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자연, 그 인간의 말과 희망의 전언
최두석 시집 『꽃에게 길을 묻는다』, 문학과지성사 2003
박영근 朴永根
시인
최두석(崔斗錫) 시집 『꽃에게 길을 묻는다』에는 그 제목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시집보다도 자연물의 모습과 태도 그리고 행위 등이 전면화되어 나타난다. 인물의 생애를 드러내고 있는 세 편의 시를 제외하면 모든 시들이 동식물의 세계와 자연의 지형으로부터 그 중심제재를 취하고 있다.
최두석의 자연은 그러나 생태 그 자체의 미적 존재나 또는 현실을 초월하려는 비유의 언어로 자신을 나타내지 않는다. 상당수의 시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것은 지나간 삶의 의미를 묻고 어떤 지향을 찾으려는 시인의 성찰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그의 시집에서 요즘 시에서는 보기 어려워진 도덕적 열정이나 의지를 읽게 되는 것은 그런 까닭일 터인데, 그것은 사물에 대한 의도적 왜곡이나 과장의 방식을 멀리하고 가능한 한 사실적 재현에 충실하려는 시적 태도와도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간혹 부러 찾는
수백년 묵은 느티나무 아래
민들레 꽃씨가
앙증맞게 낙하산 펼치고
바람 타고 날으는 걸 보며
나는 얼마나 느티나무를 열망하고
민들레에 소홀하였나 생각한다
우람한 느티나무가 간직한, 역사라 부를 만한 수백년의 시간과, 그 모습을 분명하게 붙잡을 수 없을 만큼 바람에 가볍게 날리는 민들레 꽃씨의 모습이 선명하게 대비되고 있는 시 「느티나무와 민들레」의 1연이다. 그 대비가 뚜렷하게 그어놓은 경계 위에서 시인은 지나간 삶을 반추하고 있는데, 거기서 그가 보게 되는 것은 이기(利己)와 분별로 세상의 일을 가늠하려 했던 자신의 태도이다. 시 2연의 “사람이 사는 데 과연/크고 우람한 일은 무엇이며/작고 가벼운 일은 무엇인가”와 같은, 자신에 대한 회의와 반성으로서의 질문은 그 명료한 표현일 것이다. 시인의 반성적 사유는 그 질문의 의미를 더 적극적으로 끌어올린다. 작은 일로 치부했던 무지(소홀함)와 큰 일로 섬겼던 과장(열망)이 낳은, 느티나무–민들레로 표상된 관계의 왜곡이 그것이다. 최두석은 시의 마지막 연(3연)에서 느티나무와 민들레가 서로 관계맺는 모습을 생태의 차원에서 매우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바, 왜곡이 걷힌 진실의 자리가 참으로 환하다.
느티나무 그늘이 짙어지기 전에
재빨리 꽃 피우고 떠나는
민들레 꽃씨의 비상과
민들레 꽃 필 때
짙은 그늘 드리우지 않는 느티나무를 보며
가벼운 미소가 무거운 고뇌와
함께 어울려 사는 모습 떠올린다.
자연세계의 새로운 발견과 진정한 관계의 회복이라는 삶의 또다른 지향이 이만큼 행복하게 만나는 일도 드물 것이다. 인용시에서 우리가 보는 것처럼 시적 기행(記行)이라 부를 만한 여정에서 시인이 들어올리는 자연물의 형상과 삶의 곡진한 국면의 만남은 그의 시의 주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현실적 삶의 고통과 좌절이 자연을 살아가는 뭇 생명들의 어떤 태도 속에서 활생(活生)의 의미로 전화되는 과정에 다름아닐 것이다. “뿌리로 검은 바위 끌어안고/난바다 거센 파도 소리 삼키며/모진 바람에 고개 숙여/잔디처럼 바닥을 기다가도/꽃만은 그윽이 푸른 가을 하늘/마주 보며 피우누나”(「마라도 바다국화」)라는 구절에 제시된 바다국화의 모습이나, “가시투성이로 태어났으나/가시를 떨구면서 늠름해진다/가시로 세상을 맞서는 일이/부질없다는 걸 깨우친 까닭이다”(「엄나무」)라는 시구에서 생의 특징적 면모가 독창적으로 해석되어 나타나는 엄나무의 형상은 그 단적인 예증이 될 만하다. 재현의 생생함과 단정한 절제, 대담한 생략을 통해 시가 의도하는 바 핵심 속으로 직핍해 들어가는 통찰의 힘 또한 주목할 만한 미덕이다.
이 시집의 또다른 성취를 나는 「노루귀」 「열목어」 「미타리」 「구절초」 등의 시에서 본다. 그 시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은 삶이 영위되는 인간의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거의 완전하게 격절된 ‘자연’ 속이다. 「노루귀」의 시구절이 말하고 있듯이 “지도에 없는 희미한 산길”과 같은 자연 그대로의 세계인 것이다. 시의 외면만을 본다면 그 형상적 의도는 자연의 순수의지만으로 구성되고 움직이는 자족적인 소우주를 그리는 데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진달래 피면 온몸이 붉게 물들고
지느러미에 무지개 서리는 물고기가 있다
심산유곡 눈녹이물에 떨어진
묵언의 편지 같은 꽃잎 물고
힘차게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가 있다.
–「열목어」 전문
진달래 꽃잎의 붉은빛과 그 빛을 받아 아름다운 형상으로 변화하는 물고기의 모습, 진달래가 떨군 꽃잎을 상호교감의 언어인 편지로 받아들이는 물고기의 심상, 그렇게 한몸이 된 마음과 에너지가 폭포를 차고 거슬러 오른다. 한마디로 눈부시게 일치된 관계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이 시를 되풀이 읽으면서 ‘심산유곡 눈녹이물’보다 ‘묵언의 편지’와, 한몸으로 이루어지는 ‘폭포’로의 비상에 훨씬 더 주목하게 된다. 나는 이 비유의 공간에서 자연이 빚어내는 미적 현상이 아니라, 아주 역설적으로, 단자화된 개인의 고립과 물질이 전부가 된 현실에서의 도저한 인간의 소외를 읽는다. 달리 말하면 현실의 고통에 발을 딛고 선 시의 꿈이 될 것이다. 나의 비약인가. 아마도 시집 전체를 가로지르고 있는 문제의식과 관련하여 시를 읽게 되면 사정은 더 뚜렷해질 것이다.
계절이 바뀌는 산등성이에서
단풍잎 응시하며 피는 꽃이 있다
지상의 마지막 시간 앞두고
청을 높여 우는 풀벌레 소리 따라
아련히 맑은 향내 풍기다가
낙엽과 함께 사라지는 꽃이 있다.
–「구절초」 전문
지상의 마지막 시간이란 겨울일 것이다. 그 시간 앞에서 두 가지 형상이 명징하게 대비되고 있다. ‘청을 높여 우는 풀벌레’와 ‘향내’를 남기고 사라지는 구절초의 꽃이 그것이다. 죽음을 두고 그 태도를 선명하게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향내’는 죽음을 자연으로 수락하는 태도에서 비롯될 것이다. 그래서 꽃이 아닌가.
이 시를 쓰게 만든 근간은 죽음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근대적 인간의 희극적 태도일 것이다. 욕망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비해야만 그 목숨이 유지되는 근대세계의 눈으로 죽음을 철저히 타자화하는 것. 서정적 제재인 구절초 꽃의 그 짧은 일생과 오늘날 삶의 무거운 화두인 죽음의 문제를 거침없이 교통시키고 있는 시의 숨길이 예사롭지 않다.
『꽃에게 길을 묻는다』는 그 뚜렷한 성취와 함께 그늘 또한 자신의 문제로 지니고 있다. 「석송령」 「시화 공룡알」 등의 시에서 산견되는 것으로서 시적 지향과 의도가 지나칠 만큼 직접적으로 언술될 때 나타나는 문제를 들 수가 있다. 가령 「석송령」의 “정월 보름/막걸리 부어 마시고 뿌리며 비나니/세상의 실상을 좀더 제대로 보고/만물의 소리를 좀더 경청하게 하소서”와 같은 구절은 한 예가 될 것이다. 「어린 느티나무」 「냉잇국」이 보여주는 바, 상식적 사유의 과다한 노출도 그가 경계해야 할 대목일 것이다. 어머니의 거친 손의 내력을 말하고 있는 「냉잇국」을 읽으면서 나는 시적 진정성과 체험의 관계를 새삼스럽게 돌아보았다. 구어체의 민중전기를 떠올리게 하는 「함태식」 「정무룡」 등은 주의를 요구하는 시들이 분명한데, 그 시들이 갖고 있는 서사의 산문적 성격 앞에서 나는 최두석이 어떤 연유로 판소리 형식의 시적 효율성을 적극적으로 고려하지 않는지 물을 수밖에 없다.
나는 20년이 넘는 최두석의 시적 생애를 어느 만큼은 알고 있다. 그는 시에 관한 한 여전히 희망의 말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가뭄과 장마를 견디고
꽃나무가 잘 자라
환하게 꽃술을 내미는 날
그는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는 꿈을 꾼다
–「시인과 꽃」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