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최선재 崔善在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3학년. 2000년생.
1818qpqp@naver.com
소음에서 고요로 향하는 존재의 발소리
황유원론
1. 고요를 꿈꾸는 소음의 존재
황유원은 2023년 현대문학상 수상소감에서 “존재는 소음으로 가득하다”라는 말을 남겼다. 왜 ‘소리’가 아닌 ‘소음’일까? 소리는 단순히 우리의 귀를 통해 감각되는 것을 통틀어 말하는 것이지만, 소음은 여러 소리가 불규칙하게 뒤섞여 시끄럽고 불쾌감을 일으키는 것이다. 소리가 아닌 소음으로 가득한 것이 존재라면, 존재 역시 불규칙함과 불쾌감을 지니게 된다. 이는 안정과 균형을 욕망하는 우리 인간에게 불편한 명제다. 인간은 현세의 이상향이든, 신과의 합일을 이루는 사후세계이든, 혹은 죽음 이후의 정적이든 사물의 모습과 가치가 보존되는 상태 혹은 그러한 세계를 욕망해왔다. 소음이 아닌 조화롭고 아름다운 음악으로 가득해지거나 혹은 아무 소리도 울리지 않는 ‘고요’를 품는 일이야말로 존재가 진정 바라는 일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황유원은 이렇게 말한다. “존재는 소음으로 가득하다”고.
자신의 명제에 맞서기라도 하듯, 황유원은 소음에 대조되는 고요를 거듭 말함으로써 자기 안의 무질서와 부조화를 다스리려는 존재론적 지향을 드러낸다.1 황유원의 시에서 고요는 다양한 시적 이미지와 관련되는데 이를 크게 세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물속에 고인 밤은 확실히/깊고/고요하여”(「검고 맑은 잠」) “어느새 다시 차올라 변기 한가득 고여오는 맑고 고요한 물을”(「최대치의 기쁨」, 이상 『초자연적 3D 프린팅』) 등에서 두드러지는 물의 이미지다. 이는 흐르는 물이 아닌 한곳에 고인 물이며, 밤하늘처럼 깊고 어둡지만 동시에 맑음을 유지할 수 있는 특별한 물이다. 어둠과 투명함을 동시에 지닌 물의 성질에서 시적 자아는 자신이 추구하던 고요를 발견하게 된다. 둘째는 “고요해진 눈밭에 교회 종이 한번 뎅그렁,”(「틴티나불리」) “퍼붓던 눈이/비로소 한잔의 물로/고요해져 있었다”(「유리잔 영혼」, 이상 『하얀 사슴 연못』) 등에서 볼 수 있는 겨울의 이미지다. 특히 황유원 시에서는 겨울의 하얗고 차가운 성질이 극한까지 이르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그러한 겨울의 이미지는 시간이 멈춰버렸거나 시간의 끝에 이른 듯한 적막감을 불러일으킨다. 셋째는 “나만 죽으면 이제 고요해질 듯한 기분으로”(「오디토리엄」, 『세상의 모든 최대화』) “불어 끄기라도 한 것처럼/고요해진/심장”(「전율의 밤」, 『이 왕관이』) “그들은 이제 없다/심장이 적출된 몸처럼/고요한 공간”(「휴관」, 『하얀 사슴 연못』) 등과 같은 죽음의 이미지다. 모든 존재는 언젠간 찾아올 죽음이라는 운명에 묶여 있다. 죽음은 존재의 마지막 단계이자 소멸이며, 죽음에 이른 존재보다 더 고요한 존재는 없다.
고요와 관련된 세가지 이미지는 모두 정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세가지 이미지는 황유원의 시편들에 번갈아 등장하거나 한편의 시에 혼합되어 있으며, 공통적으로 시적 자아의 고요에 대한 지향을 드러낸다.
초겨울 추위 속에 교회 종이 한번 뎅그렁,
내면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오늘 나의 존재는 종소리 울려 퍼지다 희미해지는 데까지
한겨울 추위 속에 교회 종이 한번 뎅그렁,
내면에 몰아치는 눈보라 소리를 들으며
내일 나의 존재는 도자기잔 속으로부터 대기 중에 울려 퍼지다
대기와 뒤섞여 더는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지점까지
——「틴티나불리」 부분(『하얀 사슴 연못』)
황유원이 말하는 고요는 단순히 아무것도 없음, 혹은 소멸을 가리키지 않는다. 인용된 시 「틴티나불리」에서 교회 “종소리”는 점차 희미해지지만, 이는 사라지는 것이 아닌 고요에 이르는 과정으로 표현된다. “종소리”는 자신을 둘러싼 “초겨울 추위”에 집어삼켜지지 않고 “대기와 뒤섞여 더는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지점까지” 퍼져나가기 때문이다. 화자는 자기 존재를 “종소리”에 빗대면서 내면의 “눈보라 소리”가 몰아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다. 존재의 소음이라 할 수 있는 “눈보라 소리”를 단번에 꺼트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소음과 공명하여 “이 겨울의 끝”에 도달하려는 태도인 것이다. 존재 안의 소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선 먼저 세계와의 부조화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은 황유원이 말하는 고요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고요란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더이상 움직일 필요가 없는 경지로 봐야 한다. 가장 맑고 깊게 고여 있는 물, 가장 차갑고 새하얀 겨울은 변화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 맑음, 차가움과 같은 성질들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즉 고요는 모든 소음을 극복한 존재의 종착점이다. “초겨울 추위”와 “눈보라 소리” 속에서 고요를 향해 잦아드는 “종소리”와 같이, 고요는 자기 안의 소음을 하나하나 풀어헤쳐 정적에 이르고자 하는 주체적 노력이자 결실인 것이다. 존재 내부의 소음, 혹은 소음으로 둘러싸인 세계를 외면한 채 고요만을 주창하는 건 황유원 시에서 추구되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고요가 거듭 호출될수록, “존재는 소음으로 가득하다”는 상황이 부각될 수밖에 없다. 아직 물은 깊고 맑은 물이 되지 않았다. 겨울은 지금보다 더 차갑고 새하얗게 되어야 한다. 그 길은 끝이 없어 보이며, 주체의 적극적인 노력을 필요로 한다. 문학의 의미는 목표의 도달이 아니라 목표를 향하는 분투에 있음을 생각하건대, 황유원의 시적 자아가 아무런 갈등이나 고뇌 없이 고요에의 지향에 천착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의 불완전함과 비루한 모순으로부터 자기를 구원하려 노력하면서도, 고요를 시 속에 호출한다는 것은 그가 자기 안의 난삽한 소음에 둘러싸여 고통스러워하고 있음을 거꾸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실제로 황유원의 시 중에는 「틴티나불리」처럼 담담한 어조를 취하는 것이 아닌, 존재 안의 소음을 이기지 못해 고통과 절망을 강한 어조로 드러내는 시를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2. 세계와의 불협화음, 내면의 혼잡함
고요에 이르는 길은 멀다. 그리고 시적 자아의 부단한 노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소음은 우연히 찾아와 순식간에 고요에의 길을 망가뜨린다. 이것은 황유원의 시세계를 아우르는 부조리이자 불가피한 조건이다. 세계와의 조화를 통해 소음에서 고요로 잦아들고자 하는 존재의 노력에 세계는 순순히 따라주지 않으며, 오히려 존재를 방해하고 소음 속에 가둬버린다. “존재는 소음으로 가득하다”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혹은 그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는 시적 자아의 절망은 다음 인용된 시편들에서 주된 정서로 나타난다.
음악이 다 잦아들기도 전에 짝짝짝 박수를 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우당탕 밖으로 걸어나가다니
가까스로 고이게 된 여운을 아무렇게나 발로
흩뜨려버리다니
대체 다들 뭘
어쩌자는 건가
——「평화 여백」 부분(『하얀 사슴 연못』)
당신은 겨우 그 정도밖에 잠들지 못하는가
그렇게 금방 돌아올 수 있을 정도로밖에는
나아가지 못하는가
당신은 매번 얼마나 급히 되돌아오고 마는 것인가
누가 부르기만 해도 잠에서 화들짝 깨어나는 그대여
너무 얕은 잠에 드는 이 밤을
너무 쉽게 되돌아올 수 있는 이 밤을
진정 밤이라 부를 순
없는 노릇이다
——「밤다운 밤이 아닌 밤」 부분(『초자연적 3D 프린팅』)
「평화 여백」에서 말하는 “가까스로 고이게 된 여운”은 음악이 끝난 뒤 찾아오는 고요를 가리킨다. 화자가 들은 음악은 나름의 형식과 조화를 갖췄을 것이고, 서서히 잦아든 음악이 고요에 이르는 순간 화자를 비롯한 청중들은 각자의 생각과 감정을 고요 속에 채워넣는다. 음악의 “여운”은 그때 만들어지며 음악이 끝난 뒤의 고요까지도 음악의 일부분으로 남는다. 하지만 청중들은 요란한 “박수”소리와 “발”소리로 고요를 “흩뜨려버”린다. 제목에도 나타나는 “여백”은 “다 하고 난 생각의 변두리 같은 곳”이다. 아무것도 채우지 않은 “여백”이야말로 음악이 끝난 뒤의 고요를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이지만, 청중으로 대표되는 세상 사람들은 연주되는 음악이 전부라 생각하여 그 후에 찾아오는 고요를 온갖 소음으로 덮어버린다.
「밤다운 밤이 아닌 밤」에서 말하는 “밤다운 밤”은 “쉽게 되돌아올 수” 없는 밤, 깊이 잠들어 진정한 고요에 빠져드는 밤이다. 그러나 화자는 쉽게 잠에서 깨는 “당신”에게 왜 “겨우 그 정도밖에 잠들지 못하”느냐고 묻는다. 누가 부르는 소리에 금방 깨어나는 잠은 “물샐틈없는 어둠 속 고독”(「밤의 벌레들」, 『초자연적 3D 프린팅』)과 같은 완전한 고요에 이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화자는 “당신은 겨우 그 정도밖에 잠들지 못하는가”라고 말하지만, 이 한탄하는 어조는 ‘당신’이라는 대상뿐 아니라 화자 자신을 향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저편에서 잠들었으면서도 이편에 귀를 활짝 열어두고 있”는 얕은 잠의 상태는 화자의 분열된 자아 혹은 욕망의 표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시에서 시적 자아는 소란스러운 세계의 소음에 의해서든, 자기 내면의 혼잡함에 의해서든 고요를 향한 과정에서 끝없는 장애를 겪고 있다.
이러한 고민은 화자(또는 시인)가 시를 쓰는 때에도 나타난다. 시의 세계는 엄연히 현실이 아니며 시적 세계가 현실세계의 힘을 능가하기도 어렵지만, 역설적으로 시의 세계란 자유롭다. 인간의 이상과 사유를 현실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시 안에서조차 고요라는 이상을 형상화할 수 없다면, 자신의 시와 시작(詩作) 행위조차 불필요한 소음으로 여겨진다면, 고요를 추구하던 황유원의 시 세계는 걷잡기 어려운 절망으로 빠질 위험을 겪게 된다.
정신 시끄러운 거
딱 질색이야
정신 시끄러우면
정신 끄고
아주 끄고
잠재우면 좋겠으나
우린 때로 우리가 만든
각종 전자기기만도 못해
꺼지질 못하고 계속 시끄러워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시 쓰는 정신도
시끄러 시 끄는 정신도
시끄러 시를 질질 끌며
기어가는 펜 같은 정신도
시끄러 껄끄러
아주 정신 못 차리고들 있어!
——「turn this off please」 부분(『초자연적 3D 프린팅』)
동어의 반복과 말장난으로 이루어진 「turn this off please」는 제법 시끄러운 시다. 하지만 이 시끄러움은 유희보다는 절규에 가까운 속성을 지닌다. 이 시에서 가장 시끄러운 것은 다름 아닌 “시 쓰는 정신”이다. 시를 쓰는 펜은 “질질” 끄는 소리를 내며 또다른 소음을 일으키고, 화자는 “제발 그 입 좀 다물”라며 시 쓰는 일을 포기하려는 심사를 보인다. 전원을 꺼달라는 의미의 시 제목을 통해 존재의 소음을 제 힘으로 가라앉힐 수 없는 화자의 내적 고통이 드러난다. 황유원의 시적 자아는 ‘존재는 고요로 가득하다’를 시의 세계에서 줄곧 지향해왔다. 그러나 시끄럽고 껄끄러운 것으로 비난받는 “시 쓰는 정신”은 불필요한 말의 반복과 직설적인 감정 노출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또다른 소음으로 전락했다. 여기에는 현실의 한 인간으로서도, 시적 자아로서도, 그리고 하나의 시 작품으로서도 고요를 성취할 수 없다는 총체적인 좌절이 담겨 있다.
이때 화자는 “시끄러”운 “정신”을 기계처럼 아예 꺼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정신은 순식간에 암흑 같은 고요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은 기계의 전원처럼 끄고 켤 수가 없다. 잠을 자는 것을 이와 비슷하다 여기더라도, 황유원의 시세계는 「밤다운 밤이 아닌 밤」에서처럼 “너무 얕은 잠에” 그치고 마는 한계에 봉착한다. 그렇다면 남은 건 죽음뿐이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지만, 존재의 고요가 끝내 좌절된다면 매력적인 혹은 불가결한 선택지로 다가올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황유원의 시세계는 위험한 복잡성을 얻게 된다. 고요를 이루고자 했던 차분하고도 집요한 끈기를 보여주던 화자의 태도가, 때때로 죽음을 통해 순식간에 고요에 이르려는 위태로운 욕망을 내보이는 것이다. 살아서 세계와 공명하며 자기 내면의 소음을 가라앉히는 것, 죽어 사라짐으로써 순식간에 고요한 무(無)가 되는 것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3. 소멸로 기울어지는 존재의 길
고요와 연관된 물과 겨울의 이미지에서는 그 과정이 중요시된다. 즉 물은 가만히 내버려둔다고 해서 깊고 맑은 물이 되지 않으며, 겨울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가장 차갑고 새하얀 겨울이 되지 않는다. 죽음의 이미지는 다르다. 모든 존재는 과정에 상관없이 죽음이라는 결말을 맞고, 죽음을 맞은 존재야말로 가장 고요한 존재이다. 여기서 허무한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 세계와 공명하여 고요에 이르고자 하는 길이 정작 세계로 인해 불가능하다면, 존재는 세계를 등진 채 자신을 유폐함으로써 고독에 잠기는 일만이 가능해진다. 존재가 세계를 등지고자 할 때 죽음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깊고 맑게 고인 물, 가장 차갑고 새하얀 겨울조차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물이 마르고 계절이 사라지는 텅 빈 상태야말로 진정한 고요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나온 모든 봄 여름 가을 들이 결국
지랄 같은 폭설과 염병할 폭음(暴音)들을 위한 기나긴
복선(伏線)에 불과했다는 사실,
어째서 그제야 알게 됐을까 절기는 벌써 대설에 가까워
그것도 우리가 플랫폼 벤치에 앉아 한 잔의 커피를 홀짝이며
어김없이 잔기침에 시달리고 있던 그 와중에……
(…)
난방 장치가 엉망인 객실에선 모든 승객들 스스로 알아서
따스해지는 법 배워 내야 했으므로 아무도 우릴 연주해주진 않고 하늘이
음표란 음표 모조리 떨어뜨려 가며 어둡고 텅 빈 악보 한 장으로 변해 갈 때
우리는 엉망진창으로 떨어져 내리는 음표들의 계이름이나 읽어 내야 했고
질 낮은 영감에 휘둘릴 무렵이면 누구라도
누군가라도 껴안고 뒹굴기라도 해야 해서
——「시베리아 주제에 의한 다섯 개의 사운드트랙」 부분(『세상의 모든 최대화』)
「시베리아 주제에 의한 다섯 개의 사운드트랙」을 관통하는 것은 “시베리아” “폭설” “대설” 등으로 나타나는 겨울의 이미지다. 하지만 이 시의 겨울은 하얗고 맑은 겨울이 아닌, “지랄 같은 폭설”이 내리고 “염병할 폭음”으로 시끄러운 소음의 겨울이다. “대설에 가까”운 추운 겨울 한복판에서 화자를 포함한 “우리”는 “어김없이 잔기침에 시달리”는 쓸쓸하고 병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이 겨울은 “지나온 모든 봄 여름 가을 들”의 끝에 찾아왔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사납고 지독한 겨울이 왔을 뿐이며 앞선 계절들은 “기나긴/복선”에 불과했다. 여기서 화자를 비롯한 존재들의 의지는 작용하지 않는다. 겨울은 자연히 찾아왔고 존재는 “폭설”과 “폭음”에 휘둘리기만 하는 무력한 처지에 놓여 있다.
여기서 음악은 「틴티나불리」의 “종소리”와는 달리 세계 속으로 퍼져나가지 못하고 “엉망진창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다. 음악은 세계로부터 고립된 채, 마찬가지로 가혹한 환경의 세계에서 “알아서/따스해지는 법 배워 내야” 하는 “우리”를 통해 초라하게 연주된다. 더이상 음악은 세계의 소음과 공명하며 고요를 이끌어내는 힘을 갖지 못한다. 오히려 아무렇게나 날리는 눈발 속에서 가까스로 읽어내야 하는 “질 낮은 영감”이다. 아무 의미 없이 찾아온 겨울과 엉망진창인 음악에 둘러싸여, 화자는 “어두운 터널 뚫고 반죽음되어 쏟아져 나오는 더러운 화물열차처럼” 길고 끔찍한 시간을 견디고도 자기구원에 이를 수 없으리라는 암울한 전망을 품게 된다.
하늘이 없었다면 떨어질 것도, 다시 띄울 것도 없었겠지만
어차피 우린 모두 하늘에 담겨 헤엄치는 아이들
한때 하늘을 점령할 듯 연 날리던 아이들
그동안 너무 많은 연을 띄웠으므로
팽팽히 당겨진 수만 개 연줄들로 뒤엉킨 마음은
아직도 줄 놓는 법 알지 못하지
누가 뭐래도 하늘엔 줄이 없어
줄 달린 연들이 어쩔래야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어차피 우린 모두 하늘에 빠져 익사하는 아이들
——「바라나시 4부작」 부분(『세상의 모든 최대화』)
「바라나시 4부작」의 “하늘”은 지상의 존재들(“아이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대상이다. 하늘이 지닌 맑고 투명한 성질을 생각하면, 하늘을 고요와 같은 이상향으로 볼 수 있다. “아이들”이 하늘에 “연”을 띄우는 것은 존재가 하늘에 이르기 위한 상징적 행동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연을 띄”운 탓에 하늘과 땅 사이 공간에는 “수만 개 연줄들”이 뒤엉켜 있다. “아이들”은 연줄을 놓지 못하고, “연줄”이 뒤엉켜 결국 어떤 연도 하늘에 이를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정작 하늘은 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늘에 닿기 위해 연에 줄을 매달아 띄운 시도가 도리어 하늘에 닿지 못하는 한계로 뒤바뀌는 순간이다. 이때부터 하늘은 지상을 지옥으로 만든다.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 눈앞에 서려 있다면 존재의 현실은 무의미한 고통일 수밖에 없으므로 화자는 하늘을 “담겨 헤엄치는” 공간에서 “빠져 익사하는” 공간으로 바꿔 서술한다. 이는 “연줄”이라는 한계를 극복할 수 없는 존재의 비극을 나타냄과 동시에, 하늘에 이르기 위해서는 결국 “익사”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인식을 보여준다. 이제 고요는 살아서 도달할 수 없는,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존재는 한평생 소음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다가 돌연 소멸하게 될 허무한 대상에 불과해진다.
만약 황유원의 시세계가 죽음에의 욕망으로 완전히 방향을 꺾었다면 그의 시편들은 시적 감흥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죽음은 극단적이지만 명쾌하다. 고요에 관한 고민에 가장 빠르게 답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이 명쾌함을 좇는다면 이는 문학의 존재 의미를 스스로 잃는 일이다. 더군다나 “시인은 너무 빨리 결론에 이르러서도, 해탈해서도 안 되는 존재”2다. 어떤 문학이 명쾌하게 인간을 규명한다면 그것은 표면적 관찰이나 거짓말에 불과하며, 이는 하나의 시세계를 떠받칠 힘과 크기를 갖추지 못할 공산이 크다. 황유원의 첫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에서는 존재의 고요를 향한 열망이 세계와의 부조화로 인해 가로막히는 시적 자아의 모습이 자주 발견된다. “나는 지긋지긋하고 구체적인 사실관계들로부터/몰래, 빠져나가본다”(「인벤션」) “저 작은 그릇에 담기느니/차라리 증발하는 게 낫겠어”(「극치의 수피즘」)와 같이 세계와의 절연 혹은 존재의 소멸을 욕망하는 진술이 그 예다.
하지만 동시에, 황유원은 이미 첫 시집을 통해 이러한 존재론적 위기를 극복하는 시적 정신을 보여준 바 있다. “모든 것을 총칭하느라 아주 멀리까지 퍼진 종소리”(「총칭하는 종소리」) “생각건대 우리의 고통은 오직 우리만의 것이니 우리보다 작을 것이 분명해서”(「바톤 터치」)에서 드러나듯, 황유원의 시적 자아는 세계의 모든 소음을 감각하고 자기 존재를 “온 우주를 가둘 수 있는,”(「초자연적 3D 프린팅」, 『초자연적 3D 프린팅』) 거대한 집으로 만들고자 함을 밝힌다. 이러한 사유를 통해 황유원의 시는 고요에의 지향으로 복귀한다. 동시에 고요를 향한 존재의 여정이 불가능한 자기 구원에 치닫는 무의미에서 끝나지 않고, 살아서 고요에 이르지 못하는 삶의 의미를 확보하는 대목이다.
4. ‘다 살아낸 삶’의 흔적으로서의 고요
앞서 인용한 시 「틴티나불리」에서 화자는 자신이 “종소리 울려 퍼지다 희미해지는 데까지” 존재한다고 말했다. “종소리”는 우리에게 맑고 깊은 소리로 다가온다. 또한 오랫동안 멀리 퍼져나가, 그 소리가 마침내 사라졌어도 사라지지 않은 듯한 느낌을 준다. “종소리”가 끝난 뒤 찾아오는 정적은 “종소리”의 이어짐이기도 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텅 빈 상태가 아니라, 울려퍼진 “종소리”가 세계의 구석구석에 스며든 충만한 정적인 것이다. “종소리”가 그 자체로 고요함을 품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공간 전체의 앞과 뒤를 뒤섞으며 공간의 전체성을 울림으로 증거”3하는 “종소리”는 그 뒤의 고요와 연결되어 서로가 서로를 완성하는 힘을 발휘한다.
황유원 시에서 고요는 아무것도 없음 혹은 소멸을 뜻하지 않는다는 걸 앞에서 밝혔다. 더 나아가, 고요는 세계와 자기 내면의 모든 소음을 품은 존재만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초겨울 추위 속에”서 “종소리”가 바람 소리를 뚫고 고요하게 퍼져나갔던 것처럼, 존재는 자신을 둘러싼 소음을 부정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만 존재는 죽음 이후의 고요와 자신을 연결할 수 있다. 존재가 살아 있던 시간과 사라진 뒤의 시간 모두를 고요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황유원의 시적 자아가 추구했던 본질이며, 그의 시세계를 지탱하는 사유의 근간이다. 이제 존재에게 남은 과제는 세상의 모든 소음을 향해 자신을 투신하는 일이다. 세계와의 불합치 속에서 존재는 또다시 소음에 시달리는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이는 삶의 결말인 고요를 향해 내뻗은 소음이기도 하다.
쓸어도 쓸어도 쓸리지 않는 것들로
마당은 더럽혀지고 있었고
어차피 더럽혀지는 평생을 평생
쓸다 가는 것이겠지만
무엇보다 듣기 좋은 건
아침에 마당 쓰는 소리
——「아침」 부분(『하얀 사슴 연못』)
「아침」의 “마당”은 “쓸어도 쓸어도 쓸리지 않는 것들”에 의해 끊임없이 더럽혀진다. 마당은 매일같이 쓸어내는 노력이 있어야만 깨끗함을 유지하는 공간이다. 여기서 화자는 “마당”을 한 존재의 “평생”으로 확장시킨다. 존재 역시 “평생” 동안 쓸어낸다 해도 더러워지는 수밖에 없지만, 화자는 불만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아침에 마당 쓰는 소리”가 듣기 좋다고 하며 “평생을 평생” 쓸어야 하는 존재의 운명을 긍정한다. “마당 쓰는 소리”는 존재 안의 소음을 가라앉히는 소리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로 소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고요에 이르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생겨나는 소음이다. 「turn this off please」에서 화자는 “시 쓰는 정신”이 시끄럽다고 했지만, 그러한 소음도 내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면 고요에 가까워지지 못하는 역설적 운명을 끝내 받아들이는 것이다.
흔적도 남지 않는 삶이 아니라
다 살아 낸 삶이 남아 있는 흔적과
이제 다 끝났다는 착각의 평화가 동시에 미끄러지는
넉넉하고 공평한 언덕,
평일이 모두 종말한 후
혼자 남겨진 주말의 완벽한 휴식 같고
졸음이 쏟아지는 베개 위로 흘러내리는
내용 없는 오후 같은 너의 언덕
——「새들의 선회 연구」 부분(『세상의 모든 최대화』)
「새들의 선회 연구」 속 “흔적도 남지 않는 삶”과 “다 살아 낸 삶”은 구분된다. 둘 다 삶이 끝난 뒤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지만, 전자와 달리 후자는 존재가 “흔적”을 남겼다는 차이가 있다. 후자의 존재는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는 데까지 모두 살아냈다. 죽어 사라진 존재가 남길 수 있는 “흔적”이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고요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의 고요는 삶을 모두 살아낸 존재에게서 들려오는 조용한 ‘여운’이면서, 살아 있던 시간마저 고요하게 만드는 값진 고요다. “평일이 모두 종말한 후”에 “주말의 완벽한 휴식”을 누리는 “너”처럼 말이다. 이때 중요한 건 평일을 모두 보낸 자만이 주말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니라 “종말”이라는 말을 쓸 만큼 필사적으로 평일을 겪어낸 자의 주말이다. 여기서 황유원은 “내용 없는 오후 같은”이라는 표현으로 굳이 존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고요는 세상의 모든 의미와 가치로부터 벗어난 경지다. 이는 동시에, 세상의 모든 의미와 가치를 헤집고 몸에 새긴 자만이 획득할 수 있는 ‘벗어남’이기도 하다. 그것이 황유원이 말한 “다 살아 낸 삶”의 진의 아닐까?
잠들면 안 돼! 우린 여기서 밤새 놀다 가야 하니까
어차피 죽음을 삶에 좀 섞어보는 거다
그 역(逆)이 아니라
(…)
우리 조금만 더 죽자
진짜 죽음이 있기 전에
하고 기도하던 밤이 있었다
——「여몽환포영」 부분(『초자연적 3D 프린팅』)
이제 황유원은 죽음 뒤의 고요를 위해선 무엇보다 삶이 중요하다는 자기 사유를 노래하기 시작한다. 「여몽환포영」의 화자가 “죽음을 삶에 좀 섞어보는 거다” “우리 조금만 더 죽자/진짜 죽음이 있기 전에”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죽음”은 “삶”을 집어삼키지 않는다. 오히려 “삶”이 주가 된 채 “죽음”이 조금 섞일 뿐이다. 화자는 고요한 죽음을 향해 살아가고 이를 “밤새 놀다 가”는 것이라 칭하며, 소음으로 가득한 존재의 삶에 동력을 부여한다. 황유원이 말한 “존재는 소음으로 가득하다”는 명제는 존재의 ‘살아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고요를 향한 존재의 모든 움직임은 자연히 소음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다 조금씩 존재 안으로 고요가 젖어들며, 죽음이 삶과 섞이며, “진짜 죽음이” 오기 전까지 존재는 죽음 뒤의 고요를 활달하게 예행한다.
5. 존재만이 소음으로 가득하다
알베르 까뮈는 철학적 에세이 『시지프 신화』에서 인간 존재가 죽음에의 욕망에 빠지지 않고 삶을 지속할 근거를 모색한다. 까뮈는 “중요한 것은 가장 잘 사는 것이 아니라 가장 많이 사는 것”4이라고 말한다. 세계로부터 존재의 해답을 구할 수 없는 인간은 그렇기에 어떤 해답과 규율에도 묶이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이며, 자신의 삶의 시간을 가능한 많은 경험과 행동으로 채우는 것이 실존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삶이다. 존재는 “머지않아 죽음에 의해 봉인될 그의 운명”5을 지니고 있기에, 그 운명이 오기 전까지의 시간을 최대한 누리는 것이 인간 존재가 얻어낼 수 있는 유일한 삶의 가치라는 것이다.
고요를 향한 지향 속에서 펼쳐지는 황유원의 존재론적 고뇌를 까뮈의 논지와 엮어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간 이야기되길, 존재는 자신과 세계를 분리하는 자의식을 가진 주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정의하면 존재라는 개념에 동식물이나 사물은 포함시키기 어려워진다. 이는 종래의 인간중심주의를 답습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고요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존재임을 말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유별난 자의식을 갖고 있지만, 그 자의식의 갈증을 풀어줄 답을 세계로부터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은 자신이 얕고 혼탁하더라도 불만을 갖지 않는다. 겨울은 가장 새하얗고 차가운 날일지언정 스스로 그것을 진정한 겨울로 여기는 일이 없다. 죽음 너머에 고요라는 자의적인 이상을 부여하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그래서 인간 존재는 소음으로 가득하다. 고요에 이르려는 움직임조차 결국에는 소음이다.
좋아요 좋아 다 못 지워도 좋아
어차피 다 지울 수 있을 리 없잖아
백색은 못 되더라도
어쩌면 백색소음에는 이를 수 있다는 믿음으로
——「백색소음」 부분(『하얀 사슴 연못』)
결핍은 욕망을 낳고, 욕망은 이상을 향해 길을 닦는다. 역설적으로, 고요를 갖지 못한 인간 존재는 고요를 추구하고 탐색할 수 있다. 황유원의 시세계는 시인 자신, 나아가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온전히 주어지지 못할 고요에 도달하려는 길이다. 동시에 어떻게 삶을 긍정하며 전진시킬 수 있는가를 희구하는 길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황유원의 시편들은 시인이 고요를 향해 남긴 발자국이다. “백색은 못 되더라도/어쩌면 백색소음에는 이를 수 있다는 믿음으로” 황유원의 시편들은 저마다의 발자국을 세계와 시간 속에 남긴다. 또한 그렇게 발자국을 남기는 일이, 두 다리를 움직여 걸어가며 괜한 소음을 일으키는 일이, 자신의 삶을 다 살아내려는 존재의 한 양식이다. 발소리는 “백색”의 맑고 깨끗한 소리는 못된다. 하지만 적어도 “백색소음”과 같은, “백색”의 직전에 이른 발소리는 될 수 있다. 그 발소리를 내며 걸어가는 길이란, 약속된 고요를 품은 죽음으로 뻗을지언정 언제까지나 삶의 길이다.
황유원이 남긴 명제를 이렇게 바꿔보고 싶다. “존재는 고요를 향한 소음으로 가득하다.”
심사평
올해 대산대학문학상 평론 부문에는 모두 22편이 응모되었다. 포스트휴먼과 비인간 담론, 퀴어 논의, 자본주의 시대에 대한 문화비평, 미디어 변화가 문학에 미치는 영향 등 최근 비평 현장에서 부각하는 쟁점들과 연결되는 글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청년문화를 기반으로 한 일상과 정치의 관계, 새로운 정치공동체와 연대의 방식이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해석되고 있는 점도 주목되었다. 반면 이러한 이론적 담론의 지향성이 실제 분석 대상이 되는 작품들과 긴밀하게 연결되기보다는 기존 논의들을 리뷰하거나 작품의 표층적 해석에 머무는 경우도 적지 않아 아쉬움을 주었다.
본심에서는 다음 4편의 글을 집중적으로 토론하였다. 「근대의 시공간을 넘어, 없는 것으로 지금을 살아가기: 김지연의 『마음에 없는 소리』를 중심으로」는 개별 작품에 깃들인 시간의식과 미래적 지향성을 차분히 해석한 글이다. 신인작가의 작품이 지닌 가능성의 세계를 섬세하게 살피려는 시도가 돋보였으나, 글의 기반이 되는 부재와 불가능성의 세계라든지 근대에 대한 논의가 추상적 틀에 머물러 작품이 품은 구체적인 현실을 잘 포착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시적 주체의 퀴어한 운동성: 박상수론」은 시인의 작품세계에 내장된 ‘퀴어한 운동성’의 진화 과정을 분석한 논의이다. 글의 체계적인 구성이 돋보이는 평문으로서 작품의 연구사에 대한 충실한 리뷰를 바탕으로 퀴어 담론의 장에서 작품세계를 종합적으로 진단하려는 일관성이 주목되었다. 그러나 시 작품 자체가 지닌 이론 기획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해설적 방식으로 글이 전개되면서, 평자의 독창적인 해석이 잘 부각되지 않는 점이 한계로 다가왔다.
「포스트휴먼 스캔들: 신유물론적 시 독법의 재고」는 포스트휴먼 논의와 신유물론적 비평의 향방을 진단한 시사적인 의의가 돋보이는 글이다. 최근 문학비평의 관심사를 잘 반영하면서 현장적인 감각을 갖춘 발랄한 글로 읽혔다. 하지만 글의 서두에 놓였던 신유물론적 비평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가 본론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지지 못하고, 시작품의 해석과 제시 역시 평단의 논의에 대한 반복적인 리뷰에 머문다는 점이 아쉬웠다.
「소음에서 고요로 향하는 존재의 발소리: 황유원론」은 탄탄하고 유려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한 시인의 작품세계를 깊이있게 조명한 글이다. ‘고요’와 ‘소음’의 키워드를 대조하며 변화하는 시적 이미지를 세심하게 추적하는 이 글은,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시의 상상력이 분투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따라간다. 시 읽기의 의미를 삶의 가치에 대한 보편적 탐구로 심화하고 확장하려는 집중적인 해석의 과정은 그 자체로 독자적이고 풍부한 비평적 이야기로 읽힌다. 물론 작품에 대한 해석이 평자의 내밀한 감응력과 직관으로 종종 기울면서 비평용어의 정교성이나 시사적 맥락이 보완되어야 할 지점들은 짚어둘 필요가 있겠다. 그럼에도 작품을 ‘살아 있는 현실’로 대하는 단단하고 차분한 해석방식은 앞으로 좋은 글들을 쓸 수 있는 가능성으로 다가왔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귀한 글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백지연 차미령
당선소감
언젠가 스스로에게, 왜 나는 문학을 하려는가 물은 적이 있습니다. 막연한 물음의 한구석에서, 제가 문학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문학을 스스로 좋아하고 원해서가 아니라, 문학 외에는 다른 돌파구가 보이지 않으며 자기 삶을 걸머진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문학을 붙잡고 있어야 했을 뿐입니다. 굳이 제 삶의 양식이 문학이어야 할 필연성은 없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저 역시 문학뿐 아니라 예술 전반에 무관심한 채 사회의 무난한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일시적 쾌락과 대중적 오락으로 은폐되는 권태로운 결핍을 품은 채 말입니다. 그러한 삶은 한때 제게 주어져 있던 엄연한 가능성 중 하나였으며, 이제는 그쪽으로 방향을 꺾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된 폐쇄된 가능성입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머릿속 단상들을 갖고 놀며, 저는 생각합니다. 나는 많은 것을 얻었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고. 기질, 환경, 혹은 우연적인 운명이라 부르는 그 무엇들에 의해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가능성들을 잃어버리며, 끝이 어딘지 모를 단 하나의 가능성으로 떠밀려가고 있다고.
그럼에도 굳이 문학이어야 하느냐 다시 묻는다면, 전 문학에서 아주 작게나마 자유를 발견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문학작품들을 읽으며 저는 글 너머에 있는 작가들을 생각합니다. 무엇이 그들의 고뇌 어린 생각을 밀어붙이고 그들이 펜을 잡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는지 느껴봅니다. 저는 그 끝에서 문학이 품은 자유를 실감합니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 자기 안의 부조리를 글로 풀어내려는 노력, 이것은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굳이 글을 써 남겼으며, 그 짧은 순간 그들은 운명에 떠밀리는 것이 아닌 운명이라는 마차를 모는 기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저도 그 자유를 경험하고 싶었습니다. 영원한 자유가 불가능하다면 순간의 자유라도 얻길 바랐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다 할지라도, 제 자신의 힘을 발휘해 스스로를 극복하고 얻은 자유인 것입니다. 제게 주어진 이 과분한 상은 그 믿음을 계속 가져가도 된다는 약속, 문학은 잃어버린 가능성의 더미 속에서 단 하나의 가능성을 얻어내는 길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다가옵니다.
제게 많은 지도와 조언을 베풀어주신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문예창작전공 교수님들께 감사드립니다. 평론은 작가 혹은 시인이 명시적으로 말한 것 너머까지 파헤쳐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엄경희 교수님, 이번 글에서 미진했던 그 부분을 더 날카롭게 연마하도록 하겠습니다. 정확한 어휘의 중요성을 늘 강조하셨던 김인섭 교수님, 말이 그 속뜻 때문이 아니라 말 자체의 힘으로 말이 되게끔 하는 경지를 늘 목표로 삼겠습니다. 그리고 저를 사람으로 만들어주신 이흥표 선생님, 어서 선생님께 밥 한끼 대접해드릴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나태와 교만에 빠져 지내던 저를 아무 조건 없이 기다려줬던 가족들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최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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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유원 시에 관한 앞선 논의 중에서도 엄경희와 조강석은 주목할 만한 비평적 관점을 보여준다. 엄경희는 평론집 『2000년대 시학의 천칭』(푸른사상 2019)에서 황유원의 시 「비 맞는 운동장」(『세상의 모든 최대화』)이 “비의 양을 최대로 증폭”시킴과 동시에 “빗소리의 정적감이 최대화”(94면)되는 독특한 지점을 포착한다. ‘소란스러움’과 ‘정적’이라는 상반된 분위기를 시적으로 동시에 구현한 황유원의 상상력은 낯선 것들에 의한 병치나 불연속적인 맥락 등이 중시되던 저간의 시적 경향과 구분되는 영역을 확보하고 있음을 말한다. 조강석은 황유원의 시집 『하얀 사슴 연못』의 해설에서 “평상시의 지각 범위로는 좀처럼 초점화되지 않는 사물과 사건과 사태 속으로”(149면) 독자들을 이끄는 황유원 시의 ‘내밀성’을 이야기한다. 이 가운데 ‘고요’는 어떠한 ‘소리’가 울리기 때문에 파생된 것이며, 동시에 시적 주체가 자기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사물의 내밀성에 몰입함으로써 세계 속으로 자아를 확산시키려던 시적 주체의 “세계 정복 야욕”은 고요에 의해 붙들려 “초월적 안일이나 주관적 안위에 끝내 몸을 내어주지 않”(158면)게 된다. 조강석은 고요를 시적 긴장과 평형을 동시에 가능케 하는 중요한 속성으로 설명한다.↩
- 엄경희 『2000년대 시학의 천칭』, 83면.↩
- 성기완 해설 「조선어 연금술사 통관보고서」, 『세상의 모든 최대화』, 236면.↩
- 알베르 까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16, 92면.↩
- 같은 책 18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