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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홍미자 洪美子
1960년 대전 출생. 2018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
시집 『혼잣말이 저 혼자』 등이 있음.
carrot60@hanmail.net
아일랜드
식탁에 대해 말하자면
등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짓이겨진 토마토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때 해가 주방 창으로 떨어졌을 뿐
서쪽은 아주 먼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식탁에게 다 털어놓지 못했다
탁상 달력의 붉은 표시는 약봉지와 어떤 관계도 없었다
역류성 식도염도 읽다 만 조류도감도 접어둔 한쪽 날개도
섬에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물컵이 쓰러졌다 흘러간 물이 망설임 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어서 아무 데로도 나설 수 없는
식탁은 섬을 닮았다
식탁보 아래 아일랜드 지도를 숨겨둔 것도
모허절벽으로 떠날 계획이라고
아이슬란드에서 날아온 퍼핀이 검은 바위에 앉아 있다
노랑 부리와 주황빛 다리를 위해 망원경을 준비해야지
우비와 따뜻한 물과 젖은 날개도
골웨이행 기차를 타기로 한다
외국인들의 도시라는데 그건 철새들의 땅이라는 말로 들려서
아이리시커피에 취해봤어? 더블린공항에서
비에 젖은 들판과 회색 산을 흔들며
기차는 절벽을 향해 달려가겠지
새를 보러 가는 거니까 괜찮을 거야
숨겨둔 지도를 꺼내놓기로 했다
아일랜드는 함께 도모한 일이어서
식탁은 섬이니까
어디로도 새나가지 않을 테니까
몬순
외곽이었다
따라붙는 그곳을 야자숲에 버렸다
울렁이는 계절을 넘어온 구름이 비를 쏟아냈다
놀란 도마뱀이 벽을 기어올랐다 잘린 생각들이 바닥에서 움찔거렸으나 객실 불빛이 흐려서 우리는 조금 너그러워졌다
비가 그치길 기다리는 동안 더블린공항에는 폭설이 내렸다 착륙하려는 비행기와 비틀거리는 활주로 그런 불화는 가벼운 소란이었고 도시가 불길에 휩싸였다 피 묻은 빵이 뒹굴고 가자지구 같은 짧은 에피소드가 이어졌으나 그건 모니터 속에서 일어나는 일, 우리는 오늘의 날씨에 골몰했다
배를 띄우기로 했다
우리에겐 명쾌한 실패가 필요했다 수직낙하 하는 에어포켓 같은 그런 공포 놀이도 현실이 아니어서
날아오르지 않아도 흔들리는 물살을 따라 아주 먼 데까지 갈 수 있을 거라고
노란 페인트 벽을 따라 걸었다
랜턴 빛을 맞으며 좁고 긴 골목을
여행자들에 섞이면 아직 잃어버릴 게 많다
국적도 이름도 돌아갈 그곳의 얼굴들도
가방 안에서 부스럭대는 의심의 손가락들도
죽은 쥐와 바퀴벌레를 못 본 척 우리는 모두 한 방향으로 떠밀려
강에 가까워졌을 때
다시 비가 쏟아졌다
우비를 덮어쓴 오토바이 행렬 뒤로 젖은 종이배들이 주저앉고 있었다
등 뒤에서 풀문 폭죽이 터졌고
살아남은 우리의 이유가 범람하는 강물에 쓸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