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내 삶을 돌본 것 ④
수치심의 역사
박정민 朴正民
배우, 출판사 무제 대표.
어렸을 때 나는 청주 이모집에 가는 걸 좋아했다. 나무로 된 인테리어가 참으로 멋졌던 집이다. 고풍스러운 나무 냄새가 온 집 안을 은은하게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냄새가 내게는 아직도 청주의 냄새로 깊이 각인돼 있다. 그 집엔 없는 게 없었다. 화장실도 두개에 방마다 텔레비전이 있었고, 연필도 많았고 책도 많았고 호치키스와 펀치도 있었고 장난감 야구 배트도 있었다. 세살 터울의 사촌형이 가끔씩 호치키스를 내 몸에 박아 넣고 플라스틱 배트로 머리통을 갈기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형이랑 노는 것이 즐거웠다. 그 집에서 놀면 나도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재력의 차이 같은 건 아무 상관없는 나이였다. 그곳은 그저 내가 있고 싶은 곳이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
아무래도 집이 넓어서 이모들이 한꺼번에 청주로 모이는 일이 잦았다. 부모님 두분 다 술을 안 드시니 늘 술이 올라오는 외갓집 밥상은 볼 때마다 생경했고, 웃음이 떠나지 않는 밥상머리의 분위기 또한 우리 집이나 친가와는 사뭇 달랐다. 하루는 이모들이 그 집 거실에 모여 술에 취한 듯 흥에 취한 듯 깔깔거리고 있었는데, 거실을 가로질러 가던 나의 귀에 갑자기 한 목소리가 꽂혔다.
“너 이놈, 오백원 줄 테니까 춤 한번 춰봐라.”
“유치원에서 배운 거 한번 해봐라” “노래 한번 해봐라” “이놈 고추 한번 보자”는 어른들에게 항상 들어오던 인사치레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뒤에 오백원이 따라붙으니 느낌이 사뭇 달랐다. 일종의 유혹이었다. 사고와 지능이 채 완성되지 않은 여섯살의 나는 그 자리에 우뚝 설 수밖에 없었다. 6년의 삶 중에서 가장 큰 고민에 봉착하는 순간이었다. 난 정말이지 유난히 내성적인 인간이었다. 특히 피붙이들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다시 볼 일 없는 사람들한테는 달변이다가도, 습관적으로 봐야 하는 사람들 앞에선 입에 지퍼를 채우는 버릇이 이미 어릴 때부터 완성되어 있었다. 게다가 여럿 앞에서 춤사위 같은 걸 보여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몇초만 용기를 내면 당장에 사촌형과 문방구를 갈 수 있었다. 오백원이면 연예인 얼굴이 인쇄된 책받침을 열개나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사촌형 방에 있던 캐릭터 연필을 나도 살 수 있었고, 불량식품도 다섯개나 사 먹을 수 있었다. 나도 자력으로 돈이라는 걸 벌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였던 것이다.
눈을 질끈 감고 짧은 순간 고민했다. 내가 과연 잘해낼 수 있을지, 내 춤사위가 오백원의 가치를 할 수는 있을지, 불콰하게 오른 이모들의 술기운에 해장국을 뿌려버리는 건 아닐지, 지금 너무 잘 춰버리면 다음에도 시키지는 않을지 오만가지 고민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하지만 이성은 본능을 이길 수 없다. 특히 그 나이 때는 더욱 그렇다. 이미 허우적거리고 있는 팔다리가 원망스러웠지만, 시작해버린 것이다. 나는 다리를 좌우로 거세게 떠는 동시에 다리 앞으로 손을 엇박으로 교차하며 전형적인 ‘개다리춤’을 구현하고 있었다. 이모들은 깔깔 웃어댔다. 그 웃음에 힘을 얻은 나는 손의 위치를 바꿔 머리를 쓸어올리기 시작했다. 박수 치고 오른손, 박수 치고 왼손의 동작을 무한으로 반복했다. 문제는 개다리춤이 어떻게 끝나는지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멋진 피날레로 좌중을 압도하고 싶었지만 본 적이 없어 같은 율동을 규칙적으로 반복했다. 춤은 그런 게 아닌데. 갑자기 예상치 못한 동작으로 보는 사람에게 때에 따라 강한 충격을 전달해야 하는데. 나의 개다리춤은 참으로 형편없고 단조로웠다. 비참한 구석도 엿보였다. 이모들의 웃음은 점점 잦아들었고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이모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망해버린 무대에 선 고독한 댄서의 마음에는 인생 처음으로 수치심이라는 것이 찾아왔다. 약속은 약속이다보니 마지못해 오백원을 건네받았지만 그것은 적선과도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결심했다.
다시는 누군가의 앞에서 춤을 추지 않겠다고.
*
그로부터 얼마 후 또 한번의 수치심이 사고처럼 찾아왔다. 할머니댁에 온가족이 모인 날이었다.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던 사촌 형, 누나 들이 갑자기 숨바꼭질을 하자고 했다. 뜬금없는 타이밍에 들어온 제안이었지만 숨바꼭질에 환장할 나이였던 나는 신나서 베란다로 나갔고, 구석에 딸린 작은 창고 안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찾는다!” 하는 목소리가 현관문 쪽에서 들렸고, 그뒤로도 꽤 오랫동안 나를 찾지 못하는 사촌형을 숨죽여 비웃었다. 창고 구석에 겹겹이 쌓여 있던 대중가요 악보를 구경하다가 김경호의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을 찾았고, 그 자리에서 (지금도) 가사를 다 외울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삼십분 정도가 지났을까.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해 나와보니 사촌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자기들끼리 놀고 싶어서 귀찮은 어린 동생을 숨바꼭질이라는 미명하에 창고 안에 방치해놓고 집을 떠난 것이었다. 큰엄마는 다들 노래방에 갔다고, 너랑 같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다. 나를 무시하다니. 나를 창피하게 만들다니. 나를 슬프게 하다니. 그들이 돌아오자마자 혼을 내던 큰아버지의 그 의식적인 폭언과 큰엄마의 동정 섞인 눈빛, 이러나저러나 신나게 놀고 온 듯한 사촌들의 열기가 화학적으로 뒤섞여 수치심이라는 것이 발생하는 것을 나는 그 순간 똑똑히 목격했다. 그들은 내가 어리기 때문에 수치심 같은 것을 인지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금세 치유될 상처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30년이 넘은 지금도 내가 그 일을 선명히 기억하고 이렇게 쓰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는 채 말이다.
*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나는 꽤 오랫동안 수치심이라는 감정에 취약한 인간으로 자랐다. 무시당하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고, 멍청해지는 기분이 드는 건 최악이었다. 특히 집단적 비웃음을 사는 것만큼 죽고 싶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항상 경계했고 연구했다. 수치심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계속 수치심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결국엔 인생의 원칙 같은 것이 생겼는데 이는 아래와 같다.
1. 나서지 말기.
2. 나설 거면 잘하기.
이 원칙을 공고히 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좀 놀 줄 아는 놈이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은, 누군가의 앞에서 춤 같은 건 추지 않겠다는 결심 또한 속절없이 물렁해져 있던 연약한 사춘기 시절이었다. 전국의 모범생이 모인 학교에 입학한 나는 비교적 덜 모범적인 포지션을 장악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이 학교가 응축되어 있던 나의 끼를 발산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라고 판단했었다. 다만 너무 응축되어버린 바람에 쉽사리 발견되지 않는, 심지어는 나조차도 본 적이 없는, 빅뱅 직전의 우주 상태와도 같은 그 ‘끼’를 어떻게 하면 발산할 수 있을지가 고민이었다. 그렇게 매일을 궁리하던 나는 우연히 학교 게시판에 붙은 ‘백일제 장기자랑 모집’이라는 전단을 발견했다. 우리 학교는 입학 후 백일이 되는 날 ‘백일제’라는 행사를 했는데 그중 가장 큰 무대는 단연 소극장에서 열리는 장기자랑이었다. 그것만 장악하면 나는 단번에 이 학교의 거물이 될 수 있었다. 바로 내가 여기서 가장 잘 놀 줄 아는 놈이 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던 것이다.
장기자랑 접수를 하기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 큰 무대를 혼자서 채우는 건 무리라는 판단이었다. 본능과 야욕에 잠식되어 일생일대의 기회를 날려버리는 일은 피해야 했다. 그렇게 나는 철두철미한 자기객관화를 통해 내 욕망의 희생자, 아니 파트너를 찾기로 했다. 내 화려한 데뷔쇼에 같이 똥꼬를 맞춰줄, 동시에 남은 3년 동안 나와 함께 이 학교의 거물로 지낼 동지를 말이다. 그리고 그는 멀리 있지 않았다. 같은 기숙사 맞은편 침대를 쓰던 P와 나눈 몇마디의 대화에서 그 또한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서로 눈빛만 봐도 알아챈다는 맹수들처럼.
“박정, 너 장기자랑 나가고 싶……”
“맞아.”
“역시.”
“계획이 있어?”
“좋은 게 있어.”
녀석은 뿅망치 네개를 들고 와 내게 보여주었다. 어디서 났는지 도통 알 수 없는 그것들을 들고 있던 P의 위용은 실로 대단했다. 다만 그에게도 풀리지 않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우물쭈물하는 입술에 쓴웃음이 서려 있었다. 그러고는 작은 소리로 내게 말했다.
“어떤 노래가 좋을지 모르겠어.”
“P, 걱정 마. 내게도 계획이 있어.”
“어떤!?”
“콩가.”
*
‘뿅브라더스’가 양손에 뿅망치를 들고 무대에 오르자 순간 좌중은 술렁거렸다. 발라드나 부를 줄 알던 녀석들의 무대에 지친 관객들은 심상치 않은 우리의 복장을 보고 조금씩 상기되기 시작했다. 나와 P는 무대 위에서 눈을 맞췄다. 결기가 느껴지는 대단한 교감이었다. 우리는 심호흡과 함께 고요히 고개를 숙였고, 나는 한 손으로 뿅망치를 들어올리며 “뮤직 큐”를 외쳤다.
“달나라 꿈꾸는 나의 허니 룸바롬 알리바 콩가.”
컨츄리꼬꼬의 「콩가」가 소극장 안에 울려퍼지자, 전교생이 우리를 향해 포효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누가 탁재훈이냐며 열광했고 박장대소를 아끼지 않았다. 우리는 그 반응에 힘입어 살면서 경험해보지 못한 흥분의 몸짓으로 뿅망치를 사정없이 흔들어제꼈다. 16년을 응축한 에너지. 그 에너지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기운에 의해 폭발하는 광경을 어느 우주 과학자가 관측했다면 그는 빅뱅의 비밀을 풀 수도 있을 것이었다. 훌륭한 소품과 최적의 선곡,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세련된 무대매너. 그것을 모두 버무려 빚고 빚으면 그게 바로 뿅브라더스였고 「콩가」의 1절이 울려퍼지는 동안 이 학교 최고의 킹카는 P, 그리고 나였다.
단, 1절 동안 말이다.
1절이 끝나고 우리의 뿅망치는 조금씩 갈 곳을 잃었다. 데이터가 부족했다. 가용할 수 있는 동작을 다 사용해버린 것이다. 급기야는 뿅망치로 내 머리를 때려가며 얼간이 흉내도 내어봤지만, 간주를 다 채우지 못한 채 모든 것이 소진되어버렸다. P와 나는 순간 서로를 바라보았고, 어떻게 할 거냐며 원망 섞인 눈빛을 교환했다. 그 옛날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이모부의 눈이 감기는 것처럼, 관객들 또한 조금씩 반응이 잦아들고 있었다. 이러다간 망해버릴 것이었다. 대차게 실패한 그 옛날의 개다리춤처럼 말이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뿅망치로 P의 머리를 때리기 시작했다. P는 당황했지만 순식간에 나의 의중을 파악한 것 같았다. 그러고는 환상의 콤비답게 그 또한 박자에 맞춰 덩달아 내 머리를 때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동작에 관객들은 다시 한번 조금 웃어주었고, 그에 힘입은 우리는 2절 내내 서로의 머리를 뿅망치로 때렸다.
뿅, 뿅, 뿅, 뿅, 뿅.
관객들은 다시 흥미를 잃어갔다. 반복적인 얼간이짓에 계속 웃어줄 리는 만무했으며, 나아가 몇몇 자비 없는 선배들은 조금씩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다. 지옥 같은 1분 30초. 그 순간에도 내 얼굴은 실없이 웃고 있었다(나라도 웃지 않으면 더 비참할 것 같아 선택한 그 표정이 비참의 극치였다는 것 또한 나중에서야 알았다). 불안한 과거의 기억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을 억지로 차단하며 보다 처절히 사지를 흔들었다. 동시에 그 억겁의 시간과 고통을 견디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잊고 살았던 인생의 원칙을 마음속으로 무한히 뇌까리면서.
‘나서지 말걸. 나서지 말걸. 나서지 말걸.’
‘주제를 알걸.’
*
“달나라 꿈꾸는 나의 사랑아 잘 가라 굿바이.”
노래는 끝났고, 사지는 떨렸으며 머리는 얼얼했다. 관객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나는 결국 내 인생의 두번째 댄스 무대에서도 이렇다 할 피날레를 선보이지 못했다. 최악의 똥꼬쇼라는 오명만 남긴 채 또 한번 쓸쓸히 퇴장해버린 것이다. 대기실 앞에서 마주친 다음 차례 친구가 우리의 어깨를 두드리며 무대 위로 올라갔다. 포지션의 「I love you」 전주가 들려왔다. 친구의 목소리는 감미로웠고, 노래가 끝날 때까지 우리는 좌절을 멈추지 않았다. 남은 인생에서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감미로운 좌절이었다. 향기로운 쓰레기가 된 기분이랄까. 무대 위의 친구는 노래를 엄청나게 잘했고 관객의 반응을 보니 저 아이가 우승을 차지할 게 뻔해 보였다. 모범생 사이에서 덜 모범적인 포지션을 장악하고 싶었던 꿈은 저 멀리 달아났고, 우리는 결국 무대 위의 저 아이가 ‘○○고 포지션’이라는 별명을 얻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최고의 들러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 꼭꼭 숨겨둔 어떤 감정이 다시 한번 통렬히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수문이 열린 댐 사이로 터져나오는 물처럼 어떤 익숙한 감정이 쏟아지고 있었다.
잊고 살았던 그 수치심 말이다.
*
수많은 부끄러움이 내 삶을 훑고 지나가며 크고 작은 상처를 남겼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그것에 대비하고 만회하며 사는 버릇이 생겼다. 창피당하고 싶지 않았고,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다. 비웃음과 수치심에는 장사가 없다. 지져도 지져도 굳은살이 생기지 않는다. 아물지 않는 입병 같은 것이다. 아프긴 더럽게 아프고 하루 종일 그 상처에만 온 신경을 몰두하게 되니 말이다. 그래서 웬만하면 나서지 않았고, 나설 거면 무조건 잘하려고 들었다. 남들 앞에 서는 직업을 가져버린 나라는 인간 자체가 심히 모순적이어서 내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자중하지 못하고 욕망에 굴복한 스스로가 한심스러운 그 시기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나설 거면 잘하기’를 명심하고 명심했다.
“부끄러움을 알면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 거야. 절대 부끄러운 짓을 하지 마. 안 되겠지만.”
영화 「동주」에 나오는 정지용 시인(문성근 분)의 대사(“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지.”)를 난 항상 이렇게 바꿔 읊는다. ‘부끄러움을 알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말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일종의 소심한 반항인 셈이다. 나는 부끄러움을 아는 순간이 지독히도 싫었다. 그래서 꼭 잘하고 싶었고, 잘해야만 했다. 잘하지 못하는 순간은 너무나도 끔찍해서 그럴 땐 누구보다 야멸차게 내 자신에게 온갖 험담을 퍼부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반복했다. 결심이 반복되니 결심조차 실수처럼 느껴진 적도 허다하다. 그럼에도 절대로. 절대로 그 입병 같은 수치심과 비웃음만은 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슬프지만 그게 내 삶을 돌봤다. 최대한 수치심을 빗겨 가자는 각오. 내 자리에서 가만히 잘하자는 결심. 거듭되는 실패와 후회. 그리고 다시 멱살을 잡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의 무한 순환. 만약 내 삶에 어떤 성과가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그 순간들의 공인지도 모르겠다. 후회와 강박, 자책과 오답으로 점철된 역사가 삶을 떠받든다니 자칫 비극적이지만 ‘-2의 네제곱’이나 2의 네제곱이나 마찬가지로 결국엔 16이니 이 따위로 살아도 무방하겠다고 판단한지도 오래다. -2를 더 곱하면 -32가 되는 것은 함정이나, 다시 -2를 곱해 64로 만들어 ‘요건 몰랐지?’ 하는 익살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내년이면 마흔이다. 제기랄. 그간 모아온 채찍의 상흔이 가슴속에 온통이다. 나의 훈장. 나의 무용담. 아팠고 처절했고 지랄맞았다. 쪽팔리기 싫어서 몸부림쳤던 그 모든 것들의 결산이 나의 오늘이고 내일이다. 뭘 그렇게 남 신경을 쓰냐고, 너를 믿으라고 조언하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난 속으로 말한다. ‘내가 그렇게까지 남 신경을 써서 이렇게라도 살아. 그리고 그런 나를 내가 어떻게 믿냐’고. 난 내일도 남 신경을 쓸 것이다. 모두를 만족시키겠다는 불가능의 벽에 또 부딪히고 거듭 좌절하고 다시 일어날 것이다. 징글징글한 집착으로 하루를 채울 것이다.
편히 자기 위해서. 편히 꿈꾸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