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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 | 테러, 전쟁 그리고 그후

 

테러 전후의 미국경제

‘신경제’의 종언과 금융주도 자본주의의 행방

 

 

전창환 全鋹煥

한신대 국제경제학과 교수. 편저로 『미국식 자본주의와 사회민주적 대안』(공편) 『현대자본주의의 미래와 조절이론』 등이 있음. jch6577@hucc.hanshin.ac.kr

 

 

1. 머리말

 

할리우드 공상영화에서나 접할 수 있는 테러장면이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와 군사화의 심장부인 세계무역쎈터 건물과 국방부에서 ‘실제상황’으로 재현되면서, 전세계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과 불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신형무기의 실험과 군비확대에 안달하던 부시정부는 테러행위에 대한 확증조차 제시하지 않은 채 서둘러 아프가니스탄 보복공격에 나섬으로써 무고한 시민들만 희생되고 있다. 사태가 진정되기는커녕 보복공격에 대한 추가테러 경고가 끊이지 않을 조짐을 보여, 향후 미국경제와 세계의 정치경제 정세는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1990년대 중·후반 3〜4%대의 고성장─낮은 실업률─저인플레─고주가─강한 달러로 표현된 미국경제의 선순환(善循環)이 신경제의 열풍을 일으켰지만, 2000년 중·후반 이후 IT 관련 부문에서의 과잉투자와 수익률 하락 그리고 나스닥 주가의 대폭락으로 미국 신경제의 환상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미국경제가 침체로 돌입한 직후 발생한 테러사태는 향후 세계경제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다른 한편 탈냉전 이후 종족간 갈등, 종교분쟁, 인종차별 등 국지적 분쟁이 심화되는 틈을 타 미국은 석유·천연가스 등 핵심자원에 대한 지배력 확보, 인권옹호라는 구실하에 과거 어느 때보다 노골적으로 군사개입을 주도하고 있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70년대 미국이 포드주의의 위기를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와 세계화로 돌파하고자 했던 데 있다고 본다. 2000년대 초반 본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미국의 금융주도 자본주의가 불가피하게 군사적 개입 강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는 내적 딜레머 또한 테러사태 이후 미국경제와 세계경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관건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2. 포드주의의 위기와 금융주도 자본주의의 도래 

 

전후 황금기 미국 자본주의는 월가를 중심으로 한 금융자본을 뉴딜관료·경영자·노동자 간의 연합을 통해 일정하게 통제함으로써 크게 번창할 수 있었다. 1920년대 말 대공황 이후 제정된 30년대 글래스-스티걸법(Glass-Steagall Act)은 금융기관 자체의 거대화 및 법인기업과의 유착을 차단함으로써, 경영자 자본주의를 뿌리내리게 하고 경영자의 권한과 재량권을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2차대전이 끝날 무렵 영국의 케인즈(J.M. Keynes)와 미국 재무부차관이었던 화이트(D. White)가 우여곡절 끝에 단기 투기자본의 운동을 제한하는 데 합의했다. 그 결과 선진각국은 거시정책의 자율성을 확립할 수 있는 기본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전후 미국경제와 세계경제는 대내적으로는 관리된 금융씨스템과 대외적으로는 노동 및 발전 친화적인 국제체제에 힘입어 황금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미국의 포드주의적 축적체제는 경영자의 방만한 경영, 테일러주의적 노동편성 자체의 한계, 그리고 관리된 금융씨스템의 인플레 유발경향 등으로 인해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60년대 말 노동생산성 상승의 둔화가 인플레를 수반한 이윤율 하락으로 발현되면서 포드주의적 경영자 자본주의는 급속히 해체되는 경향을 보였다. 생산성이 둔화되고 인플레가 심화됨에 따라 실질이자율이 마이너스 수준으로까지 떨어지자, 한동안 무기력한 금리생활자로 남아 있던 주주들이나 금융자산 보유자들이 자신들의 이해를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경영자와 노동자 간의 타협의 여지가 아주 협소해졌다. 또한 미국의 인플레는 고정환율의 달러본위제 게임룰과 근본적으로 배치되기 때문에 브레튼-우즈(Bretton-Woods)체제는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 가장 발빠르게 대처한 세력들은 금리생활자, 주주, 자산가 및 채권자들의 이해를 반영하는 금융자본이었다. 이들은 정부에 각종 대내외적 금융규제의 철폐를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플러스의 실질이자율 보장에도 강한 집착을 보였다. 예금금리 상한 철폐, 금융업무 구분규제 철폐 및 완화, 단기자본 이동에 대한 규제 철폐, 주식매매 수수료 자유화, 종업원 퇴직소득 보장법(ERISA)의 제정에 따른 수탁자의 책임과 자율성 강화 등 70년대 중반 이후 지속되고 있는 일련의 금융자유화 조치는 금융자본의 요구와 이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고자 했던 미국정부의 정책적 지원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로써 포드주의하에서 크게 위축되어 있던 금융자본과 고도금융세력이 확고하게 부활할 수 있게 되었다.

70년대 구조적 위기 이후 금융자본의 부활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되는 것이 바로 연기금(pension fund)·뮤추얼펀드(mutual fund, 투자회사) 등 기관투자가들이다. 마이너스의 실질이자율이 일정기간 계속되자, 가계 등 자산보유자들은 자산의 대부분을 주식과 채권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또한 정보의 비대칭성과 불완전성 때문에 포트폴리오 투자(분산투자)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기관투자가들의 역할이 급속도로 강화되었다. 고객을 유치하는 데 상대적으로 불리해진 상업은행들도 예금과 대출 업무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즉, 은행지주회사 등 상업은행들은 다양한 방법과 경로를 통해 증권업무, 자산관리업무, 보험·연금업무 등으로 업무영역을 확장해갔다. 이제 이들이 개인들의 주식투자를 대신하여 포트폴리오 투자를 주도함으로써 핵심우량기업들의 주요 주주로 자리잡게 되었다.

기관투자가들의 급성장과 가계자산 보유구조의 변화, 고령화 등으로 주식투자 문화가 미국경제 전체뿐만 아니라 개인들의 일상생활에까지 침투함으로써, 미국경제는 이전의 포드주의적 경영자 자본주의와는 확연히 다른 작동메커니즘을 보여준다. 우선 경영자들은 포드주의 황금기에서처럼 기업의 재원배분에 대한 재량적 권한을 발휘하기 어렵게 된다. 왜냐하면 경영자들이 기관투자가들이 요구하는 주주가치 극대화라는 엄격한 제약에 처하기 때문이다. 이런 제약하에서는 경영자들이 내부유보와 재투자를 늘리기보다는 배당의 분배와 기업규모의 축소(downsizing) 전략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또한 경영자들은 생산성이득의 분배에 대한 노동자들과의 타협을 중시하기보다는 기관투자가들이 요구하는 주당수익 극대화 요구에 더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기관투자가 주도의 금융주도 자본주의에서 가장 큰 문제는 주식시장과 주가의 불안정성이다. 기본적으로 정보의 불완전성과 비대칭성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내재해 있기 때문에 완비시장(complete market)과 완전경쟁시장의 일반균형이란 성립될 수 없다. 비대칭적 정보구조하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일부 기관투자가들의 행동과 이를 무비판적으로 모방하고 추수하는 투자가들에 의해 주가가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주식시장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즉, 주가는 투자가들의 모방적 행동에 따른 집중 매수와 매도의 크기에 따라 크게 변동하게 된다.

 

 

3. 90년대 ‘신경제’의 실체와 2000년대 미국경제의 아킬레스건

 

그렇다면 1995〜96년 이후 3〜4년간의 고주가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90년대 중·후반 미국역사에서 유례를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주가가 급상승한 데는 90년대 주식 수급의 특수한 여건, 즉 주식의 순발행 내지 순공급을 제한했던 요소와 주식수요의 폭발적 증대를 가져온 구조적 요인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주식의 순발행과 공급이 극도로 제한된 상태에서 주식수요가 급격히 증가하면 주가가 상승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또한 미국이 금융헤게모니를 최대한 이용하여 세계 도처에 존재하던 잉여자금을 대거 흡수해서 주식시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도 주가부양에 큰 힘이 되었다. 미국이 세계최대의 경상수지 적자국과 채무국이면서 강한 달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주식의 순발행을 제약했던 요인부터 살펴보면, 경영자들이 주당수익 극대화를 위해 자사주 매입에 적극 나서거나 분배된 배당이 다시 주식매입으로 연결되면 주식의 순발행액이 극도로 제약될 수밖에 없다. 특히 90년 중반 제5차 기업인수·합병(M&A) 과정에서 경영자들은 주식교환형 합병·인수에 대비하여 자사주를 광범위하게 확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90년대 미국기업의 순주식발행액이 줄곧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이다. 이처럼 공급이 제한된 여건하에서 확정기여형(defined contribution) 연금, 401(k) 플랜, ESOP(종업원주식소유제) 등에 의한 주식수요가 폭증하면서 주가는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또한 기술주에 대한 근거없는 낙관주의가 이들 기업에 대한 주식투자를 더욱 부추겼다. 나아가 기업들은 자사주 매입을 통한 고주가의 편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90년대 후반 은행차입과 정크본드(junk bond, 고위험채권) 발행을 크게 늘리기까지 하였다. 증권회사와 기관투자가들은 주식투자에 관한 업무에 깊이 개입하면서 최대한의 수익을 챙겼다.

미국이 IT 관련 산업에서의 과도한 성장과 수익기대, 그리고 주식의 순공급을 제한하는 90년대의 특수한 수급구조, 금융헤게모니 등에 기초하여 주가상승과 소비증대, 고성장, 강한 달러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이면에 심각한 거시경제적 불균형이 내재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우선, 90년대 이후 미국의 가계저축률이 급격히 하락해 최근에는 마이너스 수준으로까지 하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계저축률이 마이너스로 된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미국 국내에서도 1933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90년대 이후 가계저축률이 낮아지는 것은 기본적으로 주가상승과 자본이득 증대에 따라 소비지출이 증가하고 주식투자를 위한 차입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가계저축률 저하에는 여러가지 위험요소가 따른다. 주식투자를 위한 차입증대로 가계부채가 증가한 상태에서 주가가 크게 하락할 경우 가계파산이 우려된다. 또한 가계부채의 증대는 금융기관의 부실화를 초래하여 미국 금융씨스템의 불안을 심화시킬 수 있다.

둘째, 가계의 소비지출 증대와 차입 증대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비금융법인기업의 차입 증대이다. 1995년부터 1999년 3/4분기까지 비금융법인기업의 부채가 46% 증가했으며 GDP(국내총생산) 대비 비금융법인기업의 부채비율도 60년대 이후 유례없이 높은 수준에 달했다. 문제는 90년대 중·후반 기업이 신기술투자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사주 매입과 합병·인수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은행차입을 늘렸다는 점이다. 이처럼 주식시장과 은행차입이 연계되면 은행에 의한 차입의 조절은 더욱더 어려워진다. 차입 증대로 90년대 중·후반처럼 주가가 계속 상승할 수 있다면 별 문제가 안되겠지만, 주가하락으로 경기침체가 시작되면 해당 기업의 재무상황이 크게 악화된다. 특히 중소기업이나 차입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비IT기업은 주가의 반전으로 더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셋째, 재정수지 흑자만으로 국내의 저축 부족과 경상수지 적자를 메울 수 없는 이상 미국은 자본유입에 기댈 수밖에 없는데, 이 또한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미국이 해외로부터 자금을 조달하여 국내의 자금부족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불안정한 달러본위제하에서 헤게모니국가인 미국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때문이다. 즉, 미국의 법화인 달러가 국제통화로 기능함에 따라 미국은 외화부족을 우려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 유입자금을 가지고 해외에서 투기적 축적을 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의 누적에 따른 미국의 대외 순채무의 누적이 과대평가된 달러에 대한 신인도를 크게 약화시킴으로써 유로화 등의 안정통화표시 금융자산으로의 급격한 자금이전을 초래해 주가폭락과 달러가치 하락을 동시에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더 심각한 것은 잠재화된 신흥시장의 외환금융위기와 함께 일본의 재정적자의 누적에 따른 금리인상 압력과 초저금리 기조 등이 지금까지 미국으로의 지속적인 자금유입을 가능하게 했던 금리격차의 유지를 어렵게 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고평가된 달러시세를 조정하는 것이 미국정부가 당면한 핵심과제임을 감안한다면, 앞으로 미·일간 금리협조 및 환율협조 체제가 더 중요해질 것으로 보인다. 딜레머는 달러시세를 완만한 하락세로 반전시킴과 동시에 미국으로의 안정적인 자본유입과 주가상승을 가능케 하는 미·일간 정책협조가 용이하지 않다는 데 있다.

 

 

 

4. 테러사태 이후의 미국경제: 경기침체와 노골화되는 군사화

 

90년대 중·후반 IT부문의 성장에 대한 과도한 낙관주의에 휩쓸려 IT 관련 투자가 급속히 증가하고, 이것이 주식시장에 더한층 기형적으로 반영되어 정보기술 관련 기업들의 주가가 급등했지만, 과잉투자에 따른 수익률 하락과 투자에 훨씬 못 미치는 수요로 IT 관련 투자가 급격히 감소했으며, 기술주를 반영하는 나스닥 주가도 큰 폭으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IT 거품과 금융거품이 동시에 빠지고 만 것이다. 마침내 미국 상무부는 1993년 이후 처음으로 2001년 3/4분기에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고 최근 잠정 발표했다.

나스닥 주가의 대폭락 이후 2000년 9월부터 산업생산이 하락세로 돌아섰고, 고용·실질개인소득·매출 등이 모두 이 싯점 전후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최종적으로 언제 90년대 경기확장국면이 끝났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일치된 견해가 없지만, 대체로 2001년 3월을 기점으로 하여 미국경제가 침체국면으로 진입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IT 관련 부문의 과잉투자가 예상을 훨씬 넘는 심각한 수준인데다가 주가하락에 따른 소비감소효과도 아직 본격적으로 나타나지 않아, 경기침체가 상당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올해 들어 아홉 차례 단행된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금리인하 조치가 별반 효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도 IT 관련 부문의 과잉투자가 극히 심각한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테러사태가 작금의 미국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는 추가적 언급이 불필요할 것이다.

테러사태 이후 부시정부는 본격적인 경기침체로의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추가적인 금리인하와 감세 조치, 그리고 긴급재정지출 등 본격적인 경기부양책을 쓰고 있다. 그전의 금리인하 조치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현재의 경기침체의 성격상 금리인하의 효과는 거의 한계에 달한 것으로 생각된다. 오히려 부시정부는 감세를 통한 경기부양에 더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시정부의 감세안이 자본이득세와 상속세의 삭감 등 기업과 고소득층의 이해에 맞추어져 있어 얼마나 경기부양 효과를 거둘지는 의문이다.

만에 하나 부시정부가 단기적으로 아프가니스탄 보복공격에 따른 긴급재정지출, 특히 군비지출 증대를 통해 지금의 경기침체를 반전시키고자 한다면, 이는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여전히 주가와 달러에 거품이 많이 남아 있는 현싯점에서 일시적인 군비지출 증대를 통해 거품제거를 인위적으로 지연할 경우, 보복공격에 따른 정치군사적 불안은 미국경제뿐만 아니라 세계경제 전체를 위기로 몰고 갈 수 있다. 군사화를 중단하고 금융화를 제어하지 않으면 21세기 초반 세계경제가 경제위기와 전쟁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21세기 초 금융세계화가 왜 군사화와 위험천만한 동거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80년대 말 미국 내에서 신자유주의적 금융화를 위한 구조조정이 어느정도 마무리된 후 신자유주의적 금융화가 개발도상국·체제전환국 등 전세계로 확산되면서(금융세계화) 경제위기가 끊이지 않고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파편화가 극단적으로 심화되었다. 또한 새로운 금융자본의 신흥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앵글로-아메리카형 시장맹신주의가 여타 국가의 고유한 체제, 제도, 문화 그리고 종교 등을 불온시하고 해체하고자 한 결과, 국가간·종족간·종교간·민족간 갈등과 대립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특히 80년대 말 소련의 붕괴로 인해 생긴 권력공백을 틈타 다양한 형태의 국지적 분쟁이 분출하자, 실추된 헤게모니의 만회를 위해 고심하던 미국으로서는 군사적 개입 강화와 군수산업 재편을 추진하는 데 큰 힘을 얻게 되었다. 탈냉전 직후 급격히 쇠퇴할 것으로 예상된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합병·인수 등의 재구조화를 통해 더욱 거대화되고 90년대 후반 클린턴이 군사력 강화에 힘을 실어주는 정책을 전개함에 따라, 40년 만에 주어진 평화정착의 기회는 완전히 무산되고 말았다. 부시정부가 집권한 직후 군산복합체─국방부─미의회 주도의 군사화가 전모를 드러내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90년대 이후 10여년간 미국의 군사개입이 지난 40년간의 냉전체제하에서보다 더 많았고 경제위기도 그 어느 때보다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이는 자유주의자들이 예상했던 것과 달리, 90년대 금융세계화와 탈냉전이 앞으로 번영과 평화를 가져오기보다는 심각한 경제위기와 정치군사적 분쟁을 지속적으로 동반할 것이라는 전망을 가능케 한다. 미국이 새로운 ‘세계무질서’(new world disorder)를 관리해야 한다는 미명하에 안보와 국방을 위한 군비강화에 안달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클린턴정부 말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던 이런 경향은 부시정부하에서 더욱 노골화되고 있다.

부시정부는 집권하자마자 클린턴이 집권말기에 구체화한 미국본토미사일방어계획(NMD)과 전역미사일방어계획(TMD)을 통합하여 일원화하는 새로운 미사일방어계획(MD)을 제기했다. 미국은 이 계획이 실현될 경우 본토뿐만 아니라 동맹국 나아가 해외주둔 미군기지 등을 깡패국가(?)들의 미사일공격으로 보호할 수 있게 된다는 명분을 제시하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형태의 국지적 분쟁에 안심하고 병력을 투입할 수 있는 여건을 확보하게 된다. 미국은 이 계획의 실현을 위해 유럽·일본 등 동맹국의 동의를 구함과 동시에, 러시아와의 협상을 통해 미사일방어계획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고 있는 탄도탄요격미사일(ABM)제한조약을 개정할 뜻을 분명히했다. 러시아의 반대로 ABM제한조약의 개정에는 실패했지만, 미국은 다양한 루트를 통해 개정의지를 관철할 태세이다. 그 이면에 미국의 거대 군산복합체가 강력하게 버티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무역쎈터 테러 직후 부시정부가 테러에 대해 장기적인 전쟁으로 대응할 것을 선언하면서 400억 달러의 긴급지출을 단행한 것은 이미 충분히 예견되었던 것이다. 이런 조건에 편승하여 소련 붕괴 이후 새로운 적응을 모색해야 했던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최근 다시 커다란 활력을 얻어가고 있는 듯하다. 테러사태 이후 뉴욕증시가 한때 마비되었다가 다시 개장되었는데, 대부분의 주가가 급격히 하락하는 와중에서도 록히드 마틴(Lockheed Martin), 보잉(Boeing), 레이티언(Raytheon), 제너럴 다이내믹스(General Dynamics)사 등 군수관련 기업의 주가만 상승세를 보인 것이다. 미국의 금융자본들이 주주가치(shareholder-value) 극대화를 표방하면서 이들 기업의 주식매수에 집중적으로 나선 것은 기관투자가들의 생리상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이제 우리가 앞으로 주도면밀하게 대처해야 할 것은 미국 헤게모니의 양대 지주인 금융자본과 군산복합체의 동거가 가져올 파괴적 위협이다.

 

 

5. 맺음말

 

테러사태 이후 세계경제는 미국의 경제실적 악화로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다. 세계 동시불황까지는 아니더라도 미국과 금융적 연관이 강하고 IT분업연쇄에 깊숙이 편입된 동아시아 국가들은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미사일방어계획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이 도사리고 있어 군사적 긴장마저 고조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테러사태에 대해 보복전쟁으로만 일관한다면 세계의 정치·경제는 더 위험한 국면으로 빠져들 수 있다. 미국은 하루빨리 주가거품, IT거품, 달러거품을 걷어내는 데 나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보다는 군비지출 확대 등 일시적 경기회복책과 보복공격에만 의존할 태세이다. 우리는 미국이 보복전쟁을 장기화할 경우 테러집단과 군산복합체만 비대해질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제위기와 전쟁위협에 노출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21세기 초 각국의 역사와 종교, 문화를 존중함으로써 세계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금융위기, 빈곤, 환경파괴 및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전세계를 구출해야 할 중차대한 과제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다. 한때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파수꾼을 자처했던 미국이 이제 경제위기와 무질서를 전세계적으로 확산시키는 진원지가 되고 있는 현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미국이 스스로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와 군사화의 파괴적 효과를 깊이 반성하여 자기제어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그러나 일말의 희망을 갖게 했던 미국 내의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안타깝게도 자국이기주의와 보호주의에 사로잡혀 있어 큰 기대를 걸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금융화와 군사화의 최대 피해자인 개발도상국의 근로대중과 시민이 연대할 수 있는 다양한 계기들을 모색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일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