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편혜영 『사육장 쪽으로』, 문학동네 2007

불행의 공식

 

 

조연정 曺淵正

문학평론가 yeoner@naver.com

 

 

사육장아이러니의 핵심을 단순히 표리부동이나 이율배반에서 찾지 않고 오히려 예상과 결과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그 일치에서 찾는다면, 그때 아이러니는 희극이 아니라 비극이 된다. 일어날 수 있다고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한 우연한 사건 앞에서 느끼는 감정이 당황스러움이라면, 행여나 싶던 우려가 현실로 일어났을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공포이자 분노이고 결국은 허탈감이다. 편혜영(片惠英)의 두번째 소설집 『사육장 쪽으로』가 환기하는 섬뜩함은 바로 이러한 감정들의 교차 속에서 이해된다. 짐작조차 못했던 불행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 불행의 크기란 예측과 결과가 만나는 교집합의 크기에 비례한다는 것, 따라서 일상의 모든 불행은 (작가의 말을 뒤바꾸자면) 무서워할 만한 일이기는 해도 놀랄 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 편혜영은 감정이 배제된 예의 그 건조한 문체로 이같은 불행의 공식을 자분자분 그려낸다.

사유나 감정이 아니라 역겨움이라는 생리적 반응으로 각인될 만큼 낯선 소설의 지평을 열었던 편혜영의 전작들은‘도대체 왜?’라는 질문에 자주 노출되었는바, 이에 대한 해답은 주로 반(反)문명이나 역(逆)진화라는 말로 제시되었다. 주목할 점은 편혜영 소설의 개성은 불쾌한 묘사나 그것이 환기하는 메씨지 각각에 있다기보다는 그 둘의 완벽한 일치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무엇을 그리는가’의 문제와‘어떻게 그리는가’의 문제가 이토록 완벽하게 접합된 경우를 우리는 쉽게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것이 쥐떼들과 나뒹구는 버려진 아이들이든, 역병이 도는 도시이든, 조각난 시체이든, 결국 문명 이전의 야만이든 간에, 현실이 은폐한 끔찍한 실재(the Real)의 영역을 탐색하는 편혜영 소설의 불쾌한 묘사법에 대한 가장 어리석은 독해는‘왜 하필 이렇게?’라는 질문에서 시작될 것이다.

『사육장 쪽으로』에 실린 단편들이 일상과 한층 더 밀착된 묘사를 보여준다는 사실은 편혜영의 “진화”(신형철의 해설)로 혹은 개성의 상실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낯선 것’을‘낯설게’그려내는 편혜영식 묘사법은 여전하다는 사실이다. 편혜영 소설의 인물들이‘맨홀’에서 빠져나와 구조조정의 불안에 시달리는 도시의 사무원으로 성장할 때에도, 개구리를 낳는 여자에서 유모일로 생계를 돕는 주부로 변화할 때에도, 이른바 표현과 내용의 완벽한 만남이라는 그녀의 특장은 매 작품에서 편차없이 확인된다. 이번 소설집에서 반복되는‘불현듯’낯설어진 일상, 갑자기 찾아온 불행, 의도와 결과가 괴리되는 역설 등의 모티프에서는 특히‘낯선 것’과‘낯익은 것’의 전도가 주목된다.

이를 위해 자주 호출되는 설정은‘실종’이다. 대체로 『사육장 쪽으로』에서의 실종은 익숙하던 것들이 낯설어지고 그래서 관심을 끌게 되는 계기로 작동한다. 나아가 실종된 것이 쉽게 발견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도무지 알 수 없는 곳에 감춰져 있어서가 아니라 “언제나 거기에 있었”(「퍼레이드」, 141면)거나 “너무 익숙한 것”(「분실물」, 188면)이기 때문이라는 점도 특징적이다. 편혜영이 그리는 실종에는 실제적인 사라짐과 의식에서 지워짐이라는 두가지 의미가 공존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사무원의 일상이 두드러진다. 매일 보는 동료의 얼굴을 갑자기 알아볼 수 없게 되거나(「분실물」), 딸아이에 대해 아는 것이 이름뿐이라는 사실을‘불현듯’깨닫거나(「금요일의 안부인사」), 너무나도 익숙한 사무실에서 자신이 파산한 사실조차 망각해버리는(「사육장 쪽으로」) 인물들은 “회사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애쓴 것뿐”(166면) 달리 한 일이라고는 없는 자들이다. 반복되는 일상에 찌든 도시인의 비애를 말하려는 것일까.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실종된 것을 반드시 찾아야만 하는 이유는 그것이 없어졌다는 단지 그 사실 때문이며, 동시에 실종된 것이 쉽게 발견되지 않는 것도 오로지 그것을 찾으려고 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라는 역전이 중요하다. 해답을 구할 수 없는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은 모순이 전제된 불가해한 구조가 아니라 우리의 행위 자체라는 진리가 여기서 확인된다.

자신의 행위가 결국 자신을 옭아매는 굴레로 작용하는 이 아이러니는 끔찍한 파국의 상황에서 비극적으로 제시된다. 소풍이 사고로, 전원주택에의 꿈이 파산으로, 습지에서 집을 보호하는 담을 쌓기 위해 담을 부수는 행위가 결국 습지에서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역설 등, 『사육장 쪽으로』에서는 일상에서의 탈출을 도모하는 행위가 결국은 그나마 유지되던 일상마저 파탄으로 몰고 가는 형국으로 반복된다. 갑작스럽게 대면한 불행이란 기실 우연이라기보다는 필연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날이 맑을 징조”(12면)라며 그 위험을 외면했던‘안개’가 결국 사고를 만들어내고, 마주치지만 않으면 문제될 것이 없다고 여겼던 사육장의 개가 공놀이 하던 아이를 순식간에 처참히 물어뜯는다. 늑대로 오인되지만 않으면 총에 맞을 일이 없었던 늑대 탈을 쓴 사내도 결국에는 총에 맞는다. 이같은 참상은 모두 위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불안을 애써 외면하려 했던 방만함에서 비롯된다.‘일어나지만 않는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식의 태도는 당연하게도 불행을 불러온다.

편혜영의 집요함은 이들에게 조금의 자비도 허용하지 않는 몰인정에서 확인된다. 습관과 망각이라는 일상적이고도 자연스러운 행동에 대한 댓가는 실로 끔찍하다. 이들은 자신들이 떠나왔던 누추한 현실로조차 되돌아가지 못한다. 이들이 직면한 것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혼돈이고 출구 없음의 절망이며 결국 완벽한 파국이다. 이처럼 일상이란 결단코 빠져나갈 수 없는 견고한 장벽에 둘러싸여 있다는 상식이 재차 확인되지만, 『사육장 쪽으로』의 성취는 비단 여기에 있지만은 않다. 일상이란 견고하기보다는 오히려 순식간에 허물어지기 쉬운 위태한 구조물이라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극은 필연이며 그러한 사건의 행위자들은 자신의 죄값을 톡톡히 치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이 소설집이 우리에게 환기하는 메씨지다. 편혜영 소설이 주는 불쾌감은 생리적 역겨움에서 이제 심리적 불안으로 상승한다.

불안을 망각하고 습관에 안주하며 현실에 정착할 때 비로소 덮쳐오는 악몽을 통해, 편혜영은, 절망밖에 할 수 없지만 절망조차 허락되지 않는 이중구속적 상황을 효과적으로 그려낸다. 비루한 현실이나마 온전히 지켜내자는 소극적 격려를 하려는 것일까. 쉽게 절망하지만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 희망을 버리는 일임을 아는 우리는 이에 대해 전적으로 동감을 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상이 파탄에 이르는 절망적 이야기들을 통해 편혜영이 진정 보여주고 싶은 것은, 어쩌면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돌파하여 만나게 될 희망에 관한 것인지도 모른다. 편혜영의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일은 그야말로‘낯선’독법일 수도 있겠으나,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만도 없다. 편혜영의 소설에는 익숙한 얼굴이 낯설어지는 장면이 흔하지만,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어쩐지 생애 처음으로 웃는 것 같은 느낌”(148면)을 고백하는 장면도 없지는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냉소와 자조 혹은 경악과 공포로 경직된 편혜영 소설의‘얼굴’들이 차차 긴장을 풀어가고 있는 그 최초의 광경들을 우리는 무심히 보아 넘겨서는 안된다. 대안없는 삶이라는 절망 속에서 (완벽은 불가능하기에), 언제나 차선을 최선으로 여기는 태생적 패배주의자들이 한번쯤 음미해볼 만한 부분이다.

전작 『아오이가든』(문학과지성사 2005)이 보여준 집요한 묘사에서 우리는 편혜영이라는 작가를 신뢰할 수 있었다. 전작들이 보여준 숨고를 틈 없는 역겨운 묘사가 독자를 불쾌하게 했다면, 인물들에게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않음으로써 일상의 우리를 더욱 단련시키는 편혜영의 이번 소설집도 독자를 여지없이 불쾌하게 만든다. 편혜영 소설은 이제 생리적 역겨움이 아니라 심리적 역겨움으로 각인될 만하다. 이게 진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작업인 것만은 확실하다. 작가에 대한 신뢰를 확인하는 것에서 나아가 신뢰하는 작가가 시도하는 새로운 작업을 발견하는 일은 독자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하다. 『사육장 쪽으로』를 읽는 흥분은 바로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