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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2000년대 한국문학이 읽은 시대적 징후 2

 

비판의 윤리성과 최근의 비평

 

 

임규찬 林奎燦

문학평론가, 성공회대 교수. 평론집 『왔던 길, 가는 길 사이에서』 『작품과 시간』 『비평의 창』 등이 있음. kclim@mail.skhu.ac.kr

 

 

1

 

“지식인이라는 존재가 비판적임을 의미한다면, 그 비판은 맨 먼저 자기비판이어야 한다.”1 근래 발간된 여러 평론집을 읽으면서 문득 일본의 어느 지식인이 한 말이 떠올랐다. 무엇보다 필자가 이전에 행했던 이런저런 비판이 다시 반박되는 대목에서, 특히 누군가를 겨냥했던 비판이 고스란히 나 자신을 겨누는 무기로 되돌아오는 회돌이 앞에서 그 말이 더욱 절실했다. 가령 ‘타자를 부정하는 방법으로 자기를 긍정’하는 비판의 병폐에 대한 지적이나, ‘사고와 선언 사이에 모순이 존재한다’라는 비판 등이 그렇다. 사실 ‘나’ 위주로 글을 쓰면서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화상대를 택해 ‘아전인수’하는 병폐는 언제나 나타나기 쉽고, 타인을 향해 할 말이 있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해야 한다는 사실은 잊어버리기 쉽다. 하여 이런 지적들은 적어도 필자 자신에게 투영해볼수록 아픈 지적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자문하는 윤리성도 비평의 창조적 힘을 키우는 마음가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실제로 근년에 ‘문학권력’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벌어졌던 논쟁은 서로에게 큰 상처를 준 사례라고 할 수 있을 터인데,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자 (1)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스스로의 비평적 관점과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면서 “마치 한사람의 비평가로 새로 태어나는 것 같은 소중한 인식론적 제의를 겪게 되었다”2라고 말하거나, (2) ‘달갑지 않은 경험’이었지만 “문학에 대한 우리 자신의 생각의 밀도를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3라고 긍정적으로 정리하는 것을 보면 ‘비판’의 본질은 상생의 창조성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필요한 만큼 비판하고 또 자신에 대한 비판도 사심없이 감내하면서 역지사지하는 일이야말로 비평의 일상적 수행이리라 믿는다.

사실 서로 아무리 적대적이고 또 명백히 구별되는 사유세계를 가진 입론들이라 할지라도 현실 속에서 뒤섞이다보면 복잡한 역학관계에 놓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게 되는데, 특히 서로 적응하려고 애쓸 때나 일정한 지향을 가지고 같이 움직일 때 다른 행위자들과 상호작용하면서 훨씬 역동적인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한사람의 행위자는 끊임없이 다른 행위자의 행동에 반응하면서 협동과 경쟁을 하게 된다. 이런 ‘협동과 경쟁’의 상호작용이야말로 따지고 보면 비평의 속성이고, 또 비판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최근 평론집을 펴낸 류보선(『또다른 목소리들』), 이광호(『이토록 사소한 정치성』), 김형중(『변장한 유토피아』), 김영찬(『비평극장의 유령들』)이 참여한 한 문학좌담(「‘문학의 시대’ 이후의 문학비평」, 『문학동네』 2006년 가을호)이 흥미로웠다. 좌담에서 사회자가 ‘오늘날 수도 없이 쏟아져나오는 문학작품들을 가장 현장 가까이에서 읽고 또 그 흐름을 가장 민감하게 잡아내고 분류하며, 또 거기서 더 나아가 가장 과감하게 맥락화하는 비평가들’이라고 형용한 대로, 그 저자들이 때마침 한자리에 모여 대화를 나눈지라 더 눈길이 갔다. 아마도 필자가 생각하는 비평경향이 하나의 당사자로서 참여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비판을 받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고, 또 뭔가 반론을 펴고 싶은 마음도 들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비판의 윤리성’이란 문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글과 직접대화라는 두가지 형식이 한데 섞이면서 이뤄진 비판적 토론의 풍경을 보면 참석자들끼리는 어느정도 공정한 주고받기가 이루어진 듯하다. 그러나 각각의 평론집의 글과 연계해 좌담의 발언을 생각해보면 거기엔 또 적당한 타협과 회피 등 부정적 요소도 엿보인다. 여하튼 오늘의 비평의 풍경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예라고 생각하여 이들의 좌담 발언과 평론집을 중심으로 필자 나름의 비판적 개입을 해보고자 한다.

 

 

2

 

일반적으로 좌담의 흐름을 보면 여러 요인에 따라 진영이 형성되고 또 특정한 부분에서 연대가 이루어졌다가 다른 부분에선 분열과 대립이 생기기도 하는 등 흥미로운 이합집산이 연출된다. 그 점에서도 이 좌담은 흥미롭다. 특히 이광호(李光鎬)와 김형중(金亨中)의 발언은 서로 호흡이 잘 맞고 자신감이 실려 있어 강한 활기가 느껴졌다.

그런데 발언의 공정성이란 견지에서 볼 때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장애가 되고 더 진척될 논의전개를 중단시킬 수 있는, 이른바 비판 자체를 무화시킬 수 있는 전제가 이 좌담에서 은연중 떠돌고 있었다. 이광호가 불쑥, 그러나 매우 적극적으로 밝힌 바, 비평가는 ‘긍정적인 것이든 비판적인 것이든 과장되게 호명하는 것’ 즉 일종의 문학적 베팅(betting)을 한다는 발언이 그것이다. 그런데 김형중 역시 ‘자신도 의도적으로 과장되게 해석’한다고 동의 발언을 하고 김영찬(金永贊)마저 ‘2000년대 문학은 90년대 문학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문학’이라는 자신의 진단이 최근 위축된 문학담론을 활성화시켜보기 위한 ‘수행효과’의 전략적 측면이 있다고 하여 논의 전반을 교란시킨 면이 없지 않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확신의 윤리보다는 막스 베버(Max Weber)가 말한 책임의 윤리가 떠올랐다. 책임의 윤리란 우리의 의도 또는 원칙에 대해서 책임을 질 뿐만 아니라, 가능한 대로 행위의 결과를 예측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윤리를 말한다. 하나의 확신처럼 이야기하지만 책임의 윤리가 부재하는 이런 식의 발언이 나옴으로써 이후 논의는 ‘의도적인 전략을 감안하더라도’ ‘수행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인지 몰라도’ ‘의도적인 건지 몰라도’라는 식의 단서가 꼬리를 물면서 발언자의 비판정신을 위축시키고 만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약간 지나치다’ 정도로 용인됨으로써 근본적으로 검토해야 할 사항이 쉽게 용납되는 지점도 없지 않다.4

따라서 이들 논의의 흐름을 제대로 추적하려면 ‘전략’이나 ‘수행효과’라는 수단을 지우고 목적 자체로 직핍해 들어가 그것의 맨얼굴을 대면할 필요가 있다. 이광호, 김형중 스스로 ‘과장’이라 호명했듯이 이것이냐 저것이냐 양자택일 방식의 ‘극단’들이 만들어놓은 문학과 비평의 영토가 그것이다. 의외로 ‘극단적인 찬사와 극단적인 비판’이 짝패를 이룬다. 이들의 글을 두고 내용 이전에 ‘재미’나 ‘문체’ 이야기를 하는데, 내용적 성격과 관련해서 서술방법과 문체적 효과에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김형중의 경우는 단순명쾌한 논리적 서술효과를 환기시키는 바 없지 않다. 대체로 어떤 행동의 배후에는 다른 많은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분명한 이유가 있을 뿐이다. 평론집과 좌담에서 브레히트(Brecht)의 좌우명이라며 그가 즐겨 사용한 “좋은 옛날 것 위에 건설하지 말고 나쁜 새로운 것 위에 건설하라”는 문구도 그런 예이다. 그는 “지금 사회에 대해 비판적이고자 하는 문학이 취할 수 있는 최대의 도덕, 그 ‘한줌의 도덕’은 ‘당대성’이”라며, 민족문학의 주요 작가들이 ‘당대’를 그리지 못하고 과거, 이국땅, 섬 등에만 머물면서 대체적으로 ‘퇴행적 양상’을 보인다고 비판한다.5 물론 당대를 그린 리얼리스트 작가가 아예 없다고까지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작업은 그가 또 한편의 절대지표로 활용하는 세대론의 특권화, ‘젊은 작가들’의 몫으로 배치된다.

그런데 브레히트의 이 말은 좌담에서 이광호를 옹호하는 또다른 근거로 사용된다. 이제 문맥적으로 ‘좋은 옛날보다 나쁜 새로운 것에 운명을 거는 태도’로 더 단순화하여 ‘나쁜 새로운 것’ 자체가 ‘미적 모더니티의 급진성’으로 호명된다. 흥미롭게도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 역시 브레히트의 이 말을 분석한 적이 있는데, 그는 ‘탐탁지 않거나 모호할 수도 있을 현실에서 진보적인 계기를 추출하는 맑시스트의 기질을 암시하는 것’6이라고 보았다. 마치 이광호나 김형중 식의 접근을 예견이라도 한 듯, 포스트모더니즘이 ‘싸이렌의 노랫소리에 대해 율리씨즈처럼 우리의 귀를 틀어막고 그 모든 공허한 현재성 속에서 동시대의 있는 그대로와 대면하’(240면)라는 식으로 이 말을 희화화했다는 것이다.7

이러한 단순논법의 다른 예로 ‘의도확대의 오류’를 들 수 있다. 김형중은 「민족문학의 결여, 리얼리즘의 결여」에서 배수아의 『에세이스트의 책상』에 대한 백낙청의 평론을 문제삼으면서, 작가가 ‘반서사소설’을 쓰겠다고 후기에서 밝히고 있는데 백낙청은 ‘다소 안쓰러워 보일 지경’에까지 서사에 대해 집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백낙청은 마치 그런 성급한 비판을 당연하게 예상이라도 한 듯이 “내가 스토리의 진행을 재구성해보는 ‘다소 저급한 비평방법’을 동원한 것은, 김영찬의 ‘해설’을 포함한 요즘의 너무 많은 비평이 선형적 서사의 파괴를 곧바로 서사의 부재와 동일시하며 『에세이스트의 책상』에서처럼 작가가 실제로 공들여 창작한 서사를 가벼이 넘겨버린 채 ‘특수한 담론적 양상’에 대한 비평가 자신의 (그것도 이제는 대체로 낯익은 것이 되어버린) 담론을 펼치는 데 몰두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내 나름의 이의제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8라고 지적한 바 있다.

김형중의 이러한 ‘의도확대의 오류’는 한마디로 일종의 교묘한 결과주의로 작품을 바라보고 단순절대화하는 해석방식이다. 말하자면 해당 작가에게서 보이는 현재의 현상적 모습을 근거로 그것을 다시 기원으로 되돌림으로써 결과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소박한 ‘자연주의적’ 비평방식이다. 물론 김형중 비평의 근저에는 라깡—알뛰세르—데리다—푸꼬—들뢰즈로 이어지는 서구 정신분석학과 후기구조주의의 세련된 논리가 숨쉬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치밀한 논리화를 거치기보다는 단편적이고 자의적으로 활용되면서 결과적으로 파편화된 형태로 다가온다.9

 

3

 

사실 이 좌담뿐 아니라 참여자들의 개별 평론집을 포함하여 그밖의 최근 비평담론을 일람해보면 ‘뜻밖에도 여전히’ 중요한 비평적 논란의 대상으로 민족문학이나 리얼리즘(의 문제)이 올려져 있다.

좌담과 평론을 통틀어 이 문제에 대해서도 이광호, 김형중이 가장 도발적이다. 문제는 논의의 구체적 질이다. 민족문학(론)은 자주 등장하지만 그와 동시에 가장 극단적인 ‘무시’를 당하는 역설의 포로다. 방민호가 수년간의 대표적인 부정적 의존의 비평양상으로 거론한 “‘1980년대’를 부정함으로써 ‘1990년대’를 정당화하고 ‘리얼리즘’을 비판함으로써 ‘모더니즘’을 정당화하는”10 가장 적극적인 논자 가운데 한사람이 이광호였다. 그러나 최근의 진술을 보면 이제 결정적인 한걸음을 더 내디딘 듯하다.

이제 민족문학론은 ‘힘없는 헛것’이 되어 불려나온다. 민족문학이나 리얼리즘 등 ‘이념들이 현재의 한국문학에 대한 현실적인 독해력을 상실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이념적인 권력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겨냥하는 독해력이 소박한 반영론, ‘사실주의’ 수준의 것이라는 데 있다. 사태가 이러니 거기에 대응하여 일일이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퇴행적’이라 하나의 상투화된 편견으로 여기고 지나치고 싶기도 하다.

그런데 이광호는 왜 ‘옛것’을 자꾸 끄집어내는가? 숨은 의도는 의외로 단순하다.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사실주의(리얼리즘)—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의 익숙한 단선적 구도를 위해서이다. 사실 이 점에서 이광호의 최근 행보는 매우 흥미롭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모더니즘 비판이 본격 개시된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80년대라는 유령’이 먼저 필요했다.

 

그리하여 80년대라는 유령은 여전히 90년대 문학의 밑자리에서 웅크리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80년대와의 대타적 관계 때문에 90년대 문학이 설정할 수밖에 없었던 냉소와 위악의 문학과 내향성과 위선의 문학은, 80년대 문학에 대한 역방향의 자기동일성의 추구였다고 볼 수 있다.11

 

한때는 80년대와 대별되는 90년대라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이제는 그 둘을 한통속으로 묶어 2000년대와 대별시키는 또다른 인식론적 단절이다. 사실 이광호, 김형중에게서 볼 수 있는 활기는 최신 포스트모더니즘론에 자신의 입각점을 확실히 세워둠으로써 나오는 일종의 자신감이다. 이들은 무엇보다 ‘베팅’할 모험적 동지들이 대거 등장했다고 환영한다.12 옛것이라고 모두 사라진 낡은 것이 되고, 새것이라고 저절로 새로운 것이 되는 건 아닐 텐데 그들의 단절은 아무래도 빠르다. 이를 위해 그들은 서슴없이 현실에도 ‘완전히’ 절망한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창살 안에 갇힌, 그러나 갇혀서도 여전히 자본주의와는 상관없는 어떤 상태를 지시하고자 온갖 애를 다 쓰는 유토피아, 그것이 내겐 문학이다. 비관을 경계하고 낙관적 전망을 즐기는 독자들에게는 안된 말이지만, 이 창살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13

 

두 문장으로 압축된 이 대목에서 잘 드러나듯이, 역시 극단의 역설화가 꿈틀거린다. “‘근대문학’의 기준에서 보면 그건 ‘문학의 종언’에 가까운 것이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다른 문학의 ‘시작’이나 존재양식의 변화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겠죠”라는 좌담에서의 이광호의 발언은 곧 ‘문학의 죽음 위에 핀 새로운 문학의 번성’을 말한 것에 다름 아니다.14

이광호에게는 역설이 비평의 지배적인 어법과 인식모형이라 할 만하다. ‘미적 모더니티’란 믿음으로 인간의 역사현실과 역사적 담론들을 쉽사리 미망으로 분류하여 혐오와 타기대상으로 삼는다. 오히려 그 때문에 미적으로 뒤집어지는 역설기법이 자유를 얻는다. 심지어 모순어법으로 순간적 통일을 달성하는 역설의 유혹은 그의 글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다. “미적 근대성의 주제 안에는 제도화된 문학성의 역사적 성립과정과 그것에 대한 항구적인 위반의 운동이 함께 포함된다”라거나 “우리는 공적인 차원에서 탈정치적이면서, 사적이고 문화적인 혹은 미학적인 층위에서는 매우 정치적인 발견을 통해, 문학성과 정치성의 저 진부한 이분법을 돌파할 수 있다” 등에서 보듯 이제 어떤 이야기도 자유롭다.15

그리하여 마침내 이광호는 일련의 미학적 가정들에 내재된 가능성들을 마음껏 표현하고 연구하는 실험실(?)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16 이광호, 김형중의 비평이 주로 기법과 방법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이처럼 실험을 대거 공유하는 ‘2000년대 문학’의 등장에 고무되어서이다. 사회적 현실이나 그런 경험의 의미는 이제 필요한 만큼으로 부차적이게 되거나 아니면 문학의 영역에서 완전히 배제되기에 이른다. 아울러 세대론의 특권화가 마침내 ‘무중력’이란 신화를 창안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런 정도의 인식차가 있기 때문에 민족문학론·리얼리즘론과는 통약불가능한 상태가 아닌가 여겨질 정도다. 아마도 이 점은 좌담에서 김형중과 김영찬 사이에 오가는 의견의 단층, ‘작품해석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확연한 입장차에서도 드러난다. 그래서 민족문학 혹은 리얼리즘 등 담론문제는 현재의 문학지형 속에서 어떻게 다시 내외부, 특히 다른 담론들과 생산적으로 소통할 수 있을까 하는 실제적인 방법론을 모색하는 것이 더 시급한 일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좌담 자체로 봤을 때 가장 핵심적으로 다루었어야 하는 것은 하나의 토론거리로 제시된 ‘민족문학’에 대한 막연한 논란보다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문제였다.17 가령 류보선이 지적한 “제가 2000년대식 작품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전략적으로 호명하는 것에 대해 경계를 표하는 것은 2000년대 문학에 이미 어떤 고착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에요.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잘 보여주기 위한 과정에서 소재나 형식이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트렌드가 먼저 있고 그 트렌드에 맞추어 소재나 내용이 선택되는 어떤 전도가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우려 말이죠”(177~78면)라는 발언이나, 김영찬이 “미적 근대성이 나름의 저항성을 지니는 한편으로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부르주아 근대성과 공모해왔던 측면”(182면)을 언급한 부분이 그런 예에 속할 것이다. 너무도 분명한 논쟁거리로 제시한 만큼 토론은 봇물 터지듯 이어져야 하는데 문제제기에서 그친다. 아마도 그런 지점에서 좀더 깊이있는 이야기가 나온다면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를 이야기하는 민족문학론이나 리얼리즘론과도 자연스럽게 만나면서 생산적인 논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기법 및 소재 선택상의 사실주의’가 아닌 ‘모더니즘의 세례를 거친 리얼리즘’을 인정한다면, 서구와는 또다르게 한국적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관계를 생각하면서 주체적인 현실읽기와 작품읽기를 통해 일반적 통념과 다르게 작가와 작품을 분별해내는 비평작업들에도 시선을 돌릴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이광호는 미적 근대성이 단일하고 실체적인 개념이 아니라 이질적인 문학적 지향들이 만나는 자리라는 점, 단수의 이념형이나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는 점을 되풀이해서 강조한다. 적어도 그 점에서 보면 그가 끌어안은 영역에선 다원주의이지만, 그 바깥은 획일주의다. 민족문학론이나 리얼리즘론의 진행과정을 조금이라도 주의깊게 지켜본 사람이라면 이들 이론이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른바 문학관이나 현실관을 근거로 하여 구축되었던 ‘진영’ 개념이나, 또 문학의 진행 및 발전 과정에서 단계적 진화론에 입각하여 단선적으로 파악하는 역사적 관점을 가장 먼저 탈각하고자 애썼던 사실을 알 것이다.

또한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론이 찾고자 하는 것이 결코 간단치 않은 복잡성의 길이고, 그래서 많은 오류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사실 역시 알 사람은 알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논의를 보면 불가피하게 복잡성을 띨 수밖에 없는 핵심사안에 매우 안일하게 대처하는 모습이 쉽게 눈에 띈다. 이들 모두가 대체적으로 만능열쇠로 구사하는 ‘미적 모더니티’ 문제만 보더라도 그렇다.18 물론 그렇다고 민족문학론이나 리얼리즘론이 충분한 해결책을 만들어놓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까지 도달한 이러저런 성취와 오류에 대한 확고한 깨달음이야말로 ‘과거의 과오’와 더불어 ‘내일의 과오’도 피할 수 있는 한 방편이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4

 

사실 모든 비평적 논의의 핵심은 작품해석과 평가에 관한 문제이다. 그런데 이 좌담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제기되는 것은 뜻밖에도 ‘과잉해석’의 문제이다. 참석자 모두 현재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비평가라는 점을 감안하면 오늘의 비평적 상황과 관련해서 결코 예사롭지 않다.

물론 개개인의 작품읽기를 문제삼은만큼 이는 개별적으로 꼼꼼히 따져본 뒤에 판단할 문제이다. 다만 그 점을 유념하더라도 개인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 일반적인 문제는 계속 남는 듯하다. 어떤 작품을 부당하게 처리하는 방식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과도한 해석을 내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비평들을 보면 ‘해석의 부족’이나 일종의 수수방관도 작품을 부당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중대한 오류라는 인식이 상당히 널리 퍼져 있는 듯하다.

 

그것은 일종의 비평적 나태의 소산이다. 개별 작가와 작품의 미학적·역사적 개별성과 복합성을 읽어내지 않고, 이미 확정된 이데올로기적 구획 안으로 작가와 작품을 서열화하는 것은 비평적 관성과 안이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단지 비평가들이 실제비평에 게으르고 무능하기 때문에 이러한 재래적인 이분법의 척도에 그토록 긴 세월을 매달리고 있다는 것은 이상하다.19

 

민족문학‘진영’을 두고 한 말이다. 낡은 틀이 감당할 수 없는 일종의 무능력과 그럼으로써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게으름을 말하는 듯하다. 은연중 ‘게으름’을 내세워 무능력의 낙인을 찍고, 거기에 ‘성실성’을 내세워 자신의 ‘과도한 해석’을 숨기는 듯한 개운치 않은 어떤 편견 같은 것이 느껴진다.

여하튼 그 점에서라도 ‘해석의 부족’이 ‘해석의 지나침’만큼이나 위험하다는 견해를 단호히 거부한 곰브리치(Gombrich)의 견해가 흥미롭다. 해석의 부족은 작품내용을 충분히 파악하지 않았다는 결점은 있지만, 작품 자체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나친 해석의 경우는 비록 그 해석이 오류임이 밝혀지더라도, 그 오류에서 비롯한 ‘왜곡된 형’을 완전히 망각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큰 문제라는 것이다. 미술작품을 두고 한 이야기지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 ‘해석’이 옳다는 사실의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20

문제는 가능성을 성급히 현실성과 등치시킨 결과, 작품으로서의 성취보다 새로움에 쏠리는 과도한 시선, 작품이 제기하는 주제나 문제의식의 중요성을 따질 때 생길 수밖에 없는 ‘과잉’의 측면이다. 베르그쏭(Bergson)의 말처럼 “예술가는 현실에서 작품을 제작할 때, 현실성과 더불어 가능성도 동시에 만들어낸다.” 가능성은 현실성에 앞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성으로 완벽하게 완성될 때에야 진정한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한편 그런 맥락에서 비평가의 자세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근래 ‘실제비평’이 특권화되면서 가장 훌륭한 비평가는 ‘감식가’라는 유형으로 불리는 듯하다. 그래서 작품 자체에서 드러나는 부정할 수 없는 예술가의 개성을 얼마나 적확하게 파악하느냐가 관건이 된다. 무수히 쏟아져나오는 작품 하나하나에 관해 감수성과 감식안을 도구로 면밀히 조사하여 각 작품의 ‘호적’을 확립함으로써, 이른바 작품(작가)의 호적부를 적절하게 작성해주는 것이 비평가의 가장 중요한 임무인 양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평 양태는 개별 작품에 대한 엄정한 분석과 독자적인 문학적 성취를 통한 진리탐구라는 본래의 목표와는 다르게 양적인 작품해석의 변화양상 등 평준화된 기준에 따라 이렇게저렇게 나열되면서 나타나는 ‘과잉’의 측면이 있다.

더구나 ‘출판사—작가—비평가’라는 구도가 일종의 제도로 굳어지는 가운데 작가와 작품에 대한 판단은 마치 이곳 구성원들이 그때마다 보여주는 다수결투표와 흡사해지는 듯하다. 따라서 매우 현실적인 연대의 형식에 따라 작품의 ‘과잉해석’ 혹은 ‘과잉비판’이 빈번히 이루어진다. 그래서 최근 ‘문단권력’ 비판을 통해 수행된 일련의 논쟁이 ‘해석’을 둘러싼 ‘과잉’투쟁으로 비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서 또하나 생각해볼 점이 이들의 특징으로 내세워지기도 하는 ‘분류하고 맥락화하는’ 체계화의 문제이다. 아마도 현재 비평계의 일반적인 현황을 보더라도 이런 능력이 비평가로서의 능력과 크게 결부되는 듯하다.

그런데 대개 ‘이론’의 죽음에 동의하는 이들에게서는 더이상 거대이론의 개념들에 시달리지 않고, 오히려 거대이론 없이 특수한 문제들을 더 잘해나갈 수 있다는 일종의 자신감이 느껴진다. 특히 ‘이론 자체에 대한 불신’을 전제로 하면서 대개 중간 수준에서의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비평 프로그램들을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든다. 민족문학‘진영’에 ‘현재 생산되는 한국문학 작품과 밀착된 독해가 가능한’ 비평적 방법론을 요구하는 주문에서 보이듯이, 현재의 문학지형이나 변화양상에 어느 것이 잘 밀착하여 발빠르게 해석해내는지를 중시하는 경쟁적 실용주의가 팽배하다. 그래서 중소 규모의 경험적 일반화, 즉 공통의 몇몇 특징을 찾아내서 종(種)을 분류하는 비교적 단순한 논리가 어디를 가도 유행이다. 물론 이런 의미의 실용주의를 근본적으로 나쁘다고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차원이 다른 특정 담론, 특히 민족문학론에 대해 작품해석의 자동적인 잣대 같은 것을 요구하고 또 그런 잣대로서의 효용성이 없다며 한물간 이론으로 치부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점을 지적해두어야 할 것이다.

사실 그런 식의 접근엔 역사주의적 함정이 있다. 그들이 분석한 매우 독특하고 새로운 환경이나 미적 특질이 참으로 진실한지, 그리고 그것이 어느만큼 구체적인 시공 속에서 보편적 범위를 갖는지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그들과 같은 성급한 ‘역사주의자’를 정확히 거슬러서 맑스가 호메로스에 대해 말한 유명한 진술을 떠올려보자. 호메로스의 시가 어떻게 초기 그리스사회에 출현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만 그것이 갖는 보편적인 호소력, 즉 오늘날까지도 계속하여 매력을 지니는 까닭을 설명하는 일은 훨씬 어렵다.

하나의 작품을 역사적 제조건으로 환원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명제와 거꾸로 작품은 스스로 독립된 자율성을 지닌 것으로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명제의 모순은, 작품 자체가 결코 단일하지 않고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운명체임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진정한 역사해석과 진정한 미적 비평은 일치한다’는 모순적이고도 복합적인 사실을 끝끝내 놓지 말자. 그래 ‘현실읽기’와 ‘작품읽기’가 둘이 아닌 ‘한통속’ 삶의 길임을 묻고 찾아가자. 마무리하려니 이런 소박한 말들이 귓전을 울린다. “모든 것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단순하다.” 괴테의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 이 말을 또 덧붙여두었구나. “그런가 하면 모든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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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카무라 유지로 외 『인간을 넘어서』, 장화경 옮김, 당대 2004, 301면.
  2. 권성우 『논쟁과 상처』, 숙명여대출판국 2006, 7면.
  3. 서영채 『문학의 윤리』, 문학동네 2005, 20면.
  4. 심지어 ‘아닐 수도 있다’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른 면도 배제한 것은 아니다’는 등의 구멍을 만들어줌으로써, 임시방편의 논리적 방패막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 민족문학론을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나도 이런 정도의 관심과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투로 슬며시 덧붙이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생산적인 쟁점들이 논의의 장에서 ‘논쟁화’되지 않고 파편화되면서 흩어진다. 대신 일정한 수준의 자기주장이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면서 더 강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5. 김형중 「이것은 리얼리즘이 아니다」, 『변장한 유토피아』, 랜덤하우스중앙 2006.
  6. 프레드릭 제임슨 「자본주의, 모더니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이글턴 외 『비평의 기능』, 유희석 옮김, 제3문학사 1991, 240면.
  7. 홍기돈이 김형중의 「성을 사유하는 윤리적 방식」(『창작과비평』 2006년 여름호)에서 인용된 카라따니 코오진의 발언을 맥락 속에서 검토하여 그것이 전혀 다르게 변장된 점을 지적한 것도 용어나 선인들의 말을 자의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김형중의 습관임을 말해주는 예일 것이다.(「경계와 윤리, 그리고 포월」, 『창작과비평』 2006년 가을호, 371〜72면.)
  8. 백낙청 「‘창비적 독법’과 나의 소설읽기」,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창비 2006, 324면.
  9. 내 나름대로 김형중의 비평세계에 이름을 붙인다면 ‘자연주의적’이라 하고 싶다. 좌담에서도 그에 대한 비슷한 평가를 엿볼 수 있는데, 가령 “특정의 문학적 모티프를 잘 캐치해서 흥미롭게 나열하는 방식이거든요. 각각의 비평적 모티프들이 뿌려져 있는 방식입니다. 그 방식은 기존의 비평담론이 갖고 있던, 결론을 향해서 몰아가는 글쓰기의 효과나 그 보수적 성격 같은 것을 혁파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개별적인 비평에서 몰아가지 않는 글쓰기를 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평론집 전체를 본다면 김형중씨가 2000년대 문학에서 본격적으로 찾아낸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구체적 실감이랄까 그런 것이 확연히 잡히지 않는 것에 대한 궁금증 같은 것은 있습니다”(171〜72면)라는 이광호의 말이나, 또 ‘디테일’과 ‘괴상망측한 것들’에 대한 선호를 지적하는 류보선 등의 발언이 그것이다.
  10. 방민호 『행인의 독법』, 예옥 2006, 135면
  11. 이광호 「혼종적 글쓰기, 혹은 무중력 공간의 탄생」, 『이토록 사소한 정치성』, 문학과지성사 2006, 95~96면.
  12. 가령 이광호는 “2000년대 작가들은 ‘거대 서사/미시적 일상성’이라는 ‘80년대/90년대’의 이분법을 가로지르며, 탈역사적이며 동시에 탈일상적인 서사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인다. 소설장르를 통해서 어떤 서사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김중혁 편혜영 서준환 박형서 한유주 김애란 조하형 천명관 등의 낯선 서사적 모험에 관해서 아직 우리는 문학적 평가를 내리기 힘들다”(102면)라고 약간 주저하는 듯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글에서 “저 90년대와 ‘잘’ 작별하기 위한 행위”(105면)라고 말한다.
  13. 김형중, 앞의 책 6면.
  14. 사실 이 지점도 최근의 논의에서 잘 살펴볼 필요가 있는 논쟁거리이다. ‘위기론’과 ‘번영론’이란 범주로 최근의 문학현실을 객관적으로 진단하자는 권성우(「문학을 넘어서는 문학의 길」, 앞의 책)의 제안이나 작품분석을 포괄적으로 점검하여 한반도 특유의 현실과 작가적 연대의 힘 등과 결합한 ‘문학적 활력’을 말하는 한기욱(「한국문학의 새로운 현실 읽기」, 『창작과비평』 2006년 여름호)의 논의 등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15. 이광호, 앞의 책 65, 81면
  16. 이광호가 말한 “문학비평의 영항력이 남아 있는 것은 좁은 의미에서의 문학제도 안”이라는 언급과 그의 관심작업이 불행히도 이렇게 연결될 수 있다. 기법, 방법, 관습, 규칙, 언어와 논리가 더욱 정교하고 엄밀해진다는 것은 한사람의 작가가 되기 위해서 철저하고 집약적이며 오랜 기간의 전문적인 훈련과 이론주입, 실천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와 동시에 작품들을 감상하는 데에도 작품이 근거하고 있는 고도로 정교한 기준들에 대한 지식의 필요성이 점증한다. 그와 같은 기준에 대한 지식은 오로지 특별하고 집약적인 훈련에 기반하기 때문에, 특별한 장소가 필요하다. 그래서 문학과 비평의 사회적 소외를 낳는 악순환의 한 고리는 이제 불가피해진 것이다.
  17. 물론 사회자 류보선이 민족문학론에 관해 생산적인 논의를 끌어내보고자 이런저런 의미부여를 하며 되풀이해서 문제제기를 한 탓인지 역으로 이에 대한 논의가 희화화되어버린 점도 없지 않다. 사실 류보선의 민족문학론에 대한 이해 역시 데면데면한 편이다. 「거대서사의 해체와 하위주체의 발견」(『또다른 목소리들』, 소명출판 2006)에서 90년대 민족문학‘진영’의 갱신 노력을 어느정도 인정하는 듯 정리했지만 그 역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그려놓은 90년대 문학주의 세계 안에서는 하나의 외딴집에 불과하다.
  18. 백낙청이 황종연을 향해 “역지사지해서 황교수가 민중이나 민족 개념에 들이대는 칼날이 사실은 황교수의 현대 민주주의라든가 개인의 자유라는 개념에도 돌아올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검토 안된 이데올로기적인 개념을 황교수 자신도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창작과비평』 2006년 봄호, 도전인터뷰 「무엇이 한국문학의 보람인가」, 302면)라고 반문한 것도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유희석도 류보선의 평론집에서 ‘근대성’ 개념이 엄밀히 구사되지 않는 점을 가장 큰 문제점으로 들었다(「모더니티와 ‘또다른 목소리들’」, 『창작과비평』 2006년 가을호, 274면).
  19. 이광호 「문제는 리얼리즘이 아니다」, 앞의 책 55면.
  20. 다카시나 슈지 『미의 사색가들』, 학고재 2005, 20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