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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박소란 朴笑蘭
1981년 서울 출생. 2009년 『문학수첩』으로 등단.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 『한 사람의 닫힌 문』 『있다』 『수옥』 등이 있음.
noisepark510@hanmail.net
없는 연습
날벌레가 있다
죽어가는 날벌레가, 하필 주전자 속에
물을 끓이려다 말고 나는 기다린다
조그맣게 요약될 하나의 죽음을
어디야? 오고 있어?
몇통의 메시지를 보내고
읽다 만 책을 들어 천천히 책장을 넘기고
어떤 문장에는 일부러 진하게 밑줄을 긋는다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바닥에 켜켜로 내리깔린 침묵, 그 또한 사랑이었다
주전자 옆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고요히, 고요히, 그러다 그만 고요가 되어버리기
죽음이 오면
나는 따뜻하겠지
흰 김이 피어오르는 한컵 물을 후후 불어 마시며
구겨진 사랑을 다시 펼쳐 읽으며
주전자 뚜껑을 만지작거린다
이제 막 혼을 씻어낸 사람의 차디찬 손 같네 생각한다
그 손을 꼭 잡고, 오지 않는
죽음은
실은 이미 여러번 다녀갔는지도 모른다고
없는 날개를 연습하듯이
또다시
또다시
아무 곳으로도 날아가지 않고
나는 기다린다
날아오지 않는 답장을
답장이 오면
너는 따뜻하겠지
오고 있어?
숨을 멈추고, 그러다 그만 무엇을 기다리는지 잊어버리기
비바리움
다 죽는다 결국,
알면서도 시작하는 세계
그런 건 참 신기하지
망해가는 지구를 공들여 관측하는 일처럼
넘어진 뒤에도 일어서는, 일어서서 끝까지 달리는 사람처럼
피가 흐르는 무릎에서 나는 눈을 뗄 수가 없는데
일어서지 말자 살아나지 말자
속으로 내내 바라면서도
도마뱀은 알을 깐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들이 탄식하며 자라고
화석을 뚫고 나온 늙은 공룡이 한권 시집을 건넨다
그런 건 참 신기하지
한번도 죽어본 적 없다는 듯
전장의 총칼에 가슴이 뚫리고 목이 베여도
돌아온다
집으로 다 돌아온다 믿을 수 있다면
가끔은 궁금하다 여기는 어디인지
어떤 비극인지
어떤 비극이 휩쓸고 지난 자리인지
나는 어디에 있나
어디에 숨어 있나 나는
어떤 밤은 기어이 나를 찾아내겠지 꼭꼭 숨어라,
사정없이 부수고
찢고
한줄도 쓸 수가 없어 나는 간신히 쓰는 흉내만 내다가
벽 저편을 바라보면
새벽의 차디찬 물을 긷는 손이 있다
그는 하나의 손을 가졌을 뿐
살아 있는 것이 좋아서
자주 슬퍼지는
자주 부서지는
사람, 그냥 사람
그런 건 참 신기하지
물이 쏟아진다 물을 마시면 또다시 살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