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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해체와 보존을 넘는 새로운 역사 만들기

한홍구 『대한민국史』 1~4, 한겨레출판 2003~2006

 

 

염복규 廉馥圭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pkyum1@empal.com

 

 

135-31780년대 진보적 학문활동의 깃발이 높이 올랐을 때, 한국근현대사 연구는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연구의 모토는 감춰진 역사적 사실을 발굴하여 대중의 언어로 널리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90년대를 거치며 이런 경향은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다. 작년만 하더라도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책세상 2006) 『근대를 다시 읽는다』(역사비평사 2006) 등의 출간을 계기로 한국근현대사 인식을 둘러싼 중요한 논쟁이 전개되었으나, 연구자집단의 경계를 넘어서 대중적 역사인식에 의미있는 영향을 미쳤는지는 의문이다.

이런 가운데 2000년대 들어 몇년간 지속적으로 시사주간지에서 한국근현대사를 소재로 대중적 글쓰기를 쉬지 않고 이어온 한홍구(韓洪九)의 존재는 단연 이채를 발한다. 국가권력의 부당한 압력으로, 혹은 사회의 무관심 속에 묻혔던 한국근현대사의 중요한 국면들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거침없이 종횡해왔다는 점에서 저자는 80년대 진보적 역사학의 적통을 잇고 있다. 작년 연말 그 성과가 『대한민국史』 네권으로 일단 갈무리되었다.

저자의 글쓰기의 가장 큰 특징이면서 부러운 점은 근 백년의 시간을 오가며 역사 속에서 현실을, 현실 속에서 역사를 그려내는 능력이다. 평자는 특히 3권의 몇몇 대목에서 저자의 능력이 가장 잘 발휘되었다고 생각한다. 1920년대 임시정부의 이승만 탄핵에 대비하여 2004년 대통령탄핵의 부당성을 지적한 「마술피리 소리가 들리는구나」, 1950~60년대 혁신계의 고투에 2004년 총선 민주노동당의 성과를 비춰본 「‘강도당한 지갑’을 기억하라」, 헌법재판소의 신행정수도건설 위헌 판결의 근거가 된 ‘관습헌법’이라는 이상한 논리와 대비하여 정부수립 전후 ‘불법적’으로 제정된 국방경비법의 허구성을 파헤친 「‘관습형법’은 더 죽여주셨다」, 오늘날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의 연원으로 1930년대 말 일제의 전쟁동원을 거부했던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의 사례를 거론한 「‘여호와의 증인’ 앞에서 부끄럽다」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글쓰기에는 약점도 있을 수 있다. 과거의 역사에는 당대의 맥락에서 해석해야 할 부분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4권에서 노골적인 친미주의자, 한미FTA 무조건 찬성파를 비판하기 위해 소환된 대원군, 광해군, 인조반정세력 등의 자리는 약간 어색해 보인다.

한편 저자의 글쓰기가 설득력을 갖는 중요한 이유는 일견 평범하다 싶은 상식에 호소한다는 점이다. 한말의 보수주의자 이건창과 황현, 우익에서 출발하여 재야 민주화운동가가 된 함석헌 문익환 계훈제 리영희 등의 예를 통해 ‘참된 보수’의 상을 제시하고, 거기에서 나아가 수구가 보수를 참칭하는 한국사회의 왜곡된 현실을 비판하는 글(1권 「‘참된 보수’를 아십니까」)은 이런 면을 잘 보여준다. 전향한 운동권 출신들, 뉴라이트, 386 국회의원들에 대한 비판의 기준도 어떤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결국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예의, 말 그대로 상식의 차원으로 수렴된다(3권 1부 ‘똑바로 살아라’, 4권 4부 ‘그때 그 사람들’). 그런데 이런 전략은 폭넓은 대중적 설득력을 갖기는 하지만 때로는 저자의 주관적 판단을 전면에 지나치게 드러내는 한계를 보이기도 한다. 저자식으로 표현하면, ‘오버’하게 되는 것이다. 386 국회의원들에 대비하여 유시민을 고평한 부분은 전형적으로 ‘너무 나간’ 예이다. 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최덕신·류미영 부부의 가족사를 다룬 글(1권 「기구한 참으로 기구한…」)도 빨치산토벌군 사령관, 5·16군정기 외무장관 등으로 남한의 반공전사이자 기득권층이었던 최덕신의 이력을 고려하면 일방적인 서술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렇게 장점으로든 단점으로든 저자는 자신의 주관을 글쓰기에 깊이 개입시킨다. 그러나 『대한민국史』 전체를 읽다 보면 저자의 일관된 관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민족·계급·이념을 넘어서는 반폭력평화주의이다. 멀게는 1930년대 초 조선에서의 반중국인 폭동, 만주에서의 ‘반민생단투쟁’에서부터 한국전쟁기 미군의 전방위 폭격으로 인한 무고한 피해, 베트남전 참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거쳐, 1970~80년대 국가권력의 강제전향 공작, 간첩사건 조작, 고문·살인에 이르기까지 폭력, 특히 국가폭력에 대한 저자의 날선 공격은 이 책 전체를 관류하는 주제의식이다. 저자가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 군대와 군사화된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 역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일 터이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한국인이 가해자였던 폭력에 대한 준엄한 고발이다. 1931년 중국 만보산(萬寶山)에서는 조선 농민과 중국 농민이 서로 충돌했는데, 조선에서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반중국인 폭동이 일어났다. 저자는 그 폭동의 참혹한 결과-전국적으로 최소한 화교 100명 이상 사망-를 가감없이 추적한다(2권 「호떡집에 불난 사연」). 그리고 조선인이 피해자였던 만보산사건과 달리 이 폭동은 교과서에도 기록되지 않았음을 상기시킨다. 우리가 기억하지 않는 ‘가해의 역사’는 베트남전에서도 반복되었다. 물론 참전 경위와 과정 전체에서 한국이 가해자였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저자는 베트남전 참전으로 소수 권력층이 아닌 다수 한국인이 겪은 피해만큼, 비록 자의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명백히 한국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의 실체를 고발한다. 예컨대 일제 말기의 위안부 동원, 한국전쟁기의 노근리사건같이 한국인이 피해자인 경우보다 이렇게 한국인이 가해자인 역사에 대한 반성적 성찰은 독자들의 역사의식을 더 강하게 환기해준다. 저자의 전공은 친일파 색출을 명분으로 혁명과 이념의 광풍 속에서 자행된 중국공산당의 조선 공산주의자 탄압-이른바 ‘반민생단투쟁’-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한국인이 피해자였던 이 사건에 대한 연구를 통해 더욱 보편적인 ‘역사의 교훈’으로 나아간 셈이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어느정도 ‘피해자의식’에 갇혀 있었던 80년대 진보적 역사학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이 짧은 지면에서 반의반도 소화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소재들을 다루는 책을 읽으며 줄곧 궁금했던 것은 제목 ‘대한민국史’였다. 출판사에서 제안했다고는 하지만, 저자는 어떤 생각에서 이런 제목을 붙인 것일까? “누구보다도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사람들”(2권 머리말)에게 도움을 줄 마음으로 글을 쓴 저자의 관점이 대한민국사의 ‘해체’일 리 없는 만큼 “어떻게 하면 미워해야 마땅한 자들에 대한 정당한 공분을 불러일으킬까”(4권 머리말)에 골몰하는 저자의 관심이 대한민국사의 ‘보지(保持)’일 리도 없을 것이다. 저자의 진정한 목표는, 말하자면 대한민국사의 ‘재건’으로 보인다. 그것의 적실성과 실현 가능성을 따지기 위해서는 대중적 글쓰기와는 또다른 영역에서의 깊이있는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에게 그런 목표를 추구할 만한 열정과 능력이 있음은 분명한 듯하다. 『대한민국史』 네권이 그 분명한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