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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 장편소설의 미래를 열자
우리 소설의 새 길 열기
중진들의 최근 장편을 중심으로
정호웅 鄭豪雄
문학평론가, 홍익대 국어교육과 교수. 저서로 『우리 소설이 걸어온 길』 『한국문학의 근본주의적 상상력』 『한국의 역사소설』 등이 있음. yuhaj@wow.hongik.ac.kr
1. 자기갱신과 창조의 정신
우리 소설이 길을 잃고 골짜기에 빠져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여기저기 한탄의 소리, 우려의 소리, 개탄의 소리가 들린다.‘거 봐라, 문학의 시대는 벌써 끝났다니까.’선지자를 흉내낸 듯한 의기양양, 단호한 확신의 목소리도 같이 들린다.
그들 풍문의 말이 실제를 정확하게 짚어낸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많은 작가들이 저마다 앞길을 열며 나아가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같은 전진의 사실은 우리 소설의 자기갱신과 창조의 생명력이 여전히 활기차게 살아 약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니, 우리는 저같은 소문의 말들에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이 글에서 나는 70년대 이래 우리 소설을 앞에서 이끌어온 중진작가들의 최근 장편들을 살펴, 그 속에 뚜렷한 새 길 열기의 실제를 확인해보고자 한다. 논의대상은 김원일(金源一)의 『전갈』(실천문학사 2007), 조정래(趙廷來)의 『인간연습』(실천문학사 2006)과 『오 하느님』(문학동네 2007), 이문열(李文烈)의 『호모 엑세쿠탄스』(민음사 2006), 한승원(韓勝源)의 『소설 원효』(비채 2006)이다.
그 각각은,‘역사의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을 내걸고 추상화된 관념의 규정성을 해체하며 과거 진실의 포착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시적 단순성의 형식’으로써 대하소설 이후를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현실공간의 가상공간화’란 새로운 형식 실험으로써 현실공간의 제약을 넘어 좀더 넓은 소설공간을 열고자 한다는 점에서,‘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역사소설의 고전적 규율에 충실함으로써 이에서 벗어난 역사소설이 지배적인 현실을 되돌아보게 이끈다는 점에서 소설사적 의미를 지닌다.
2. 자기징벌의 형식과 역사적 진실
한국 현대문학 연구자로서, 독자로서 내가 읽고 싶은 소설 중 하나는 우리 근현대사 갈피갈피에 서려 있는, 드러난 경우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더 많은, 배신과 변절을 깊이 다룬 작품이다. 비슷한 소재의 작품은 물론 많다. 하지만 거칠게 말한다면, 그런 작품들은 대개 선/악의 윤리적 이분법에 갇혀 있으며, 배신과 변절을‘악’으로 미리 규정해놓고 부정한다. 오직 부정의 대상으로만 작품 속에 호출된 그 배신과 변절의 과거는 객관적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악’이라는 추상관념일 뿐이다. 추상관념으로 환원된 그 과거가 실제의 과거일 수 없으며, 숨겨진 진실을 담고 있는 과거일 수 없음은 자명하다.
고정불변의 관념으로 추상화된 그 과거는 대체로 부정하는 주체의 현재를 옹호하고 선전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은폐하는 정치적 도구로서 기능한다. 그 부정의 주체는 부정 대상인‘악’과 맞서는‘선’이라는 또다른 추상관념 속에 몸을 숨기고, 검증불가의 안전공간에서 절대의 자유를 누린다. 한국사회에 흘러넘치는 저 과거부정의 엄숙한 말 가운데 상당수는 이같은 자유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때의 선이란, 저 악으로 규정된 과거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행운에서 생겨난 텅 빈, 허위의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선이라는 추상관념에 몸을 부리고 저같은 절대의 자유를 향락하는 그 부정의 주체는 악으로 규정하여 배제하는 그 과거와 스스로를 단절시킴으로써 자신이 그 과거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숨기거나 잊는다. 또는 숨기고 잊는다. 과거와의 무의식적 또는 의식적 단절인데 이럴 때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형성되는, 바람직한 역사 개진을 추동하고 이끄는 역사의식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읽고 싶은 것은 그런 거짓 자유에서 생겨난 일방성의 정치적·윤리적 언어로 이루어진 작품,‘악’이라는 추상관념으로 환원된 과거를 다룬 작품이 아니라, 구체적 실제로서의 과거를 파고든 작품이다. 인간의 이기적 욕망이며, 슬픔이며, 고뇌며, 때로는 자기반성과 자기갱신의 피투성이 행로를 이끄는 강인하고 아름다운 정신이며, 온갖 것들을 담고 어둠 속에 웅크린 괴물 같은 그 배신과 변절의 과거를 읽고 싶은 것이다.
김원일의 『전갈』이 바로 그런 작품이다. 주인공의 조부 강치무가 태어난 1900년에서 2000년까지, 100년에 걸친 한 집안의 삼대 가문사가 서사의 골격을 이룬다. 살아남고자 하는 강잉(强仍)한 생존욕에 이끌린 그들 삼대의 가문사는 처참할 지경으로 남루하다. 작가의 붓길은 참으로 냉정하여 그 남루의 현실을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세밀하게 그려내었다. 서사를 주도하는 중심인물들을 미화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인력(引力)을 물리칠 수 있는 통제력이란 말처럼 쉬운 게 아닌데, 아마도 필경(筆耕) 40년의 쉼없는 고행에서 얻어진 것일 터이다.
남루한 가문사의 깊은 곳에는 치욕 하나가 외눈알 번득이며 도사리고 있다. 잊어버릴 수도, 변명으로 가릴 수도, 내부의 눈 때문에 다른 그럴싸한 것으로 꾸며 덮을 수도 없는 절대의 상처다.
강치무는 해삼위 헌병대에서 무단장으로 이송될 때, 거기 헌병대에서 죽지 않았으니 명줄 하나는 타고났다 싶었고, 이제부터는 목숨을 돌보아야 한다고 느꼈기에 어떤 곤경에 처하더라도 살아남기로 작심했다. 그렇게 마음이 변한 뒤부터 애국심, 정의감, 양심 등 듣기 좋은 모든 말에 등을 돌렸다. 시간에 맡겨 부평초처럼 흘러가기로 했다. 몸으로 때울 수 있는 노동에 가축처럼 헌신했다. 마루타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기를 포기했던 것이다.(273면)
고향인 밀양에서 3·1만세운동에 가담하고 추적을 피해 만주로 옮긴 뒤 관동군 방역급수부(1941년 8월 1일부로‘만주 제731부대’로 개칭)에서 짐승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치욕에 떨어지기까지 그가 걸었던 행로를 재구성하면 이렇다. 신흥무관학교 하사관반 수료→대종교 산하 대한군정회(북로군정서) 전사로 청산리전투 참가→자유시참변(흑하사변)을 겪고 헤이룽장(黑龍江)성과 해삼위로 유전(流轉)→해삼위의 고려공산당에 들어가 활동→1933년 여름 해삼위 일본영사관 소속 헌병대에 체포되어 헌병대 영창에 수감되었다가 10월 하순 무단장 헌병대 특수감옥에 수감→1934년 2월 하얼삔 근교 관동군 방역급수부로 이감.
이렇듯, 핏빛 죽음의 험로를 뚫고나온 독립운동의 굳센 전사가 잔혹한 고문의 공포와 마루따로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덜미잡혀‘살아남기로 작심’하고‘인간다운 인간으로 살기를 포기’한다. 전사에서 인간 아닌 존재로의 전락은 그를 짓누른 상황의 폭력성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지를 증언하는 것인데, 70년 세월을 단숨에 넘어 덮쳐와 읽는이의 숨결을 막는다. 섬뜩하다.
인간 아닌 인간의 길로 스스로를 내몰아 짐승의 삶을 살고자 했지만, 그것을 짐승의 삶이라 할 수는 없다. 자신을 짐승이라 생각하는 자의식,‘살아남았기에 부끄럽다’는 윤리의식을 품고 고뇌의 진창에서 몸부림치는 존재를 짐승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혀를 물어 반벙어리가 되게 하였으며, 해방후 새나라 세우기의 실천에 적극 투신하도록 이끌었고, 말년을 낚시질과 침묵 속에 가두었던 것은 그같은 자의식이고 윤리의식이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 배신과 변절의 치욕을 죽을 때까지 품고 살았고, 끝내 자신을 용서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그가 반벙어리가 되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는 변절 이후 반벙어리가 되어, 해방 직후의 짧은 한때를 빼곤 50년 긴 세월을 침묵 속에 살았다. 그는 자신에게 생존을 위한 소통에 필요한 최소한의 말만 허용하고, 침묵의 어둠 속에 스스로를 격리·유폐했다. 그같은 세계와의 단절은 곧 스스로에게 내린 징벌이다.
배신과 변절의 죄업을 짊어지고 평생을 고뇌하며 살아가는 이같은 자기징벌의 인물은 김원일 소설 곳곳에 등장한다. 『바람과 강』의 주인공 이인태가 대표적이다. 한때는 독립군 전사였으나 변절하여 많은 사람들을 사지로 내몰았던 수치스런 과거를 지닌 인물이다.‘개돼지로 살아라’라는 저주를 덮어쓰고 평생을 비천하게 보내고자 하였다. 그 저주는 그를 취조한 일본인 형사와 피해자들이 던진 것이지만 동시에 그 스스로 덮어쓴 것이기도 하니, 이 점에서 그는 강치무와 마찬가지로 자기징벌자였다.1
자신의 변절에 대한 통회의 한 방식으로 선택된‘자굴(自屈)의 삶’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을 징벌하는 이같은 인물을 통해 김원일 문학은 자기반성을 통해 스스로를 갱신해나가는 고귀한 정신을 창조했다.
‘배신과 변절’의 과거를‘악’이라는 추상적 관념으로 봉인하지 않고 그 실제를 깊이 파고듦으로써 김원일 문학은 그 치욕의 과거 속에 숨겨진 슬픔과 고통을 드러내었다. 그 드러내기는, 우리가 일쑤 그러곤 하는, 과거를 윤리적 선/악의 이분법으로 척도하는 것이 진실과 멀리 떨어진 것일 수도 있음을 깨우친다. 친일/저항, 전향/비전향(부분전향) 등의 거친 이분법은 물론이고, 이런저런 윤리적 잣대로써 과거를 살았던 한국인들의 삶을 재고자 하는 모든 시도의 근본을 해체하여, 그 실체를 속속들이 파악할 수는 없는 그들과 그 시대의 진실 앞에 겸허하게 서야 함을‘개돼지의 삶’을 살고자 했던 그들의 슬픈 행로는 일깨우는 것이다.
이같은 해체는 조부 강치무의 평생을 추적하여 복원·정리하려는 손자의 작업을 작품 구성의 한 축으로 설정함으로써‘역사의 진실’이 결코 가닿을 수 없는 유동하는 관념임을 구성적 차원에서도 실현한다.
나는 허군 아이디어를 찜찜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박문일이 마루타로서 희생되었다는 사실과 할아버지가 스스로 혀를 끊은 장면도 실인즉 그렇게 창작되었다. 따지고 보면 할아버지의 고백이나 할머니의 증언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기억의 재생과정에서 자기가 사는 시대를 저울질하며 기억을 미화하거나 왜곡할 수 있다. 그런 증언에 의지해야 할 기록자도 나름대로의 선입관으로 진실이 아닌 허위에 편승하기도 한다. 그렇게 볼 때, 자서전이나 전기란 게 어디까지가 진실이냐에 대해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 자체가 진실을 은폐하며 얼마쯤은 위장되어 있고 진실도 세월이 흐르면 시대에 따라 굴곡을 겪게 마련이다.(356면)
한 인간의 과거를 복원하는 일은 이처럼 어렵다. 그 일은 앞의 인용에서 밝히고 있는 여러 요인들로 인해‘만들어지는’것을 피할 수 없다. 없었던 것이 덧붙여지고 있었던 것이 빠지며, 빈 곳은 가공의 것으로 채워진다. 복원의 전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같은‘만들어짐’때문에 조부 강치무의 진실, 그 삶의 실체를 온전히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갈』은 온전한 복원의 불가능성이라는 인식 위에 섬으로써, 과거를 그대로 되살려 선/악으로 명명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대어 과거를 다루었던 우리 소설의 한 지배적인 경향에 맞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그 가능성의 실현은,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유동하는 과거의 온전한 복원을 향해 나아가고 또 나아가는 작가정신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3. 단순성의 형식과 깊이
『태백산맥』에서 『아리랑』을 거쳐 『한강』에 이르기까지 대하장편에 전념했던 조정래가‘원고지 600매 내외’의 경장편을 쓰겠노라 선언하고 벌써 두 편의 작품을 내놓았다. 『인간연습』과 『오 하느님』.
『인간연습』은 전향 장기수를 다룬 작품이다. 두루 알듯이 2000년 9월 2일 판문점을 통해 63명의 비전향 장기수들이 북송되었다. 한겨레신문(2000.8.23) 보도에 의하면 이들은 “정치공작원 또는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70년 이전부터 30년 이상 옥살이를 한 70대 이상의 노인들”인데, 수감기간을 합치면 2045년이나 된다고 한다. 놀랍게도 한사람당 평균 32년 6개월간 완전 격리된 칠흑어둠의 세월을 견뎠던 것이다.
그런데 살인적인 전향공작에 못 이겨 감옥에서 전향한 사람들은 여기서 제외되었다. 북송 대상이 비전향 장기수로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그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전향 장기수는 남에서도 북에서도 내몰려 꼼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에 갇혔다. 두고 온 고향은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고, 살고 있는 이곳은 그들을 지배질서의 밖에 격리하고 있으니 그들이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이들 비전향 장기수의 안타까운 현실은 김동원 감독의 다큐멘터리영화 「송환」과 김하기의 소설 「미귀(未歸)」를 통해 널리 알려진 바 있다. 둘 다 강제와 폭력에 떠밀려 전향했음에도 그들을 내몰고 가둔 이 땅의 현실을 고발하고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작품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송환」은 남달리 순박하고 선량한 김영식이란 인물을 중심에 놓아 이념과 정치, 그것들을 안고 흐르는 시간(역사)의 비정함을 부각시킨 것이라는 점에서, 「미귀」는 남북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는 중립의 통일의지를 힘주어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저마다의 개성을 확보한다.
조정래의 『인간연습』은, 강제와 폭력에 의한 전향이므로 변절이 아니라는 자부심으로 자신을 세우고 새로운 삶의 길을 적극적으로 모색해나가는 인물의 행로를 서사의 골격으로 삼음으로써 독자적 세계를 이루었다.2 자신을 지켜 끝끝내 굽히지 않는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 확신의 인물은‘조정래적 인물’이라 이름붙일 수 있는 것으로 그가 쌓아올린 방대한 문학세계의 핵이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이왕의 조정래 문학과 다르지 않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주인공에 맞서는 대립자를 설정하지 않음으로써 조정래 문학의 기본형식인 대립과 투쟁의 구조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 눈에 띈다. 작가 스스로 정한 분량의 제한 때문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로 인해 인물들의 관계가 아니라 주인공 자체가 소설 구성의 중심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관계성의 배제 또는 약화는 분량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 형식의 문제이니, 동질의 인물성격이 주인공으로 설정되었다 하더라도 이왕의 소설과는 다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연습』은 이왕의 조정래 문학과는 다른 새로운 소설이다.
이 새로운 소설의 성패는 구성의 중심인 주인공에게 달려 있다. 주인공(사상, 삶의 방식, 취향, 미의식, 슬픔, 고뇌 등 그 무엇이든)을 얼마나 깊게, 밀도높게 그리는가가 관건인데, 과연 어떠한가?
이런 일이 어째서 그래. 이게 좀 좋아. 내가 청소를 말끔히 해서 귀엽고 예쁜 아이들이 깨끗한 변소를 쓰게 되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나. 자네 모르지? 예쁜 아이들 똥에서는 쿠린내가 아니라 단내가 나는 거.(197면)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을 견디며 자기동일성을 지켜낸 주인공이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도달한 곳은 이같은 시적‘단순성’의 세계이다.‘귀엽고 예쁜 아이들’이 뛰노는‘인간의 꽃밭’에서 몸을 낮추고 아이들의 똥을 치우며 기쁨과 행복을 찾고 얻을 수 있다는 이 소박한 생각은 무엇인가. 추악한 욕망으로 가득찬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부정일 수도 있고, 이기의 욕망에 갇힌 정신과 삶에 대한 부정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무엇이라 분명히 갈피잡아 말할 수는 없는데, 마치 시적 이미지처럼 모호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다다른 곳이 이처럼 소박한 시적 단순성의 세계이듯,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서사를 주도하는 것 또한 자기 신념에 철저하여 굽히지 않는 강인한 지조의 정신이 걷는 일직선의 행로, 곧 단순성의 여로이다. 그 단순성의 여로와 단순성의 세계는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워 실로 높고 귀하다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골짜기에 빠진 한국소설을 이끄는 가능성일 수 있을까?
대하소설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끌어들임으로써 무질서와 군더더기 주렁주렁한 비만이란 부정적 측면을 어쩔 수 없이 가질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면, 이 날렵하고 가벼운 단순성의 형식은 또 하나의 가능성일 수 있다. 깊이와 밀도를 확보한다면 작지만 안으로는 넓고 깊어 큰 세계를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연습』은 이 점에서 우리 소설의 한 길을 열었다.
작가의 최근작 『오 하느님』은 한 조선 청년의 기구한 인생행로를 따라가는 작품이다. 일본군 병사→소련군 병사→독일군 병사라는 희한한 인생유전을 거쳐 미군의 포로가 되고 마침내는 소련군의 총탄에 맞아 비명에 죽기까지, 우여곡절 처참한 고통의 행로는 일본의 식민지 조선백성이었기에 겪어야만 했던 운명적인 것이었다. 그 행로를 이끄는 것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본능, “호랑이한테 열두번 물려가도 정신만 채리면 살아난다”는 어머니의 말과 “총알 피해댕겨라”라는 아버지의 무뚝뚝한 당부 등이다. 단순한데 이 단순성은 그가 겪어야 했던 칠흑어둠의 절망과 피범벅 고통 그리고 죽음으로 채워진 운명의 비정성을 또렷하게 부각시킨다.‘깊은 단순성’이라 할 수 있을 터인데 조정래 경장편이 지닌 단순성의 형식이 하나의 가능성이 될 수 있는 근거를 여기서 확인한다.
4. 가상공간화의 형식과 정치성
뚜렷한 주관의 이념작가 이문열의 장편 『호모 엑세쿠탄스』(전3권)가 큰 관심을 끌며 나온 지 몇달이 지났다. 출간 직후, 작가의 정치적 의견을 드러낸 것으로 짐작되는 작품 속 내용에 대한 갑론을박이 신문 지면과 인터넷 공간에서 한동안 펼쳐지다가 곧 사그라졌다. 정치판에서 매일같이 극적인 이야기를 생산해내는 마당에 사람들이 소설 속 정치이야기에 오래 붙잡혀 있을 까닭이 없는 것, 너무나 당연하다.
정치문제에 집중된 관심에 가려 조명받지 못했지만 『호모 엑세쿠탄스』는 우리 소설의 앞날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의미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작가가 공들여 고안, 구축해낸 새로운 형식.
사람이 사라졌다고 해야 하나 증발했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찾으면 찾을수록 신차장님의 실재성(實在性)이 희미해지는 검미다. 매일매일 지워져가는 사람처럼……(3권 277면)
주인공은 신성민이라는 증권회사 차장이다. 그는 작품 마지막에 이르러 사라져버리는데, 직장에서 연고지며 출신학교며 그와 관계된 곳을 찾아 뒤지면 뒤질수록 그의‘실재성’이 희미해진다. 조금 더 나아가면 완전히 지워져, 신성민은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인물이 될 것이다.
그가 완전히 지워져 가공의 인물로 변한다면, 그를 중심으로 엮인 소설공간 전체가 가상공간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소설이 끝날 때까지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으니 그는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에 걸쳐 있는, 점차 지워지며 가상공간 쪽으로 옮겨가고 있는 존재라 하겠다. 그를 중심으로 엮인 이 소설이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에 걸쳐 있다는 것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가상공간과 현실공간이 겹쳐 있고, 현실공간에 존재했던 인물이며 조직이며 건물 등의 실재성이 점차 약화된다는 설정은 이것만이 아니다.
정말 괴이쩍은 느낌이오. 한달 전까지만 해도‘새여모’는 틀림없이 우리 사회에 실재하는 시민단체였고, 그 구성원은 대개가 주민등록번호로 인적사항을 조회해볼 수 있던 사람들이었어요. 뿐만 아니라, 그들과 관계를 맺고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들은 같은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던 동시대인들이었지요. 이를테면,‘새여모’는 본부 지부 할 것 없이 모두 지적법(地籍法)상 명확한 주소를 가지고 있었고, 그 회원들은 실재하는 건물에 세들어 다른 사람들과 얽혀 지냈으며, 전화를 받아주는 연락처가 있었단 말이오.
지난날 그 사람들이 갑자기 사라지고도 한동안은 그들의 실재성이 의심받지는 않았어요. (…) 그런데 한 보름 사이에 모든 것이 달라져버립디다. 무언가 엄청난 힘이 지워버리듯 그들이 실재했던 흔적들이 사라지고 관련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마저 희미해져가는 겁니다.(3권 166~8면)
실재했던 것들이 그 실재성을 잃고 소설 속 가상공간으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작품의 후반부에 이르면 이 말의 주인공은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로 밝혀지며 가상공간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이같은 현실공간의 가상공간화는 모든 등장인물이 실재성을 잃음으로써 소설공간 전체가 가상공간이 되기 직전까지 계속된다. 빈번하게 등장하는 꿈과 환청 체험이란 구성소의 보완으로 이 독특한 형식이 더욱 탄탄해진다는 사실도 덧붙여두어야겠다.
작가의 의도는 물론 알 수 없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형식으로 해서, 현실성을 지니기 어려운 적(敵)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대결이라는 소설의 중심 갈등을 펼치는 데서 피할 수 없는 현실의 구속으로부터 한껏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현실공간의 계속되는 가상공간화가 현실의 실재성을 회의하는 인식론의 형식적 반영인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이를 뒤받치는 근거를 찾을 수 없으니, 지금으로선 무어라 단정하기 어렵다.
현실공간의 가상공간화란 새로운 형식을 창출함으로써 『호모 엑세쿠탄스』는 새로운 형식실험의 한 모범을 보였다. 이 사실은 거듭 평가되어 마땅하다. 다만 이 새로운 형식이 기존의 형식으로 담을 수 없는 내용을 위해 고안된 것인지 아닌지는 좀더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내 독후감은 이 형식이 작품의 핵심내용인, 현실정치에 대한 확고하고 철두철미하며 배타적인 진단의 말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외돈다는 것이지만, 지금으로선 가능성의 형식이라고 하는 게 온당할 것이다.
이 작품의 제목‘호모 엑세쿠탄스’는 처형하는 인간이라 옮길 수 있다.‘노동하는 인간’‘사고하는 인간’등이 인간의 본성을 담아내는 표현이듯, 악성(惡性)의 신이든 선성(善性)의 신이든 처형해온 지난 역사에 근거하여, 처형이 인간의 한 본성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 작품에서의 그것은 특히 악성의 신에 대한 맹렬한 적의와 관련된 것으로 읽힌다.
실은 지금 내가 찾고 있는 그들 모두가 3년 전에 한국을 다녀갔소. 선생 말대로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가 차례로 오고, 그 둘의 길을 여는 동시에 처형으로 지워야 하는‘호모 엑세쿠탄스’들도 은밀하게 따라와 제 몫을 다하고 갔고. 그리고 모두가 떠나면서 그 두 방향의 신성이 우리 한반도와 이 시대에 베풀려고 의도했던 초월적 역사(役事)도 끝장난 줄 알았소. 그런데 마지막으로 그들이 떠나고 3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보니 아닌 것 같소. 특히 어두운 신성, 사악한 초월을 제거해야 할‘호모 엑세쿠탄스’들은 아무래도 너무 빨리 우리 땅에서 철수해버린 것임에 틀림이 없소. 그동안도 어둠의 자식들과 사탄의 세력은 날로 강성해져 끝내는 우리 모두를 불로 심판받게 할 아마겟돈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소.(3권 272면)
여기서 말하는 악의 신성(神性)은 지금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정치세력이 내건 이념들과 그 이념을 좇아 무리지어 나아가는 사람들의 사고와 행위에 담긴 정치적 초월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깊은 사유력을 지닌 작가들에게 부여된 사회적·시대적 책무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그에 대한 비판은 지나치게 일방적이고 일면적이며 시종일관 속속들이 적의에 차 있어 비판대상의 실제를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오히려 가로막고 있다. 적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대결 및 그들의 처형이라는 모티프를 중심으로 한 대서사의 기획이 성공적으로 실현되었다고 평가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다. 새로운 형식의 창출, 성경 및 기독교 여러 교파의 교리와 역사에 대한 폭넓은 지식의 풍부하고 효과적인 활용, 시사 진단 언어의 빼어난 운용 등 이 작품의 긍정적인 측면들이 이로 인해 빛바래고 말았다는 점도 아쉽다.
5. 역사소설의 궁극
이 글의 논의의 마지막 대상은 한승원의 『소설 원효』(전3권)이다. 『동학제』 『흑산도 하늘길』 『초의』로 이어지는 작가의 역사세계 탐구에 연결되는 이 작품은 지금의 관점에서 옛 인물을 새롭게 해석하는 역사소설의 한 형식을 세웠다는 점에서 지나칠 수 없다.
『소설 원효』는 “원효를 새로이 올바르게 읽음으로써 오독으로 인하여 잘못 알려진 원효에 대한 관념을 바꾸고자”하는 큰 발원(發願)의 소산이다. 발원이 커야 크게 이루는 법, 우리는 이 작품에서 선/악, 진/위, 미/추, 육체/영혼 등 인간 삶의 모든 부면을 척도하는 분별의 경계를 넘어 자유자재한, 포용과 통합이며 초월인 원효를 새롭게 만난다.
한승원의 원효는 신라의 산하와 문화, 신라의 백성들을 사랑한 신라인이었지만 지역주의적·국가주의적 기호에 갇히지 않았던 세계인이기도 했다. 그 원효는 정치인들의 권력의지에 맞서 가여운 백성의 목숨을 구하고자 한 반전·반권력의 생명주의자였다. 그 원효는 권력의 폭력에 굴하지 않았고 권력에 아부하여 일신의 안락을 구하지 않았던 자유혼의 인물이었다. 그 원효는‘화쟁(和諍)’과‘무애(無碍)’의 깃발을 들고 한시도 나아감을 멈추지 않았던, 일로일심(一路一心) 계속적인 자기갱신의 길을 걸었던 치열한 구도자였다. 그 원효는 하늘과 땅의 이치를 좇아, 뭇생명과 더불어 스스로 낮은 곳에 나아가 엎드렸던 겸손한 정신, 반인간중심주의의 실천자였다.
한승원이 창조해낸 그 원효는 과거의 인물이면서 오늘을 사는 현재인이기도 하다. 작가의 현재가 적극 개입하여 과거의 원효와 깊이 어울리며 현재와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생성된 과거에 속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과거이면서 현재이며, 동시에 과거도 현재도 아닌 시간에 속하는 세계의 창조야말로 역사소설이 겨누어야 할 궁극이 아니겠는가.
6. 중진들의 젊은 문학
지금까지 우리는 30, 40년 긴 세월 소설창작의 일로를 걸어온 네 작가의 최근 장편을 살펴왔다. 모두가 우리 장편소설의 앞길을 열고자 하는 의욕의 산물로서 기존의 우리 소설을 되돌아보게 하는 새로움을 지니고 있으니 젊은 문학이라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김원일의 『전갈』은‘배신과 변절’의 과거를 통해‘역사의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를 깊이 탐구한 작품이다. 그 진실은 진실 추구의 과정 속에 있다는 것, 그러므로 확정 불가능한 유동체라는 것, 잘 정돈되어 명료한 양성(陽性)의 관념이나 구호보다는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어둠 속 슬픔과 고뇌의 웅얼거림 속에 더 많이 깃들인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관념을 동원하여 과거를 추상화하는 모든 시도의 근본을 해체하며 문학에 내재한 정치성의 근본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 정치성은 어떤 과거를‘악’으로 규정하고 부정함으로써‘선’의 관념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우리의 숨은 욕망을 밝혀 드러내는 힘을 지닌 것이며, 문학의 경계를 넘어서는, 말하자면 근본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조정래의 『인간연습』 『오 하느님』 두 장편은‘단순성의 형식’실험으로써 장편소설의 새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양으로써 장편·중편·단편을 구분하는 오랜 관행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간단하지 않다. 관건은 그 단순성의 깊이와 밀도일 터인데 실제 창작으로써만 검증 가능한 것, 그것은 가능성의 형식이다.
이문열의 『호모 엑세쿠탄스』는 형식실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현실공간의 가상공간화라 이름지을 수 있는 이 작품의 새로운 형식은 사실성의 울에 갇힌 한국소설의 사실주의적 규율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연재중인 황석영의 장편 『바리데기』 등이 환상성을 끌어들여 편협한 사실주의적 규율에서 벗어남으로써 엄청난‘시공간 확장’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가변성이 핵심 속성인 이같은 형식과, 확고한 신념이 만들어내는 현실 진단의 내용과 요지부동 스스로를 닫고 있는 단정의 언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내용이 규정하는 형식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것인데, 내용과 형식의 관계에 대한 고전적인 질문 앞에 우리를 다시 세운다.
한승원의 『소설 원효』는 작가의 현재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재구성한 과거라는 점에서 역사소설의 근본을 새삼 일깨우는 작품이다. 과거에 갇혀 시대착오의 미로를 헤매는 소설과, 과거에서 벗어나 탈역사의 자유공간을 떠도는 자의(恣意)의 소설이 역사소설의 이름을 내걸고 나서는 현실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힘이 여기 깃들어 힘차다.
지면 제한 때문에 많은 작품을 뒤에 남기고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다. 최일남, 박완서 등 70대 후반의 소설가들까지 현역작가의 연령폭은 갈수록 넓어지고 있다. 다만 이뿐이라면 사람 수만 많아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 별다른 의미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을 포함하여 50~70대 작가들 상당수는 여전히 젊은 문학과 겨루며 새로운 지평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으니 우리 소설의 앞날은 어둡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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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원일의 『늘푸른 소나무』에 나오는 김기조도 자기징벌자인데,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자기완성을 향하는 구도의 길에 들어선다. 양반지주가인 “백씨 집안 재직이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행로는 우여곡절로 가득차 다른 인물의 외줄기 행로에 비해 훨씬 풍성하여 그야말로 소설적 인물이라 할 만하다.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김기조는 부산의 조직폭력배의 징치에 걸려 성기를 잃는 변고를 겪고 석주율의 감화를 깊이 받아들임으로써 과거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물로 신생함으로써 계속적인 갱신으로 자기완성의 길을 걸어가는 석주율과 같은 자리에 서게 된다. 자신에 대한 근본 반성과 부정의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변모였을 것이다.” 졸고 「자기완성의 행로」, 『한국의 역사소설』, 역락 2006, 199면.↩
- 현실질서 밖으로 내몰린 전향 장기수들의 마음이 깃들 수 있는 곳 중 하나는 갈수록 선명해지는 기억 속 과거의 세계이다. 그곳은 현실의 비정함을 몰랐기에 천진난만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살아 있는 세계, 아내와 어린 자식들의 체온과 살냄새가 아직도 생생한 세계, 자기가 충성했던 권력과 체제와 이념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전혀 품지 않았던 완벽한 주객동일성의 세계, 그 속에서 매순간 충일했던 젊음의 시간들이 힘차게 약동하고 있는 세계이다. 그 세계는 지금의 현실이 고통스러울수록, 마음에 들지 않을수록 더욱 아름답고 진실된 것으로 미화될 것이다. 개인의 구체적 기억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 기억을 생산하는 곳이기에 그 세계에 대한 그리움과 집착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여기에 멈춘다면‘행복했던 과거/불행한 현재’의 상투적인 이분법의 틀에 갇히고 참된 인간사랑의 길에 대한 모색에서 멀어지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