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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이흔복 시집 『먼 길 가는 나그네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솔 2007
나그네가 우는 날은 그늘이 넓다
김종훈 金鍾勳
문학평론가 splive@chol.com
이흔복의 『먼 길 가는 나그네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이하 『먼 길 가는 나그네』)는 운율도 시를 일구는 훌륭한 일꾼임을 새삼 일깨워주는 시집이다. 현대시에서 곁방살이로 운신하던 운율은 『먼 길 가는 나그네』를 만나 오랜만에 활발히 움직인다.‘허무의 재림’을 들어 김사인은 소월(素月)을 연상했다. 소월을 연상하는 자리에 여유가 있다면,‘생동하는 운율’이 가장 먼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소월이 주로 여성의 목소리로 민요를 불렀다면 이흔복은 나그네의 옷을 입고 판소리를 부른다. 서양음악의 장조에 대응하며 주로 아악에 쓰이는 평조와 달리, 판소리는 서양음악의 단조에 대응하며 속악에 두루 쓰이는 계면조의 음계를 사용한다. 이흔복의 나그네는 그중에서도 계면조의 판소리 중 웅장하고 호탕한 동편제보다는 부드러우면서도 구성진 서편제 가락을 택해 제 목소리를 뽑아낸다.
시집을 열면 첫 시부터 “간다, 돌아간다. 나 돌아를 간다. 그리하여 나 서러워 말리. 서러워지고 말리”(「눈에 익은 길 마음속엔 멀다-장사익」) 하는 소리가 들린다. 슬픔과 설움의 정서는 시집의 끝까지 그 울림을 유지한다. 그의 서편제가 주로 진양조장단을 쓰며, 그의 소리가 대체로 유장한 까닭이다. 간혹 호흡이 짧게 끊기는 휘모리장단이 들리기도 하지만 이 짧은 호흡은, 나그네가 느낀 기쁨의 표현이 아니라, 그가 이제 막 오르막길에 접어들었다는 신호이다.
그가 내는 길고 짧은 호흡은 대개 국토의 형세를 담아내는데, 설움과 슬픔의 정서는 때때로 국경을 넘는다. 갠지스강과 타클라마칸사막 같은 곳이 그를 맞이한다. 도시는, 물론 그가 피해가는 곳이다. 도시의 세련됨은‘나그네’라는 고전적인 이름과 맞지 않는다. 자신이 남긴 흔적도‘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는 말에 따라 지워져 있다. 도시를 거니는 산책자, 돌아갈 곳이 있는 여행자의 호명을 거절하며 나그네는 나그네로서 어제 없는 오늘을 떠돈다.
나그네의 오늘은 내일과도 연결되지 않는다. “어제의 죽어가던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인 오늘은 내일의 많은 사람들의 아름다운 추억일진대 정처 없고 정처 없는 한 사내”(「영월 동강에서 장운갑 형에게 보내는 엽서」)에서, 어제와 내일은 나그네의 오늘을 고립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동떨어진 오늘은,‘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갈망하던 내일’같이 좋은 내일을 향해 강박적으로 내몰리는 성공 지침서의 오늘과도 다른 것이고, “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 말자/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말없는 찬사”(「지하인간」)같이 어제를 위안하기 위해 힘겹게 유지하던 이십대 장정일(蔣正一)의 오늘과도 다른 것이다.
여기서는 잠시
길을 잃어도 좋다
시간의 흐름은
시작도 끝도 없는
나 자신의 혼을 떠난 풍경,
-「별을 따러 달에 갔다」 부분
어제를 돌아보지 않는 그는 내일을 기약하지도 않는다. 그의 오늘은 어제와 내일과의 인연에서 떨어져나왔다. 그가 갠지스강과 시간의 흐름을 겹쳐놓으며 강과 연속된 시간을 “풍경”화하는 것도, “자신의 혼”이 있는 오늘을 연속된 시간에서 이탈시키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이흔복이 나그네의 옷을 입게 된 까닭을 넌지시 보여준다. 역설적으로 그에게 오늘은 모든 시간을 포함한 무시간과 같다. 그의 영혼은 무시간의 영역에서 연속된 시간에 들러붙은 자신의 육체, 몸, 생을 바라본다. 분리된 영혼과 육신은 각각 종교적 뜻을 지닌 초월적 세계와 허무의 정서를 담은 경험세계를 시에 불러들이는데, 이 둘은 유랑의 길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나는 나를 울고 있다”(13면) “그 언제 내가 없는 그 어느 날에/내가 운다”(24면) “중요한 것은 삶이 아닌 산다는 것 아닐런지요”(42면) “나는 어느새 내 몸뚱이보다 더 무거운 그림자를 풀어준다”(64면) “나도 가끔은 내 그림자를 따라 멀리 떠나고 싶었다”(72면) 등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었다는 인식의 결과물이자 유랑의 길에서 뱉는 나그네의 고백들이다. 이때 이들은 굳이 계면조의 음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들은 나그네의 생각과 심정을 잘 요약하면서 잠언으로 내려앉거나 간혹 탄식으로 흩어진다.
그의 노랫가락은 실제 풍경 가까이 갔을 때 길고 높아진다. 초월적 세계에서 경험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매우 확고해서, 가령 그가 자신의 육체를 이야기할 때, 몸이라고 뭉뚱그려 호명할 뿐 점이나 눈썹 같은 거죽의 생김새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 풍경을 대할 때 그는, 그 몸을 열어 속살의 무늬 하나하나를 소리에 담으려 애쓴다. 그는 자신에게 단호하지만 풍경에는 너그럽다.
“육체는 언젠가 마음이 이끄는 대로 따를 뿐이다”(「산 너머 그곳에 가면 하늘밖에 없다」)와 “풀잎 위 고요히 안착하여 스스로를 빛내는 영롱한 물방울. 스며들거나 깐깐오월 돋은볕이면 증발할 것만 같은, 번지거나 명지바람이면 합쳐져 흘러내릴 것만 같은 한순간, 순간!”(「물방울의 시」)에서 보이는 나그네의 태도는 얼마나 다른가. 앞에서 그는 자신의 인식을 드러내기 위해 목소리를 가다듬지만, 뒤에서 그는 풍경들의 무늬를 재현하기 위해 목소리를 바깥에 풀어놓는다.
발 없는 새
어느 봄 이른 숲
여기저기
날마다 새로
날마다 다르게
잠시 걸터앉아
쉬기 좋은
너럭돌 위로 떨어지는
네 울음 매어 놓고
내가 우는 날은
그늘이 넓다
-「눈물로 꿈을 불러 찾아도 보네」 부분
정작 『먼 길 가는 나그네』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랫가락은, 그가 잠시 걸음을 멈추었을 때 들린다. 산과 바닷가를 지나며 목청을 높였던 그가 숨을 고르고 있다. 그는 설움을 토해내지도, 바깥에 눈길을 빼앗기지도 않는다. 설움은 입 안에 머물러 있고 풍경은 눈가에 걸쳐 있다. 설움이 슬며시 부채를 넘겨받는다. 풍경이 두드리던 북을 멈춘다. 새가 울며 지나갔다. 그림자가 조용히 지나갔다. 바람이 오고 간다. 설움이 부채를 접고 풍경이 북채를 놓으며 읊조린다. “내가 우는 날은/그늘이 넓다”. 둘이 함께 일렁일 때 나는 나지막한 소리이다. 이처럼 『먼 길 가는 나그네』에서 울리는 높고 낮은 전통적 가락, 유랑을 부추기는 종교적인 갈등 등은 새것이 아닌 잊어버렸던 것으로써 이 시대의 독자에게 낯설게 다가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