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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경계와 윤리, 그리고 포월(匍越)
『창작과비평』 2006년 여름호 문학특집에 대하여
홍기돈 洪基敦
문학평론가. 평론집으로 『페르세우스의 방패』 『인공낙원의 뒷골목』 등이 있음. gdhong@chol.com
1. IMF사태와 6·15선언은 양자택일의 문제인가
『창작과비평』은 2006년 여름호 특집을 ‘2000년대 한국문학이 읽은 시대적 징후’로 꾸몄다. 문학을 통해 시대를 파악하려는 노력이야 그동안 많이 접해왔으니 그리 새로운 접근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2000년대 한국문학’을 통해 시대를 읽겠다면 상황은 다르게 전개된다. ‘2000년대 한국문학’이라는 시간의 구획은 이전 시기의 문학, 예컨대 ‘1990년대 문학’과 변별되는 측면에서 의미를 가지게 되며, 변별되는 자질은 새로움으로 포장되어 의도적으로 강조될 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2000년대 문학’을 특집으로 설정하는 순간 『창작과비평』은 한국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나름대로 설정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기실 ‘2000년대 문학’을 강조하는 문학매체들은 자신들의 입장에 맞게 그 새로움을 강조하는 추세이다. 전면적으로 세대교체를 이룬 『문예중앙』은 세대론 차원의 단절욕망 위에서 2000년대 문학의 새로움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이 강조하는 “새로운 문학의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는 ‘감각’과 ‘즐거움’이다.1 반면 『문학과사회』는 정치적 의식을 완전히 벗어던진 ‘무중력 공간의 탄생’을 강조하고 있다.2 이러한 논리가 새로운 경향의 대표주자로 내세우는 정이현에게는 들어맞겠지만, 과연 다른 작가들까지 포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새로움을 포장하는 방식의 차이와는 상관없이, 문학과 사회를 대립적으로 설정하면서 현실의 바깥으로 빠져나가려 한다는 점에서 『문예중앙』과 『문학과사회』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창작과비평』의 입장은 어떠할까. 이런 물음은 한기욱(韓基煜)의 「한국문학의 새로운 현실 읽기」에 시선을 집중하게 만든다. 이 평론은 기획의 총론이다. 『창작과비평』의 상임편집위원인만큼, 한기욱은 기획 전반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이 평론을 써내려갔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글을 읽고 있으면, 오해일 수도 있겠지만, 『창작과비평』의 편집인 백낙청의 그림자가 어른어른 느껴진다. 따라서 이 부분부터 짚고 나아갈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한기욱은 “2000년대 문학의 기점에 해당하는 역사상의 계기”를 설정하는 데 필요 이상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2000년대 문학의 기점이 되어야 하는 사건이 무엇인지를 반복하여 묻는다. 1997년 맞닥뜨린 IMF사태인가, 2000년 성취한 6·15공동선언인가. 그러고는 6·15공동선언의 중요성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남녘 사람들(특히 젊은 세대들)에게는 IMF사태가 6·15선언보다 훨씬 충격적으로 느껴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두 사건으로 말미암은 중장기적인 변화를 비교하면 6·15선언 쪽이 훨씬 심대할 것이다.”3 한기욱은 왜 ‘IMF사태냐, 6·15선언이냐’를 대립항으로 설정하여 묻고 있는 것일까.
백낙청(白樂晴)은 『흔들리는 분단체제』를 1998년에 상재하였고, 2006년에는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을 묶어 냈다. 그런데 두권의 책 사이에는 논리적 단절이 발견된다. 가령 『흔들리는 분단체제』에는 다음과 같은 관점이 나타난다. “‘한국 모델’이 분단체제에 맞춰 구성되었고 그 경제적 위력이 분단시대의 특정 국면에 한정된 것이라면 IMF사태가 단순히 ‘급전을 꾸어 쓴’, 다시 말해 일시적 유동성의 위기라는 진단은 가당치 않은 것이다.”4 그렇다면 IMF사태는 분단체제와 연동하는 남한경제의 실상에 해당할 터이니, 우리 사회를 이야기할 때 변수(變數)가 아닌 상수(常數)로 놓고 논의를 풀어나가야만 한다. 그런데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을 읽어보면, 6·15공동선언의 의의와 중요성에 대한 강조로 일관하면서도, 상수로 다루어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가 빠져 있다.
만약 백낙청의 주장이 일관성을 획득하려면, 6·15공동선언이 그동안의 분단체제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IMF사태로 야기된 상황이 이러저러하지만, 2000년 성취한 6·15공동선언은 그 비참한 상황을 극복하는 데 이러한 의미가 있다고 밝혀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왜 IMF사태가 아니고 6·15공동선언이어야 하는가,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바로 그 지점에서 한기욱은 IMF사태와 6·15공동선언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설정하고, 반복하여 6·15공동선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IMF사태와 6·15공동선언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려는 모습은 조금도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총론을 통해 한기욱은 2000년대 문학의 기점으로 6·15공동선언을 꼽았지만, 그외 네명의 필자는 6·15공동선언과 무관하게 평론을 써내려갔다. 「거미의 집짓기와 소화법—통일과정의 소설적 표현」을 쓴 황광수가 6·15공동선언을 의식하기는 했다. 하지만 평론의 앞부분에서 “텍스트들을 읽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6·15시대의 ‘통일’주제 소설들을 논하는 쪽으로 기억이 굴절되어버렸다”(228면)고 밝히고 있듯이, 청탁자가 요구했던 ‘6·15공동선언’의 의미는 이 글에서도 증발해버린 형국이다. 따라서 전체 기획의 차원에서 파악한다면 2000년대 한국문학의 기점을 둘러싼 한기욱의 견해는 제대로 공유되지 못한 셈이다. 그러니 여기에 대한 분석과 반성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2. 경계 넘어서기의 미덕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기욱의 「한국문학의 새로운 현실 읽기」는 읽을 만하다. 근거로는 두 가지 사실을 꼽을 수 있다. 첫째, 그는 6·15공동선언의 의미를 한반도의 분단극복 과정으로만 한정시키지 않고, “경계 넘기”일반으로 확장시켰다. 이에 따라 최근 소설을 통해 논의할 수 있는 예민한 문제들은 대부분 포섭할 수 있었다. 가령 소설의 공간이 동남아와 유럽으로 넓어지는 현상은 한반도 남쪽의 반국(半國)적 경계를 벗어나 시야를 넓혀가는 태도와 이어진다. 복잡한 내면의 여러 경계를 넘는 일 또한 여기에 포함된다. 이주노동자의 문제는 어떤가. 먼저 국제결혼, 이로 인한 혼혈 2세·다인종·다민족·다국적 가족의 문제가 발생하니 이 또한 경계 넘기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6·15공동선언의 엄청난 잡식성에 순순히 동의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남지만, 그야 어찌되었든 한기욱은 경계 넘기를 통해 유효한 분석틀을 세우게 되었다. 즉 소설을 통해 드러나는 다양한 사안들에 개입할 근거를 확보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기욱의 평론은 장점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먼저 현실 속에서 문학을 파악하려는 태도가 두드러지게 확인된다. 예컨대 소설에 등장하는 이주노동자의 문제를 이해하는 관점이 사태의 복잡성에 근접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주로 세계화시대 한국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생존 전략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인종적·국민적·민족적 경계의 횡단과 관련이 있다. 이 다층적 경계를 제대로 넘는 일이 장차 통일한국의 국가적·민족적 성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점에서 6·15시대에 각별한 의미를 띤다.”(213면)
범위를 좀더 넓혀 생각해본다면, 사태를 파악하는 한기욱의 태도는 『창작과비평』의 입장에서 배태된다고 할 수 있다. 세부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문학의 기점에 해당하는 역사상의 계기”를 따지는 행위는 ‘역사상의 계기’와 ‘문학의 기점’을 동시에 고려하고자 하는 의식에서 발생한다. 다시 말해서 역사(사회)와 문학의 관계를 통일적으로 파악하며 2000년대 한국문학의 좌표와 방향을 모색하려는 노력이 한기욱의 경계 넘기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창작과비평』이 『문예중앙』 『문학과사회』와 갈라지는 대목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한기욱은 이러한 분석틀을 작품 분석에까지 그대로 밀고 나간다. 이를 통해 그는 각각의 작품이 현실과 길항하는 관계라든가 팽팽한 긴장을 섬세하게 파악해낼 수 있었다. 이것이 「한국문학의 새로운 현실 읽기」가 읽을 만하다는 두번째 근거이다. 각각의 작품해설에 대한 부분까지 다루기에는 내게 주어진 지면이 너무도 모자란다. 그리고 좀더 나아갔으면 싶은 대목이 더러 있지만, 동의하지 못할 내용은 거의 없다. 따라서 그의 언급 가운데 현재 문단의 흐름에서 특별히 유의미하다 싶은 두 대목만 돋을새김하고 지나가도록 하겠다.
내가 판단컨대, 최근 한국소설에 드러나는 탈사회적 경향, 무력함, 왜소함 따위는 상당부분 과장되어 있다. 이러한 해석의 거품을 앞서서 만드는 이는 물론 평론가들이다. 나름의 의도를 관철시키거나 부분을 전체로 확장시켜 논리의 통일을 꾀하는 데는 유용하겠지만, 이게 과연 윤리적인 일인지 한국문학에 바람직한 일인지는 의문이다. 일단 2000년대 한국문학이 제자리를 찾아가려면 이런 측면에 대한 지적과 비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5
그런 맥락에서 한기욱의 다음과 같은 이광호 비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2000년대 작가들의 세대론적 심리경향을 어물쩍 2000년대 문학의 특성으로 차용하는 방식은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작품 읽기에서 상당한 선입관으로 작용할 수 있다. 2000년대 문학작품들을 실제 이상으로 탈현실적이고 탈역사적인 맥락에서 읽기 쉽다는 것이다.”(214면) 그리고 그가 김영찬에게 갖는 다음과 같은 느낌도 일리있게 다가온다. “2000년대 젊은 문학의 ‘탈내면의 상상력’이라는 가능성을 취하기 위해 ‘2000년대 문학의 자아’에 죄다 ‘무력함’ ‘왜소함’ ‘빈곤함’의 딱지를 붙이는 느낌이랄까.”(215~16면)
3. 윤리의 가면을 쓴 욕망
윤리는 경계에서부터 발생한다. 주체와 타자가 만나는 자리가 바로 경계이기 때문이다. 경계의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면서 주체와 타자는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가고, 이해의 폭이 확장되는 만큼 윤리는 점차 제자리를 찾아나가게 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전방위에서 경계 넘기를 모색하는 한기욱은 어쩌면 윤리의 세계로 들어서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윤리의 문제를 김형중(金亨中)은 「성(性)을 사유하는 윤리적 방식—최근 한국문학에 나타난 성·사랑·가족에 대한 단상들」에서 정면으로 다루었다. 그렇지만 몇가지 점에서 그가 말하는 윤리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먼저 김형중은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의 「교통공간에 대한 노트」를 인용하며 윤리의 거점을 마련하고 있는데, 이게 과연 타당한지 의문이다. 코오진이 그 글에서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은 “내부와 외부의 공간 구별을 해체”하려는 기획이다. 글의 처음 부분에 그 의도는 분명하게 밝혀져 있다. “내가 여기서 생각하고 싶은 것은 단지 균질 공간을 비판하는 일이 아니다. 그러한 비판은 내부와 외부를 분할하는 사고를 항상 회복시키고 마는데, 공간에 대한 그와 같은 사고를 나는 해체하고자 한다.”6 그러니 그가 ‘교통공간’에서 윤리의 근거를 모색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다. “모세나 예수, 나아가 다른 세계 종교의 시조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공동체 또는 공동체적인 종교와 달리 ‘교통공간’에서의 윤리성이 개시(開示)되는 일이다.”(같은 글 41면)
그렇다면 김형중 또한 교통공간으로 나아가야 한다. 코오진의 발언을 근거로 나름의 입지를 마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절대적 외부성’을 용인하라고 주장하면서 교통의 가능성이 사라진 자리에 윤리의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타자란 근본적으로 동일자의 언어 밖에 있는 자, 절대적 외부성을 용인하지 않는 한 항상 이방인으로 배척받거나 과장되게 이상화되어버리고 마는 자이다.”(248면) 타자가 ‘동일자의 언어 밖에 있는 자’라고 해서 ‘절대적 외부성’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규정해버리고 나면 타자는 언제나 하나의 공동체 바깥에 유령처럼 떠돌게 될 뿐이다. “커뮤니케이션을 수행하는 것은 여행하고 번역하며 교환하는 것”(같은 글 38~39면)일 터인데, 그런 가능성까지도 애초에 제거해버린 까닭이다. 카라따니가 해체하고자 했던 내부와 외부는 김형중을 통해 이렇게 공고해지고 있다. 윤리와 비윤리/반윤리는 이렇게 하여 전도되고 만다.
여성작가의 작품에 대한 그의 무차별적인 포용은 그래서 가능해졌다. 여성은 남성의 절대적인 외부에 존재하며, 그런 까닭에 여성작가와 남성평론가의 교통은 감히 모색할 수 없고 그저 실체를 인정하는 태도만이 윤리로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구심력과 그녀들의 원심력은 서로에게 애초부터 절대적 외부이다. 그 사실을 용인하지 않는 한 그들의 시선과 언어는 결코 윤리를 발생시키지 못한다.”(251면) 만약 이를 거역한다면 ‘동일자의 언어’로 여성을 배척하거나 과장되게 이상화해버리는 데 머무르지 않겠는가. 이렇게 논리의 토대를 마련한다면 이후의 전개는 윤리의 이름으로 거리낄 것이 없어진다.
가령 “김민정은 분노와 조롱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여성성이란 모성이고 모성이란 잉태와 생명의 생산에 있다는 종래의 관념을 폭파한다”(251~52면)라는 정리를 보자. 그러한 내용이야 시의 표면에 그대로 드러나니 이견이 있을 까닭이 없다. 그렇지만 김민정 시에서 발견되는 “사유의 깊이가 지나치게 단순화된”7 양상에 대해서 윤리의 이름으로 침묵해버리는 데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물론 김형중의 잘못된 가설 위에서라면 침묵만이 윤리적인 행위이리라. 김민정은 남성인 김형중의 ‘절대적 외부’에 존재하는 여성이며, 그런 까닭에 그가 이러저러한 평가를 가하는 행위는 ‘절대적 외부’를 용인하지 않는 비윤리적인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평가는 여성평론가의 몫으로 미루어야만 온당한 것일까.
나는 일찍이 잡지에 발표된 김민정의 몇몇 시를 보면서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나나’가 우리 삶 속에 은폐되어 있는 위선과 폭력에 맞서는 존재이길 기대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의 첫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에 실린 그의 시의 전모는 이전의 기대와 달리 매우 단순한 사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닿게 한다. 혹자는 그의 시를 만화적 상상력이라고 지칭하기도 했는데 그런 것만큼이나 그의 시가 장난스럽게 느껴진다.8
김형중의 윤리는 ‘가면을 쓴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앞에서 나는 『문예중앙』이 보여주는 세대론 차원의 단절 욕망에 대하여 잠시 언급한 바 있다. 『문예중앙』의 편집동인 김형중에게 가득 차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욕망이다. 의도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과도한 욕망이 카라따니 코오진의 오독을 불러왔고, 그 위에서 새로운 경향의 여성 작가들과 시인들이 무차별적으로 포용되고 있다. 안타까운 사실은 외국이론에 대한 김형중의 오독이 여러 글에서 반복되어 나타난다는 점이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2000년대 문학의 새로움이 일방적으로 추수되고 강화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김형중의 윤리(가면을 쓴 욕망)는 동의를 이끌어내기 어렵다. 그러고 보면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굳건히 세워나가면서 짐짓 경계를 넘어서는 것처럼 포장하는 시도는 세계화시대 자본의 욕망과 얼마나 닮아 있는가. “데카르트적인 균질공간은, 그것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그 안과 밖을 상보적으로 강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경계(borderless)로 이야기되는 세계경제가 내셔널리즘이나 블록화를 강요하는 것과 동일하다.”9 일단 솔직하게 자본주의의 위력을 현실로 인정하자면서 “사실을(이라도) 수리하기 위하여”방안을 모색하는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태도라고도 볼 수 있겠다.10 그렇지만 이 순간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근대문학의 종언’은 이런 물음조차 실종해버릴 때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4. 초월(超越)에서 포월(匍越)로 건너가는 길
이즈음에서 2000년대 문학의 새로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새로움이란 상대적 가치인 까닭에 비교대상을 필요로 한다. 즉 나름의 새로움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이와 비교할 만한 낡은 대상이 앞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움은 낡은 것과의 긴장관계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획득한다. 그렇다면 2000년대 문학의 새로움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그 새로움을 배태하도록 만든 문단의 낡은 질서를 동시에 고려해야만 한다. 여기에는 문학사회학의 관점이 필요할 듯하다. 카라따니 코오진의 경우 한국문학의 상황을 근거로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했는데, 문학 내적인 논리만 가지고는 문학이 그러한 처지로 굴러떨어진 과정과 맥락을 도무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새롭다는 일련의 시들을 보면 퍽이나 난해하다. 그래서 난해함을 새로움의 지표로 삼는 경향도 눈에 띈다. 새로운 것이라면 일단 끌어안고 보자는 태도도 여기서 빚어진다. 가령 『문예중앙』의 다음과 같은 진술을 보면 알 수 있다. “작품 앞에서 비평은 늘 늦될 수밖에 없습니다. 뒤처진 비평이 앞선 작품을 꾸짖고 타기시하고 매도하는 일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입니다.”11 작품과 비평을 대화의 관계로 파악한다면 이러한 발언에 동의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입장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그리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현재의 상업화된 문단질서 속에서 치열한 작가의식의 발로가 시의 난해함으로 이어졌을 가능성까지 사장시켜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특정한 시기에 문학의 자율성을 지향하는 시인, 작가는 의도적으로 난해함을 취하기도 한다. 주제를 불가해한 방식으로 드러냄으로써 고객의 주문에 종속되는 상황을 벗어나려는 일종의 전략인 셈이다. “부르디외에 의하면 이것은 생산물과 생산자의 특수성과 대체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일이며, 문학장 외적인 주문과 완벽한 단절을 선언하는 일이기도 하다.”그러니까 그들이 난해한 문체를 선택하여 자기만의 고유함을 드러냄에 따라, “환경과 시장의 산물이었던 작품들은 그 스스로의 존재원리와 필연성을 사회에 강제하는 문화상품으로 탈바꿈한 것이다.”12 현재의 한국문학에서는 이러한 가능성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문학장에서 작동하는 타율성이 극에 달해 있기 때문이다.
타율성의 극으로는 경제논리가 지배하는 상업적 문학생산의 장(거대 생산의 장)을 꼽을 수 있다. 자율성이 붕괴된 문학의 장에서 시인·작가들은 고객들의 문화적 수요를 변형시키는 대신, 그 수요에 부응하여 생산물을 공급하고 나서게 된다. 그리고 타율성의 극에서 생산되는 산물들은 짧은 시간 내에 낙후될 운명에 놓인만큼 신속한 순환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단기적 생산싸이클에 의해 생산된다. 작가의 운명 또한 이와 함께한다. 한국에서 1990년대 중반부터 ‘문학의 위기’가 심심찮게 논의되었다는 사실은 여기에 겹쳐진다. 위기에 대한 여러가지 진단이 나왔지만, 가장 분명하고 설득력있는 접근은 문학 외적인 것들이 문학 내부로 이식되어 문학의 가치를 급속하게 잠식해버리더라는 내용이다. 이러한 진단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렇다면 지금 시기 타율성의 극에서 자율성의 극으로 건너가기 위한 적극적인 의지가 나타날 만한 근거는 충분하지 않은가.
물론 난해성이 그 자체로 치열한 작가의식을 보증하지는 못한다. 단순한 사유 위에서 펼쳐지는 어지러운 언어의 유희가 치열한 작가의식과 동렬에 놓여서는 곤란한 까닭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평론가의 개입이 필요하다. 문학적인 대화를 통해 옥석을 가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형철(申亨澈)의 「스키조와 아나키—2000년대 한국 시의 정치성을 위한 단상」은 이 작업을 진행하고 있어서 흥미를 끈다. 그러니까 그가 “오늘날 가능한 것은 금지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유혹에 대한 거절일 것이다. 이제 권력은 ‘하지 마라’라고 말하지 않고 ‘하라’라고 말하기 때문이다”(277면)라고 이야기할 때 평론의 방향은 자연스럽게 문학의 자율성 옹호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신형철은 문학의 자율성과 시의 정치성을 하나로 묶어 논의를 전개한다. 이를 위하여 장석원과 강정을 대상으로 삼은 것은 적절한 판단이다. 먼저 장석원을 보면, 그는 정말 “김수영의 진정한 후계자”라는 느낌이 든다. 개별적이고 육체적인 언어,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언어, 메타적이고 비평적인 언어가 서로 충돌하며 자아내는 팽팽한 긴장이 그러하며, 사랑과 혁명을 동시에 밀고 나아가는 인식도 그러하다.13 또한, “그의 아나키즘은 사랑의 내용이 아니라 사랑의 형식”(287면)이라는 신형철의 평가가 따를 만큼 형식에 대한 고민도 깊어 보인다.
강정에게서도 김수영의 시선이 느껴지는 바 있다. 가령 「들판을 달리는 토끼」는 시로써 전개한 그의 시론인데, 이는 김수영의 「연기」를 생각나게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관심을 가져야 할 사항은 그가 드러내는 초월의 욕망이다. “사랑이란 인간의 뒤집어진 피부 안쪽을 들쑤셔/피와 살을 나눠먹는 일 아닐까 해요”(「하나뿐인 음식」)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편협한 주체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방식이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교통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신형철의 판단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진정한 생성이란 주체가 어떤 대상과 함께 ‘구별불가능/식별불가능의 객관적 지대’로 들어서는 것이라는 들뢰즈의 언명은 강정의 관점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281면)
그런데 이러한 사유를 시간적·공간적으로 늘리고, 사랑의 대상을 인간 너머로 확장시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무에 가까워지고 말 터인데, “긴 얼룩무늬 혀로 한번 스윽 핥으면 사라질 우주의 얼룩”(「기린은 환영이다」)이라거나 “인간도 아니고 인간 아닌 것도 아닌 만물이 때 되면 허물 벗어 다른 생을 낳는 그곳을/허공이라 한들 어떠리”(「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와 같은 싯구가 이를 증명한다. 주체가 무에 가까워지는 것과 비례하여 인간의 언어 또한 순간으로 수렴하며 소멸로 다가서는 대목은 눈길을 잡아끈다. “듣고 보니 말이라 했지만,/책에 쌓인 먼지라거나/같이 있다 방금 자리를 뜬 사람의 미진한 온기 따위인지도 모른다”(「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이 두번의 초월이 과연 서로 얼마나 다른가 하는 사실이다. 신형철은 후자의 초월을 일러 “그가 가끔 초월의 제스처에 다가갈 때 우리는 서먹해진다”(283면)고 하였다. 부정적으로 파악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강정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를 ‘망각’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성별의 울타리를 초월한다”(279면)에서의 초월은 어찌하여 긍정적으로 평가되는가. 이는 아마 초월의 이중성에서 기인할 것이다.
초월에 대한 욕심은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두개의 상반된 성격을 갖는다. 즉 하나는 인간이 인과의 구속에서 벗어나 의지에 따라 변덕을 부릴 수 있는 선택의 자유로움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무상한 변덕으로부터 벗어나 법칙에 따라 안정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순리(順理)의 자유로움을 말한다. 이로 인해 인간은 변덕을 부릴 수 있는 선택의 자유와 법칙을 따를 수 있는 순리의 자유를 동시에 원하는 모순된 모습을 갖는다.14
초월욕망을 어느 한 방향으로만 고정시키는 순간 시적인 긴장은 풀어지거나 경직되고 만다. 그러니 초월의 이중성 속에서 문학의 성취를 얻으려면 현실의 지반을 쉽게 뛰어넘어서는 안된다. 현실의 긴장을 초월 속에 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진석의 표현에 따른다면 ‘포월(匍越)’정도가 되겠다. 신형철은 아마 강정의 시세계에 대해 그러한 정도의 우려를 덧붙이고 싶었을 것이다.
신형철의 우려에 각주를 덧붙이자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선시대 유교문화를 참조하는 것이 유용할 듯하다. 천지인(天地人)의 삼재(三才)에 따라 초월욕, 물질욕, 인륜욕을 나누어 관계를 살피는 내용도 그러하지만, 수신(修身)을 통해 스스로의 욕망을 적절하게 제어해나가는 과정에 유교문화의 요체가 놓이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신독(愼獨)이라고 해서 홀로 있을 때조차 마치 남이 보는 것처럼 도리에 어그러짐 없이 몸가짐을 바로 하고 언행을 삼갔을까. “오늘날 가능한 것은 금지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유혹에 대한 거절일 것이다”라는 성찰은 이러한 내용 안에서 더욱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5. 『창작과비평』에 보내는 제언
『창작과비평』의 2006년 여름호 특집 ‘2000년대 한국문학이 읽은 시대적 징후’를 살펴보았다. 가장 두드러진 사실은 총론(한기욱)의 의도가 각론을 통해 제대로 해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2000년대 한국문학’을 특집으로 설정하는 순간 『창작과비평』은 한국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나름대로 설정”했을 텐데, 그러한 방향이 다른 평론들을 통해 검증받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러한 양상이고 보면, 2000년대 한국문학의 향방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창작과비평』의 목소리는 왜소해질 수밖에 없다. 다른 문학매체들은 각각 자신들의 욕망 위에 ‘2000년대 한국문학’의 새로움을 포장하여 공세적으로 나서고 있는데, 이를 상대하면서 『창작과비평』의 입지를 확보하기는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 내부논쟁의 부재가 생산적인 담론 창출의 실패로 이어진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2000년대 문학의 기점에 해당하는 역사적 계기”를 6·15공동선언으로 설정하는 시도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더군다나 IMF사태냐, 6·15공동선언이냐 양자택일하려는 태도는 작위적이란 느낌이 강하게 든다. 『창작과비평』이라는 해석공동체 내부에서는 이를 둘러싼 내부논쟁이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로 인해 해석공동체 외부와의 대화 가능성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총론의 내용이 각론으로 제대로 이어지지 못한 까닭에 『창작과비평』의 2006년 여름호 특집이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기는 어려울 성싶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창작과비평』이 쌓아왔던 면면한 사상적 전통 속에서 참조할 만한 사실들이 몇가지 확인되고 있음은 주목해야 하겠다. 먼저 ‘문학의 자율성’을 바탕으로 하여 시학, 정치학, 윤리학이 한데 뭉뚱그려지는 젊은 시인들의 시세계가 출현하고 있는 현상이 예사롭지 않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지금까지도 위세를 떨치고 있는 순수문학 따위와는 현격히 구별되며, 현실에 대한 무관심을 뻔지르르 포장하던 ‘현실방임주의’와도 궤를 달리 한다. 그러니 『창작과비평』과 이러한 경향의 시세계가 관계 정립되어야 하겠는데, 1990년대 후반 최원식(崔元植)이 주창했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론’이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겠다.
“유혹에 대한 거절”을 단순한 태도의 표명이 아니라 사상의 수준으로 이끌어가는 데도 『창작과비평』의 역할이 필요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유혹에 대한 거절은, 한낱 인식(앎)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인식(삶)을 성찰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릴 때 가능해진다. 체득(體得)의 경지는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그런데 체득이란 서구의 근대사상과 변별되는 동아시아 사상의 근본이 아니던가. 이러한 물음을 통해 동아시아 사상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성과를 쌓아온 『창작과비평』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아나갈 수 있다.
새로운 문명이란 인간을 새롭게 이해하고 규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지며, 이를 위해서는 시간적·공간적으로 근대 바깥의 다양한 사상을 참조해야만 한다. 2000년대 한국문학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며 그러한 가능성을 결합시킬 수는 없는 일일까. 근대가 직면한 막다른 벽이 견고하기는 하지만, 그 너머로 나아가는 일 역시 훌륭한 경계 넘기임에 틀림없지 않은가. 만약 그러한 고민을 발전시킬 수만 있다면, 『창작과비평』의 2006년 여름호 특집은 나름의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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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신호를 내면서」, 『문예중앙』 2005년 봄호, 2~3면.↩
- 이광호 「혼종적 글쓰기 혹은 무중력 공간의 탄생—2000년대 문학의 다른 이름들」, 『문학과사회』 2005년 여름호.↩
- 한기욱 「한국문학의 새로운 현실 읽기」, 『창작과비평』 2006년 여름호, 210면. (이하 이 책의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표기함)↩
- 백낙청 「IMF시대의 통일사업」, 『흔들리는 분단체제』, 창작과비평사 1998, 65면.↩
- 필자가 「인정투쟁의 욕망과 ‘새로움’이라는 블랙홀—이광호, 김형중 비판」(『문학수첩』 2005년 가을호)을 썼던 까닭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 카라따니 코오진 「교통공간에 관한 노트」, 『유머로서의 유물론』, 이경훈 옮김, 문화과학사 2002, 30면.↩
- 엄경희 「환상적 실험시에 대한 몇가지 질문」, 『시작』 2006년 봄호, 45면.↩
- 같은 글 46면.↩
- 카라따니 코오진, 같은 글 30면.↩
- 김형중의 「기어라, 비평!—2000년대 소설담론에 대한 단상들」, 『문예중앙』 2005년 겨울호 참조.↩
- 「혁신호를 내면서」, 『문예중앙』 2005년 봄호, 3면.↩
- 신미경 『프랑스 문학사회학』, 동문선 2003, 115면.↩
- 권혁웅 「미래파」, 『미래파』, 문학과지성사 2005 참조.↩
- 최봉영 『주체와 욕망』, 사계절 2000, 12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