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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90년대문학 성찰의 좌표를 찾아서
황종연·백지연·하정일의 평론을 중심으로
김명환 金明煥
문학평론가. 성공회대 교수, 영문학. 주요 평론으로 「90년대 문학운동의 새로운 전망」 「새로운 연대를 위한 비평의 열정」 등이 있음. mhkim@mail.skhu.ac.kr
최근 첫 평론집을 펴낸 황종연·백지연과 두번째 평론집을 엮은 하정일은 모두 90년대 문학의 지형에서 개성적인 목소리를 낸 비평가들이다. 이들은 비평마저 상업주의에 물들어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던 지난 연대의 착잡한 현실을 올바로 바라보는 일에 적잖이 기여했다. 종종 서로 차이가 나거나 충돌하기까지 하는 비평적 입지들을 점검하는 작업은 오늘의 비평적 쟁점의 소재를 이해함으로써 우리 비평의 좌표를 정확히 살피는 일이 될 것이다.
1. 진정성의 비평과 리얼리즘 비판
황종연(黃鍾淵)은 90년대 우리 문학의 새롭고 다양한 현상들을 면밀하게 주시하면서 그 배면에 깔린 근본적인 흐름을 거시적인 차원의 비평적 안목으로 해명하려는 차분한 자세를 견지해왔다. 첫 평론집 『비루한 것의 카니발』(문학동네 2001)에서 그런 특장(特長)이 잘 드러나고 있으며, 특히 근대세계의 보편성이라는 각도에서 90년대 우리 문학의 실상을 해석하고 평가하려는 진지한 성찰이 대목마다 스며들어 있다.
평론집의 제목이기도 한 「비루한 것의 카니발」에서 황종연은 “지난 십년 사이에 성행한 패덕과 불륜의 소설은 한국소설의 어떤 선구적 작품을 상기시키기보다는 언어와 국가의 경계를 넘어선 문학의 현대적 관행을 연상시킨다”(14면)면서 이를 바흐찐적인 카니발레스크의 전통과 연결시켜 논한다. “모든 서열적 위계, 특권, 규범, 금기를 유예”(같은 곳)시켜 기성질서로부터 해방을 구가한 민중 카니발에서 풍부하게 생성된 ‘위반과 전복의 언어’가 장정일·최인석을 비롯한 90년대의 소설적 성과에서 동일하게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황종연은 “광기의 카니발은 부르주아적 정체성을 파괴하는 효과가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재건을 돕는 효과가 있다”거나 민중 카니발이 일부 낭만적 민중주의자들의 미화와는 달리 “애초부터 기성 권력 자체가 허용한 헤게모니의 일시적 균열”이라는 정당한 지적을 잊지 않는다(31면).
90년대 한국소설에 나타나는 ‘비루한 것의 카니발’이 ‘대안 없는 장난’으로 폄하될 수 없는 이유는 이들 작품에 들어 있는 진정성 때문이다. “진정성은 진정성이 부재한다는 인식 속에, 진정성을 추구하는 행동 속에 존재”(같은 곳)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들 비루한 것의 형상화에는 강렬한 도덕적 감각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황종연 비평을 꿰뚫고 흐르는 핵심을 두 가지만 든다면, 바로 이 문학적 진정성이라는 잣대와 리얼리즘의 극복이라는 문제의식이다. 이 둘은 황종연 비평의 특색인 동시에 그의 비평적 발전을 위해서 좀더 냉철하게 성찰되어야 할 사항이기도 하다.
‘진정성’이라는 용어는 90년대 들어와 여러 평론가들이 제가끔 다양한 의미로 사용해왔지만, 황종연 비평에서 이 개념이 으뜸가는 비평적 잣대임은 부인할 수 없다. 가령 김영하의 작품 「비상구」를 두고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전통 속에서 획득한 장르적 진지성에 대한 계산된 반란”(236면)이라고 파악하면서, 주인공인 양아치 우현이 ‘사랑과 신뢰에 대한 욕구’를 보여주지만 작가는 주인공이 사랑과 신뢰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가능성을 의심한다고 본다. 그리고 바로 이 철저한 자세가 진정성의 징표인 것이다. 또 방현석의 단편 「겨울 미포만」을 이념적 당위에 치우쳤다고 비판하면서 “진정성의 문화와는 거리가 있는 소설”(274면)이라고 결론짓는 대목도 참고할 만하다.
진정성은 내용적인 측면을 가리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백민석의 「목화밭」을 두고 작품의 목표가 “실제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수정하는 것”(256면)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세계를 드러내는 방식의 변화, 작품형식이나 기법의 진정성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진정한 삶이란 언제나 부정의 방식으로 추구되는 것이라면, 그 소설적 표현은 당연히 표현의 관습에 대한 도전을 필요로 한다. 진정성의 이상이 소설에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자기 성찰적 담론이 아니라 자아 갱신과 초월의 충동을 육화한 새로운 형식의 모색인 것이다. 따라서 고정된 주제와 담론을 답습한 소설은 아무리 열심히 진정성을 얘기해도 진정하지 않다. (271면)
이런 시각에서 신경숙의 『외딴방』 같은 장편의 성취는 “개인의 진실을 정직하게 추궁하려는 노력, 그리고 그 진실에 적합한 언어를 찾아내려는 노력과 불가분의 관계”(같은 곳)인 것이다.
그러나 진정성의 개념에는 묵과하기 힘든 모호성이 내장되어 있다. 투철한 객관적 사유가 비평의 기본요건이라고 할진대, 진정성은 그러한 사유의 길라잡이가 될 분석의 도구가 아니라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최종적인 비평적 판단에 관련된 기술(記述)의 용어라고 보아야 옳다. 내 생각에는 진정성의 말뜻 자체가 애당초 그것을 비평의 핵심 잣대로 삼기 어렵게 한다. 우리는 이론과 입장의 차이를 막론하고 문학비평의 텍스트에서 ‘참다운’ ‘진정한’ ‘진지한’ 등의 형용어구를 자주 발견한다. 가령, 황종연이 비판하는 리얼리즘론의 대표자에 속하는 루카치(G. Lukács)의 비평에서도 진정성은 그 비평의 골간을 구성하는 주요개념은 결코 아니지만, 비평적 분석의 결과를 진술하는 과정에서 곧잘 언급된다. 그러나 이때의 진정성은 어디까지나 전형성·총체성 등 그의 비평적 개념들을 치밀하고 논리적으로 구사한 끝에 나오는 것임을 지적해야겠다.
황종연은 소위 90년대의 ‘신세대 작가’들의 소설적 경향을 무의미하다고 타기(唾棄)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떠받들지도 않는 균형감각을 유지한다. 90년대에 등단했지만 신세대 작가군과 구별되는 독특한 소설세계를 지닌 한창훈을 놓고 “90년대 소설에 서민적 삶의 훈기와 활력을 소생시켰다는 점에서 그의 성과는 뚜렷하다”면서 “소설이 첨단의 풍속을 반영하기에 급급한 혐의가 적지 않은 시대”에 한창훈의 출현을 든든해하는 입장이 그런 점을 잘 보여준다(329면). 그러나 이 과정에서 황종연의 문학적 진정성은 (그가 이해하는 바의) 80년대 리얼리즘문학에 대한 과도한 대타의식으로 인해 협소해지는 것은 아닌가 염려된다. 그가 높이 평가하는 작가나 작품들을 보면, 기존의 진부한 내용과 형식을 동시에 돌파하려는 노력이 기법적으로는 다양하고 참신한 성과를 일부 거두었지만, 그것이 아직 낡은 내용을 새롭게 갱신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한 경우가 많다. 한꺼번에 묶어버리기에는 각자의 개성이 뚜렷하지만, 장정일·김영하·백민석의 기발하고 대담한 문학적 실험들의 배후에는 아직도 극복되지 못한 내용적 빈약함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판단은 서영채·이광호의 평론을 논하는 가운데 “장정일의 소설에 대해 저항, 전복, 부정의 정신을 인정하는 발언들을 만나면, 그의 소설이 지닌 현실과의 추상적인 관련을 너무 후하게 용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이러한 의문은 저항의 포즈와 저항의 정신을 준별하는 일을 소홀히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우려와도 연결된다”(400면)는 황종연 자신의 주장과 통한다. 사실 「비루한 것의 카니발」에 담긴 장정일론은 바로 황종연 자신의 이같은 관점을 소홀히한 듯한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장정일·최인석에 대한 황종연의 평가는 예컨대 방민호의 작가론보다 다소 치우친 듯하며, 장정일과 최인석을 하나로 묶어 보는 것 자체도 무리한 점이 없지 않다.
뒤에 다룰 백지연 평론집의 첫번째 글 「문학적 진정성, 계몽과 전망을 넘어서」가 잘 정리하고 있듯이, 우리는 진정성이라는 잣대가 편협해질 가능성에 대해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비평용어로서의 근본적인 난점을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80년대 리얼리즘문학의 비판적 극복을 중요하게 상정하는 황종연으로서는 80년대의 민중문학에서 자신이 말하는 ‘진정성’의 기준에 도달한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을 세심하게 분별해주는 노력이 앞으로 필요하다. 그러지 못할 때, 리얼리즘 미학의 비판이라는 문제의식은 풍부해지기 어려우며, 하정일이 주장하듯이 리얼리즘 문학의 ‘최고의 전통’과 대화하는 길로 나아가기 어렵다.
리얼리즘이나 민족문학을 비판할 때 그 최고의 성과와 정면으로 대결하지 못한다면 그 비판의 의의는 반감된다. 황종연의 평론 「민족을 상상하는 문학─한국소설의 민족주의 비판」의 치명적인 문제점은 은연중에 70년대 이래의 민족문학(론)을 민족주의문학(론)과 등치시킨다는 사실이다. 민족문학론자들의 비평에 민족주의와 민족문학의 복잡하고 때로 착잡한 관계에 대한 논의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논법이 쉽게 나오는지 궁금하다. 또 실제 민족문학론에서 우수한 작품으로 강조한 시나 소설을 다루면서 자신의 논지를 펴지 않고 민족문학론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작품을 다루는 것도 촛점을 흐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황종연이 다루고 있는 조정래의 『아리랑』, 윤흥길의 『낫』, 이청준의 『흰옷』은 민족문학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도 황종연과 동일한 비판을 가하게 되는 작품이며, 실제 뒤에서 살펴볼 하정일은 『아리랑』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다. “한국소설에서 민족에 대한 상상은 이념적 대립을 넘어서는 민족 화해에 대한 열망만이 아니라 근대성이 민족의 일체화된 삶의 이상에 가하는 제약과 조건에 대한 보다 철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109면)는 주장이 민족문학운동이 성취한 최고의 이론적·작품적 성과를 좀더 구체적으로 소화하는 노력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작품 분석과 평가가 문학비평의 백미임은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구체적인 작품론에 이르면 황종연의 비평은 다른 입장의 비평들과 대화할 거리가 많다. 가령 신경숙의 「밤길」을 논하면서 “신경숙 소설의 도덕적 감각이 80년대 리얼리즘 소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확인”(141면)하는 데 그치는 점이나, 「감자 먹는 사람들」이 개인의 진정한 자아에 대한 성숙한 인식을 보인다는 호평에 대해서 나로서는 불만이 많다. 그러나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지만, 신경숙의 「배드민턴 치는 여자」를 『외딴방』 「감자 먹는 사람들」과 더불어 신경숙의 작품뿐만 아니라 90년대 소설 전체에서 중요한 성취로 꼽는 발언(155면)은 황종연 외에는 읽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래서 더더욱 「배드민턴 치는 여자」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분석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큰데, 황종연은 다른 글에서 이 작품을 “그 미학적 기반에 있어서 80년대의 주류 리얼리즘 소설과는 분명히 다른”(207면) 것이라고 되풀이하는 데 그친다.
여기서 자세히 논의할 수는 없지만, 남근주의에 물든 남성위주 사회의 정신적 풍토와 젊은 여성의 절실한 인간적·성적 욕구를 날카롭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 단편은 주목할 만한 문제작이다. 황종연은 다른 글에서 “여성문학은 여성 고유의 문화에 잠재되어 있는 의미와 가치 들을 돌이켜보아야 한다”(83면)고 결론짓는데, 이러한 문제의식과 「배드민턴 치는 여자」에 대한 고평은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이런 내용들이 일관되게 황종연 비평 내에서 사유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작품 읽기에서 텍스트에 자기 나름의 시각으로 밀착해 들어간다기보다는 비평가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작품 분석보다 다소 앞세우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바라건대 황종연이 자신의 비평적 입장을 균형감각을 잃지 않고 밀고 나가면서 좀더 자상하고 구체적인 작품 평가를 많이 내놓았으면 한다. 그것은 그와 다른 입장의 비평 사이에 생산적이고 풍성한 대화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2. 특수한 세대적 체험과 비평의 객관성
첫 평론집인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창작과비평사 2001)의 서문에서 백지연(白智延)은 “문학적 계몽주의와 완전히 결별하지 못하면서도 문학의 엄숙함을 조롱하는 유희와 실험에 끊임없이 끌리는 회색인”(6면)이라고 자기 자신을 진단하고 있다. 백지연 비평의 매력은 (‘문학적 계몽주의’라는 표현이 꼭 적합한지 의문이지만) 민족문학론을 포함한 이제까지의 비평적 틀을 충분히 소화하는 가운데 자기 세대의 독특한 체험과 감수성을 올바르게 해석하려는 노력에서 나온다. 신세대 작가들의 “소설을 가로지르는 허무주의와 그 허무주의를 형성한 특유의 세대적인 체험을 사회적인 맥락에서 읽어볼 필요”(36면)에 대한 주장이 그런 특징을 잘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른바 신세대 작가들을 읽을 때 비평적 독해력의 미흡함뿐 아니라 (내 나이가 많지도 않지만) 세대차로 인한 몰이해나 오독을 많이 염려하는 편이다. 우리 사회가 서구의 수백년을 단 수십년에 압축해서 살아왔다는 말은 항상 기억해야 할 일이지만, 특히 1987년 6월항쟁 전후로부터 1992년 문민정부의 탄생에 이르는 5,6년간의 변화는 겪어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해하기 힘들 만큼 큰 정신적 굴곡이었다고 하겠다. 특히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사회변혁의 열기에 휩쓸리며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강요’당하기도 했지만, 곧이어 국내 민족민주운동의 분열과 침체,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보며 자본주의의 막강한 힘과 그것이 우리 각자에게 깊숙이 내면화되어 있음을 절감한 세대의 허무주의나 냉소주의는 아랫사람 야단치듯이 쉽게 비판하고 넘길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특정 세대의 경험을 몸으로 겪었고 그 경험을 넓은 사회적·역사적 맥락에서 조망하려 한다는 점에서 백지연의 비평은 풍부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90년대 초에 등장한 ‘진정성’의 담론들이 “80년대 리얼리즘 미학이론과 대응하는 입장에서 제기된 점”을 거론하면서 “‘명료한 언어로 해명될 수 없는 문학적 감동’으로서의 진정성은 문학의 정치성을 초월하거나 견제하는 방패가 된다”(16면)는 분석은 앞의 황종연에게도 크게 빗나가지 않을 지적이다. 또 김영하를 두고 “지난 연대의 이념적 공동체를 전체주의적 발상의 폭압성으로 단순화한다는 점에서 김영하의 소설은 상당히 완강한 면모를 보여준다”(41면)면서 그의 “사회적 체험은 이념적 연대감의 파괴와 자기정체성의 혼란이 불러온 허무주의의 자장 안에 있다”(43면)는 평가도 정확한 듯하다.
그러나 김영하를 비롯한 신세대 작가의 문학적 특질에 대한 분석은 끝까지 자신의 입장을 밀고 나가지 못하는 어정쩡한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비상구」가 주는 ‘필’(feel)은 미래를 차압당한 청년들의 아픔을 읽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은 흔하고 흔한 신파를 보여주기 때문에 마음을 움직인다. 시시껄렁한 잡담과도 같은 삶이 바로 진짜 ‘인생’이 아닌가. 그래서 때로는 사랑과 신뢰보다는 동정과 연민이 상처를 치유하는지도 모른다. 「비상구」가 전하는 메씨지는 희망이 거세된 세계가 보여주는 인생의 아이러니 그 자체에 있다. (312면)
이런 대목이 신세대 소설의 특유함을 인정하기 위한 노력임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엄정한 비평으로서는 아쉬움이 크다. 김영하의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에 실린 작품들이 가진 리얼리티가 과연 어떤 점에서 이제까지의 소설과 같고 다른지, 또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이 작품들의 ‘새로움’에 해당하는지에 관한 좀더 정치한 분석이 요구된다. 내 생각에는 김영하·백민석을 포함한 몇몇 작가들은 기법과 표현의 갱신에서는 일정한 성과가 있지만, 그것이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 작품의 새로운 성취로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그 기법적 혁신의 참신함도 빛이 바랜다고 본다.
가령, 백지연이 적절하게 명명했듯이 김영하의 세계는 ‘자기방어의 수사학’에 국한된 어떤 것이다. 그런 자기방어의 틀을 가지고 창조적 에네르기의 원천을 언제까지나 유지하기란 불가능한 법이다. 그렇다면 “아직도 우리는 소설을 통해서 반성적 자아의 성숙한 승리, 깨달음과 감동이 보장되는 인륜성의 모험을 기대”(72면)한다는 발언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전통적인’ 비평의 의미있는 관점들을 지켜나가려는 백지연으로서는 좀더 치열하고 매서운 비판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한 비판의 힘이 과거 일각의 비평적 실천이 그러했듯이 선명하고 단정적인 어휘 구사로 되는 것은 아니며, 주밀하고 공정한 작품 분석으로 뒷받침될 때만이 확보됨은 말할 것도 없다.
구체적 작품 평가와 관련된 것으로서, 백지연 평론집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은 여성작가들의 세계를 집중적으로 살피는 3부 ‘여성, 타자(他者)로 호명되는 글쓰기’이다. 여기서는 박경리·최명희·공지영·이혜경·이남희·서하진 등 모두 6명의 문학세계를 다루고 있다. 특히 박경리의 『토지』나 최명희의 『혼불』처럼 여성작가들이 쓴 뛰어난 대하소설에 대한 작품론이 소중하게 여겨진다. 좋은 작가와 작품은 선배작가의 문학에 대한 정밀하고 비판적인 독서 없이는 불가능하다. 문학적 전통과 유산의 무게는 그만큼 엄청난 것이다. 문학마저 ‘미로 속을 질주하는’ 듯한 이 속도의 시대에서 『토지』나 『혼불』 같은 대작, 특히 후자와 같은 독특한 작품은 웬만한 문학지망생들도 꼼꼼히 읽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을 읽게 만드는 비평의 역할은 중요한 것이다.
여성론적인 시각에서 박경리의 『토지』에 등장하는 신여성의 모습이 계몽적인 민족주의 사상의 맥락에서 그려지지 당대 신여성들의 내적 갈등과 고뇌를 리얼하게 그려내지 못했다는 비판이나, 최명희의 『혼불』에서 청암부인에 대한 시각이 종가댁 맏며느리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며 여성인물로서는 신비화되어 있다는 지적은 이 작품들에 대한 자상한 분석과 애정으로 뒷받침되어 있다. 손가락으로 바위에 구멍을 뚫는 심정으로 써내려갔다는 『혼불』에 나오는 액막이 연 묘사에 대한 언급(194〜95면)은 좋은 예가 된다. (연전에 TV에서 방영된 『혼불』 특집 다큐멘터리에서 작가가 소설의 한 대목을 위해 엄청난 수의 연을 직접 만들어본 사실을 자료로 보여준 적이 있다. 이렇게 혼신의 힘을 기울인 창조적 노력에 대한 정당한 관심과 주의 환기는 비평의 주요 임무 중 하나일 것이다.)
3부의 작품론들에 대해 불만을 말하자면, 여성작가들의 문학세계를 끊임없이 비교하고 대조하는 습성이 좀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공지영에 대해 여성문제와 사회문제를 분리하여 사고하는 경향을 꼬집으면서(218면), 남성 주인공들을 실물감을 지니지 못한 평면적인 인물로 그림으로써 “상대방을 윤리적으로 응징하는 자기우월적 심리를 암암리에 내풍기고 있음”(221면)을 지적하면서도, 이런 문제가 다른 여성작가에게서 어떤 양상으로 되풀이되거나 혹은 해결의 실마리를 보여주는지에 대해 더 나아간 논의가 부족해서 아쉽다. 이런 약점이 이남희론의 마무리인 “고통의 기억과 젊음의 향수 위에 구축된 그의 소설은 어둠속에서 외로운 혹성이 꿈꾸는 따뜻한 희망의 교신이다”(253면)는 문장을 그저 수사적인 차원에 머물게 만드는 듯하다. 또, 마지막 4부에 실린 「기괴하고도 슬픈 몽유기」에서 배수아 소설이 『심야통신』에 와서 “일관된 세계를 보여주려는 작가의 서사적 욕망이 강하게 내비친다”(290면)는 판단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오히려 이전의 몇몇 빼어난 작품들이 지닌 독특한 서사가 이완되면서 낡은 틀의 이야기 구조가 앙상하게 노정되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나 싶다.
태어난 시기가 같다는 이유로 동일한 세대로 묶이는 데 대해 심한 저항감을 스스로 표출하고 있기도 하지만, 백지연 비평은 동년배들의 비평적 실천과 다른 자신의 개성적인 목소리를 가다듬고 있다. 이를 위해 그는 이미 앞세대 비평적 전통과의 무조건적인 단절이 아니라 이의 비판적 계승과 극복을 천명하는 뜻있고 소중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매력없는 절충주의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 해야 할 작업이 많이 있다.
3. 민족문학과 근대성에 대한 탐구
하정일(河晸一) 평론집 『20세기 한국문학과 근대성의 변증법』(소명출판 2000)에서 가장 먼저 언급하고 싶은 점은 7,80년대 리얼리즘의 ‘최선의 전통’과 90년대 문학의 ‘최선의 전통’을 만나게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다. 앞서 황종연 평론을 검토하면서 언급하기도 했지만, 우리 평단에는 건강한 대화와 대결의 풍토가 아직 더 정착되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가령, 하정일은 90년대 들어 민족문학을 민족주의문학과 동일시하는 사고의 유포를 경계한다(「탈식민주의 시대의 민족문제와 20세기 한국문학」). 단순한 민족주의적 문학과 구별되는 민족문학의 특징에 대한 그의 논지는 누구라도 수긍할 만한 것이며, 앞서 다룬 황종연의 평문에 대해 적절한 비판의 기능을 행사한다.
그러나 평론집을 전체적으로 훑어볼 때 하정일의 논리전개는 다른 평론가들의 성과를 정확히 인식하거나 의식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매우 거칠고 단정적인 주장도 있어 좀 실망스럽다. 예를 들어, 그가 말하는 ‘복수(複數)의 근대’라는 문제의식이 백낙청·최원식이 추구해온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와 연결된 것임은 틀림없지만, 구체적으로 같고 다른 점을 밝히고 있지 않다. 따라서 여기에 입장의 차이가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표현상의 차이인지가 불분명하다. “민족문학이 근대성의 실현을 위한 문학이념”(105면)이라는 규정이나 “민족문학의 장래는 근대성의 구현에 성공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116면)는 주장은 적어도 그 자구에 따를 때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라는 문제설정과 명백하게 차이가 난다. 이 점에 대한 하정일 자신의 면밀하고 성실한 자기점검이 불가결하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평문은 “민족문학이 ‘근대성의 성취를 통한 근대극복’의 이념”(「새로운 출발점에 선 민족문학론」, 『창작과비평』 2001년 봄호 271면)이라는 변화된 표현을 쓰고 있음을 덧붙여야겠다.
「시민문학론에서 근대극복론까지」에서 백낙청의 민족문학론 분석은 대체로 온당한 것이며, 과거 몇몇 비평이 보여준 몰이해나 왜곡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그러나 백낙청 평론에 대한 비판의 구체적 내용에는 짚고 넘어가야 할 허점이 있다. 우선, 하정일은 분단 ‘이후’의 체제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분단극복의 과정에 대한 백낙청의 되풀이된 발언을 간과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분단극복이 우리의 실천에 달린 한, 분단 이후의 체제에 대해서 미리부터 무슨 그림을 그려놓을 수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며, 다만 진정한 분단극복의 관점에서 몇가지 원칙을 제시할 수 있을 따름이다. 또 분단체제를 백낙청의 주장과 달리 세계체제의 하위체제로 볼 것이 아니라 국가간 체제이되 ‘특수한 형식’의 국가간 체제로 봐야 한다는 그의 주장(81면)은 어떤 이론적·실천적 함의를 지니는지 불분명하다. 짐작컨대 이는 NL 대 PD의 문제의식 중 후자의 틀을 계승한 것으로 남한의 사회변혁 또는 민주화를 선결과제로 보는 것이 아닌가 싶지만 분명한 설명은 없다. 더불어 분단체제와 세계체제의 사이에 동아시아라든가 아시아·태평양지역과 같은 매개항이 없다는 비판 역시 공소하다. 만약 그런 매개항이 성립하려면 실제 현실에서 그런 체제적 작동이 있어야 하는데, 동아시아지역에서 그런 체제를 발견하는 것은 관념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계급문제에 대해 상대적으로 소홀하다는 얘기는 이미 식상할 만큼 반복되어온 이야기이지만, 백낙청 평론의 민중성을 앞에서 한껏 추어올린 후 나오는 지적일 때는 더욱 정치한 비판적 분석이 필요하다고 본다.
하정일 비평은 중요한 문제들을 적절한 대목에서 거론하지만, 자주 문제의 해결책을 너무 쉽게 제시하는 듯하다. 일례로 “민족문제와 계급문제의 결합 필요성이 제기”(57면)된다고 말하지만, 이 두 문제가 애초부터 어떻게 불가분하게 엉켜 있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서술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가령, “이번 IMF 사태로 많은 기업들이 도산했지만, 사실 총자본, 그중에서도 대자본의 관점에서 보면 그다지 잃은 것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87년 이후에 이루어진 자본-노동 간의 일정한 타협을 무화시켰다는 점에서 자본은 재도약의 발판을 단단히 다지는 예기치 못했던 행운을 얻은 셈”(58〜59면)이라는 정세파악은 일면적이며, 민족문제가 곧 계급문제이며 그 역도 성립한다는 식의 단순논리로 오해되기 십상이다. “민족 주체성과 민중 생존권의 상호관련성은 근대 세계사의 보편적 진리”(59면)라는 거창한 어구는 전통적 좌파의 낡고 도식적인 논리라는 공격을 배겨낼 만큼 튼실해 보이지 않는다.
탈근대론의 단골 표적인 계몽의 기획을 옹호하는 자세도 허술하다. “계몽의 기획이 낳은 온갖 문제점이 주체성에 대한 ‘물신숭배적’ 인식 때문”(104면)이라면서 “주체성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주체성에 대한 편향된 이해가 문제”(같은 곳)라는 주장은 협애하다. 여기서야말로 세계체제의 중심부와 주변부의 관계, 서구의 이성이 이룩한 근대성의 업적에 동전의 양면으로 붙어 있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온갖 억압과 착취를 언급하면서 이러한 맥락에서 민족문학의 유효성을 논해야 옳을 듯하다.
사실 민족문학 이념의 유효성 여부는 아직 본격적인 논의는 부족하지만 이미 여러 해 전부터 민족문학론 내부에서도 중요한 의제로 올라 있다. 이 점에 대한 적절한 문제의식을 내비치지 않은 채 민족문학의 적실성, 민족문제와 계급문제의 상호관련성을 되풀이하는 것은 좀 공허하게 느껴진다. 앞서도 말했듯이 황종연은 민족문학의 이념에 대해 비판적이고, 백지연의 경우 명시적인 언급은 없어도 그 유효성을 크게 인정하지 않는 듯하다. 민족문학을 둘러싼 비평계의 이러한 동향을 그저 퇴행으로 몰지 않고 깊이있는 현실인식에 뒷받침된 힘있는 문학적 이념에 대해 고민해야 할 싯점에 우리가 서 있다고 본다. 상세한 논의는 어렵지만 한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민족국가 단위의 사회운동, 국가권력 장악을 통한 인간해방이 회의적인 것으로 밝혀진 역사적 싯점에서, (우리의 경우 이미 특정한 민족국가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지만) 민족 단위의 정치적 실천과 그보다 훨씬 더 큰 지구적 차원이나 훨씬 작은 지역적 규모의 대중운동을 효과있게 연결하는 문학이념으로 발전하지 않으면 민족문학의 미래가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제 우리의 문학은 남한 사회의 가장 국지적인 차원의 인간 삶을 파고들면서도 그 속에서 분단극복의 문제의식을 떠올리는 동시에 그것이 우리 민족의 차원을 넘어서는 어떤 것임을 입증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새로운 시대의 리얼리즘 역시 이처럼 거창한 과제를 감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정일의 작업이 앞으로 이런 차원에서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론을 동시에 가다듬어나가길 기대한다.
다른 비평가의 작업에 대한 치열한 대결의식의 부족은 때로 하정일의 평론을 맥빠질 만큼 당위론으로 빠뜨린다. 90년대의 문학적 상업주의를 비판하는 대목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제 문학과 자본의 싸움은 바야흐로 전면전에 돌입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전면전에서 문학이 승리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필자도 안타깝지만 별다른 묘안이 없다. 다만 민중연대성에 값하는 진정한 대중성을 끊임없이 발굴해나가는 것만이 문학과 자본의 전면전이라는 90년대적 문학지형 속에서 문학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162면)
‘민중연대성에 값하는 진정한 대중성’이라는 문제의식은 좀더 구체적인 논의, 좀더 설득력있는 작품론으로 뒷받침될 때만이 의미를 지닌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하정일이 비판하는 90년대의 반(反)민족문학, 반리얼리즘적 비평 경향은 그의 문제의식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나올 것이다. 안타깝게도 평론집의 다른 대목에서 그런 튼튼한 작품론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조정래의 70년대 말 소설을 다루면서 “자본주의적 근대화와 구별되는 민중주체적 근대화”(377면)라는 표현을 쓰지만, 이는 조정래 작품에 대한 정확한 독해에 기반한 것은 못된다고 본다. ‘민중주체적 근대화’라는 것이 아예 어불성설이라고 믿지는 않으며, 또 특정한 역사적 싯점에서 적절한 정치적 실천을 통해 그런 근대화를 어느정도 쟁취할 역사적 가능성이 있었다고 보고 싶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문학평론으로서 설득력있는 근거를 댈 때의 이야기인 것이다.
90년대 문학에 대한 실제비평에서 하정일은 “90년대의 한국문학은 눈물 없는 비관주의와 근거 없는 냉소주의를 남발”(411면)했다는 정곡을 찌르는 발언을 한다. 그러나 대표적인 90년대 작가의 하나인 은희경의 작품집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에 대한 구체적 평가는 미흡하지 않은가 한다. 가령 「멍」에 대해 평소의 냉소주의와 달리 “낭만적 사랑에 대한 동조는 바로 작가의 내밀한 무의식의 발현”(410면)이라고 평가하지만, 이 단편이 은희경 작품세계, 더 구체적으로 이 작품집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 소설인지를 자리매김하는 작업이 병행되지 않아 그 타당성 여부를 따지기가 다소 혼란스럽다. 이 소설집이 “전작과 달리 진실한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냉소주의를 넘어서고 있다”(411면)는 판단에 쉽게 동의하기는 어려운데, 왜냐하면 보기에 따라서는 하정일이 냉소주의를 넘어선다고 호평한 단편들이 작가 특유의 시각이 예리하게 비판한 통념적인 낭만적 사고나 정서들에 객관적 거리를 지키기 못한 측면이 있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종적인 쟁점은 작품에 대한 정확하고 풍부한 독해라는 믿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4. 끝맺음에 대신하여
10년 단위의 시기 구분이 가지는 문제점을 잊지 않아야겠지만, 황종연과 백지연은 90년대 문학의 독특한 진면모를 파악하는 일에 집중함으로써 만만찮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황종연의 경우, 전체적으로 보아 90년대 ‘신세대 문학’의 새로움과 ‘진정성’을 부각하는 데 치우친 편이며, 그것이 근본적으로 안고 있는 취약성을 제대로 꼬집어내는 면이 부족하다. 백지연은 특정한 세대의 경험을 사회적·역사적 맥락에서 해석하려는 의지가 돋보이지만, 그 역시 ‘비루한 영웅’들의 모습에 지나치게 눈길을 빼앗김으로써 작품의 좋고 나쁨에 대한 나름의 엄정함이 때로 흔들리는 듯하다. 하정일은 앞의 두 비평가들과 달리 90년대 문학에 대해 통렬할 만큼 비판적이지만, 그런 문학이 나오는 현실의 변화에 대해 비교적 덜 민감하며, 이것이 그의 민족문학이나 근대성 논의를 종종 밋밋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세 비평가가 각자 보여주는 독특한 개성과 강점은 새로운 연대의 문학적 실천이 떠안아야 할 과제의 윤곽을 그리는 일에 불가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