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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한반도 평화의 방정식, 그 해법을 찾아서

S. 해리슨 『코리안 엔드게임』, 삼인 2003

 

 

구갑우 具甲祐

경남대 북한대학원 교수. kwkoo@kyungnam.ac.kr

 

 

 

우연히 지리산자락에 앉아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일까. 미국의 언론인 쎌리그 해리슨(Selig S. Harrison)이 쓰고 한국의 언론인 한겨레의 기자 네 분이 번역한 『코리안 엔드게임』(Korean Endgame: A Strategy for Reunification and U.S. Disengagement, 이홍동 외 옮김)은, 지리산이 그 상흔을 간직하고 있는 좌우파의 처절한 대립을 떠올리게 한다. 해리슨에 따르면, 한반도는 여전히 내전(內戰)상태다. 그 내전이 종반으로 치닫고 있지만, 그 결과를 예측하기란 매우 힘든 상황이다. 또다른 미국의 언론인인 『두 개의 한국』의 저자 오버도퍼(D. Oberdorfer)는 핵문제를 둘러싼 북한과 미국의 대립으로 한반도가 바야흐로 ‘엄청난 폭풍’(perfect storm)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금 냉전의 한반도에 열전(熱戰)이 도래하는 것일까.

누가 전쟁을 원하는가. 수수께끼다. 해리슨은 이 임박한 위기의 실타래를 풀면서 동시에 미래의 역사를 쓰는 매혹적 작업을 하고자 한다. 1972년 미국의 언론인으로는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북한을 취재했고 그 뒤로 정기적으로 북한을 방문했을 뿐만 아니라, 1994년 한반도 위기 때는 직접 그 과정에 참여하여 북한의 핵동결과 미국의 외교적·경제적 제재 완화의 교환을 이끌어냈던 그는, 한반도 평화의 방정식을 다음과 같이 풀고자 한다. “미국이 북한과의 평화협정을 맺을 의지가 있고 그 협정에 한국이 찬성하지 않는 한, 남북간의 군사적 적대관계가 종식되리라는 희망은 갖기 어렵다. 남북간의 적대관계를 종식시키려면 먼저 북한과 미국 간의 화해가 이루어져야 한다.”(5면) 즉 해리슨에 따르면 북한과 미국의 화해가 한반도 평화과정의 출발점이다.

이 해법은 자칫 한반도 평화의 주체로 추상적인 국가를 상정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이 책의 서문만 읽을 때, 특히 그러한 해석을 할 수 있다. 우리는 편의상 또는 언어의 한계 또는 물신화된 관념 때문에, 미국이, 남한이, 북한이 무엇 무엇을 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때론 그 주어가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해리슨은, 근대의 성립과 더불어 초월적 주체로 등장한 국가를 국제정치의 유일한 분석단위로 설정하지 않는다. 그는 마치 국가들의 갈등과 협력의 게임처럼 보이는 한반도의 국제정치에서 다양한 정치·사회세력들의 갈등과 협력을 찾아낸다. 해리슨의 분석과 해석에 따르면 ‘워싱턴과 서울의 군사적·산업적 기득권 세력’과 북한의 ‘보수파’가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초국가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한반도 문제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한반도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요인이다. 이 암묵적 동맹의 해체과정이 곧 한반도 평화과정이다.

코리안엔드이 해법은 지금 여기 한반도에서 폭풍처럼 다가오고 있는 위기에 대한 비현실적 해결책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북한은 핵보유 내지 핵프로그램의 실재를 인정한 것처럼 보이고 미국은 이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해리슨의 지적처럼 ‘작계(作計) 5027’에 따르면 미국은 북한이 남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징후가 발견되면 핵을 포함한 선제공격을 가할 수 있다. 북한이 상대적으로 비용이 저렴한 핵프로그램에 매달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북한이 미국과의 전쟁 이후 이른바 상시포위심리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일본의 북한연구자 와다 하루끼(和田春樹)가 그의 저서 『북조선(北朝鮮)』에서 지적한 것처럼 그 심리 때문에 유격대·정규군국가를 유지하고 있다면, 그 상시포위심리가 사라지지 않는 한 북한과 미국의 화해는 요원할 수 있다. 북한과 미국의 이 치킨게임은 이제 절정에 다다른 듯하다. 누군가 질주하는 자동차의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면, 충돌 이외의 대안은 없다. 만약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그 일을 저지른 행위자 가운데 하나인 미국은 그 화(禍)를 면할 수도 있겠지만 한반도의 두 국가는 함께 망하는 길을 갈 수도 있다. 북한과 미국의 화해를 도출할 수 있는 접점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 보수파들은 강압을 통해 북한의 붕괴를 유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붕괴론은 자신의 특권과 기득권을 보전하려는 북한 엘리뜨들의 생존 의지를 과소평가한 것이고 또한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대안도 아니라고 해리슨은 주장한다. 한반도에서 평화적 방법에 의한 평화의 달성은 북한의 핵포기와 미국의 체제보장이 교환될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해리슨은 ‘경제적·정치적 유인책’만으로는 한반도 문제의 해결 실마리를 제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누구보다도 역사에 기반한 현실적 대안을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자칫 해리슨의 해법은 이른바 ‘친북(親北) 좌파’의 대안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대안은 오히려 미국적이다. 연방제 방식의 공존을 이룬 한반도의 비핵화·중립화가 무엇보다도 미국의 이해에 절대적으로 부합한다는 주장이야말로 이 책의 백미(白眉)다. 미국이 한반도 내의 안정자 또는 균형자 역할을 추구하는 탈개입정책–북미관계의 정상화에서 남북한의 군비통제와 주한미군의 점진적 철수로 이어지는 경로–으로 전환할 때, 경제적·군사적 측면에서 미국의 이익이 극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흡수통일이 아니라, 남북공존을 제도화하는 느슨한 연방제로의 이행에 필요한 안보우산을 제공할 때, 즉 북침이나 남침을 억제하는 균형자로서의 역할을 다할 때, 한반도는 물론 동아시아지역에서 미국의 이익이 향상될 수 있다는 주장은 경청할 만하다. 해리슨이 보기에, ‘전통적인 정치학의 분류법이 통하지 않는 새로운 체제’(73~73면)를 만들어냈으며 현재는 실용주의자를 중심으로 생존을 위해 비밀스럽게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북한으로 하여금 개혁을 지속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의 정책전환은 필수적이다. 또한 이 최종적 해법은 미국뿐만 아니라 경제적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자신들의 국가이익을 재정의하고 있는 한반도 주변의 이해 당사자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미국·중국·일본·러시아가 재래식 병력으로 한반도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합의를 이루고,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생산·사용·배치하지 않겠다는 남북한을 포함한 6자간의 합의가 이루어질 때, 한반도가 영속적인 평화와 통일을 향해 전진할 수 있다고 해리슨은 생각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미국이다. 해리슨의 표현에 따르면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부당한 개입정책이 문제의 핵심이다. 좀더 정확히 이야기한다면 미국의 국가이익을 냉전적 한반도의 현상유지에서 찾고자 하는 세력, 그리고 거기에 기생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남북한을 포함한 주변국의 정치·사회세력이야말로 한반도 평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한반도 평화과정이 쉽지 않음을 알려주는 지표다. 해리슨의 지적처럼 미국이 “스스로를 ‘유일 초강대국’으로 생각하고 이에 따라 움직이는 한”(40면), 즉 그들의 보편을 엄청난 무력을 통해 행사하려는 한, 한반도에서 평화적 방법에 의한 평화를 달성하려는 노력은 암초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북한이 붕괴하지 않는 한, 역사는 끝을 맺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오만을 보면서, 유토피아와 현실 순응 양자를 동시에 넘어서려는, 희망의 원리를 간직한 한반도 평화과정의 기획이 휴짓조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그러나 미국 스스로의 변화를 기다리는 것이 답이 될 수는 없다. 의지와 상관없이 남한정부와 시민사회가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여야 하지만 중재자도 되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 미국이 북한을 마치 꽃놀이패처럼 다루는 한심한 지경의 극복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국제정치의 역사에서 힘의 정치구조를 바꾸어나가는 지혜로운 행위자의 실천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그 구조를 바꾸어나가는 힘을 찾는 작업이 필요하다. 남한 시민사회의 미국에 대한 비판이야말로 힘이 모든 것을 말하던 한반도 국제정치의 구조에 가장 큰 충격을 준 변혁적 실천이 아닐까. 그것을 한국의 민족주의로 읽어내려는 해리슨의 보수적 인식의 한계가 보이기도 한다. 9·11 전후에 형성된 미국의 일방주의적 정책에 대항하는 지구적 시민사회의 실천 속에서 남한 시민사회의 국제정치적 인식의 변혁을 바라볼 수는 없을까. 한반도 평화과정은 세력균형이 평화라는 전통적인 서구중심주의적 국제정치관을 넘어서는 한걸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반도 국제정치의 구조를 바꾸는 힘의 원천이 남한 시민사회의 보편적 실천과 그 열린 시민사회가 추구하는 국제연대에 있음을 본다.

보고 싶은 것만 보지 않고 읽고 싶은 것만 읽지 않는, 열린 자세를 가지고 있는 미국의 언론인 해리슨의 책은 우리에게 큰 기쁨을 준다. 그 책은 우리에게 힘의 정치가 난무하는 국제정치의 세계에서도 평화적 방법에 의한 평화의 여정이 가능함을 알려준다. 사회과학의 존재이유를 일깨워주는 책이기도 하다. 한반도 평화과정을 위해 합의할 수 있는 최대의 공통분모는 평화적 방법에 의한 평화다. 부정할 수 없는 출발점이다. 이 원칙을 기초로 다양한 의견의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해리슨의 해법도 그 가운데 하나다. 자칫 가질 수도 있는, 한반도 평화방정식의 해법을 독점하는 듯한 태도는, 한반도 평화과정을 위협하는 요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