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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아프가니스탄 여성: 이미지와 현실

 

 

김영희 金英姬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영문학. 저서로 『비평의 객관성과 실천적 지평』이 있음. gnosis@kaist.ac.kr

 

 

들어가는 말

 

지난해 9·11 사태가 일어나고 이어 감행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 이후, 서구에서는 물론 한국에서도 아프간 여성은 남다른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무엇보다도 억압의 희생자라는 이미지가 압도했으니, 온몸을 철저히 뒤덮고 눈까지 망사로 가린 부르카(burqa)가 억압을 강렬하게 표상하였다. 그런 아프간 여성의 이미지는 때때로 이슬람권 여성 일반을 대표하는 것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슬람권 여성들이 꼭 수동적인 수난의 대상으로만 현상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가령 부각의 정도야 현격하게 덜하지만, 역시 무력갈등에 휘말린 팔레스타인 여성의 이미지는 같은 이슬람권이어도 좀더 복잡하고, 사뭇 대조적이기까지 하다. 언론의 시선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은 자살테러를 주도한 여성들이었지만, 머리에 흰 스카프를 쓰고 기다란 검은 옷을 걸쳤든, ‘서양식’ 옷에 하이힐을 신었든, 가두행진에 나서거나 시위군중 앞에서 구호를 외치는 여성들의 모습도 전해진다. 1987〜94년에 걸친 1차 인티파다(intifada, 민중봉기)에서 이미 팔레스타인 여성들은 거리에 나서서 돌을 던지며 시위하는 모습으로 각인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간 여성의 이미지, 그것도 부르카를 입은 하나의 이미지가 유독 관심의 촛점이 되며 ‘이슬람 여성’ 전체로 일반화되기도 하는 현상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우선 아프간 여성이 겪어야 한 억압이 그만큼 극심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현실에서 걷어올린 이미지인만큼 거기에는 해당 여성들의 삶의 일면이 분명 담겨 있다. 그러나 이같은 이미지의 선별과 시선의 고착은 또다른 의미도 담고 있다. 가령 부르카를 입은 아프간 여성의 이미지는 투쟁하는 팔레스타인 여성의 이미지보다 침략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우기에 훨씬 적절한 것이었다. 거리로 나와 시위하는 투쟁적인 이미지보다 부르카로 상징되는 희생자의 이미지가 기왕의 ‘여성’ 이미지, 혹은 ‘전근대적’인 ‘제3세계’ 여성의 이미지에 더 부합한다는 점도 짚어야 할 것이다. 워낙 이미지가 현실에서 발원하고 현실을 어느정도 드러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선별과 구성, 유통과정을 통해 바라보는 자의 특정한 시선이 담기게 마련이며, 때로는 맥락에서 분리되고 동결되어 그것을 만들어낸 역사를 지워버리기도 한다. 부르카 이미지는 그 전형적인 사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글은 아프간 여성의 단일화된 이미지가 갖는 의미를 살펴보고, 그런 이미지를 낳는 한편 그 뒤에 가려지기도 하는 아프간 여성들의 역사와 현재를 재구성해보려는 한 시도다. 그렇다고 ‘현실’의 전모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고 주장할 생각은 물론 없다. 관심이 일천한 한국의 필자로서 그럴 처지도 아닐뿐더러, 관련 글들이나 정보를 접하면서 새삼 깨달은 것이 있다면, 이른바 ‘총체적’인 혹은 ‘객관적’인 이해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점이었다. 지배적인 이미지 뒤에 자리한 현실의 일각에나마 한걸음 더 다가서게 된다면 그것으로 족할 뿐이다.

 

 

2. 부르카라는 이미지

 

부르카를 입은 여성 이미지는 아프간 여성들이 처한 참담한 처지를 충격적으로 전달하면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지만, 한편으로 아프간 여성들의 삶 자체를 또한번 위협에 몰아넣는 전쟁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쓰이기도 하였다.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다치고 죽고 생활터전과 가족을 잃어 고통받는 ‘전쟁의 희생자’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전근대적’인 이슬람 근본주의에 의한 ‘억압의 희생자’라는 여성 이미지가 압도하였다. 부르카를 입은 아프간 여성들은 이 전쟁의 ‘인도적인’ 명분을 뒷받침해주었다. “여성에 대한 야만적 억압이 테러리스트들의 중심목표다. (…) 테러리즘에 대한 투쟁은 여성의 권리와 존엄을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고 주장한 로라 부시(Laura Bush)의 연설1에서 드러나듯, 미국은 아프간 여성의 구원자인 것처럼 형상화된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Taleban) 정권을 테러리즘의 본거지로 규정해나가는 과정에서 부르카는 그 폭력성과 ‘반문명적인’ 억압성을 환기시키는 가장 적절한 상징이 된 것이다. 탈레반의 패퇴 이후 부르카를 벗고 화장을 한 얼굴을 드러낸 여성들이 화면에 되풀이 비추어졌는데, 아프간의 두 대조적인 여성상은 미국의 대아프간 전쟁이 자국을 공격한 세력에 대한 응징일 뿐 아니라, 아프간 국민을 탈레반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준 해방전쟁인 것처럼 분식(粉飾)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2

그러나 미국이 여성을 포함한 아프간 민중의 처지에 진정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탈레반을 포함한 아프가니스탄 근본주의세력의 확산은 이미 20여년 된 일인데 이제 와서 새삼 문제인 양 나오는 것부터가 수상쩍거니와, 오히려 미국이 바로 이 근본주의세력을 직접 지원해왔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이번 사태에 국한해 보더라도 미국의 관심은 아프간 민중 해방은커녕 스스로 테러세력의 온상이라고 비난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한 공격도 아니다. 미국이 탈레반 축출을 위해 북부동맹 세력과 손을 잡고, 평화정착단계에서도 이들에 크게 기대고 있는 점만 보아도 분명해진다. 북부동맹이 누구인가? 탈레반에 반대해 집결한 군벌연합이지만 그 상당부분은 무자헤딘(Mujahedeen, 聖戰의 전사라는 뜻으로 대소 항전세력의 총칭) 출신이다. 무자헤딘은 탈레반이 정권을 잡기 전에 부르카를 강요하고 여성들을 강간·납치·살해하는 등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무법지대로 몰고 갔다. 탈레반이 ‘제도적’인 여성억압을 자행하였다면, 무자헤딘 및 북부동맹의 여성억압은 더 자의적이고 무질서한 형태였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애당초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의 좌파정권과 소련 점령군에 맞선 무자헤딘을 지원했을 때부터, 이들의 반여성적인 입장과 정책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3 부르카 강제를 비롯하여 여성을 집안에 격리시키는 푸르다(purdah) 제도는 이미 ‘반소항전’ 당시 난민캠프에서 실시되었는데, 이에 대한 일부 여성들의 문제제기를 미국은---그리고 일부 서구 여성이나 페미니스트들까지---자국 문화에 대한 존중이라는 명분으로 묵살하기 일쑤였다. 여기에 반공이라는 냉전적 사고가 작동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4

탈레반 정권이 축출된 후 ‘부르카를 벗어버린 여성’의 이미지가 집중 부각된 것에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이데올로기적 의도가 다분했다. 그러나 부르카를 둘러싼 문제가 이처럼 단순치 않다는 것은 곧 드러났다. 선정적 관심이 잦아든 이후 전해지는 소식은 수도인 카불(Kabul)에서조차 대다수 여성들이 부르카를 착용하고 있다는 것이다.5 왜 그들은 아직도 부르카를 입는 것일까? 벗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벗지 않는 것일까? 지역·출신·개인에 따라 그 답은 다양하다. 도시의 교육받은 젊은 여성들의 경우는 아직도 존재하는 탈레반 분자들을 비롯한 근본주의세력의 실재하거나 잠재적인 위협에 대한 두려움을 꼽는 경우가 많은 반면, 농촌으로 갈수록 그리고 연령층이 높아질수록 부르카는 우리의 전통 의상이라는 반응이 많은 편이다. 좋은 부르카를 입는 것이 꿈이라는 한 농촌소녀 이야기, 그리고 부르카를 만드는 천 중에는 한국에서 수입되는 것이 많다는 이야기가 한국 텔레비전에 방영된 적도 있다.

부르카는 아프가니스탄의 모든 종족의 전통의상이 아니라 파슈툰(Pashtun)족이 사막지대에서 주로 입던 의상이다. 또한 부르카 착용은 시기에 따라 그리고 지역과 계층에 따라 차이가 난다. 무자헤딘의 장악 이전만 해도, 아프가니스탄 일부 지역에서 부르카를 입기는 했지만, 도시에서는 대개 입지 않았다고 한다. 문제는 부르카 자체가 아니라 그 착용여부를 두고 가해지는 제도적인 강압이다.

그렇다고 현재의 부르카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그저 하나의 천조각에 불과한 것일까? 물론 부르카 자체가 그것을 착용하는 여성에게 갖는 의미를 그저 ‘억압’으로만 읽는 것은 단순한 해석일 것이다. 부르카의 구속과 육체적 고통을 말하는 여성들도 많지만, 그저 ‘전통’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하는 여성도, 부르카가 일상생활에 아무 지장도 없다고 말하는 여성도 있다. 부르카 비난에 반대하는 한 필자는 그것이 “예속보다는 보호”의 표징이라고 한다.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부르카 착용이 공적인 장소에서의 활동을 더 ‘안전’하게 해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부르카가 제공하는 안전과 보호의 기능 자체가 사회 전반의 여성억압을 전제하는 것은 아닌가? 그 점은 그 필자의 이어지는 지적에서 뜻하지 않게 드러난다. “[아프가니스탄 농촌의] 남성지배 사회에서 [부르카를 착용하지 않은 여성들은] ‘문란한’ 여성으로 취급된다. 그들은 남편한테 버림받을 것인데, 교육을 받았거나 혼인관계 바깥에서 생계수단을 갖고 있는 여성은 드물다.”6

결국 그 연원이 어떻든간에, 현재 부르카는 일터와 거리와 시장 등 ‘공적 영역’이 여성의 ‘본령’이 아니라는 분명한 메씨지를 담은 상징이자, 그 메씨지를 계속 현실에서 재생산하는 장치다. 중요한 것은 부르카 자체보다 거기 부착된 이 메씨지, 즉 남녀 삶의 구조 자체다. 복장과 거기에 담긴 의미는 삶의 구조가 변화함에 따라 바뀌어나갈 것이다. 아직 모두가 부르카를 착용하고 있는 아프간 서부의 구아리안(Ghaurian) 지역의 여성들에게도 복식문제는 고민과 모색의 대상이다. 파레마 압바시(Parema Abbasi)라는 여성은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는 이 문제, 즉 어떤 복식을 따를지, 새로운 우리 자신의 복식을 만들어낼 것인지를 포함해서 이 문제를 늘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정하든 그것은 단계적인 접근이 되어야만 하니, 그저 단번에 베일을 벗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7

사실 부르카 문제가 비교적 많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후반부터였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한 문건 중 하나가 ‘인권의사회’(Physicians for Human Rights)가 1998년 낸 「탈레반의 대여성 전쟁」(The Taliban’s War on Women)이었다. 이 보고는 탈레반의 여성억압 중 부르카 문제에 촛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이 단체는 2001년 이를 수정하는 새 보고서를 낸다. 탈레반 이전에 부르카를 입지 않았던 교육받은 카불 여성 80명을 쌤플로 한 애당초 보고서에서와는 달리, 좀더 다양한 집단의 2만명을 대상으로 한 새 보고서에서는, 면담한 여성의 80〜90%가 부르카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고 답변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언론의 관심을 받지 못했고, 전쟁 발발 후에도 참고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8

부르카에 대한 아프간 여성들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그 이미지가 주는 정서적 효과에 집중한 것은 미국 여성운동 일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프간 여성인권운동을 자국 내에서나 국제적으로 활발히 펼쳐온 FMF(Feminist Majority Foundation)의 ‘아프가니스탄의 성별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캠페인’(Campaign to Stop Gender Apartheid in Afghanistan)에 대해서도 이런 비판이 제기되었다. 부르카 써보기 캠페인 같은 방식에 집중함으로써, 아프간 여성을 ‘구원’대상인 ‘무력한 희생자’로만 보는 경향에 일조한다는 것이다.9 관심이 부르카의 이미지에서 촉발되었다는 것 자체야 물론 비난거리가 아니다. 어디서 출발했든, 부르카 뒤에 자리한 실제 여성들의 삶과 역사와 목소리에 대한 관심으로, 그리고 그런 삶과 역사를 만들어낸 복합적인 요인 및 거기 연루된 ‘서구’의 몫에 대한 성찰과 자기비판으로 나아가는 노력이 중요하겠다. 그럴 때 일찍이 스피박이 지적한 바 ‘백인 남성이 갈색 남성으로부터 갈색 여성 구하기’10라는 제국주의적 도식에 페미니즘이 동원되는 일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3. 부르카 뒤에 숨은 역사

 

부르카를 입은 아프간 여성을 말하면서 종종 함께 거론되는 것이, 80년대만 해도 아프간 여성들은 교육도 받고 직장도 가졌다는 이야기다. 한 정리에 따르면, “탈레반 장악 이전, 아프간 여성은 카불에서 의사의 40%, 교사의 70%, 카불대학 교수의 60%, 그리고 대학생의 50%를 점하였다”고 한다.11 실상 이같은 여성들의 활발한 사회진출에는 당시 아프가니스탄 좌파정권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수치를 이야기하면서도 대개는 이런 배경은 생략하고 넘어간다. 혹 좌파정권에 맞선 무자헤딘을 지원하며 대리전을 벌였던 미국이나, 이 사실에 침묵했던 다수 서구국가 및 언론들로서는 과거의 그런 역사를 소리없이 지워버리고 싶은 것일까?

1978년 쿠데타로 집권한 PDPA(People’s Democratic Party of Afghanistan)는 집권 후 여러 개혁조처를 단행하였다. 새 정부는 신붓값을 제한하고 강제결혼을 금지하고 결혼 최소연령을 높이는 등 혼인제도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 남녀 모두의 의무교육을 실시하며 여성들의 사회참여를 권장하였다. 그 결과 80년대에 여성들의 사회진출은 앞서와 같은 수적 증가를 이룩하였고, 정부·정당·의회 등 정계에도 많은 여성이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과도적인 조치 없이 전격적이고 강압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면서 반발과 반란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몇달 안 가 무자헤딘이 결집되기 시작했고, 반란과 PDPA 내부의 두 분파 사이의 권력투쟁, 강경파 아민(Hafizullah Amin)의 집권 등으로 위태로워진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소련이 개입한다. 그로써 대정부 투쟁은 민족항전의 성격을 띠게 되고, 아프가니스탄 전역은 오랜 전쟁(1979〜89)에 돌입한다.12 이제 이들 개혁에 붙은 ‘반아프간적’ ‘반이슬람적’이며 ‘외세추종적’이라는 딱지는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1989년 소련이 물러나고 1992년 좌파정권이 전복된 후 무자헤딘이 권력을 장악하는데, 이들은 그간의 개혁조처를 전면 취소하고 편협하게 해석한 ‘이슬람 율법’을 강요하였다. 그 뒤를 이은 것이 다름아닌 탈레반 정권이었다. 이제 여성들은 사회진출은커녕, 항시 부르카를 착용하고 남성을 대동하고서야 거리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탈레반은 자신들의 정책이 여성들에게 ‘더 많은 안전’을 보장해준다고 선전했다.13 결국 현재의 미국에 이르기까지, 아프가니스탄을 통제한 모든 세력이 제가끔 아프간 여성의 구원을 표방한 것이다.

무자헤딘이나 탈레반은 오랜 전쟁으로 이미 피폐할 대로 피폐했고 종족·언어·부족·지역 등 다양한 차이와 갈등요소를 지닌 아프가니스탄 사회의 문제를 풀어갈 어떤 프로그램도 갖고 있지 않았다. 결국 그들이 의존한 것은 이데올로기적 선전과 단속이었으니, 오랜 반소항전으로 더욱 뿌리깊어진 반외세·반제국주의 감정에 편승해 ‘이슬람적’ 정통성과 ‘이슬람’ 문화 고수를 내세웠다. 그것은 여성은 부르카를 입고 남성은 수염을 길러야만 하는 복식과 외모의 통제로, 그리고 남녀의 활동영역을 엄격히 구분하여 일체의 공적 영역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푸르다(purdah) 관행의 실시로 나타났고, 이것이 ‘부르카를 입은 여성’ 이미지의 현실적 배경이 된 것이다. 여성을 공적 영역에서 강압적으로 퇴출하고 모든 권한을 박탈한 이들의 정책은 전장에서 복귀한 남성들의 일자리를 만들어내려는 경제적인 미봉책과 일반 남성들의 경제적·정치적 취약성을 은폐하는 장치이기도 했다.14 결국 아프가니스탄의 성별구조는 고전적인 가부장제의 극단적 모습으로 재구축되기에 이른다. 일견 더없이 단순한 형태로 보이는 이같은 남성 지배체제의 구축에는 성별갈등 이외에 다양한 대내외적 사회적 갈등구조가 함께 작동했던 것이다.

여성의 몸을 민족성과 문화의 가장 중요한 상징처럼 취급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한 이슬람권에서는 그런 현상이 특히 두드러졌다. 서양과 조우한 이래 아랍권에서, 베일로 대표되는 아랍여성의 ‘특수한’ 위치는 식민세력과 반식민세력, 서구파와 수구파, 개화파와 보수파가 부딪치는 첨예한 각축장이 되어왔다.15 탈레반으로 대표되는 근본주의세력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세력이 여성을 놓고 각축하는 형국을 띤 이번의 아프가니스탄 사태는 이 해묵은 과정의 최신판일 뿐이다.

그렇다면 탈레반의 반동을 몰고 온 좌파정권의 개혁시도와 실패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좌파정권의 패배에는, 무자헤딘을 경제적·군사적으로 지원하면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과 냉전을 벌인 미국을 비롯한 파키스탄·사우디아라비아 등의 개입이나, 외세의 지배에 저항하는 아프간 민중의 뿌리깊은 ‘독립정신’, 국가보다는 부족 중심의 정체성이 강한 전통 등이 작용하였다. 개혁적인 여성정책 그 자체가 이 정권의 발목을 잡은 주된 요인 중 하나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여성정책, 그중에서도 남녀공학의 실시는 아프간 사회의 뿌리깊은 보수성에 부딪히며, 난민을 만들고 무자헤딘을 형성시키는 빌미가 되었다. 결국 소련을 등에 업고 유혈쿠데타로 집권한 좌파정권의 개혁 추진은 반외세 민족감정과 보수성향의 결합만 부추기면서 개혁 자체를 ‘비아프간’적인 것으로 낙인찍는 역효과를 가져온 셈이다.

이같은 개혁시도와 좌초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되풀이된 경험이다. 아프가니스탄의 공식적인 ‘독립’을 선포하며 첫 왕으로 등극한 아마눌라 (Amanullah, 재위 1919〜29)는 근대화의 일환으로 여성해방을 중시하였다. 그는 “새 아프가니스탄의 미래 구조의 초석은 여성의 해방이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여성투표권을 헌법에 명기하고 조혼을 금하며 여학교를 장려하고, 공직자에게는 일부다처제를 금하고 서양식 복장을 입도록 했다. 1928년 수라야(Surayya) 왕비가 부르카를 벗은 모습으로 공중 앞에 나타났고, 이후 여성들에게 부르카를 벗으라는 칙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왕의 신속한 개혁 추진과 서양복식의 강조는 반대파에 공격빌미를 주었다. 보수적인 부족세력의 반발을 산 그는 결국 폐위·망명하게 된다. 이번 아프가니스탄 평화정착의 구심점 역할을 하리라 기대받던 자히르 샤(Zahir Shah, 재위 1933〜73)를 포함한 이후의 왕들은 반대세력을 달래기 위해 아마눌라가 만든 정책들을 폐지해버린다.16 그러다 다시 1950년대 말에서 1960년 초반에 주로 다우드(Daoud) 수상 집권시 정부는 베일 착용을 선택사항으로 바꾸고 여성격리제도의 종식을 선언하였다. 여성들은 투표권을 인정받았으며, 대학에 입학하고, 직장을 가지며, 공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17 또한 1964년 헌법에는 ‘의무교육’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런 조치들은 뿌리내리지 못한 채 끝난 것으로 보인다. 동구나 서구 등 외국 유학파와 도시 중산층의 전문직 집단 및 여성이 비교적 많이 포진했던 PDPA는 이같은 개혁조치를 한층 전면적으로 집행하려 하였지만, 외세와의 연루 및 무리한 추진으로 좌초하고 만 것이다.

PDPA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일찍이 아프간 여성문제에 관심을 촉구해온 모가담(V.M. Moghadam)은, 강경파 아민의 독재로 긴장이 악화되기 전인 초기 정책에 주로 촛점을 둔 것이지만, 이들 정책의 진보성을 옹호하는 편이다. 그녀는 1992년 나온 글에서 PDPA의 정책, 특히 여성 문맹퇴치운동을 강압적으로 추진한 데 대한 비판들에 맞서, 문맹퇴치운동은 사회혁명에서 항시 시도되는 것이며, 권리와 개혁과 혁명은 강압적 조치나 투쟁을 통해 획득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좀더 어조를 낮춘 1999년 글에서도 모가담은 정부의 설득이 “물리적 폭력을 포함”한 점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정부 개혁프로그램의 실패를 주로 “뿌리깊은 가부장적 사회구조와 적대적인 지역적·국제적 풍토” 탓으로 분석한다. 이 글에서 모가담은 PDPA 정권 몰락 후 “혁명은 여성을 위한 것이었는데”라고 했다는 한 여성의 말을 소개하기도 한다.18

그러나 모가담 자신도 긍정적으로 소개하는 ‘아프가니스탄여성혁명연합’(Revolutionary Association of Women in Afghanistan, RAWA)의 입장은, 반소투쟁에 나섰던 이 단체로서야 당연한 것이겠지만, 매우 다르다. 한 회원에 따르면,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 성평등을 가져온 게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억류하고 고문했으며, 기도를 금하며 여자는 서양식 복장을 하고 남자는 수염을 자르도록 강요했다. 그 결과 아프간인들은 ‘여권(女權)’이라는 말만 들으면 소련과 제국주의를 떠올리게 되어 “여권을 위한 우리의 작업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녀의 평가다.19

이처럼 엇갈린 평가에서도 드러나듯, 좌파정권 시절의 경험이 페미니즘에 갖는 의미는 간단치가 않다. 한편으로는, 페미니즘이란 이슬람 사회와 무관한 서구적 발상이며 이슬람 문화에 대한 제국주의적 공격이라는 관념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아프가니스탄에서 페미니즘의 처지를 더욱 곤고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좌파정권만의 공적은 아니겠고 주로 카불을 포함한 일부 지역 및 계층에 집중되기는 했지만, 여성권리 신장의 성과는 그후 여성들의 계속된 투쟁의 한 기반이 되었다. 탈레반이 물러나자 언론과 교육 등 ‘공적 영역’에 이미 준비된 모습으로 등장한 많은 여성들의 모습도 그를 증거한다.

 

 

4. 부르카를 넘어서: 아프간 여성운동의 대응

 

이같은 착잡한 양면성은 RAWA의 입장에도 반영된다. 아프간전쟁을 계기로 가장 주목을 받아온 이 단체는 1977년 인권과 사회정의를 위해 싸우는 독자조직으로 출발하여 소련침공 이후 반소투쟁과 반근본주의 투쟁을 계속해왔다. 가령 1988년에는 파키스탄에서 여성과 아동으로 구성된 시위를 벌이며 “아프간인 다수는 사회정의와 여성의 권리가 보장되는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아프가니스탄을 지지한다”고 주장하고 소련 및 아프간 정부, 근본주의세력 모두를 비판하였다. 특히 이들은 “우리 국민, 특히 여성을 광포하게 억누르고 있는 반동적 광신도들”의 ‘반민주적이고 반여성적’인 행동을 규탄하였다.20 이들은 근본주의가 횡행하던 파키스탄의 난민캠프와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학교 운영,21 의료 제공, 경제활동 지원, 직업교육 등 여러 부문에서 여성권리 보호 및 신장을 위한 지하활동을 계속해왔으며, 『여성의 메씨지』(Payam-e-Zan)라는 계간지를 발행하고, 비디오나 인터넷 싸이트를 통해 아프간 여성의 참상을 세계에 알리는 일을 해왔다. 현재 회원은 수천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 및 북부동맹과의 결탁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해왔다.22

이처럼 여성평등과 세속민주정부 수립을 지향하는 좌파조직으로 출발했으면서도 소련의 아프간 침공을 비판한 이들은 진보좌파들에게선 무시를,23 근본주의세력에게선 ‘반지하드’라는 비난을 받았다. 소련 및 친소정권의 진보성만을 보는 서구의 진보좌파와 ‘이슬람’ 전통의 고수만이 민족적인 태도라고 보는 근본주의세력 모두에게 RAWA의 입장은 이해할 수 없거나 ‘적’일 뿐이었다. RAWA를 창립한 미나(Meena)라는 여성이 1987년 파키스탄에서 암살되었는데, RAWA는 아프간 KGB와 망명중이던 아프간 이슬람주의 분파의 합동작전이었다고 본다.24 진상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런 주장은 RAWA가 당시 어떤 전선들을 긋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여성을 포함한 아프간 민중의 독자적 노력만이 문제를 해결할 뿐이며 제국주의 전략에 입각한 외세의 개입은 그나마 자라나던 개혁세력의 진로를 어둡게 만들 뿐이라는 것이 RAWA의 입장이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해서도 이들은 근본주의자를 양성해왔던 미국의 위선적인 태도를 비판하면서, 전쟁은 아프간 민중의 삶을 더욱 파괴할 뿐이며, 아프간인 스스로 사회를 개혁해나갈 수 있으니 그것을 돕는 것이 서구의 몫이라고 여러 성명서와 문건을 통해 주장한 바 있다. 한편 세속민주정부 수립과 여성권리를 주장하는 RAWA의 입장은 ‘서구적’이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들의 입장과 시도가 아프가니스탄에 낯선 것만은 아니며, 이들이 이슬람 자체를 반대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근본주의가 이슬람을 편협하게 왜곡하여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슬람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세속민주주의가 이슬람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지만, 근본주의에게 이들은 ‘이단’일 뿐이다.25

RAWA 외에도 다른 지하여성조직들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중 아프간여성회의(Afghan Women’s Council, 1993년 창립)라는 여성조직이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서 교육·의료 등의 활동을 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RAWA와는 달리 아프가니스탄의 종교적·문화적 전통의 틀 안에서 여권을 신장하려는 입장인데, 좀더 ‘온건한’ 이같은 노선에도 불구하고 이들 역시 무자헤딘의 위협을 받아왔다.26

2001년 11월 말에 열린 본(Bonn) 회의에서 합의된 평화구축 및 국가재건 일정표에 따라, 같은 해 12월에는 하미드 카르자이(Hamid Karzai)를 수반으로 한 과도정부가 출범하였으며 바로 얼마 전인 2002년 6월에는 2년 임기의 임시정부를 새로 구성하였다. 이같은 진행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의 미래는 아직 불투명하고 대다수 여성들의 처지는 곤고하기만 하다. 전쟁은 아직 종결되지 않았으며, 새 정부의 장악력은 매우 취약하고 제한적이다. 새 정부가 ‘친미정권’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는 점, 여권 보장을 이야기하면서도 샤리아(Shariah) 율법의 고수를 내세우는 점, 그리고 북부동맹이 정부에서 큰 지분을 획득하게 된 점 또한 장기적인 전망을 어둡게 하는 요인이다. RAWA에서 경고했던 대로, 마자르(Mazar) 지역을 통제하는 도스툼(Dostum)과 같은 북부동맹 출신 군벌세력들은 이미 아프가니스탄의 상당 지역을 장악하고 독자적으로 통제하고 있는데, 북부동맹 출신인 압둘 카디르(Abdul Qadir) 부통령이 지난 7월에 카불에서 피살된 데서도 드러나듯 다시 군벌간 각축, 종족분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살인·강간 등도 드물지 않게 자행되고 있다. 남편을 잃은 많은 여성들은 구걸이나 매춘으로 내몰리며, 빈곤가정의 경우 어린 딸을 팔아넘기는 경우도 보도되었다. 비교적 사정이 나은 카불의 거리에서도 구걸에 나선 수많은 여성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아프간 여성들은 여성친화적인 새로운 질서 구축을 위해 애쓰고 있다. 본 회의에서 여성부를 설치하기로 정한 데 따라 과도정부에서는 시마 사마르(Sima Samar)를 부총리 겸 여성부장관으로 임명하고, 또 한명의 여성 수하일라 셋디키(Suhaila Seddiqi)를 보건부장관으로 임명하였다. 국제적인 압력과 경제지원,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요구가 이나마의 성과를 가져왔다고 하겠다. 과도정부와 임시정부 수립에 즈음해 여성들은 그때마다 자신들의 의사를 결집하고 대변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그 두 움직임을 따라가보자.

본 회의에 이어 2001년 12월 4일부터 이틀간 열린 ‘브뤼쎌 아프간여성정상회담’(Brussels Afghan Women’s Summit)에는 RAWA 회원을 포함해 아프간 여성들을 대표하는 여러 여성들과 다른 이슬람권 여성들이 서구 페미니스트 조직들의 주선으로 회동을 가졌다. 여권을 포함한 인권, 교육, 난민복지, 재건의 네 분야로 나뉘어 토론을 거듭한 끝에 이들은 62개항의 ‘브뤼쎌 선언’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아프간 여성들 내부의 다양성이 드러나고 조정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가장 입장차이가 두드러진 대목은 여권 부분과 새 정부의 형태에 대한 것이었다. 여권에 관해서는 인권 및 여권에 관한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수준이어야 한다는 쪽과 민감한 문제보다는 노동·교육·보건 등 기본과제의 해결에서부터 시작하자는 쪽으로 크게 나뉘었다. 여기서 민감한 문제란 남녀공학이라든가, 이혼 등 혼인제도, 상속권, 피임 등을 말하는데, 회담은 결국 기본과제부터 명기하는 것으로 합의를 하였다. 정부형태에 대해서는 세속민주제, 이란 모델의 이슬람공화국, 혹은 1964년 헌법에 기초한 그 중간형태 등이 거론되었다.27 최종 선언문에 “1964년 헌법에 기초한 새 헌법”이라는 문구가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중간형태에서 출발하기로 합의한 것으로 짐작된다. 선언은 이 헌법작성 및 정부구성 등 중요한 결정과정에 여성을 포함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그밖에 “성별, 연령, 종족, 장애, 종교, 정치적 입장에 따른 차별의 금지 원칙”이 명시되어 있고, 조혼, 강제결혼 및 성폭력·인신거래로부터의 여성보호, 투표권, 동등임금, 교육·보건·고용의 동등한 기회 등 여성의 평등권 보장 등이 들어 있다.28

회의 참석자들은 또한 부르카 착용에 대해서는 착용 강제는 반대하되 금지조처도 우려하는 경향이었다고 한다. 사실 RAWA에서도 부르카는 개인적 선택의 문제지 국가가 강요할 사항이 아니라는 입장을 그전부터 표명한 바 있다. 국제연대에 대해서도 지원을 환영하되, 미국정부는 물론 서구의 페미니스트들의 간섭이나 이용을 경계하는 아프간 여성들의 태도가 이 회의에서도 드러났다고 한다.

과도정부는 6개월 후 로야 지르가(loya jirga, 전통적인 부족원로회의)를 통해 새 임시정부를 구성하기로 되어 있었고, 이에 따라 지난 6월 11일 로야 지르가가 열렸다. 여기에는 1500명의 대표단이 참석하였는데, 그중 여성은 150명 내지 200명 정도였다.29 여성들이 이 정도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원래 10% 이상을 여성에 할당하기로 된 규정, 그리고 여성들 자신의 노력 덕분이었다. 대개 농촌지역에서는 여성선출에 소극적이었지만,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의 요구로 선출한 경우도 있고, 여성들 스스로 남성들이 회동한 모스크(mosque, 이슬람 사원)에 들어가 여성 자리를 더 늘리라고 요구한 경우도 있었다.

미국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이 회의의 진행과정에 불만을 표하면서도, 여성들의 참여는 적극적이었다. 대통령 후보 3인 중 한명으로 여성이 출마해 200표(2위)를 획득하기도 했고, 어떤 정파에도 속하지 않은 여성들은 근본주의 군벌이 회의에 참여한 데 대해 면전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등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었다고 한다.30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의 분위기는 아직도 이런 여성들에 적대적이다. 새 여성부장관 임명이 난관에 봉착했던 것도 이를 보여준다. 시마 사마르는 샤리아법을 부정했다는 한 외신보도를 빌미로 비난과 협박에 시달린 나머지 여성부장관직을 포기하였고,31 첫 각료진 발표시 여성부장관직은 비워둘 정도로 진통을 겪은 끝에야 새 장관이 임명될 수 있었다. 대통령 스스로 그 자리의 부담과 위험을 한 개인에 지우기란 힘들다고 말했다니 가히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노릇이다. RAWA가 이전보다는 공개적으로 활동하지만, 많은 사업을 익명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도 아직 위험이 여전하기 때문이다.32

 

 

5. 글을 맺으면서

 

브뤼쎌 회담에서 드러난 아프간 여성들 내부의 다양한 입장 차이, 그리고 국제연대에 대한 기대와 경계의 병존은 이슬람권 여성운동의 현주소를 반영한다. 이슬람권 여성운동의 입장은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주장하는 세속주의 경향과, 이슬람의 종교적·문화적 틀 안에서 여권신장 및 여성해방을 시도하는 ‘이슬람 페미니즘’으로 대별된다.33 이같은 이념 및 지향점의 차이를 어떻게 조정하고 연대해나갈 것인가는 아프간 여성들 내부에서도, 국제여성운동의 연대에서도 중요한 과제로 제기된 셈이다.

어느 한 입장을 ‘정답’으로 강요하기보다 우선 합의할 수 있는 부분을 챙겨나가면서 그다음 과제들을 함께 토론해나가고 각자의 입장을 수정·보완해나가는 접근방식이 필요하겠다. 차이를 반목으로 만드는 온갖 이분법들을 다시 되돌아보는 일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세속주의와 이슬람 페미니즘이 대립하고 있지만, 대화의 지점은 생각보다 많을지 모른다. 이슬람 페미니즘도 여성의 교육·취업 등의 기본권에 대해서는 세속주의와 별로 생각이 다르지 않다. RAWA의 입장에서도 보았듯, 세속주의 또한 이슬람 종교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슬람이 다수의 종교와 문화로 살아 있는 한, 이슬람의 ‘친여성적’ 재해석은 세속주의의 입장에서도 긴요한 원군이 될 수 있다. 아프간 여성들은 여성들 사이의 차이, 남성들의 가부장적 관념 및 관행, 불투명한 국가의 앞날, 오랜 전쟁으로 파괴된 삶의 조건 등을 앞에 두고 어렵지만 필수적인 싸움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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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aura Bush, “Radio Address to the Nation,” 2001년 11월 17일; Gary Leupp, “Bush, Burqas and the Oppression of Afghan Women,” Counterpunch 2002년 7월 16일자 (www.counterpunch.org/leupp0716.htm)에서 재인용.
  2. 이같은 미국정부 쪽의 언설을 ‘군사·산업적 페미니즘’으로 규정하며 상세히 소개·비판한 글로는 폴 크레이머 「클린턴, 남성성, 테러와의 전쟁」, 『여성과사회』 14호(2002년 상반기호) 63~76면. 이 글은 ‘여성을 위한 전쟁은 없다’라는 특집의 일부이며, 그에 앞서 『이프』 2001년 겨울호에서도 ‘Against War, Against Terrorism’이라는 특집을 마련한 바 있다.
  3. 이스라엘 역시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에 대한 대항세력을 키운다는 생각에서 팔레스타인의 근본주의 집단인 하마스(Hamas)를 지원한 바 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들의 적은 근본주의가 아니라 자국의 이익에 반하는 세력일 뿐이다.
  4. 아프간 난민과 관련한 다문화주의의 이같은 문제점에 대한 지적으로는 Valentine M. Moghadam, “Revolution, Islam and Women: Sexual Politics in Iran and Afghanistan,” Andrew Parker, et. al. (ed.), Nationalisms & Sexualities (New York & London: Roultledge 1992) 437면 및 Sima Wali, “Muslim Refugee, Returnee, and Displaced Women: Challenges and Dilemmas,” Mahnaz Afkhami (ed.), Faith & Freedom: Women’s Human Rights in the Muslim World (New York: Syracuse University Press 1995) 177면 참조.
  5. 지난 7월 말에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한 한 여성의 증언에 따르면 카불에서 본 여성의 80~90%가, 잘랄라바드(Jalalabad)에서는 모두가 부르카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 Anne Brodsky, “Inside Pakistan and Afghanistan with RAWA,” Counterpunch 2002년 7월 29일 (www.counterpunch. org/brodsky0729.html).
  6. Mary Dejevsky, “Lifting the Veil Does Not Liberate Women,” Independent 2001년 11월 20일자.
  7. Ahmed Rashid, “Afghan Women Emerge as Elections Take Place,” 2002년 5월 20일, www.eurasianet.org/departments/rights/articles/eav052002.shtml.
  8. Sonia Shah, “Unveiling the Taleban Dress Codes Are Not the Issue, New Study Finds,” Z Magazine 2001년 7월 10일(www.zmag.org/Sustainers/content/2001-07/10shah.htm). 두 보고서는 ‘인권의사회’ 싸이트(www.phrusa.org)에서 읽을 수 있다.
  9. 신랄한 지적으로는 인도 출신 미국여성으로 아프간여성미션(Afghan Women’s Mission)의 부회장인 Sonali Kolhatkar의 “‘Saving’ Afghan Women,” 2002년 5월 9일, www.zmag.org/content/ Gender/kolhatkarwomen.cfm 참조.
  10. Gayatri Spivak, “Can the Subaltern Speak?” Cary Nelson & Lawrence Grossberg (eds.), Marxism and the Interpretation of Culture (Chicago: Univ. of Illinois Press 1988) 296면.
  11. Kathleen Richter, “Revolutionary Afghan Women,” Z Magazine 2000년 12월호(www.thirdworldtraveler.com/Women/RevolAfghanWomen.html).
  12. 이 전쟁의 진행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Larry P. Goodson, Afghanistan’s Endless War: State Failure, Regional Politics, and the Rise of the Taliban (Seattle and London: Univ. of Washington Press, 2001) 55~90면 참조. 아프가니스탄의 지난 30년사를 정리한 글로는 이옥순 「아! 아프간, 아프가니스탄」, 『창작과비평』 115호(2002년 봄호) 참조.
  13. Larry P. Goodson, 앞의 책 119면
  14. Sima Wali, 앞의 글 178면 참조.
  15. 베일이 논란의 중심으로 떠오른 데 유럽 식민주의가 한 역할에 대해서는 Leila Ahmed, Women and Gender in Islam: Historical Roots of a Modern Debate (New Haven & London: Yale Univ. Press 1992) 8장 “The Discourse of the Veil” 144~68면 참조. 이런 논란에서 근대와 전통은 이분법적으로 생각되기 십상인데, 이런 이분법 비판이 이슬람 여성에 관한 연구에서 최근 부상하고 있다. Leila Ahmed도 이슬람권에서 현재 착용되는 베일은 정확히 말하면 전통적 의상이 아니라 그것의 근대적 변형이자 새로운 창안물이라는 점을 이집트의 경우를 들어 지적한다(220~34면). 비슷한 해석으로 Lila Abu-Lughod, “The Marriage of Feminism and Islamism in Egypt,” Lila Abu-Lughod (ed.), Remaking Women: Feminism and Modernity in the Middle East (West Sussex: Princeton Univ. Press 1998) 243~67면 참조.
  16. Kumari Jayawardena, Feminism and Nationalism in the Third World (London: Zed Books 1986) 71~72면 참조.
  17.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에서 1999년에 작성한 “Women in Afghanistan” (www.web. amnesty.org/ai.nsf/index/ASA110111999) 및 아프가니스탄 온라인 싸이트의 “Chronological History of Afghanistan, Part III”(www.afhghan-web.com/history/ chron/index3.html) 참조.
  18. Valentine M. Moghadam, 앞의 글 및 “Revolution, Religion, and Gender Politics: Iran and Afghanistan Compared,” Journal of Women’s History 10권 4호(1999 겨울호) 참조.
  19. Kathleen Richter, 앞의 글에 소개된 발언.
  20. Valentine M. Moghadam, 앞의 글(1999).
  21. 여기서 배운 소녀들이 자라나 회원이 되는 일도 많았다.
  22. Kathleen Richter, 앞의 글 및 RAWA 싸이트(www.rawa.org) 참조. 이 싸이트는 자동적으로 미러싸이트로 연결된다. 탈레반 패퇴 이전만 하더라도 보안상의 이유 때문이었으나, 2002년 8월 현재는 조회수 폭주 때문이다. 조이여울 「여성과 소수자의 눈으로 본 평화담론」, 『여성과사회』 14호 48~62면에도 RAWA의 활동 및 근자의 사태들에 대한 입장이 비교적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23. Sonali Kolhatkar, 앞의 글 참조.
  24. “The Women’s War,” The Independent 2001년 10월 4일자(rawasongs.fancymarketing.net/ independent.htm).
  25. Margaret Wente, “The Taliban’s forgotten war on women,” The Globe and Mail 2001년 9월 20일자 A13면.
  26. 국제사면위원회, 앞의 글 참조.
  27. Janelle Brown, “A Chance to Shine,” 2001년 12월 5일, dir.salon.com/mwt/feature/ 2001/12/05/brussels_women/index.html 및 Sara Austin, “Where Are the Women?” The Nations 2001년 12월 31일자에 회담경과 및 뒷이야기가 비교적 상세히 실려 있다.
  28. 선언 문안은 ‘Women’s Alliance for Peace and Human Rights in Afghanistan’ 싸이트(www.wapha.org/summit.html)에서 읽어볼 수 있다.
  29. 수치는 전하는 이마다 달라 확정하기 힘들다. 전체 참석자 수가 1600명으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30. Halima Kazem, “Afghan Women Find Political Voice,” 2002년 6월 14일, www.eurasianet. org/departments/insight/articles/eav061402a.shtml.
  31. Camelia Entekhabi-Fard, “Karzai Grapples with Appointment of Women’s Affairs Minister,” 2002년 6월 25일, www.eurasianet.org/departments/insight/articles/eav062502a.shtml.
  32. Natasha Walter, “Barefaced Resistance,” The Guardian 2002년 7월 20일자.
  33. 이슬람과 여성을 둘러싼 이슬람권 및 서구의 입장들에 대해서는 졸고 「이슬람과 페미니즘: 최근 두 논쟁을 중심으로」, 『여성과사회』 14호 6~32면에 좀더 상세히 다룬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