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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박완서 장편 『그 남자네 집』, 현대문학 2004

무애자재의 삶을 위하여

 

 

임홍배 林洪培

문학평론가, 서울대 독문학과 교수 limhb059@snu.ac.kr

 

 

그-남자네-집

훌륭한 이야기꾼이란 조용히 타오르는 불꽃으로 자기 삶의 심지를 완전히 연소시키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박완서(朴婉緖)의 작품을 접할 때마다 그 말이 실감되지만, 이번에 새로 나온 장편 『그 남자네 집』에서도 꼭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야기의 소재 자체는 평범하다. 예순은 훨씬 넘었을 노년의 여성이 사십년 전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지나온 삶을 되짚어보는 이야기다. 첫사랑에 대한 회상이라는 것은 대개 한 개인의 삶에서 현재의 퇴락한 삶을 새삼스레 확인하는 쓸쓸한 소회와 더불어 시간의 위력에 굴복한 무상한 삶의 흔적을 더듬는 쪽으로 기울게 마련이다. 인생의 그런 실감에 비추어보면 첫사랑의 기억에서 발단되는 이야기가 장편 분량의 소설로 성공할 공산은 그리 크지 않다. 그런데 『그 남자네 집』에는 그런 범상한 소재를 가지고도 독자의 가슴을 훈훈한 온기로 데워주는 불씨가 살아 있다. 그 불씨를 지피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질문에 대한 온전한 대답은 작품의 마지막까지 유보되고, 이 작품의 독특한 매력과 감동도 거기에 연유한다. 하지만 작품의 초반부터 분명히 감지되는 것은 ‘그 남자’에 대한 미세한 기억의 갈피 사이로 ‘나’의 삶 전체를 하나의 운명극으로 조명하는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날 ‘나’는 후배가 새로 이사간 집을 방문하는데, 그 집은 우연치 않게 사십년 전 ‘나’와 ‘그 남자’가 살던 동네에 자리잡고 있다. 옛날의 개천은 복개되고 완전히 딴 동네로 변했지만, 뜻밖에도 ‘그 남자네 집’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이를 계기로 사십년 전 정지된 시간을 되불러오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남자네 집』이 장편으로 나오기 전에 같은 제목으로 발표된 단편을 보면,

 

그 남자의 부음을 들은 지도 십년 가까이 될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 나에게 그가 영원히 아름다운 청년인 것처럼 그에게 나도 영원히 구슬 같은 처녀일 것이다.(「그 남자네 집」, 『문학과사회』 2002년 여름호 526면)

 

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리고 실제로 단편에서 회상되는 시간대는 ‘나’와 ‘그 남자’의 첫사랑 시절로만 압축되어 있거니와, ‘플라토닉의 맹목적 신도’였던 두 사람의 애틋한 첫사랑이 전쟁 직후 고단한 삶을 배경으로 단편의 품격에 어울리게 한폭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런데 그 단편이 장편으로 새롭게 태어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그 남자의 부음’으로 처리된 죽음, 아니 그전의 삶에, 단편으로는 풀어내지 못한 곡진한 사연이 없지 않을 것이다. 또 영원히 아름다운 젊음을 허용하지 않은 세월을 견뎌내는 동안 ‘나’와 ‘그 남자’는 적어도 서로 무연한 관찰자로만 머물지도 않았을 것이다. 실은 단편 속에도 한 생애의 무게가 느껴지는 대목이 있다.

 

그 시절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리 와 있나. 그 시절이 우리에게 정말 있기나 있었을까. 여긴 어디인가. 그건 일종의 위기의식이었다.(같은 글 525면)

 

‘그 남자네 집’에서 함께 음악을 듣던 과거의 ‘나’는 현재로 돌아와 자신도 모르게 이런 당혹감에 빠져든다. 엄밀히 말하면 ‘그 시절이 우리에게 정말 있기나 있었을까’라고 묻는 ‘나’는 현재의 싯점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쪽이지만, 바로 다음에 ‘여긴 어디인가’라고 당혹해하는 ‘나’의 시공간 속에는 과거와 현재, 지금 이곳과 옛적 그곳의 구분이 없다. 다시 말해 ‘여기’는 그 남자와 음악을 듣던 그 시절의 방이기도 하고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기도 하며, 시간적으로는 기억 속의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펼쳐진 삶의 전부를 응축하고 있는 것이다.‘나’를 혼란에 빠뜨리는 이러한 시공간의 뒤섞임이 일순간 위기의식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 시절이 과연 있었는지도 모르게 묻혀 있던 아득한 과거의 기억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 전체를 흔드는 파문을 불러오기 때문일 것이다.‘나’의 첫사랑에서 황홀한 전율과 불안을 동반했던 서로 “닮은 불운을 관통하는 운명의 울림”(같은 글 519면)은 결코 영원한 젊음 속에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가두어놓을 수 없는 진앙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 진앙의 중심에 ‘그 남자’가 서 있음은 물론이다.

단편에서 짧은 암시에 그쳤던 그러한 위기의식은 장편 『그 남자네 집』에서 ‘나’의 삶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작용하고 있다.‘그 남자’와의 인연이 첫사랑에 그친 것부터가 위기의식에 대한 본능적 반작용의 성격이 강하다. 전란의 와중에 남편과 아들을 잃고 아녀자만 남은 집안에서 ‘나’의 어머니는 “보이는 기억, 안 보이는 기억들을 짜던 비단폭 자르듯이 싹둑 자르고 새로운 피륙을 짜려”(62면)는 단도리의 일환으로 대학에 갓 입학한 ‘나’의 학업을 중단시키고 ‘나’를 생활전선에 내보낸다. 어머니의 그런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나’와는 달리 ‘닮은 불운’에 적응하지 못하는 ‘그 남자’에게 삶을 의탁할 자신이 없는 ‘나’는 결국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직장 동료를 결혼상대로 택하는 것이다.‘나’의 결혼으로 ‘그 남자’의 삶은 파탄으로 치닫는다.‘그 남자’네 집안은 전란중에 형과 아버지가 월북하고 어머니와 누나 둘이 남아 있는데, 정작 ‘그 남자’는 군대간 자신을 기다리느라 남편을 따라가지 못하고 생이별한 자기 어머니를 못살게 구박하고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한 채 룸펜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나’의 결혼 전에도 ‘그 남자’는 “저 노모만 없었으면 얼마나 자유로울까”(36면)라며 혈연의 정까지 귀찮아할 정도로 생활 자체의 속박을 싫어했던만큼 ‘나’의 결혼이 그의 허무적 충동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된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착실한 주부로 결혼생활에 안착해가는 ‘나’는 결국 ‘그 남자’의 발광을 보다 못한 그의 누나의 부탁으로 그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첫사랑의 장면을 재연하는 듯한 이 만남을 통해 남자는 안정을 되찾는 듯이 보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은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은밀한 욕망에 이끌린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교외에서의 밀회를 약속하고 ‘나’는 기차역에서 남자를 기다리지만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이로써 ‘나’는 가정생활의 위기를 모면한 것에 안도하면서 다시 평탄한 주부의 삶으로 돌아간다. 이야기가 여기서 그쳤다면 이 작품은 중편 정도로 마감되었을 것이다.

작품이 새 국면으로 접어드는 것은 남자가 나타나지 않았던 경위가 뒤늦게 밝혀지면서다. 남자가 약속시간에 나오지 못한 이유는 그날 아침 발작과 함께 눈이 돌아가는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고, 남자의 누나를 통해 이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나’는 뇌수술을 마치고 눈을 붕대로 감은 채 병상에 누워 있는 남자를 찾아간다. 여기서 남자의 누나는 뜻밖에도 남자의 뇌에서 꺼냈다는 벌레를 보여주는데, 그것을 보면서 ‘나’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든다.

 

여자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딴 세상, 극한상황의 전쟁터가 떠올라 몸서리를 쳤다.

그것이 다 벌레의 짓이었을까. 내 젊음을 황홀하게 빛낸 그 기쁨의 시간이 다 벌레의 선물이었을까. 설마 처음부터 끝까지 다는 아니겠지. 그렇다면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우리들의 시간이고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벌레들의 시간이었을까. 오직 그 생각만 하면서 집까지 왔다.(200~201면)

 

‘나’의 이런 반응에는 복잡한 감정이 뒤엉켜 있다. 먼저 극한상황의 전쟁터를 떠올리는 것은 전쟁터에서 겪은 어떤 극한의 체험이 남자로 하여금 가족마저 귀찮아할 만큼 삶의 의욕을 상실케 하고 끝내는 불모의 광기로 몰아넣었을 거라는 짐작과 결부되어 있을 것이다. 남자가 그토록 ‘나’에게 매달린 것도 그런 허무적 충동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보면 눈이 멀도록 자신을 그리워한 남자에게 아무런 위안도 되지 못하는 ‘나’는 연민의 통한을 느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럼에도 ‘내 젊음을 황홀하게 빛낸 그 기쁨의 시간이 다 벌레의 선물이었을까’라는 다른 회오의 감정이 앞서는 것은 정말로 첫사랑의 기억을 그렇게 생각해서라기보다는, 남자에게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다시 돌이킬 수 없이 덧나게 했다는 자책이 그만큼 깊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문병을 가서 “나는 처음으로 그 남자의 전체, 보이는 상처와 보이지 않는 상처까지를 포함한 한 남자의 전체를 본 것처럼 느꼈다”(201면)고 하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다른 한편 인용문의 발언에는 남자와의 재회를 통해 야기될 위기에 대한 방어본능도 저변에 깔려 있다. 만약 남자가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하지 않고 두 사람이 밀회의 시간을 가졌더라면 지금 낳은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하는 끔찍한 상상 끝에 “나는 잔인하게도 그날 그 남자에게 그 무서운 일이 일어난 걸 감사하고 있었다”(238면)고 여기기까지 하는 것이다. 충실한 주부의 역할로 돌아가서 생활을 다잡는 ‘나’의 의식은 그러므로 ‘그 남자’에 대한 기억을 지워가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정파탄의 위기를 모면한 ‘나’의 행복 또는 행운이 ‘그 남자’의 불행과 맞바꿔진 것이라면 그처럼 기구한 운명으로 맺어진 존재가 쉬이 잊혀질 리 없다.

이후 ‘나’는 두번 더 남자와 만나는데, 두번 모두 남자와 이별하기 위해서다. 한번은 십년의 세월이 흐른 후 ‘나’와 남자가 친정어머니의 집에서 만나는 장면이다.‘나’는 그사이에 네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고, 남자는 비록 앞을 못 보지만 동네 길을 익혀서 ‘나’의 옛집까지 찾아올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마치 집안 풍경이 훤히 보이는 듯 처신하는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앞 못 보는 티 안 나게 성한 사람처럼 행동하기 위한 연습은 나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287면)라는 생각 끝에 결국 ‘이 자라지 않는 남자’에 대해 ‘육친애적이고 떳떳한 분노’를 터뜨린다.“장난치지 말고 생긴 대로 살란 말야”(288면) 등등의 온갖 험한 말로 남자를 야단쳐서 떠나보내는 ‘나’는 “그 남자는 시력을 잃고 나는 귀여움을 잃었다. 나의 첫사랑은 이렇게 작살이 났다”(288~89면)고 이별의 장면을 담담하게 술회하고 있지만, ‘나’의 야멸치고 모진 태도에 이제라도 남자가 자기를 잊고 제 삶을 찾아가길 바라는 애절한 비원이 담겨 있음은 물론이다.

마지막 만남은 남자의 어머니 문상을 갔을 때다. 그사이에 남자는 결혼을 해서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고, 물려받은 유산에 부인의 도움으로 장애인 재활과 장학사업을 하는 등 완전히 자립에 성공했다. 남자는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아들이 입다 버린 헌 빤스를 입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면서 울먹인다. 아들이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오길 기다리며 남편을 포기했던 어머니, 살아 돌아온 아들이 고마워서 온갖 구박에도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았던 어머니, 아들이 실명을 했는데도 목숨은 살렸다고 감사했던 바로 그 어머니다. 아마도 남자는 어머니의 사랑에 뒤늦게 눈뜨면서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흐느끼는 남자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포옹하는 것으로 작품은 끝난다.

 

나도 애끓는 마음을 참을 수 없어 그 남자를 안았다. 그 남자도 무너지듯 안겨왔다. 우리의 포옹은 내가 꿈꾸던 포옹하고도 욕망하던 포옹하고도 달랐다. 우리의 포옹은 물처럼 담담하고 완벽했다.

우리의 결별은 그것으로 족했다.(310면)

 

여기에 더 무슨 설명을 보탤 것인가. 운명이란 사람이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서로 빚진 행과 불행의 얽힘이다. 인간이 그런 운명의 속박에서 놓여나는 것은 대개 죽음을 통해서나 가능한 일이기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서로에게 빚진 인연 때문에 괴로워하게 마련이다. 『그 남자네 집』은 그런 숙명의 고통을 견뎌내면서 서로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는 온전한 사랑을 찾아가는 무애자재(無碍自在)한 삶의 진경을 한편의 운명극으로 보여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