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논단과 현장

 

미국 이민법 갈등과 한국사회의 이주민 문제

 

 

하승창 河勝彰

시민운동가. 함께하는 시민행동 사무처장 역임. 연구년을 맞아 현재 미국에 체류중. 저서로 『하승창의 NGO이야기』가 있음. chang@action.or.kr

 

 

이민자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이민법 파동

 

이민자의 나라라는 미국이 이민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2005년‘불법체류’이민자들에 대한 강력한 단속과 처벌 내용이 담긴 쎈선브레너(Sensenbrenner) 법안이 하원에서 논의되면서 미국내 이민자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이민자를 규제하기 위해 이민법안이 추진되었지만, 역설적으로 2006년 미 주요 도시에서 1백만이 넘는 이민자들이 참여한 파업은 그들이 미국사회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임을 확실하게 설명해주었다. 이 파업을 통해 이민자들이 주로 종사하는 소기업과 각종 써비스산업은 그들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미국민들 모두가 기피하는 업종에 국가안보에 위험하다고 생각되는‘불법체류’이민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지난해 중간선거에서 강력한 이민단속법안을 제출하거나 지지했던 의원들이 대거 낙선하면서, 올해 전면적 이민개혁을 위한 포괄적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리라는 기대가 한껏 높아졌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지난 수년간 싸워왔던 이민관련 단체들은 미 의회가 추진하는 이민개혁의 지지부진함에 실망을 금치 못한데다가 더이상 의회가 자신들을 대변하지 못할 거라는 인식 때문에 좌절감에 빠져 있다. 애초 논의되었던 포괄적 이민개혁법안은 주요 아젠다에서 사라졌을 뿐 아니라 이민자단체들의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수준에서 심의가 시작되었다.

 

2007년 뉴욕 유니언광장에서 열린 이민자 집회 ⓒ AP Photo

2007년 뉴욕 유니언광장에서 열린 이민자 집회 ⓒ AP Photo

 

의회가 논의를 시작한 내용은, 1200만 서류미비자의 사면, 국경보안 강화(44억달러 소요), 이민법 수정이 자주 일어나지 않도록 횟수 제한, 이민점수제 적용, 기업에서 직원 고용시 철저한 신분확인과 이를 위반한 고용주에 대한 처벌, 임시로 체류하며 노동을 할 수 있는 초청노동자 프로그램(Guest Worker Program), 새로운 이민신청자에 대한 영어 숙련 조건 등이다.

최근 만났던 뉴욕이민자연맹(New York Immigration Coalition)의 아비데 무싸비알(A. Moussavial) 국장이나 한인이민자 운동단체인 뉴욕청년학교의 차주범 부장은 의회에서 수정안 표결과 부결이 지루하게 반복됨으로써 포괄적 이민개혁법안의 실현가능성이 거의 사라지고 향후 대응방향을 둘러싼 이민자단체 사이의 이견이 생겨나고 있다고 전한다. 현재 논의되는 안에 전면적인 반대를 표명하는 쪽과 1200만명 사면 등 현실적 이익을 무시할 수 없다며 부분적인 개정안을 내려는 쪽으로 나뉘고, 그 속에서도 예컨대 드림액트(Dream Act) 법안이라 하여 주로 불법체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지원안을 통과시키려는 움직임 등이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이러는 사이에 각 주에서는 자체적으로 이민자들을 강력하게 단속하고 그들에 대한 혜택을 축소하는 법안들이 속속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지금의 미국 이민문제는 외형적으로‘경제적’문제와 국가안보의 문제가 중첩되어 있다. 이민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기업과 자신들의 일자리 축소에 반발하는 노동자들의 대립, 9·11 이후 불안해진 국가안보의 저변에‘불법체류’이민자들이 있다는 인식이 논란의 핵심이다. 이같은 상황을 반영한 부시의 초청노동자 프로그램은 미국경제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은 받아들이되 이민은 차단하겠다는 것이 기본적인 취지이다. 늘어나는‘불법체류’를 막기 위해 미국-멕시코 국경에 경비를 강화하고, 미국 내에서 불법노동자를 고용하는 사람들도 강력하게 처벌하며,‘불법체류’를 범죄로 규정하여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자는 것이다.

이민자의 나라라는 정체성을 가진 미국이 최근 이민자들에게 이런 태도를 취하는 이유는 단순한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좀더 근본적인 데 있다. 알고 보면 미국이 과거에도 이민자들에게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지만, 특히 1965년 이민법 개정 이후 아시아 및 히스패닉계 이민자들이 증가함으로써 기존 주류사회의 백인들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2050년이면 미국사회에서 백인은 더이상 다수가 아닐 것이라는 인구학적 예측이 나오고 있을 뿐 아니라, 이미 몇몇 주요 대도시에서는 실제로 백인이 다수가 아니다. 헌팅턴(S. Huntington)이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Who are we?)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미국 건국자의 자손으로 여기는 백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각종 제도의 혜택을 이민자들이 잠식하면서 기존 시민들의 생활환경이 나빠지고 있다고 여기며, 이민자들이 영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미국사회에도 통합돼 들어오지 않는 무임편승자(free rider)라는 생각이 강하다. 이들 백인의 지지를 받는 공화계 의원들과 영어를 미국의 법정 공용어로 만들고자 하는 그룹, 미국내 인구분포가 다수의 백인과 소수의 유색인종으로 유지되기를 원하는 보수층 등도 역시 현재의 이민법 논의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불법체류자’(illegal immigrant)로 불리는 이민자들은 2006년 거리로 쏟아져나오며 다음 문구를 피켓에 적어 이에 답했다.‘No human being is illegal. We are America.’(불법인간은 없다. 우리가 미국이다.) 자신들은 공동체에‘형사적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으며, 다만 이민법상 필요한 서류를 현재 갖추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서류미비자’(undocumented immigrant)라고 부른다. 자신들은 미국사회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세금을 납부하면서 사회의 성장에 기여하고 있으며, 과거에도 그랬듯이 새로운 이민자들이 미국을 새롭게 만들어갈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현재의 이민법 갈등은 앞으로의 미국에 대한 새로운 도전인 셈이다.

 

 

한국의 이주민 문제와 공동체 구성의 변화

 

이런 논란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나는 한국사회도 조만간 유사한 문제에 봉착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년 전부터 내 기억에 남아 맴도는 두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94년이던가, 시민단체 경실련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일군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경실련 강당으로 몰려왔다. 경실련 간사들은 때아니게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의 어눌한 한국어에 담긴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자본주의 초기에나 있을 법한 일들이 한국 땅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건물 4층에 있던 경실련 사무실로 오르는 계단에는 그간 산재와 구타에 시달리거나 죽어간 외국인 노동자들의 처참한 사진들이 게시되었다. 불법이라 하여 쫓겨다니는 그들이 숨어 지내는 쪽방에 가보고는 80년대 노동운동 할 때 보고 겪었던 우리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는 생각에 그들 보기가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어느날, 마을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당시 살던 곳은 파주였는데, 마을버스에 동남아 출신으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쪼르륵 올라온다. 무심히 보고 있던 나는 버스가 출발했는데도 당연히 연이어 탈 것이라고 기대했던 동남아 출신 어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의아해하던 순간, 그 아이 옆자리에는 전형적인 한국인 할아버지가 앉았고 두 사람은 여느 할아버지와 손자처럼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하, 그들은 한가족이구나. 나는 내 상상력의 빈곤을 탓하면서 아시아가 우리 안에 어느새 성큼 들어와 있음을 느꼈다.

두 일화에서 드러나는 인식변화를 생각해보면 10년 전 초상들은 과거의 것이 아닐까 싶지만, 올해 여수출입국관리소 화재사건은 10년 전의 모습도 여전함을 보여준다. 이렇게 10년 전의 원시적 상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우리는 과거와는 다른 지형의 사회로 들어서고 있는 듯하다. 박노자(朴露子)나 임지현(林志弦) 등이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의 위험에 대해 일찍부터 경고했지만, 사회적 의식과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주의에 대한 반성적 고찰을 거칠 새도 없이 우리의 물적 토대는 급속히 변화해가고 있다.

법무부 공식통계로도 2005년 현재 외국인 거주인구가 80만명에 이르고, 법무부는 아예 외국인 1백만명 시대라 부르고 있다.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공동체의 문제에서는 막연히 별개로 분리해서 사고하거나 취급했던‘사람’들이 어느새 우리 삶의 가운데로 들어오고 있다. 국경이라는 물리적 경계를 넘어 다른 공동체에서 우리 생활공간 속으로 오는 사람들, 흔히‘이민자’로 불리는 사람들이 이제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1백만명에 이르는 거주 외국인 가운데 거의 절반이 산업연수생제도나 고용허가제 등을 통해 일자리를 찾아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이민자’로 부르지 않고 외국인 노동자로 불러왔다. 그들이 이곳에 정주하지 않고 잠시 노동력만 제공한 뒤 떠나갈 것임을 전제한 셈이다. 그러나 이민자들은 폐쇄적인 공동체 주변에 잠시 머물다 떠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로 들어오고 있으며 앞으로 그런 흐름은 줄어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1.08명 수준으로 떨어진 우리 사회의 낮은 출산율은 노동력 부족을 불러오고 있으며, 이런 추세가 지속될 때 2010년이면 50만명의 노동력이 부족할 것이라 예상된다. 또한 이민자들이 속한 나라들과 한국의 경제적 격차가 유지되는 한, 세계화시대에 더 나은 임금과 삶의 조건을 찾아 떠나는 노동력의 이동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이 아무리 국경에 울타리를 친다고 해도 더 나은 삶을 찾아 국경을 넘는 멕시코인들을 막기는 어렵다. 미국에 그들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가 있는 한, 국경을 넘는 비용과 위험이 조금 커진다고 더 많은 기회를 포기할 리 없기 때문이다. 이는 세계화의 역설이기도 하다. 상품과 자본이 자유로이 국가를 넘나드는데, 노동력 상품이라고 이렇게 교통이 발전한 세계화시대에 국경을 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국이라고 거기에서 예외일 수 있겠는가?

더불어 국제결혼도 늘어나고 있다. 한해 결혼하는 사람들의 10% 이상이 국제결혼이다. 한국인과 이주노동자의 결혼뿐 아니라 (마치 아시아인의 미국 이민 초창기의‘사진신부’처럼) 농촌으로의 결혼이민도 증가하고 있다. 계속된 개방과 자유무역협정으로 경쟁력이 없는 농촌은 계속 몰락하고 남아 있는 남성들은 결혼상대를 찾아 동남아 각국으로 날아가고 있다. 농촌의 모습이 변화하지 않는 한 이 흐름도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열쌍 중 한쌍이 국제혼을 할 만큼 결혼의 양태가 달라진 현실은 조만간 우리 사회에 과거와는‘다른’한국인이 늘어날 것임을 말해준다. 국제결혼 2세대 인구는 2020년이면 150만명을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계속되는 결혼이민과 이주노동자의 증가, 그에 따른 2세대 인구의 증가는 한국사회의 인종지표를 바꾸어놓을 것이 분명하다. 이는 한국사회가 이미 다인종사회로 접어들었고 점차 그런 경향이 강화될 것임을 말해준다.

따라서 이제 이민자문제는 한국사회의 새로운 의제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는 그들의 열악한 인권상황에 관한 것이었다. 2006년 앰네스티인터내셔널의 평가에 의하면, 2003년 외국인고용허가제의 시행으로 산업연수생제도로 인한 이주노동자 차별을 해소하려 했지만, 그들은 합법적 노조의 결성이 불가능하고(최근에야 이주노동자 노조가 합법화됐다) 작업장에서의 정신적·신체적 위협은 여전하며 산업재해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10년 전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태에서 거의 변화가 없다는 점에서 이주노동자의 인권문제는 여전히 중요하겠지만, 그와 더불어 한국사회는 이민자문제라는 좀더 폭넓고 새로운 사회적 문제에 당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변화에 대한 대응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여러 학문분야에서 다문화주의를 기본방향으로 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는‘외국인’의 지역사회 통합과 결혼이민자들의 정착을 지원하고, 외국인기본법 등을 제정했으며, 법무부도 이민법 제정과 이민청 신설을 검토하고 있다고 지난 5월 노무현 대통령이 카타르 방문시 밝힌 바 있다. 한번 지나가듯 언급하고 말았지만 이명박 전 시장도 이제 이민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 내부에서 공동체의 인종적 구성비율 변화가 이미 현실로 다가왔을 뿐 아니라, 학계나 정치권에서도 이민과 이민자에 대한 본격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셈이다.

그러나 이주노동자의 극악한 인권현실에 대한 분노와 베트남 여성들에 대한 비인격적 결혼이민 풍토에 대한 한탄은 있으되, 실제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이민자와 그들의 다음세대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우리는 10년 이내에 새로운 한국인들이 일자리를 구하려고 도시로 몰려올 때 얼마나 그들을 한국인으로 받아들이게 될까? 아니 이미 새로운 한국인들이 학교에 입학하고 있는데, 우리의 교과서에는 그같은 변화가 얼마나 반영되어 있을까? 미국에서 1965년 이민법 개정 이후 백인우월주의자들이 오히려 늘어나고 있고 유럽에서 스킨헤드족이 증가하는 현실이 과연 남의 나라 일이기만 할까? 우리 인터넷공간에도 아직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외국인혐오 싸이트가 만들어지고 있지 않은가?

지금은 이런 현상이 공동체와 분리된 특수한 영역의 문제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소위 3D업종과 각종 써비스영역은 조선족과 이주노동자들이 없다면 유지되지 못할 판이고, 농촌에서는 결혼이민으로 이주해온 여성들 덕분에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다. 그들은 공동체와 분리된 특수한 영역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미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으며 공동체의 유지에 기여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새로운’ 한국인을 맞이할 준비

 

최근 우리 사회에도 재한외국인처우기본법의 통과, 거주외국인지원 조례 등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정책적 변화가 생겨나고 있지만 근본적 접근은 아니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할 문제는‘새로운’한국인에 대한 것이다. 국내의 이주노동자 문제를 다루는 시민단체들은, 당장의 비인간적 대우에 대한 항의를 조직하는 데도 인력과 시간이 부족한 탓에 근본적인 제도적·법적 요구가 중요함을 인식하면서도 이를 운동 차원에서 제대로 제기하지 못하고 있다고 자평한다.

당장 우리의 헌법부터 다시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헌법의 평등권 조항에 인종 조항은 없다. 모든 기본권의 주체도‘국민’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제 막 생겨나기 시작한 영주권자를 비롯한 거주외국인의 기본권은 헌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지 않은 셈이다. 혈통을 중시하는 민족적 배타성이 강한 우리의 의식을 반영한 국적법에 대한 검토도 생각해봐야 한다. 앞으로 늘어날 이민문제를 대비해서 관련 법체계에 대한 정비도 필요하다. 미국의 경우에는 이민법으로 대부분의 문제가 관할되지만 우리는 현재 고용허가제, 출입국관리법, 외국인기본법 등으로 관련 법규가 나뉘어 있다. 다문화가족지원법 등 다양한 갈래의 법제정 요구들에 대해, 각각에 해당하는 법을 따로 제정할 것인지 아니면 이민에 관한 포괄적인 기본법을 만들 것인지도 검토해야 한다.

공동체 전체의 의식과 제도를 만들어낼 수 있는 법의 제정뿐 아니라 이민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언어문제에도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뉴욕의 경우는 시에서 이민자들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전화를 1백여개가 넘는 언어로 써비스하고 있다. 또한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영어만을 공용어로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폐지논란도 일었지만, 여전히 많은 학교가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아이들을 위한 영어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함으로써 영어를 잘 못하더라도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선거과정에서는 영어를 못하는 시민들을 위해 다른 언어로 된 투표용지가 제공되고, 히스패닉이 많은 도시에서는 행정관청에서 영어와 스페인어가 동시에 쓰인다. 우리의 경우에도 안산, 파주나 결혼 이주여성이 많은 농촌지역 등의 행정써비스에서 언어지원이 확대되어야 한다. 그밖에도 주택과 의료보험문제 등 그들이 공동체 내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데 기본적인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외국인으로서‘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식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제 그들은 우리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우리 안에 새로운 문화와 경험을 전해주고 공동체의 유지와 의식과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면서 지금과는 다른 한국을 만들어가는 훌륭한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래야 거주외국인이 이미 1백만 이상, 2세대가 조만간 150만 이상으로 늘어나 지금과는 달라질 사회 속에서 그들과 공존하며 풍성한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