선배가……
영이 우뚝 멈춰 선다.
영 뭐라고요?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세은이라고요? 제 이름은 영이에요. 왜 다른 이름을 이야기하는 거죠.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아요. 저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아요. 혹시 당신이 제게 붙여준 새로운 이름인가요? 그렇게 판단하면 될까요? 그게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아요.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천천히 다시 한번만 말씀해주시겠어요?
김강현 세은 선배가……
영 아악! 내 이름은 영이라니까요. 말도 안 돼요. 밤마다 저를 보면서 반짝반짝 빛난다고, 예쁘다고 말해줬잖아요. 제 데이터 이론상으로 그런 말은 좋아하는 존재에게 하는 말인데요. 아닌가요? 당신을 보기 위해 이 깜깜하고 추운 우주를 건너 날아가고 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요? 지구에 사는 수많은 인간들이 모두 다 저를 보면서 저마다 사랑하는 인간의 이름을 말해요.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그러면 안 되죠. 제가 지구로 날아가는 유일한 이유가 당신인데요. 이럴 줄 알았으면 힘들게 우주를 건너지도 않았을 텐데요. 경로를 재탐색해봤어요. 하지만 너무 먼 거리를 와버렸어요. 다시 되돌아가는 건 가능하지만 비효율적이에요. 다시 돌아갈 순 없어요. 이제 저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당신만 아니었다면 이런 감정을 몰랐을 텐데. 차라리 이대로 부서져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이.)
아나운서 속보입니다. 인공위성 ‘영’이 예상 경로를 완전히 이탈했다고 합니다.
채지훈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다가 뭔가를 발견하고 놀란다.
채지훈 어?
캐스터 잠시만요. 지금 공이 좌익수 쪽으로 날아가는 것 같았는데, 중견수 쪽으로 날아가는데요. 맞나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죠? 타자가 친 공이 갑자기 방향을 틀었습니다. 정말 보고도 믿기지가 않네요. 지금 공이 좌익수가 아니라, 중견수 쪽으로 날아가고 있습니다. 중견수가 급히 달려가보지만,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최세은 뭐야? 제발! 제발……
채지훈은 하늘을 보며 뭔가를 잡기 위해 뒷걸음질로 달려간다.
캐스터 중견수. 공을 향해 달려가는데요. 중견수! 중견수! 포기하면 안 됩니다. 할 수 있습니다. 중견수!
채지훈은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계속해서 뒤쪽으로 달려간다. 그러다가 관객들이 아예 볼 수 없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퇴장한다.
캐스터 중견수…… 공을 잡아냈습니다! 결국 해냅니다!
최세은 와아!
막.
심사평
올해 대산대학문학상에는 총 75편의 희곡이 응모되었다. 응모작들이 다루고 있는 소재의 폭이 넓고, 참신한 작품들이 다수 눈에 띄었다. 다만 지나치게 대사에 의지하여 대사로만 쓰인 작품들을 만날 때는 안타깝기도 했다. 희곡은 인물이 상황과 사건을 마주하며 나아갈 때 힘이 생긴다. 그 과정에서 작가의 문제의식이 발현된다면 작품에는 제 몫의 깊이가 생겨날 것이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서 논의한 작품은 모두 여섯편이다. 「프로필에 적어두지」는 젊은 시인의 시를 읽는 듯했다. 언어적 테크닉이 유려하고 고유하여 눈길이 갔다. 논쟁적이고 불편할 수 있는 ‘소아성애’라는 소재를 다루나 작가적 시선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층위가 다양하여 작품의 해석에 열려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작품이 다소 난해하고 관객보다는 작가 내면에 침잠하는 지점이 있어 최종심에서 진지하게 논의했다.
「코스모스」는 코스모스 행성과 지구 사이를 오가는 우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후반부가 대사 위주로 이루어져 있고, 종호와 지연의 내적 개연성이 드라마 안에서 상대적으로 설득력이 약하다는 지점이 아쉬움을 남겼다. 「수조」는 연극성이 살아 있는 희곡이었다. 다만 후반부의 문제의식이 어느정도 예상 가능하다는 지점에 대해 심사위원들이 공감했다. 「완벽한 카레 요리」는 인물과 대사를 다루는 작가의 구력이 느껴졌다. 생동하는 대사가 눈길이 갔으나, 작가의 질문이 조금 더 벼려지기를 기대하게 된다. 「명복을 빕니다」는 저승사자들의 대화가 흥미로웠으나 아직 후반부가 미완으로 보인다. 반짝이는 문제의식을 갈고 닦아 작품을 발전시켜나가기를 기원해본다.
당선작인 「0의 궤도」는 우주, 야구장, 동아리실 등 여러 시공간이 중첩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나아가는 연극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희곡이 무대화를 전제로 쓰인 문학이라는 점에서, 공연화되었을 때 주제의식이 발현되고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향후 희곡의 수정 과정에서 극적 긴장감을 더하고 작가의 세계관과 문제의식을 작품 속에 날카롭게 벼려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희곡을 쓰는 여러분이 글 쓰는 기쁨을 경험하고 몸과 마음이 건강하시기를 기원한다.
이오진 최치언
당선소감
안녕하세요. 김채은입니다.
먼저, 이런 기회의 장을 마련해주신 대산문화재단에 감사하다는 말 드리고 싶습니다. 가능성을 보고 뽑아주신 심사위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요즘 참 고민이 많던 시기였는데, 이 상이 저한테 ‘여전히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조금 더 해보렴!’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정말 더 잘해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깁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저는 자신있으니까, 계속 지켜봐주시길 바랍니다!
저에게는 이렇게 기쁜 일이 생겼지만, 주위 사람들을 보면 여전히 슬픈 일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상황입니다. 모두 다 잘 이겨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 과정에 함께하겠습니다. 진심으로 다들 행복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큰 힘이 되어주고 항상 응원해주는 가족과 친구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제 곁에서 오래오래 함께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한 분들께 다 연락드렸는데, 연락을 할 수 없는 한분이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그분에게 감사인사 전하고 이만 줄이겠습니다.
이 작품을 쓸 때 큰 영감이 되어주신 SSG 랜더스의 중견수 최지훈 선수! 항상 건강하셨으면 좋겠고, 매 경기 행운이 따라주길 응원하겠습니다.
김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