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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 제14회 창비신인평론상 수상작

 

생의 우울을 지탱하는 ‘지옥의 눈’

 

박창범 朴昌範

1971년 강원도 철원 출생. 한양대 국어교육학과 석사과정 수료. arasaro@naver.com

 

 

1. 아비를 욕보이는 두 풍경

 

병든 아비가 방 저편에 있다. 아들은 집을 나갔고 어미는 죽은 지 오래다. 노처녀 딸(‘나’)은 자신의 방에서, 불행하게 죽은 어미의 유품을 뒤적이다 아비의 기척을 어렴풋이 느낀다. 그러고는 이내 자위를 시작한다. 이 인상적인 장면은 익히 알려진 「저녁의 게임」(오정희)의 결말부이다. 왜‘나’는 아비를 곁에 두고 죽은 어미(체취)를 불러들여 자위를 하는가. 아비와 나는 어미의 비참한 죽음에 연루된 자들이다. 나의 탄생은 어미의 실성을 불렀고, 그 어미를 매정하게 내친 것은 아비였다. 물론 나 또한 그 결정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나’의 자위는 모든 사태의 원인이면서도 반성하지 않는 아비를 욕보이는 방식이자, 그 아비/죄의식의 세계로부터 탈주하고픈 욕망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는 한편, 자위의 현장에 불러들인 그래서 필시 내려다보고 있을 어미(마침 위층에는‘여자’/어미가 아이를 재우기 위해 자장가를 부르며 서성인다)에게 자신이 충분히 타락했음을, 죄의 댓가를 성실히 이행하고 있음을 확인시키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니 속죄이고 자학이자 자기모멸이다. 이후 이 수인(囚人)의 영혼이 내달려간 곳은 어미(중산층 여성)의 세계였고, 아비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적대의 대상이었음은 대체로 동의하는 바다. 또 하나, 아무튼 자위행위 그 자체는 성공했다는 점을 지적해두자. 이후 우리는 이십여년의 격차를 두고 수인의 자리를 고집하는 또다른 자아를 만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비를 욕보이고‘나’를 징벌하는 행위는 여전히 반복, 변주된다.

권여선(權汝宣)의 『푸르른 틈새』는 “성과 정치”를 알면 어른이 될 수 있다는 순진한 처자의 이야기다.1 그 처자는 한국사회의 관례적 성장코스를 따라 대학에 입학했고 거기서 성과 정치라는 두 “장애물”과 대결한다. 결과는 예상되는 바 그대로다. 사랑은 그녀에게 고통과 절망을 안겨주었고, 변혁의 꿈 역시 눈앞에 엄존한 적이 아닌 허약한 내면과 조직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그녀에게 좌절을 선사했다. 아비의 권력이 장악한 “성과 정치”에 입문하는 길은 곧 상처와 절망의 과정이었다. “피에 젖은 새”의 이 찢긴 영혼은 자살로써 아비의 세계에 화답하려 한다.

그런데 자살을 감행하기 직전, 이 훼손된 영혼은 도발적 행위를 저지른다. 골방(“젖은 방”)에서 자위하기가 그것이다. 그것이 도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쾌락의 현장에 얼마 전에 죽은 실제 아비를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위를 하면서 아버지를 떠올리는 순간” 쾌락은 흔적없이 사라진다.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클리토리스” 앞에 아비를 세우기를 쉬 멈추지 않는다. 이 불온한 상상력, 불경한 몹쓸 짓을 한사코 아비의 시선 아래 두려는 것은 극단적인 자기모멸을 실천하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보호자이자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 면전에서 타락한 자신의 실존을, 치욕과 수치를 드러내는 것보다 더한 모멸은 없을 터이니 말이다. 물론 이같은 행위는 “최대의 악행”을 저지름으로써 자신의 자살을 정당화하려는 방편이기도 하다. 그러니 위악이다. 또한 집안을 일으킬 것이라는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그‘파랑새 신화’가 완전히 실패했음을 내보임으로써 자신에게 집중됐던 책임과 기대의 하중을 벗어던지는 길이기도 하다. 물론 그녀가 애타게 기다리는 절정의 순간은 끝내 오지 않는다. 자위는 실패한다. 충분히 위악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위악을 실천하기에는 천성적으로 모질지 못한 탓이다.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이 피투성이의 영혼, 기본적으로 충분히 독하지 못해 자살도 자위도 성공하지 못했던, 그리하여 끝내 아비(의 세계)를 외면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자의 후일담이다. 오정희의 광기와‘엽기’(김윤식)가 주로 사회와의 교섭을 차단한 채 가부장이라는 자장 내에서 폭발적 위력을 드러낸 것과 달리 권여선의 히스테리적 발작과 파괴적 에너지는 그 틀 너머에서 발현되고 있다는 점도 이와 무관치 않다. 권여선 소설이 오정희의 소설, 그리고‘집 나가는 여자들’(김형중)을 앞세웠던 90년대 이후 일군의 여성소설들과 갈라지는 대목도 바로 여기이다. 따라서 이 글은 다음과 같은 물음의 좌표를 서성여야 한다. 결국 아비의 세계를 떠날 수 없었던 이 여리나 곤두선 정신은 어떤 여로를 펼쳐내고 있는가. 세계에 대한 낭만적 신화와 호기심이 사라졌을 때 무엇을 지켜보고 어떻게 삶을 견디는가.

 

 

2. 사랑, 불가능하거나 불구적이거나

 

우리는 권여선 소설에서 엇갈리고 실패한 혹은 불가능한 사랑의 서사와 빈번하게 조우한다. 사랑의 대상은 기억 속에서나 겨우 존재하고(「내 정원의 붉은 열매」) 연애가 제공하기 마련인 “달고 격한 느낌”은 꿈속에서나 조우할 수 있을 뿐이다(「위험한 산책」). 또한 두 남녀의 욕망의 행로는 필시 엇갈리거나(「사랑을 믿다」 「처녀치마」) 너무 늦게, 그러니까 열정과 향기가 죄다 휘발된 뒤에나 찾아온다(「12월 31일」). 이렇듯 권여선 소설에서 사랑은 어김없이 비극적이다. 그렇다면 왜 사랑은 불행의 얼굴로만 방문하는가. 우선 작가가 실패한 연애담에 유독 주목하는 이유를, 사랑의 실패에서 발현하기 마련인 인간과 세계에 대한 보다 성숙한 시선과 성찰을 위한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소설외적 추정이다. 문제는 내부의 어떤 요인이 실패한 사랑을 도출하는가이다. 미리 언급하자면 두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사랑의 감정이 금지에 의해 작동되거나 거꾸로 좌절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사랑은 불가능하거나 추억 속에서 호명, 전유될 수 있을 따름이다. 다른 하나는 사랑의 양태와 관계한다. 다시 말해 권여선 소설에서 사랑은 대개 죄의식에 묶여 있어 불구적이고 불행할 수밖에 없다. 먼저 전자의 문제부터 살펴보자.

「12월 31일」은 우정이라는 장벽 혹은 허울 아래서만 존속할 수 있는 사랑에 대한 서사이다. 소설은 마흔을 앞둔 독신남‘나’가 십년 전 그녀(민혜원)에게 전하지 못해 간직해야 했던‘종이봉투’를 매만지다 과거 추억의 현장으로 접속되는 다소 상투적인 상황으로 시작된다. 대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나. 어느날, 대학시절 내내 짝사랑했던 그러나 이제는 두 아이의 엄마인 민혜원에게서 뜻밖의 전화가 걸려온다. 학창시절‘나’는 소심한 성격 탓에 적극적인 애정 표현을 하지 못했고, 그녀는 이러한‘나’의 감정을 익히 알면서도 모른 체했다. 결과적으로 그녀가 취한 “적당한 거리감 덕분”에 “각별한 우정”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녀가 설정한 간격, 아니 어쩌면 내가 지레짐작으로 그녀가 그어놓았다고 상상한 건지도 모르는 그 아슬아슬하고 지워지기 쉬운 페인트 자국을, 나는 최선을 다해 지키려고 노력했다. (「12월 31일」 99면)

 

졸업 후 다시 만난 이들은 그날 술을 마시고 오랜 주저와 실랑이 끝에 잠자리까지 갖게 된다. 나는 뒤늦게 “열렬한 구애”를 한 셈이고, 그녀는 더이상 외면하지 않는다. 행복한 결합을 가로막던‘간격’,‘상상의 선’이 제거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둘 사이의 우정은 사랑으로 전환될 법도 하다. 그러나 상황은 기대에 어긋난다. 여자는 가정으로 돌아가고‘나’는 붙잡지도 전화번호조차 묻지도 않는다. “아슬아슬하고 지워지기 쉬운 페인트 자국”이 걷히자 사랑은 물론 그들의 관계 전체가 파탄난 것이다. 이는 “어느정도 안정”을 찾고 자리를 잡은 주인공이 자신의 일상이 침해받는 것을 저어한 까닭으로도, 불륜이 제기하기 마련인 윤리와 양심의 문제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 반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나’가 쎅스의 와중에 무엇과 조우했는가를 주시해야 한다. 내가 목격한 것은 “여관 창밖에서 쾅쾅 터지는 폭죽 빛에 드러난, 그녀의 턱과 목을 가르는 부자연스런 화장 선”이었다. 즉 “간격”이 사라지자 그녀에 대한‘나’의 내밀한 환상, 그 몽환적 시선도 더불어 증발된 것이다. 당연하게도 사랑의 감정 역시 휘발된다. 금지와 한데 묶여 있던 환상이 걷히면 날것 그대로의 모습(중년의 주부)이 포착될 수밖에 없다. 바꿔 말해‘나’의 사랑을 유지시키는 것은 바로 그녀가 “설정한 간격”에 있었고, 이러한 점에서‘나’의 사랑은 단지 우정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에서만 존속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금지의 지위는 모순적이다. 사랑을 촉발하나 사랑의 실현 혹은 완숙을 위해 금지가 제거되면 사랑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탓이다. 반면 금지와 장벽이 그 본연의 임무(장애물)로 기능하는 경우도 있다.

「내 정원의 붉은 열매」는 운동권 선후배간의 실패한 첫사랑을 그린다. 첫사랑을 가로막은 요인은 두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다. 하나는 당대 공적 대의를 위해 사적인 것을 억제해야 했던 경직된 운동권의 분위기이다. 당시 대학선배라는 존재는 우선 “존경과 신뢰”의 대상이어야 했다. 그리고 운동권이 갖추어야 할 품성과 습속에 따르면 선후배 사이의 애정은 분명 경계해야 할 일이었고, 결국 그들의 사랑은 이 제약의 토양을 뚫고 움트지 못했다. 당시‘P형’의 삶을 지배했던 “비스듬한 바이어스”가 의미하는 바 또한 이것이었으리라. 다른 하나는 이와 맞물려 발생한 개인적 오해였다. P형이 배가 고프다는 말을 후배에게 감히 할 수 없었던 것처럼,‘나’또한 P형의 허기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이 삽화가 알려주듯이, 상대방의 속내에 무지했기에 사랑은 당연히 이루어질 수 없었다. 금지가 사랑을 낳는 역설적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 「12월 31일」이라면, 이 작품에서는 사회적 금지의 코드가 사랑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사랑이 금지와 금기의 선에 걸려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사랑은 금지에 의해 작동되거나 좌절된다. 그러니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주인공들은 사연은 각기 달라도 종국에는 동일한 포즈를 취한다. 실패한 사랑을, 떠난 연인을 추억하는 것이 권여선 연애담의 전형적인 설정이다. 떠난 연인을 회상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비극성의 연유가 이전과는 사뭇 다른 또 한편의 소설을 보자.

「사랑을 믿다」는 타인에게 사랑받았으나 그 자신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두 남녀의 뒤틀리고 엇갈린 운명을 더듬고 있다. 처음은 남자가 뒤이어는 여자가 동일한 실수를 반복한다. 그러니까 한 여자가‘나’를 흠모했을 때‘나’는 그녀를 그저 마음 맞는 “동료”로만 여겼고,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나’가 그녀를 사랑할 때에는 이번엔 거꾸로 그녀가‘나’에 대한 감정을 완전히 거두어들여 “한낱 친구”로만 여긴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내 대낮 같은 기다림”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여자가‘나’에 대한 미련을 철회하자 이번엔‘나’가 동료 이상의 감정이 없었던 그녀를 사랑한다는 대목이다. 이 역전된 관계는 그녀의 삶의 연속성이 파괴된 상황과 결부시켜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결국 실연의 고통은 극복했지만 이전과는 판이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곧 그녀는 “사랑의 고통으로부터 너무 먼 어딘가로 초월”해버려 “더이상 사랑을 믿지 않”게 되었다. 해서 그녀는 “다가올 어둠에 너무 일찍 눈이 익”어 “오후를 사는 사람의 나른한 눈빛”으로 살아간다. 잠시 그녀의 자리로 이동해 생각해보자. 그녀는 과거와 달리 사랑을 상실했고, 이러한 삶이 불행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녀가 고모네 집에 두고 온 “본성의 작은 칩”은 다름아닌 사랑 혹은 그에 대한 믿음이었다.‘나’의 눈에 그녀의 삶이 안쓰럽게 비친다면, 이는 그녀의 세계에 사랑이 누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잃고 혹은 버리고 건조하게 살아가는 불행한 그녀의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은 역설적으로 그녀가 자신의 삶에서 괄호쳐버린 사랑이다. 그리고 의도와는 무관하게 사랑이 소거된 불행한 그녀의 삶을 이끌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녀의 마음을 읽지 못했던‘나’에게 있다. 아울러 나의 사랑이 태어나는 순간도 바로 이 지점이다. 사랑은 타인을 연약하고 무언가가 결여된 존재로 인식하는 순간 솟아오른다.2 따라서 그녀의 결여, 불행에 대한 나의 인식이 사랑을 불러들인다. 바꿔 말해, 죄책감과 연민이 사랑의 감정을 촉발하는 것이다.

 

그를 사랑했지만 아직 그와 결혼할 결심을 굳히지 못했던 무렵 저 손가락 짓처럼 반복되는 그의 채근으로 나는 성가셨다. 구질구질하게 결혼이라니. 이제야 그때의 괴로움이 그와 보낸 나날들을 행복으로 채색해주는 유일한 빛이라는 걸 알겠다. (「처녀치마」 15면)

 

「처녀치마」가 보여주는 사랑 또한 죄의식과 자책이 스며 있다는 점에서 불순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주인공이 두번의 이혼 경력을 지닌 연인을 끝내 뿌리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젊었을 적‘그’는‘나’를 사랑했고‘나’또한 그를 사랑했으나 그의 청혼을 거절했다.‘나’는 당시‘구질구질한 결혼’을, 그 제도를 성가셔했다. 이러한 최초의 어긋남이, 어쩌면 경솔했을 그 판단이, 결국 오늘의 파행과 불행한 관계를 불러왔다. 이에 대한 책임은 아무튼‘나’에게도 있고, 그에 따른 자책과 죄의식이 그와의 관계를 청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수업 시대」에서도 가정을 택할 것이 뻔한 유부남(시인)을‘나’는 내치지 못한다. 대신 불행한 관계에 대한 모든 책임을 그의 시인적 언사와 기질에 현혹된‘나’에게, “밤마다 소설을 탐독”했던 나의 감상성에 돌릴 따름이다.‘나’에게서 풍기는 “그놈의 비린내” 때문에 “사냥꾼”(시인)에 포박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권여선 소설이 보여주는 사랑은 순수하지 못하다. 사랑이 비극적인 것은 사랑이 죄의식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죄의식을 떠맡은 인물은 당연히 수인의 자리에 위치할 터이다. 이 경우 한 사람이 죄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에 관계는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 이는 평생을 남편의 “쓰레기통과 타구통과 변기통이 되어 살아온”(「처녀치마」) 어머니의 삶이 대변한다. “지옥의 다락방에 갇혀 벗어날 길 없는 노역과 고통”에 시달리는 어머니의 삶은 그야말로 수인의 삶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관계의 중핵인 균형이 무너질 때 그 관계는 필시 지배와 예속의 문제로 귀결된다. 작가가 딸(‘나’)의 입을 빌려 “관계란 악마에 속한다”고 단언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태도를 취하는 인물들은 타자의 삶에 종속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권여선 소설의 특이한 점은 이러한 태도를 지닌 자들이 그 어긋난 관계의 책임을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돌리는 망상적 죄의식에 가까운 기묘한 심리로 대응한다는 점이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인생들은, 자신의 욕망을 뒤로하고 주체적 삶을 살지 않기에 삶의 무의미와 덧없음을 피할 수 없을 터이다. 이제 연인의 품 저 밖으로 나가보자.

 

 

3. 세상의 허위에 대한 냉소와 조롱

 

평온하고 견고한 일상의 성채는, 더불어 그곳에 안착한 내면의 평정은 어떻게 일순 아수라장으로 돌변하는가. 권여선의 최근 몇몇 작품들은 이러한 토픽을 형상화하고 있다. 조화로운 관계의 네트워크를 일순간에 파열시키는 그 힘은 단연코, 여러 평자들의 지적처럼, 독특한 캐릭터에 있다. 더욱이 이 기괴한 인물들은 결과적으로 평온과 평정을 파열시키는 것 외에는 아무데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듯도 보여, 일견 지젝이 언급한 특정한 요구에 집착하는‘순수한 충동의 화신’,‘자동기계’를 연상케 한다.3 우연찮게도 권여선은 한 작품(「문상」)에서 이와같은 인물을 “자기 생각의 궤도만”을 도는 “자동인형”이라 부른 바 있다. 그리하여 이 “괴물”들이 펼치는 서사적 향연을 “병리학적 인물열전”4이라 불러도 그리 과하지 않다. 「문상」의‘우정미’와 「약콩이 끓는 동안」의‘윤서영’, 「분홍 리본의 시절」의‘나’, 「가을이 오면」의‘로라’, 「솔숲 사이로」의 뜨내기‘그’등 파국의 텔로스를 향해 질주하는 일련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서사적 행로가 그러하다. 이들은 모두 부지불식간에 자신들이 개입된 관계의 그물망과 그 속에서 나름의 평온과 평정을 즐기던 인물들의 내면을 할퀴고 파열시킬 운명에 봉사한다. 물론 이 괴물들의 내면에 내장돼 파괴적 충동을 이끄는 힘의 목록에는 사소하고 내밀하나 떨치기 힘든 정념과 파토스, 예기치 않게 출몰해 평안한 삶을 걷잡을 수 없게 만드는 불편한 기억 등이 기재돼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묻자. 이들은 왜 상징적 네트워크를 뒤흔드는가. 작가는 왜 이 그물망을 내파하는 이 구성적 오점, 얼룩 들을 한사코 등장시키는가. 이러한 의문에 실마리를 제공하는 단편 「약콩이 끓는 동안」에서부터 논의를 출발시켜보자.

여기 딱한 처지에 놓인 한 사내가 있다. 그는 음대 교수로 정년퇴임을 일년여 앞둔 어느날 교통사고로 반신불수가 된다. 그리하여 그의 삶에는 식모이자 간병인인‘순천댁’, 나이 마흔이 되도록 자기 앞가림도 못해 “무시와 구박”을 받으며 아비의 집에 얹혀 식객 노릇을 마다하지 않는 두 아들, “중도반단(中途半斷)”으로 살아온 열정도 재능도 없는 대학원생‘윤양’이 부득이하게 개입하게 된다. 김교수는 자신의 삶에 침범한 이들을 성가셔하고 못마땅해한다. 이들은 김교수의 “일상에 달라붙어 평온을 교란”하는 불청객일 따름이다. 때문에 그는 허구한 날, “왜 인간들은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하는 걸까”라는 불평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러나 김교수는 틈만 나면 자식들의 시답잖은 대화를 엿듣고 순천댁과 윤양을 훔쳐보는 아이러니를 보이기도 한다. 이 어긋남은 윤양이 뺑소니사고를 당해 김교수를 찾지 않게 되는, 더불어 은근슬쩍 윤양에게 수작 걸던 두 아들도 연이어 집을 나가게 되는 상황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훼방꾼들이 하나둘 떠나자 그의 삶은 자신이 그토록 갈구하던 평온한 삶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리라는 예상과 달리 엉뚱하게 전개된다. 김교수는 “변비와 불면”이 심해지고 급기야 한밤중에 눈물을 짜기까지 한다. 자신만의 생활방식과 리듬을 되찾고 누릴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되레 그의 내면은 평정을 잃고 속절없이 무너진다. 막상 질서와 평온이, 고독이 찾아들자 그 상태를 감당하지 못하는 셈이다. 이 역설적 상황의 의미는 이러할 것이다. 김교수의 삶은 불만에 찬 표면적 발화와는 달리, 이방의 존재들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의지할 난간이 느닷없이 사라지자 그의 삶 전체가 휘청거리는 것이다. 실상 그가 못마땅하게 지켜본 불청객들은 그가 진정 감당할 수 없고 대면하기 싫었던 무료와 고독, 죽음의 공포를 회피하게 해주었다. 이제 그는‘욕망의 실재’, 그 공포의 순간과 맞서야 한다. 환영의 놀이터는 사라졌다. 이는 다시금 무엇을 말하는가. (다분히 성적인) “야만적인 충동”과 속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고상한 가치를 추구하는 지식인들의 이중성과 허위의식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것이 아니고 새삼 무엇이겠는가. 김교수가 강박적으로 집착하던 “생활의 질서와 감정의 균형” 같은 것은 허위이자 한갓 포즈에 지나지 않았다. 교양속물들에 대한 냉소와 조롱의 칼날은 여타 작품에서도 지속된다.

「분홍 리본의 시절」에서 이 칼끝은 두 방향으로 갈라진다. 전직 출판사 편집장이자 운동권 출신인‘주철수’와 대학교수인 그의 교양있는 아내의 삶이 그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결과적으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의 양태와 태도를 지닌 주인공‘나’를 겨누고 있다. 독신에다 뚜렷한 직장도 없는 서른을 앞둔‘나’는 감상적이게도 “고립된 삶”을 위해 무작정 아무 연고도 없는 신도시로 이주한다. 그리고 거기서 뜻하지 않게 선배인 주철수 부부와 조우하게 된다. 소설은 이후 이들 부부와 만나 겪은 일과, 학창시절 주선배와 나의 과거에 대한 회상으로 채워진다. 주목할 점은‘나’의 옛 애인이기도 했던 주선배와 그 아내의 삶이다. 그들은 그리 부족한 게 없는 안정된 중산층의 삶을 향유하고 있다. 그 표지는 일단 음식 취향으로 나타난다. 그들 부부는 가급적 “소문난 맛집”을 순례하고, “식사 후에 반드시 과일이나 케이크, 쿠키”를 즐긴다. 그들은 고상한 음식 취향에 걸맞게 육류는 가급적 멀리한다. 그러나 “중산층의 표지는 육류를 즐기지 않는 데 있다기보다 육류를 즐기지 않는다고 말하는 데 있는 모양”이라는‘나’의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이 지향하고 가치를 두는 세계는 실제 그들의 욕망이나 욕구와 일치하지 않는다. 어긋나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주선배는 자신이 일상적으로 누리는 삶과는 어울리지 않게, 밑도 끝도 없이 “사는 게 공포”스럽다고 되뇐다. 실상 그는 중산층의 안락한 삶을 향유하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삶의 근원적 문제에 직면해 엄청난 고뇌에 빠진 양 가식과 위장된 포즈로 일관한다. “스스로 안경을 잘 잃어버린다는 사실에 긴박되어 항상 여벌로 안경을 구비해 다니”는 것처럼, 하나의 관념에 강박되어 실제 자신의 삶이 그러한 것인 양 애써 포즈를 취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더욱이 “그것 없이는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단장(斷腸)의 관념을 가져본 적”도 없으니 그 고뇌의 포즈 또한 절박할 리 없다. 과거에는 툭하면 “뒤돌아보면 잡히는 게 없”다는 생각에 집착하다 이제는 “사는 게 공포”라는 화두로 가볍게 건너뛴 주선배의 태도에서 어떠한 진정성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그의 아내 또한 다르지 않다. 나이어린‘나’에게 끝내 말을 놓지 않던 예의 바르고 교양있는 그녀는‘나’와 주선배의 부정한 관계를 의심하고는 “내가 그렇게 만만했니, 니들?” 하고 “똑 떨어지는 반말”로 품위의 탈을 벗는다. 실제 속내나 삶과 자신들이 취한‘주의’가 어긋난 중산층의 허위와 속물성이 허물 벗는 장면이라 할 만하다. 흥미롭게도 작가는 마지막까지 허세의 포즈를 유지하는, 다시 말해 이혼하는 마당에 “상징적 의례”(이별여행)까지 펼치는 이들 부부에게 교통사고를 선사함으로써 이들의 속물적 삶과 태도를 한껏 조롱한다. 한편‘나’의 삶 또한 주선배 부부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반성이 뒤따르기는 하나 이십대의 마지막을 기념하기 위해 “고립된 삶”을 자처하면서도 “추잡한 연루”를 은밀히 동경하던‘나’의 이중성 또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탓이다. 화자인‘나’는 허위와 가식의 포즈로 덧칠된 주선배 부부와 함께했던 이 시기를 “비린내의 시절”로 규정하고 있다.

작가가‘괴물’을 등장시킨 목적은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허위와 가식의 세계에 대한, 그리고 그것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인간들과 그 관계망에 대한 냉소와 불신이다. 허위의 탈을 벗기고자 하는 작가의 집요하다 할 충동은 단지‘먹물’들의 세계만을 겨누고 있지는 않다. 이 점은 「가을이 오면」에서 빚쟁이에게 쫓겨 딸까지 팽개치고 도망간 주제에 여전히‘우아의 포즈’를 취하고 살아가는 어미를 향한‘로라’의 발작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 어미라고 냉소와 조롱의 칼날을 피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아울러 「솔숲 사이로」가 보여주듯, 삶을 지탱하는 신념 혹은 믿음의 체계는 권여선 소설에서 항시 그 지위를 의심받는다. 이는 일종의 삶의 참조점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존재와 세계를 비추어내지 못할뿐더러 그것의 허위가, 그 판타지가 깨질 때 인간의 실존과 내면의 실상이 오롯이 드러나기 때문일 터이다.

 

 

4. 히스테리적 주체가 사는 법

 

앞에서 권여선의 인물들은 망상적 죄의식에 가까운 기묘한 심리를 품고 있어 삶의 덧없음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음을 언급한 바 있다. 따라서 문제는 주어진 삶의 조건을 불가피하게 받아들이는, 죄책감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자들의 억눌린 내면이다. 이 부분에 새삼 주목하는 이유는 권여선 소설에서 마주치는 병리적 증후들이 방사되는 기원적 처소가 바로 이 숙명론자들의 어두운 내면이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불가항력적 삶의 조건을 수긍해야 한다는 태도와 그 자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욕망하는 상반된 심리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자책과 자학이 그리고 외부 대상을 향한 부정적 에너지가 발현한다. 권여선 인물들이 내보이는 체념 혹은 무기력의 정서와 그것이 외부를 향할 때 드러나는 파괴적 충동은 불가피한 삶의 조건에 대응하는 두가지 주된 반응이라 할 수 있다. 가령 「가을이 오면」에 펼쳐진 세계가 바로 그렇다. 이 소설의 주인공 역시 갱신의 여지가 없는 암울한 생의 조건에 던져져 있고, 이 불가피한 삶의 틀 앞에서 주인공은 양가적 태도를 보인다. “죽은 듯 살아가기”를 열망하는 것이 그 하나라면, 발악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안쓰러운 제스처 취하기가 다른 하나이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늦깎이 여대생‘로라’가 자신의 남자친구를 어미에게 소개시키고 그 과정에서 어미에게 발작에 가까운 분노를 표출한다는 것이 「가을이 오면」의 개략적 내용이다. 따라서 주인공이 왜 어미에게 분노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독해의 관건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먼저 어미에게 버릇없이 대드는 로라가 누구인지 따져보는 것이 순서겠다. 그녀는 대학 인근의 값싼 옥탑방에서 대출금 이자와 월세, 각종 공과금 등에 쪼들리며 궁색하게 살고 있다. 유일한 혈육인 어머니는 재산을 다 까먹고 현재 변두리 교회에서 불목하니 노릇을 하며 홀로 지내고 있어 도와줄 형편이 못된다. 로라의 암담함은 그러나 주변 여건에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책임의 태반은 자신에게 있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물정이나 소문”에도 어둡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상상력과 독창성이 부족”한 편이어서 시쳇말로 갑갑하기 이를 데 없다. 게다가 외모 또한 못생기고 뚱뚱한데다 “치료법도 없는” 알레르기성 피부질환까지 앓고 있다. 로라의 삶은 그녀의 “꽉 막힌 인상”만큼이나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말대로 “곰보인데다 째보”이기까지 한 거의 최악의 상황이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자들이 한번쯤 품어봄직한‘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하는 후회와 한숨이 흘러나올 법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로라는 소설 말미에 “엄마는 왜 이렇게 나를 못나게 낳았어?” 하고 기필코 따지고야 만다. 그녀가 직장을 그만두고 별 대책도 없이 뒤늦게 입학한 대학에서‘아동학’을 전공한 것도 어미에 대한 원망의 강도와 순정성을 짐작게 한다. 그런데 어미에게 대드는 뒤틀린 심사 이면에는 로라의 참담한 맥락이 자리하고 있을 터이지만, 이 모든 책임이 왜 어미에게 있다고 믿는가. 아버지의 유산을 탕진한데다 빚쟁이들이 들이닥쳤을 때 자식을 팽개치고 혼자 달아났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어찌 감히 사랑 같은 것을 갈망할 수 있는가. 모녀간에마저도 피할 수 없었던 저 사랑을 망치는 사랑을, 사랑이라는 베일 뒤에 가려진 저 살아 꿈틀거리는 해초의 흡반을, 뜨거운 용액이 목구멍에 들이부어지는 저 우아하기 짝이 없는 고문을. (「가을이 오면」 17면)

 

이는 그녀가 어미로부터 비뚤어진 교육, “사랑을 망치는 사랑”을 받아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녀의 어미는 로라에게‘우아한 여성’이 되라고 가르쳐왔다. 물론 그것은 본질적으로 로라가 어미의 불가해한 욕망 앞에서 내놓은 환상 씨나리오라 하겠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에게 “애초부터 우아의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해서 로라는, 우아한 어미의 눈에는 단지 “꿩도 매도 다 놓친”“열등하고 미달된 여성”으로 비친다. 때문에 로라가 평생 인정받지 못하는 못난 자식이 될 수밖에 없음은 뻔한 이치다. 어미를 “나쁜 소식을 가져오는 전령에게 녹인 황금액을 목구멍에 부어주”는‘잔인한 클레오파트라’에 빗대는 것도 인정받지 못하고 또 받을 수도 없는 자식의 뒤틀린 심사에서 비롯되리라. 이러한 점에서 로라는 어미의 욕망에 붙들려 있다. 로라가 지향했던 우아한 세계는 그녀의 어미 그리고 그 어미로 대변되는 사회가 부과한 여성성의 이상이었지 그녀 자신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어미의 욕망에 따라 자기 욕망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로라는 히스테리적 주체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순간 그녀는 자신이 왜 이제껏 매일 시장통을 헤매었는지를 번개같이 깨달은 느낌이었다. 여름 한낮의 시장 거리는 처연하도록 아름다웠다. 그녀가 길바닥에 쓰러져 너울거리는 공기 너머로 본 것은 뜨거움과 조잡함이 우윳빛으로 뒤엉긴, 이를테면 순댓국 같은 풍경이었다. (「가을이 오면」 17~18면)

 

로라의 삶은 타자(어미)의 세계와 시간에 억류돼 있었다. 이러한 문맥에서 로라의 “자학적인 버릇”, 즉‘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정오만 되면 무작정 시장통을 거니는’버릇의 연유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과잉적 행위는 일종의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무의식적 몸짓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우선 시장통 자체가 “애교나 새침, 우아” 등 어미적 세계와는 동떨어진 장소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리고 로라가 시장통에 쓰러지면서 목도한 “순댓국 같은 풍경”에서‘처연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는 사실, 곧 그때까지 그녀가 진입하거나 머무르고자 했던‘우아한 세계’와 대척점에 있는 세계에서 나름의 가치를 발견한다는 점 또한 그러하다. 따라서 로라가 시장통에 쓰러지는 대목은 일종의 상징적 자살과 재탄생의 과정으로 읽힐 수 있다. 실신했다 깨어나는 과정이 그렇거니와, 새로운 세계에서 다시 태어났기에 그에 어울리는 “비명”을, 첫울음을 울어젖히는 대목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실상 로라는 이 사건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어미의 욕망과 세계에 반기를 들 수 있었다.

결국 이 소설은 남자친구를 증인으로 대동하고 어미에게 결별을 통보하는 딸의 서사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자면 이 소설은 자신의 삶을 이 지경으로 이끈 기원(어미)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었던 셈이다. 이 또한 고통을 유발한 어떤 지점, 특수한 사건을 찾는다는 점에서 히스테리적 주체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5 히스테리증자들이 곧잘 빠져드는 공상, “만약 ~하기만 해도/했어도”에 대한 믿음은 권여선 소설의 주인공들이 내보이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가령 「사랑을 믿다」나 「내 정원의 붉은 열매」에서의 주인공들은 모두 실패하고 어긋난 관계의 시원을 찾아 기억여행을 떠나고, 이후 가정의 목소리를 흘려보낸다.6 한편 이 가정이 서사의 실질적 동력이 되고 있는 작품이 바로 「반죽의 형상」이다.

소설에는 늘 붙어다니는 단짝(‘나’와‘N’)이 등장한다. 그들은 대학 4년으로도 모자라 이제 회사동료이기까지 하다. 대학시절 내내 “식판 하나로 점심을 나눠먹”던 사이였으니 그 유별남이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한 반죽 속에 있는 두 형상”처럼 떨어질 수 없었던 이 둘의 관계는 서먹서먹하다 못해 어느덧 “다시는 영영 화합하지 못”할 회복 불능의 사이가 되었다. 당연하게도 둘 사이에 존재하던 일체감과 충일한 기운은 사라졌다. N은‘나’에게 무심하고,‘나’는 수시로 남자들을 만나고 영화와 술에 집착하는 N을 경멸한다.‘나’가 느끼는 배신의 감정은 익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래서‘나’는 N과의 결별(휴가)을 준비하고, 비장하게도 이를‘결투’로 칭한다. 그리고‘결투’라는 이름에 걸맞게 자신이 N에게 받은 모욕의 현장을 찾아나선다.‘결투’란 모름지기 “모욕을 청산하는 가장 명쾌한 방식”이기에 “결투신청”에 합당한‘나’의 모욕의 경험이 있어야 할 터이다.

 

그때 손수건을 던졌어야 했다. 뒷자리의 남학생처럼 부주의하게 내 몸을 건드린 데 대해서가 아니라 세자리 숫자의 그 버스를 타고 강변으로 가 수제비처럼 나를 조금씩 떼어내 강으로 던진 열흘에 대해서, 너 아프잖아 너 아프잖아 마지막으로 나를 위해 목 놓아 울던 최후의 애도에 대해서. (「반죽의 형상」 169~70면)

 

내가 소급해서 찾은 “모욕이 발아하던 그 시점”은 “한마디 언질이나 암시도” 없이 N이 나를 피했던 대학 4학년 때였다. N은 나를 만나지 않은 열흘 동안, 매일 한강에 나가‘수제비를 떼어내듯’‘나’라는 존재를 떨쳐버리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모욕의 시점을 찾아낸‘나’가 하는 일이라고는, 모욕받았던 당시에 “결투를 위한 손수건”을 던졌어야 하는데,라는 익숙한 가정뿐이다. 다시 말해 진작에 헤어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고작이다. 실제 현실에서‘나’는 끝내 N에게 결별을 통보하지 않는다. 결투와 복수는 나의 공허한 상상 속에서만 이루어질 뿐이다. 그리하여‘나’는‘로라’가 가을이 오기를, 그저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나’는 N의 태도를 지켜보겠다는 지극히 수동적 태도를 표명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렇듯 권여선의 인물들은 대개 기다리고 지켜보는 것에서 그친다. 이러한 수동성은 권여선 소설의 약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가피한 현실을 맹목적으로 초월하려 하거나 어설픈 화해를 시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의의 또한 만만치 않을 터이다. 곧 이 응시하려는 자세는 주어진 세계를 회피하지 않겠다는 정신과 만나는 토대이자 냉소와 조롱이 태어나는 지반이기 때문이다.

 

 

5. 병든 세계와 함께 아프기

 

앞에서 수인의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 취하는 삶의 양상을 살펴보았다. 불가피한 생의 조건 앞에서 히스테리적 태도로 삶을 견디는 것이 그 하나였다. 그러나 권여선 소설은 이와 상이하게 대응하는 모습 또한 보여주고 있다. 수인의 처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국면을 꿈꾸거나 찾아나서려는 태도가 그것이다. 잠시 「반죽의 형상」으로 돌아가보자.‘나’가 결투를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은, 언젠가 N이 택시를 타고 집 뒤편에 내리는 바람에 한시간가량 집을 찾아 헤매야 했던 삽화에서 유추할 수 있듯, “존재의 뒤편”으로 떨어져 당혹과 혼란을 경험케 되리라는 존재론적 불안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 권여선 소설에서는 드물게 신생의 충동이 표출되어 있는 「위험한 산책」이 이에 답하고 있다.

이 소설의 서사는 애정 없는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여주인공이 남편과 정부(후배) 사이에서 고민하다 “살이 모조리 썩”은 조개껍데기처럼 형식만 남은 관계이지만 결국 남편을 택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런데 왜 애정도 없는 남편을 진정 떠나지 못하는가. 주인공의 진술대로 “무엇이건 잡은 것을 놓치지 않는 남편의 강한 악력”이 편안하기 때문만일까.

 

누가 뭐래도 남편과 그녀는 잠자리를 함께하는 부부이자 한시절을 함께 지내온 동료였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부부이며 동료인 것이다. 이런 터무니없는 상상은 잠시나마 그녀에게 로맨틱한 기쁨을 주었다. (「위험한 산책」 223면)

 

남편은 현재‘위선적인 기울임의 자세에 꽁꽁 갇혀 있’지만, 한때는 사랑했던 그리고 동일한 가치와 신념을 공유했던 “누가 뭐래도” 남편이고 동료였다. 게다가 남편은 아무튼 그 시절을 통과하면서 외상적 장애까지 얻지 않았는가. 이 저버리고 외면할 수 없다는 일종의 윤리적 태도가 권여선 주인공들을 항시 주저앉히는 것은 아닐까. “존재의 뒤편”으로 내달리지 못하는 실질적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을까. 물론 여기에는 새로운 삶의 국면을 찾아나선다 해도 그곳이 기왕의 세계와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심드렁한 인식이 자리하고 있을 터이다. 이는 주인공이 남편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선택지라 할 수 있는 정부에게 그다지 큰 열정과 애착을 보이지 않는다는 데서 간접적으로 뒷받침된다. 때문에 더욱더 남편을 떠난다는 것은 필시 윤리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 윤리적 의식은 「문상」의 주인공이 좀더 섬세하게 펼쳐 보인다.

숙면을 취하고 막연히‘좋다’는 느낌에 빠져 있던 주인공(‘그’)은 삼년 전 창작교실의 수강생이었던‘우정미’에게서 난처한 전화 한통을 받는다. 용건은 자신을 친아버지처럼 돌봐주던 큰아버지가 죽었으니 문상을 와달라는 것이다. 그가 그녀와 특별한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게다가 그녀는 “머릿속에 살짝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깊고 은밀한 접촉을 당한 듯 불쾌해지는 질감의 소유자”였다. 우정미의 달갑지 않은 전화를 받고 나서‘좋다’는 느낌은 삽시간에 사라지고 그의 평온하고 균형잡힌 일상과 내면은 흔들린다. 그녀와 얽힌 기억이 잘 빠지지 않은 “잇새에 낀 조갯살”같이 불쾌감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물론 그 불쾌의 현장에는 그녀와의 쎅스의 추억이 자리한다. 해서, 주인공이 모두들 외면하는 외톨이 우정미와 어찌하다 잠자리를 갖게 되었는가 살필 수밖에 없다.

이는 결과적으로 수업 후 뒤풀이에서 찾아온 일회적 감정 때문이었다. 주인공은 그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달은 난장판의 술자리에서 “고장난 라디오처럼” 방치된 우정미가 다른 “누구보다도 고상하다”는 비교우위의 느낌에 빠져들었다. 그 “상대적 호오”의 감정이, 그리고 필시 그것에 수반되었을 우정미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 그러한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녀의 뒤를 좇으면서 느꼈던 “연민과 혐오”의 감정은 여관에서도 여지없이 반복된다. 그의‘경련과 구토’가 알려주듯, “상대적 호오”와 감당하지 못할 “연민”의 댓가는 참혹한 것이었다. 소설은 혐오스런 여자와의 하룻밤의 실수 때문에 호출당한 주인공이 결국 고민하다 문상을 가지 않겠다고 천명하는 것으로 끝난다. 문상을 가지 않기로 한, 아니 갈 수 없는 주인공의 행로에는 정직하나 허약하고 무력한 지식인에 대한 작가의 조롱과 냉소가 얼마간 투여되어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 우정미라는 상처받고 고립된 영혼을 필사적으로 외면하지 않으려는 주인공의 안쓰러움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그는 영안실에서 오지 않을 문상객을 헛되이 기다리고 있을 그녀를 생각했다. 그녀가 그토록 부지런히 타전한 구호요청은 세상 어디에도 가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가 갈 것이다. 그녀는 그가 건너야 할 늪이고 품어야 할 빛이다. (…) 그의 머릿속으로 한줄기 차디찬 기류가 흘러들었다. 그는 어느새 슬그머니 타이를 풀어놓았다. 그는 가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가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문상」 200~201면)

 

타자의 고통과 신음 앞에서 번민하는 저 따듯한 심성, 어찌해서든 “품어”보려는 태도, 바로 여기에 권여선 소설의 미덕이 있다. 병들었지만 여전히 아무도 아파하지 않는 세상에서, 세상이 원래 그렇지 하는 무덤덤하다 못해 싸늘하기까지 한 시선이 만연한 이 현실에서, 상처받은 영혼과 그 간절한 “구호요청”에 응답하려는 저 가상한 노력은, 저 연민의 자세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절실하다. 권여선이 보이는 냉소와 조롱, 세상에 대한 분노가 더욱 빛날 수 있는 것도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저 따듯한 심성과 연민이 그 배면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세상의 평온과 아름다움’은 “지옥의 눈”(「가을이 오면」)이어야 비로소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암울한 현실을 환기하는 역설이지만, 그렇게라도 세상을 유지시키려는 것은 지금 여기의 부정태의 현실 너머에 삶이 자리할 수 없음에 대한 리얼한 인식의 소산이다. “보아도 읽히지 않는 세상”(「위험한 산책」)에서 삶은 당연히 우울하겠지만, 그러하기에 더더욱 상처받은 영혼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소홀히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타자의 고통을 응시하라는 권여선의 주문이 새삼 감동과 충격의 여진을 안겨줄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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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글에 인용한 권여선의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푸르른 틈새』(살림 1996) 『처녀치마』(이룸 2004) 『분홍 리본의 시절』(창비 2007) 「내 정원의 붉은 열매」(안찬수·정홍수·진정석 엮음 『소진의 기억』, 문학동네 2007) 「사랑을 믿다」(『한국문학』 2007년 여름호). 이하 인용할 때는 작품명과 면수만 표기한다.
  2. 슬라보예 지젝 『향락의 전이』, 이만우 옮김, 인간사랑 2001, 202면.
  3. 슬라보예 지젝 『삐딱하게 보기』, 김소연·유재희 옮김, 시각과 언어 1995, 54면.
  4. 김영찬 해설 「괴물의 윤리」, 『분홍 리본의 시절』, 창비 2007, 237면.
  5. 쌀레클에 따르면, “만약 ~했더라면”(if only)에 대한 믿음은 히스테리증자로 하여금 무고한 희생양의 자리를 지탱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필수적인 환상이다. 이에 대해서는, 레나타 쌀레클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 b 2003, 133면 참조.
  6. 「사랑을 믿다」에서 남자주인공은 연인을 잃은 이유를‘다른 여자의 새된 노래’에 혹했던 것에서 찾으며‘그녀(떠난 연인)의 작은 노랫소리에 귀 기울였어야 했는데’하고 후회한다. 또한 「내 정원의 붉은 열매」에서 여주인공은‘만약 산타가 아니라 P형이 내게 따듯하게 대했었더라면’어찌되었을까를 가정한다. 그리고 「12월 31일」에서도 역시 대학시절의 연인과 결혼했더라면 어찌되었을까 하는 상상의 목소리를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