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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그래도 금자씨가 좋았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
성은애 成銀愛
단국대 인문학부 교수, 영문학 easung@dku.edu
기대 내가 처음 본 박찬욱(朴贊郁) 감독의 영화는 「공동경비구역 JSA」였고, 결정적으로 그의 영화에 반하게 만든 것은 「올드보이」였다. 그래서 나는 너무 무섭고 끔찍하다는 주변 사람들의 평에 밀려 극장에서 보지 못했던 「복수는 나의 것」을 뒤늦게 챙겨보고 그가 더 좋아졌으며, 옴니버스영화 「여섯개의 시선」 중 그의 단편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에서는 감동을 받았다. 그후에 본 「쓰리, 몬스터」는 그저 그랬지만, 아무튼 기대를 아니할 수는 없는 상황. 그러나 기대가 좀 지나쳤던 것일까?
장면들 기대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멋있었다. 감탄사가 나올 만큼. 편집의 리듬도 완벽했다. ‘금자’가 ‘백선생’을 잡아서 복수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나쁜 놈 복수의 대상인 백선생 역에 일부러 최민식이라는 배우를 기용한 것은 고도의 연기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감독의 말을 믿었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보고 나니 백선생은 그다지 복잡미묘한 연기가 필요하다고는 여겨지지 않는, 그냥 ‘나쁜 놈’일 뿐이었다. 처음부터 밑도 끝도 없이 무조건 나쁜 놈이기 때문에 동정의 여지가 없었고, 그래서 그가 잔혹하게 죽어가는 장면에서도 동정심은 전혀 일지 않았다. 그런 인물은 또 그런 인물대로 실감나게 그려지긴 했으나, 백선생의 캐릭터는 「복수는 나의 것」의 유괴범 류(신하균 분)나 「올드보이」의 이우진(유지태 분)과는 격이 달랐다. 요트를 사기 위해 아이들을 살해했다니! 정말 미친 놈이다. 결국 이 영화는 복수를 행하는 금자(이영애 분)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영화가 되었다.
복수와 정의 복수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정의(正義)를 구현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복수하는 사람 머릿속에는 선―악의 구도가 분명하지만, 이렇게 일방적인 복수극은 흥미가 떨어진다. 복수에 대해서 뭔가 조금이라도 깊이있는 얘길 하려면 일방적인 ‘원톱’ 체제는 불리하다는 거다. 가장 고전적인 복수 비극인 아이스킬로스(Aeschylos)의 3부작 ‘오레스테이아’(Oresteia)만 해도, 악을 행한 대상에 대한 선의 복수가 아니라, 전쟁의 대의를 위해 딸을 제물로 바친 남편 아가멤논에 대한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복수,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에 대한 아들 오레스테스의 복수, 어머니를 죽인 패륜아에 대한 복수의 여신의 복수, 그리고 이 일련의 복수극에 대해 팽팽하게 맞서는 양 진영의 대결과 화해로 이어지는, 매우 복잡한 구도를 보여주지 않는가. 정말이지 정의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금자씨 악인 백선생을 친절한 금자씨가 처단하는 과정이라. 거참 간단하군. 이렇게 하면 너무 심심하니까 금자씨의 캐릭터를 묘하게 비틀어놓는다. 고등학생 금자는 매우 맹랑한 날라리처럼 보이고, 현장검증을 하며 복수심에 불타는 금자의 얼굴은 처절하다. 교도소에서의 ‘친절한’ 금자는 매우 가증스럽지만, 너무 해맑은 표정이어서 도리어 코믹하다. 잔혹한 복수를 위한 주도면밀한 준비라고만 하기엔 그녀의 이중적인 캐릭터가 좀 ‘또라이’처럼 보인다. 순전히 복수만을 위해서라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는 말이다. 교도소에서의 금자의 살인이 그런 식으로 유야무야 넘어가는 정도야 그냥 눈감아주더라도 말이다. 게다가 붉은 눈화장이면 됐지, 손가락은 왜 자르나? 물론 식칼로 손가락을 자르는 여성은 절대 친절해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영화 후반부에 막상 복수를 시작한 금자는 훨씬 ‘정상적’이다. 갑자기 ‘정상화’되어서 재미가 없고, 심지어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그럼 금자씨는 ‘친절한’ 사람인가? 화자(내레이터)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금자씨가 좋았다고 말한다. 나 역시 금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아리송하지만, 그래도 금자씨가 좋았다. 이영애가 비로소 ‘배우’처럼 보였다.
폐교 산골 폐교에서 복수가 이루어진다. 이 장면은 풍자적인 블랙코미디도 될 수 있었고, 진지한 우화도 될 수 있었고, 처절하고 잔혹한 복수의 결정체가 될 수도 있었으며, 복수란 이렇게도 찜찜하고 칙칙한 것이라는 메씨지를 전달할 수도 있었다. 이동이 잦고 장면전환도 빠른 전반부의 환한 화면들과, 후반부의 폐소공포증을 자아내는 공간, 좌절과 슬픔의 극한에 이른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루어 복수의 의미를 좀더 선명하게 부각시킬 수도 있었다. 좀더 진지하고 치밀하게 전개하거나, 아니면 아예 좀더 코믹하게 풍자적으로 나갔더라면 어땠을까. 감독은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하려다가 이상한 섞어찌개를 만들어버렸고, 나는 이 잡탕찌개의 맛을 별로 즐기지 못했다. 꽤나 연기 내공이 뛰어난 조연들도 감정선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듯 보였다. 불친절한 영화라기보다 제 스스로 헷갈려하는 영화로군,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똥고집 어쨌거나 영화는 화면이 멋지기 이전에 앞뒤가 맞고 말이 좀 되어줘야 한다는 생각은, 영화의 미학을 모르는 문외한의 이상한 고집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 영화의 장점은 스타일이지 내러티브가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그럼 장점을 더 많이 즐기고 어설픈 점은 그냥 좀 넘어가줘도 되지 않을라나? 그런데 매우 죄송하지만 그렇게 안되더라니까. 화면만 보고 있기에는 두 시간이 너무 길더라는 말이지. 여러 스타일을 가지고 멋들어지게 노는 재주만큼, 여러 가닥의 주제들을 조화롭게 엮어내는 재능도 함께 보여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두고두고 남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