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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의 문화지도, 어떻게 달라지나

 

‘상상력’으로 열어가야 할 새로운 지평

90년대 한국사회의 성담론 성찰

 

 

이남희­ 李南姬

서울대 강사, 서양사. 『여성과사회』 편집위원. namhlee@yahoo.co.kr

 

 

1. 상상력의 소중함과 빈곤함

 

문화에 관한 여러 갈래의 정의를 읽던 중, “문화연구의 핵심어로서의 문화란 인간의 생존방식을 논의하는 단어이며, 특히 ‘유전자로 프로그램된 삶’이 아니라 ‘모여서 만들어가는 삶’에 대해 말하기 위해 고안된 단어이다. 문화란 결국 사회구성원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내적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자, 그 외적 조건과 자신을 연결시키는 내적 성찰능력이며, 그럼으로써 자신들이 살고 있는 조건을 바꾸어가는 창조적 능력이다 (…) 문화연구는 한마디로 자신의 삶의 조건을 낯설게 바라보는 자기성찰적 훈련이다”(조혜정 「문화이론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정치적 언어’에서 정치적 언어의 정치학으로」, 『연세춘추』 1994. 2. 28)라는 진술, 특히 ‘자기의 삶의 조건을 낯설게 바라보는’이란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필자는 이것을 다른 말로 ‘상상력의 발휘’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주어진 현실조건에서 자리바꿈을 해보는 것도 때로는 통쾌함과 반성의 재료가 되지만 그 지점을 넘어서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여는 힘을 갖는다. 우리 사회의 ‘성과 가족’ 문제를 성찰할 때 ‘상상력’이 갖는 소중함을 돌아보려는 것이 이 글의 의도이지만 얘기의 출발은 일단 그 상상력의 빈곤함을 지적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가만히 보면 우리 사회에서 몇사람이 채 읽지 않는 이론서보다 TV 드라마 등 대중문화를 통해 성과 가족에 대한 더 급진적인 주장이나 생각이 전개되고 있는 것 같다. “결혼한 세 부부 중 한 부부가 이혼. 한국의 가정들은 지금 위기에 봉착해 있다. 가정이란 굴레를 벗어 던지고 저마다 ‘나’의 욕망을 좇아 꿈틀거리고 있다”(MBC 「위기의 남자」 기획의도 http://www.imbc.com/ tv/drama/crisis/)는 현실진단 아래 남편과 아내가 각기 다른 상대를 만나는 내용을 다룬 드라마는 이제 별로 충격적이지도 않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꽤 도발적인 제목 아래, 결혼과 애인과의 동거를 양립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감독 유하는 “이 영화를 통해 결혼이란 화두를 공론화시키고 싶었고,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본 결혼제도에 대해 담론을 이끌어내고 싶다. 영화 속 이야기는 옆집에서 일어나는 실제상황이다. 즉 누구에게나 연희는 존재하는 것이다”(『씨네 21』 2002. 4. 23)라고 말한다. 훗날 어느 역사가가 이를 사료삼아 한국사회의 쎅슈얼리티를 연구한다면 어떻게 기술할지 궁금해진다.

그러나 문제제기는 과격해도 결론은 ‘버킹검’일 수밖에 없는 대중문화의 속성 탓인지 이들이 펼치는 상상력은 한없이 빈약해 보인다. 「위기의 남자」의 기획의도 말미에는 “그러나, 방황의 계절을 거친 많은 이들은 다시금 가정의 울타리를 그리워하기 마련. 이 드라마는 인간의 마지막 안식처는 결국 ‘가정’임을 일깨워주고자 한다”고 안전핀을 달았고,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보고 ‘결혼제도를 고민’하게 됐다는 한 지식인은 기껏 내놓는 대안이란 것이 이러했다.

 

성 소비의 자유와 다양성을 진작시키기 위해서라면, 나는 차라리 지금의 결혼제도를 그대로 둔 채 공창제를 운영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이 공창제에서 성적 쾌락의 일차생산자는 여성일 수도 있고 남성일 수도 있다. 또 이 제도 아래서 성적 쾌락의 일차생산자가 지금의 사창가에서처럼 중간상인들에게 착취당하지 않도록 세심한 법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고종석 「아저씨,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보고 결혼제도를 고민하다」, 『씨네 21』 2002. 5. 10)

 

현실의 제도에 비판적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에 너무나 익숙해 있는 이들로서는 다른 그 너머를 꿈꾸는 일조차 쉽지 않다.

그에 비하면 얼마 전 TV의 ‘주말의 명화’ 시간을 통해 방영된 말린 고리스(Marleen Gorris) 감독의 「안토니아스 라인」(Antonia’s Line, 1995)은 가부장적 가족제도나 성관계를 넘어서는 상상력이 어느 정도까지 피어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로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지난 몇해 동안 대학의 여성주의 모임이나 여성단체의 교육프로그램에서 토론교재로 즐겨 선택됐던 것인데 주말의 명화를 통해 안방에서 보게 됐다. 방송 담당자가 그 영화를 고른 이유가 감독이 ‘국민 영웅’ 히딩크와 같은 네덜란드 출신이라는 게 눈에 띄어서였는지,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탔기 때문인지, 그 주제의식이 정말 마음에 들어서였는지, 그도저도 아닌 또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공중파를 통해 그 영화가 방영된 것이 조금은 의외였다.

「안토니아스 라인」은 가족 혹은 성에 대해 펼칠 수 있는 다양한 대안적 가능성을 한상 가득 차려낸, 좀처럼 맛볼 수 없던 영화다. 2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고향마을로 돌아와 농사를 짓고 살게 된 안토니아와 딸 다니엘, 손녀로 이어지는 여성 4대의 이야기가 큰 줄거리이다. ‘애들 엄마’가 되어달라는 홀아비 바스의 청혼에 ‘나는 아들이 필요없어요. 남편도 필요없어요’라고 분명히 말하고, 대신 도움이 필요할 때 서로 돕는 친구로, 주일에는 양쪽 아이들을 데리고 식사를 하는 이웃으로, 원할 때는 애인으로 새로운 관계맺기를 해나가는 안토니아, 결혼이나 남편은 원치 않지만 아이를 갖고 싶어한 화가 다니엘, 수학과 음악에 몰두하고 연애나 모성에 집착하지 않는 천재 타입의 테레사, 이들 삼대 중 누구도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혼자 사는 늙은 여자, 미혼모, 아비 없는 자식 등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나 고정 관념이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그 집에 모여드는 사람들, 정신지체자인 디디와 ‘얼빠진 입술’의 사랑, 같은 성(性)인 다니엘과 테레사 담임의 사랑, 죽음의 행복 대신 삶의 행복을 택해 파계한 보좌 신부와 애 딸린 레타의 사랑은 마을과 교회로부터는 배척당하지만, 평화롭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므로 아름답다. 소위 ‘정상적인’ 가정을 가진 이는 하나도 없지만 결핍의 그늘은 없다. 그 대척점에서는 대지주인 디디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오빠 피터가 강간을 저지르고 주임 신부가 위선적인 설교를 한다.

아무리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나라라고는 하지만, 네덜란드에도 이런 목가적인 풍경의 소수자를 위한 낙원 안토니아네는 아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감독이 줄곧 환상적이고 코믹한 풍으로 화면을 끌어간 것도 유토피아를 이야기하고 있음을 의식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필자가 여전히 궁금한 것은 이렇게 기존 성관계와 가족질서를 몽땅 뒤집는, 잔잔하지만 ‘위협적인’ 영화가 공중파를 통해 방영될 정도로 우리 풍토가 달라졌는가, 그걸 본 시청자들은 어떤 감흥을 느꼈을까, 그리고 이번 시청 체험이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가족을 해체·재구성하는 힘을 가진 담론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하긴 주말에 배를 방바닥에 붙이고 느긋하게 보는 외화와 토론거리를 생각해가며 세미나실에서 보는 영화는 다를 것이다. 가끔 TV에서 댄싱그룹이 리메이크해 부르는 민중가요 「사계」를 들을 때마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라는 가사는 낯설기만 하고 그들의 춤동작만 눈에 들어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까.

 

 

2. 거대담론과 미시담론에서의 성

 

9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 성담론이 엄청나게 확산되고 내용에서도 지각변동이 진행됐다는 것은 자주 듣는 얘기다. 왜, 유독 이 시기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거나 많은 이들에 의해 민감하게 감지됐을까? 변했다면 무엇이 왜 변한 것일까? 우리 사회의 정치적 지형변화의 기점은 내부적으로는 1987년 민주화대투쟁 시기로 잡을 수 있지만, 그후 세계 사회주의권의 붕괴 여파로 탈정치화의 바람이 부는 등 사회 문화적 변화의 양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대체로 90년대 들어서이다. 이 시기는 정치·사회 변혁을 중심에 두는 거대담론이 쇠퇴하는 대신 일상생활, 개인의 정체성이 중요해지는 미시담론이 부각된 시기로 흔히 묘사된다. 이러한 시대조류의 변동은 역사가나 사회과학자뿐 아니라 80년대에 대표적인 대하 장편소설을 썼던 소설가의 시선을 통해서도 읽을 수 있다.

 

길고 긴 꿈에서 깨어난 듯 5년여 만에 『아리랑』을 끝내고 바라본 세상은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웠다 (…)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빈번하고 심각한 기미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 거대담론의 퇴조와 미시담론의 확장이라는 것이었다 (…) 뒤늦게 알고 보니 거대담론이란 80년대 식으로 사회문제나 역사문제를 소설의 소재나 주제로 삼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미시담론이란 그와 반대로 개인의 문제나 인간의 내적인 문제를 작품화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조정래 「나의 창작교실」, 『실천문학』 1996년 가을호)

 

그렇다면 사회문제나 역사문제를 소재로 삼는 거대담론에서는 성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던가? 반대로 개인의 문제나 인간의 내적인 문제를 다루는 경우에는 성에 대해 더 많이 말한다는 뜻인가? 거대담론 시대의 대표적인 성과로 꼽히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도 등장인물들의 혁명투쟁 못지않게 많은 분량이 성행위나 연애장면 묘사에 할애됐다. 과연 성에 관해 말을 많이, 자주 하게 됐다는 것 자체가 90년대의 새로운 변화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그전에는 사람들이 성에 대해 침묵하고 있었다는 뜻인가? 그렇지는 않다. 80년대 대중의 정치적 불만을 배설시키기 위한 배출구로서 3S(스포츠·쎅스·스크린)정책의 결과이건, 암울한 시대에 대한 울분을 달래는 탈출구이건, 이윤이 되는 것은 어느것이나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자본주의의 상업적 산물이건, 혹은 근대사회에서 개인의 주체성을 형성하는 방식이건, 그 어느 항목에 해당하든지간에 성과 관련된 상징과 묘사는 그전부터 이미 우리 주위에서 차고 넘쳤다.

1991년과 1996년에 반복된 ‘예술이냐, 외설이냐’라는 논쟁도 마광수나 장정일이 소설을 쓰기 훨씬 전부터 있었던 사뭇 진부한 것이다. 90년대 ‘즐거운 사라’가 등장하기 전인 70년대에도 남성작가의 피그말리온으로 창조된 ‘겨울여자, 이화’가 이미 성해방이란 단어로 치장한 채 영화에도 등장해 58만 5700명의 관객을 동원한 기록을 남겼다(「아듀! 한국영화 100년의 벗이여 (2)」, 『씨네 21』 2001. 9. 21). 남성의 욕망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사라와 이화는 별로 차이가 없다. 7, 80년대의 남자 대학생들이 술자리에서 다투어 털어놓던 음담패설이 사실은 자신의 소시민적 모범생 티를 부정하고 민중성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변호를 누군가에게서 듣고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더이상 민중성을 애써 입증할 필요가 없어진 지금, 중년인 그들의 술자리에서 음담패설이 멸종됐는지 궁금하다. 군대 시절 대화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여자얘기’ 속에서 여성 등장인물은 대개 성기로만 클로즈업되거나 턱없이 이상화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그 시절뿐만 아니라 요즘 신문 연재중인 소설의 군생활 회상대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맨날 술집 여자나 창녀하고 한 것말고 다른 건 없어? 좀 심플한 거 말이야.

저 같은 놈에게 그런 여자가 걸리겠습니까? 여자들이 얼마나 똑똑한데요. 제대로 정신 박힌 여자라면 저처럼 배운 거 없지, 돈 없고 빽 없는 놈에게 마음을 열겠습니까? 인물이 잘나기라도 했나, 뭐 중뿔나게 내세울 게 있어야죠. 근데 가만 돌아보니까 한 여자가 떠오릅니다. 정말 풀잎 같은 여자였지요. 이슬 머금은 풀잎 같은 여자였지요. 꿀이슬 받아먹고 사는 청색 푸른띠 나비 같은 여자였지요. (유용주 「노동일기 2」 85회, 『한겨레』 2002. 6. 26)

 

그렇다면 문제는 말하지 않던 것을 말하게 됐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누가 무엇을 어떻게 말했는가, 그리고 그로 인해 쎅슈얼리티를 구성하는 내용과 젠더로서의 양성관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느냐 하는 것이다. 새로움의 정도도 거기에 맞추어 측정되어야 할 것이다. 새롭다는 게 기껏해야 흘러간 노랫가락같이 늘 듣던 얘기들을 더 많이, 더 자주 듣게 되는 것이라면, 그것말고는 달리 떠오르는 게 없는 그 척박한 상상력이 서글프지 않은가.

 

 

3. 90년대 성담론을 변화시킨 힘

 

그래도 90년대 성담론이 이전 시대와 확실히 다른 면이 있다고 필자도 생각하지만, 그 변화는 좀 다른 방향에서 찾아봐야 할 것 같다. 그중 하나는 성에 대한 각종 언술이 이 시기에 공식적인 담론의 지위를 획득하고 학계에서 거론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의 사대적 지식 유통구조로 볼 때 언제나 비교적 안전한 지적 인증서 구실을 해온 서구의 이론서를 살펴보자. 여성학의 시각에서 쎅슈얼리티를 다룬 책들은 70년대 말부터 지속적으로 번역, 소개됐지만 서구의 남성지식인에 의해 씌어진 이론서, 즉 미셸 푸꼬(Michel Foucault)의 『성의 역사』 제1권, 재생산과 분리된 ‘조형적 쎅슈얼리티’를 거론한 앤소니 기든스(Anthony Giddens)라든지 ‘계급해방 담론에 의해 억압된 욕망해방 이론을 개방’했다는 1930년대의 성정치 주창자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의 저술 등이 번역된 시기는 성이란 주제가 한국의 남성지식인들의 학술적 관심사로 등장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1 라이히의 『성 혁명』의 역자는 자신이 번역에 나서게 된 동기를 「역자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구성애, 서갑숙으로 이어지는 처절한 신음, 매스컴의 천방지축. 더 기가 막힌 여자 경찰서장. 우리를 거세하려는 불구자들의 매음굴에서 벗어나, 건강한 인간으로 자라기 위해, 불구자들의 지배를 부수기 위해, 자치 사회를 만들기 위해, 성혁명을 부르짖는 라이히와 접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 개인적으로 라이히의 성의 억압/해방이라는 도식에는 별로 동의하지 않지만, 어쨌거나 이런 남성이론가들의 도입 소개는 쎅슈얼리티 연구를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을 담은 ‘팜플렛’ 수준 혹은 분리된 ‘게토’(ghetto) 영역을 넘어서 ‘학술적인’ 주제목록으로 등재되게 하는 데 한몫을 한 것도 사실이다. 이제 웬만한 국내의 유수 인문사회 분야 학술지나 학술대회에서 ‘성’을 한번쯤 특집으로 다루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권위있는 지식이란 곧 ‘남성적인’ 사고의 소산으로 간주되는 학계의 전통 속에서 이런 현상은 성담론의 지각변동을 반영하는 것이다. 물론 푸꼬 등을 인용한다고 해서 ‘여성적인’ 것을 열등하게 보는 사고방식이나 현실의 각종 성적 불평등을 시정하는 실천으로 곧장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주장을 접함으로써 쎅슈얼리티의 역사성이나 사회적 구성에 주목하고 생물학적인 결정론을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갖는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다만 만일 19세기의 성의학자들(sexologiest)의 전철을 밟아, 성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도 이분법적 시각을 벗어나지 못한 채 남녀의 ‘본질적’ 차이를 확인하는 것에 그친다면, 되레 관심이 없느니만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점은 우리가 항상 경계해야 할 위험이다.

하지만 사적인 이야기에서 학술적인 언어로 성담론이 위치변동을 한 것은 변화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90년대의 성담론에서 새롭게 열린 상상력의 공간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을 연 가장 큰 힘은 여성 주체의 등장이다. 여기서 주체란 성에 대해 말하는 화자일 뿐 아니라 남성적인 시선을 통해 포획되지 않은 자기 자신의 욕망을 가진 존재를 의미한다. 90년대의 쎅슈얼리티는 양성평등의 담론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성과를 보려면 물론 아직 멀었지만 지난 수년 동안 양성평등 실현은 국정과제로도 떠올랐다. 가장 강력한 담론의 주도자인 정치가나 관료에서 일상에서 만나는 개별 남성들에 이르기까지 본심은 어떻든지간에 공공연하게 ‘여성비하’적이거나 ‘성적으로 모욕을 주는’ 말과 행동은 삼가야 할 덕목이 됐다.2 어떤 이들은 90년대에 들어 상대적으로 여성들의 목소리나 주장이 활발해진 것을 다른 사회운동의 퇴조 여파라고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고 ‘여성단체의 극성’에 대한 혐오감을 노골적으로 표하기도 하지만 이런 변화는 단지 의식이나 담론의 영향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요소들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특히 지난 수십년간 여성인구 구성에서 일어난 변화는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누구나 짐작하는 사실이지만, 그동안 고학력 여성이 급격히 증가했다. 통계청의 조사(「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25세 이상 여성인구 중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인구는 1975년부터 2000년까지 25년간 2.4%에서 18%로 7.5배가 늘어나서, 남성(9.5%에서 31%로 약 3배)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아직도 고등교육에서 소외된 여성들이 많이 있지만, 여대생이 극히 소수이던 시대와 달리 이제는 대학을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엘리뜨거나 특권층에 속하는 것은 아닐 만큼 여성들의 고등교육도 대중화됐다. 최근에는 남학생과의 진학률 차이도 전처럼 크지 않다. 예를 들어 전체 여자고등학교 졸업생 중 대학으로 진학하는 비율을 보면 2001년도 통계로 67.6%에 달한다. 같은 해 남자고등학생의 진학률은 73.1%였다(한국여성개발원 ‘여성통계’ 「학교급 및 성별 취학률과 진학률」, http://www2.kwdi.re.kr:8090ucgi-bin/stat_fnd_n2002-07-29).

통계청 조사(「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15세 이상 여성인구 중 취업자 비율은 1975년 39.4%에서 2001년 47.3%로, 남성(2001년 70.5%)에 비해 전체적으로 낮고 고학력일수록 경제활동참여율이 낮지만, 꾸준히 증가해왔다. 반면 여성들의 생애주기 중 출산에 할애되는 기간은 점차 단축되는 추세다.3 전체 인구 중 가임여성의 평균자녀출산율도 놀라울 정도로 낮아졌다.4 즉 출산 등 재생산으로서의 슈얼리티의 비중이 축소되고 있는 것이다. 여성들의 슈얼리티에서 어머니로서의 역할과 분리된 성적 욕망이 중요한 사회문제로 부각된 것은 결코 우연이나 도덕 문란의 효과는 아니다.

게다가 현재 삼십대 이하인 여성들은 얼마 전까지 국책사업이었던 가족계획사업이 실시된 시대에 태어나, 부모들이 국가로부터 딸 아들 구별 말고 잘 키우라는 계몽적 훈시를 받고 낳아 기른 세대다. 가족계획 표어를 보면 1960년대에 세 자녀 출산을 권유하며 ‘알맞게 낳아서 훌륭하게 키우자’던 것이 1970년대에 들어오면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로, 1980년대에는 한 자녀 정책으로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훌륭하게 키운 딸들 새시대의 주역들’로 달라져가는 것을 알 수 있다.5 아들 선호현상이 여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가족 안에서 딸의 지위나 양육방식이 상대적으로 평등해지는 때에 자라난 이 세대의 여성들이 사회에서도 평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예고된 변화이고 국가 차원에서 그것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면 일종의 ‘사기’를 친 게 되는 것이다. 국가의 정책이나 경제·사회 제반 분야의 관행이 이런 실질적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가족관계·직장·사회에서 성별 갈등과 위기는 점점 증폭될 수밖에 없다.

‘가족계획’ 세대의 여성들은 90년대 이후 여성운동의 분수령을 이룬 호주제 폐지운동이나 성폭력 근절운동 등의 실질적인 풀뿌리 추진세력이고, 인터넷상의 각종 여성주의 싸이트를 활발히 이끌어가고 있으며, 그외 각 부문에서 성별 분리나 차별을 깨뜨리고 있고 또 깨뜨려나갈 세대다. 대학가에서 지난 몇해간 학생회 조직에서 여학생들이 회장으로 당선되는 현상은 학생회의 이념성이 떨어지고 학생들의 관심이 멀어진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중요한 변화를 담고 있다. ‘후남이’ 세대가 아니라 딸·아들 구별 없이 둘 혹은 하나를 낳아 기른 딸 세대가 등장했음을 알리는 것이다. 위와 같은 전개는 이미 익숙하고 틀에 박힌 방식의 가족·부부·연인·동료 관계로는 수용할 수 없는 단계에 우리가 도달했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필요로 한다는 신호이다.

 

 

4. ‘욕망을 말하기’의 어려움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여성 주체가 형성될 기반이 조성됐다고 해서 그것이 곧 여성 주체의 등장을 자동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여성이 주체가 된다는 것이 곧 남성 주체의 욕망을 공유한다는 뜻도 아니다. 여성주의의 궁극적인 대안이 남성과 여성의 역할 맞바꿈이 아니라는 것은 이제 어느정도 상식이지만, 한편으로 여전히 여성주의자들이 되풀이해서 받는 질문이다.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그거말고 다른 게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순결 이데올로기’를 탈피하는 것이 곧 ‘성적 자유주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적 자유주의를 비판하건 찬양하건 상관없이 빈곤한 상상력의 소산이다. 성담론이 넘쳐나는 시대에 혼돈을 직접 체험하며 싸워낸 90년대의 ‘영 페미니스트’는 성이 ‘해방 혹은 보수’의 양면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보는 시각을 ‘단순하기 그지없는 남성중심적 의심’이라고 간파했다.

 

쎅슈얼리티를 둘러싼 육체적·정서적 폭력의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내재한 욕망을 분출하면 ‘여성도’ 성적 주체가 된다는 주장은 고의적인 거짓말이다. ‘가능한 한 많이, 오래, 자주’라니? 이것은 오래 전부터 어디에서 들어오던 이야기 아닌가? 사실 남성과 성관계를 맺고 싶어 안달하는 여성 이미지가 성별 권력관계에 무어 그리 위협적이며 치명적일 것인가? (김신현경 「성적 주체로서의 여성, 욕망과 폭력 ‘사이’?」, 한국여성연구소 엮음 『여성과사회』 13호, 2001년 하반기, 61~62면)

 

상상력이 ‘백일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현실과 부딪치는 갈등의 지점에서 그 싹이 자란다. 그렇다고 여성의 금욕을 주장하는 것도 우습지만, 현실적으로 남성중심 성규범이 유지되는 사회에서 여성이 욕망을 드러내고 실현하는 성적 주체로 등장한다는 것은 상당히 많은 단서조항을 필요로 한다. 지난 제4회 서울여성영화제에서 마리 만디(Marie Mandy) 감독의 「욕망을 영화화하기: 여성감독이 말하는 쎅슈얼리티」(Filming Desire: A Journey Through Women? 2001)란 다큐멘터리가 상영됐다. 감독은 “여성감독들이 사랑, 욕망, 특히 쎅슈얼리티를 어떻게 영화화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대표적인 여성감독들을 인터뷰한 이 작품에서 그들은 여성의 몸을 전시하고 소비하게끔 하는 기존의 영화들과 다른 여성적 관점, 여성적 영화언어로 새로운 이미지의 쎅슈얼리티를 표현하고 그 관계를 바로잡아가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한결같이 토로한다. 이들이 영화에서 재현하려는 여성의 몸은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주체지만 이미 관습에 젖은 시선을 벗겨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쎅슈얼리티를 말할 때 이런 어려움은 더 큰 무게로 다가온다. 페미니스트들이 왜 성적 쾌락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성폭력만 물고늘어지느냐는 볼멘소리도 가끔 들려오지만 그때마다 ‘누구 좋으라고?’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성을 즐길 자유를 사유하는 동시에 성을 거절할 권리를 사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상상력이다. 대중문화에 성담론이 범람하지만 하나도 새롭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성별화된 현실세계의 질서 아래서 생산됨으로 인해 남성의 성을 주체화하고 여성의 성을 타자화·대상화, 즉 오직 관계하는 남성과의 관계에서만 의미나 형태를 반복적으로 부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쾌락을 표현해도 여성이 성적 주체로 구성되기란 어렵다(김은실 「성적주체로서의 여성의 재현과 대중문화」, 『여성의 몸, 몸의 문화정치학』, 또하나의 문화 2001). 젊은 여성이 순전히 자신의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쎅시한 몸매를 가꾸고 야한 옷을 입는다 해도 남성중심의 시선이나 대상화의 덫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고 심지어는 지능이나 그 ‘의도’를 의심받기조차 한다.6 최근 상연되는 연극 중에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있다.7 “질(膣)의 독백” 정도로 번역되는 제목을 다는 대신 원어 제목을 그대로 쓴 것은 아마도 홍보 등 여러가지 고려가 있었을 것이다. 기획자는 공연 기획의도를 이렇게 설명한다.

 

여성의 성기를 둘러싼 진지하고 유쾌한 담론을 여성들의 사실적인 인터뷰 형식으로 보여주는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솔직하고 당당한 연극이다. 이 연극을 보고 난 여성이라면 반드시 성의 아름다운 해방구를 되찾은 자유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번 공연을 통해 ‘버자이너’ 독백은 더이상 개인적인 독백이 아닌 사회적인 공통담론으로 자연스럽게, 더욱 풍성하게 이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함께 큰 소리로 말할 수 있는 여성의 성은 이제 자유롭다. (www.vaginamonologues.co.kr)

 

연극을 보는 나는 자유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나? 시작할 때는 그랬다. 있을 법하지만 입밖에 내어 말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얘기들을 털어놓는 분위기에서 ‘아, 이런 연극도 되는구나’ 좋은 기분이 들었다. 배우의 연기도 훌륭했다. 그런데 연기에 스스로 몰입한 배우가 오르가슴을 다양한 신음소리에 담아 거듭 표현하는 대목에 이르러 점점 불편해졌다. 같이 객석에 앉아 있는 남성관객들이 자꾸만 신경쓰이기도 했다. ‘그녀’의 쾌락이 ‘그’의 쾌락으로 전유될까 조바심이 났던 탓이다. 작품구성에 비해 지나치게 긴 그 대목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관습적인 문법, 즉 남성의 시선에 부응하는 쾌락의 표현에 맞춰 연기수업을 받으면서 영화나 연극에서 우수한 자질을 인정받은 배우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농익은 연기력을 바탕으로 여성의 성적 환희를 표현하는 그 장면에서 불편해진 감정은 그후 그 연극을 본 내 주위 동료들에게도 확인할 수 있었다. 초록은 동색이고, 끼리끼리 모여 논다고 하면 할말은 없지만, 자유의 느낌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것이다.

 

 

5. 다시 문제는 ‘상상력’이다.

 

필자는 90년대에 들어 성담론이 급격히 확산됐다는 평가에 동의하기도 하고 동의하지 않기도 한다. ‘성’에 관한 이야기라면 그전부터도 이미 음으로 양으로 넘쳐났다. 많은 경우 내용도 그게 그거다. 90년대에 새로운 것이 있다면 크게 두 가지인데 우선 쎅슈얼리티가 신비의 세계가 아니라 일상의 세계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범람하는 성에 대한 각종 언설 가운데 정작 새로움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감춰진 ‘성의 신비’에 대한 잡다한 정보나 지식이 아니라 고정불변으로 보이는 것을 해체하는 상상력이다. 또하나 꼽을 만한 것은 쎅슈얼리티가 성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성별화된 구조에 포박되어 있다는 인식이 확대되고 비로소 진지하게 성찰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여성의 쎅슈얼리티를 온전하게 논하기 위해서는 벗겨내야 할 꺼풀이 아직도 여러 겹 있다. 성이건 가족이건 경제에서건 남성이 중심, 여성이 보조로 여겨지는 한, 여성의 욕망을 실현하는 여성 주체 구성은 불완전한 것일 뿐이다.

필자는 수입된 작품 대신 90년대 이후 우리 사회 안에서 새로운 성담론의 가능성을 여는 사례를 찾아보려고 했으나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자기가 품은 욕망과 혐오를 솔직하게 노래하는 페미니스트 가수 지현이나 몇편의 독립영화들을 꼽아보기도 했지만 아직은 대중문화의 영역 밖에 있다. 최근 제작된 영화 중에 박진표 감독의 「죽어도 좋아」가 노인의 삶과 소외된 성을 다루었다고 들었는데 지난 7월 23일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았다. 현재 국내에는 제한상영관이 없는 상태여서 제한등급을 받는 경우 극장개봉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하니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앞으로 우리의 경험 속에서 우리의 담론과 삶을 바꾸는 상상력을 키우는 토양이 마련될 수 있기를, 그래서 굳이 남의 얘기를 끌어다대지 않아도 논의가 풍성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이 글을 쓰면서 거는 기대다.

대안의 문제를 돌아보면, 성담론의 새로운 상상력을 열기 위해서는 이러이러한 성도덕이나 가족형태가 올바른 것이다라는 식의 단정은 또 다른 구속이나 제한일 뿐이다. 예를 들어 90년대의 부부관계를 상징하는 새로운 기호로 등장한 ‘평등부부’도 각기 개별 사례로 간주될 때 의미있게 존재할 수 있을 뿐 모범적인 모델로 제시된다면 당사자와 다른 사람들에게 희극이거나 비극이다. 문제는 인습과 타성에 찌든 사고를 반복하지 않음으로써 대안적 가족, 사랑, 성관계를 가능케 하는 열린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좋은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시대의 변화에 따른 바람직한 아버지상(像)’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지 아버지의 잃어버린 권위를 되돌리는 것이 아니다. 양친 부모와 아이들로 구성된 ‘정상’ 가족, 특정 조건의 남녀만 축복받는 결혼제도를 넘어서 단독 부모, 독신, 무자식, 육체적 장애, 나이듦, 단일하지 않은 성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을 타자화하지 않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은 결코 방종이나 부도덕이 아니다. 누군가 말한 대로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고, 낯선 것을 인정하는 바로 그 지점에 다른 세상을 여는 열쇠가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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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셸 푸꼬 『성의 역사』 제1권 “앎의 의지”(이규헌 옮김, 나남 1990); 앤소니 기든스 『현대사회의 성·사랑·에로티시즘: 친밀성의 구조변동』(배은경·황정미 옮김, 새물결 1995); 빌헬름 라이히 『성 혁명』(윤수종 옮김, 새길 2000).
  2. 물론 이런 환경이 갈등없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직장내 성희롱 처벌문제는 남성들의 히스테릭한 반응이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청소년대상 성범죄자 신상공개는 급기야 위헌여부가 심사대상에 올라 있는 상태다. 지난 7월 24일 서울행정법원 행정11부(재판장 한기택 부장판사)는 청소년 성매매 혐의로 벌금형이 확정된 전직 공무원 A씨가 낸 위헌법률심판제청 신청을 받아들여 헌법재판소에 위헌여부를 가려달라고 제청했다. “형사처벌을 받은 성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은 ‘동일한 범죄에 대해 거듭 처벌하지 않는다’는 헌법의 이중처벌금지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 제청의 주요사유다(연합뉴스 2002. 7. 24). 성폭력 가해자에 관대하고 피해자에 대해 오히려 엄했던 사법제도의 불균형을 시정하는 것과 가해자의 ‘인권보호’ 원칙 사이의 충돌은 앞으로도 계속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법을 비롯한 민주주의 제도 자체가 얼마나 가부장적 개념 중심으로 구성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통찰 아래 제도가 정비되지 않으면 쉽게 해소되기 어려운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더 자세한 논의는 신상숙 「성폭력의 의미구성과 ‘성적 자기결정권’의 딜레마」, 한국여성연구소 엮음 『여성과사회』 13호(2001년 하반기); 황정미 「캐롤 페이트만과 탈(脫)가부장제의 정치적 상상력」, 한국여성연구소 엮음 『여성과사회』 14호(2002년 상반기) 참조.
  3. 1964~74년 사이에 결혼한 여성들의 결혼에서 막내 출산까지의 기간이 평균 6.4년인 반면 1985~94년 사이에 결혼한 여성들의 경우는 4.1년으로 단축됐다. 대졸 여성들의 경우는 이 기간이 더 짧아서 3.3년이다. 조사대상은 배우자가 있는 15~49세 사이 여성이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전국출산력 및 가족보건실태조사」, 2001 참조.
  4. 통계청(2000)의 발표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가임여성 1명이 일생 동안 낳는 평균자녀 수는 1970년 4.5명에서 1998년 1.48명으로 크게 줄었다. 이는 선진국의 1.56명보다 낮다. 개도국은 2.80명이며 대륙별로는 유럽이 1.42명으로 가장 낮고 아프리카가 4.62명으로 가장 높다. 통계청 「세계 및 한국의 인구현황」, 2000 참조.
  5. 우리나라에서 제3세계 인구억제의 일환으로 가족계획 사업을 도입한 것은 1961년이고 실제 추진된 것은 1965년이다. 이 사업을 위해 1961년 창립된 (사)대한가족계획협회는 1999년 대한가족계획복지협회로 개칭했는데 현재는 산아제한 사업은 중단한 상태로 ‘엄마젖, 건강한 다음 세대를 위한 약속입니다’라는 구호 아래 모유 먹이기 홍보에 중점을 두고 있다. 대한가족계획복지협회 홈페이지(http://www.ppfk.or.kr) 참조.
  6. 여성의 외모 표현과 욕망 표현이 갖는 딜레머에 대해서는 (이박)혜경 「‘섹시함’의 페미니즘적 전유는 가능한가』, 한국여성연구소 엮음 『여성과사회』 10호(1999) 참조.
  7.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미국의 이브 엔슬러(Eve Ensler)가 각지에서 직접 만난 여성들에게 들은 사례를 바탕으로 대본을 쓰고 직접 연기도 한 오프 브로드웨이 히트작으로, 지금도 세계 여러 극장과 대학가에서 일인극 혹은 다수의 배우가 참여하는 형태로 공연되고 있다. 특히 엔슬러는 공연수익금 중 일부를 전쟁으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일상적으로 자행된 보스니아 등지의 피해여성을 지원하는 데 보내왔다. 해마다 발렌타인 데이 무렵의 공연(V-Day 프로젝트)에서 나온 수익은 기부금으로 돌리는 것이 관례가 됐는데 2002년 6월 30일까지 지원금 규모는 400만 달러에 이른다. 최근에는 아프간에서 여성을 위한 학교설립 프로그램 등과 여성조직에 지원하고 있다. Women’s Review of Books, Vol. XIX, No. 9(2002년 6월) 4~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