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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그럼에도 공감과 우정은 어떻게 가능한가
조해진 소설집 『천사들의 도시』
김미정 金美晶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버려야만 적합한 것이 되는 것’의 윤리」 등이 있음. metanous@naver.com
나 아닌 남의 슬픔이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경험적 유사함만으로 그들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혹은 우리의 언어가 그들의 슬픔이나 고통을 재현할 수 있을까.
조해진(趙海珍) 소설집 『천사들의 도시』(민음사 2008)는 우리가 한번쯤 생각해보았을 이 질문들을 환기한다. 그의 소설에는 비슷하게 슬프고 아프고 고통받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에게 이야기해주는 시선이 있다. 그래서‘타자의 소설’(신형철)이라는 명명도 가능했을 것이다.
조해진의 소설에는 표현할 방법을 알지 못하거나 표현할 언어를 갖지 못한 이들(「천사들의 도시」의 외국인들, 「인터뷰」의 나탈리아, 「그리고, 일주일」의 아버지)이 있다. 심지어 자신의 존재를 주장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이 사라져버린 이들(「지워진 그림자」의 남자, 「등 뒤에」의 동생들)도 있다. 그리고 복화술사같이 그들의 이야기에 이입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또다른 시선이 있다. 그 시선의 주인공 역시 슬프고 아프고 외롭다.
그런데 분명히 짚어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 시선이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관계의 위계를 증거하는 연민이나 동정이라든지 자기 안의 동기를 결여한 온정주의 등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오히려 소설 속 대상과 시선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있다.
이를테면 그의 소설에 빈번하게‘타인의 타액, 토사물’(「지워진 그림자」 「여자에게 길을 묻다」 「등 뒤에」)에 상처받은 이들이 묘사되는 것을 보자.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음으로써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식을 터득한”(「천사들의 도시」) 이들도 있다. “(타인이) 나를 위해서 무언가 구체적인 행동을 해줄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으며 원하지도 않는”(「그리고, 일주일」) 이도 있다. 그의 소설은 본래 타인을‘타액, 토사물’로 이미지화하는 쪽에 속한다. 따라서 오히려‘안정된 각도와 구도의 기념사진’(「기념사진」)으로 끝나는 세계는, 우리를 만족스럽게 할지언정 가장 조해진 소설답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들은 자주 자기세계의 보존을 위해 문을 닫는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말을 걸고 자신을 이입하려는 시선이 있다. 일종의 동병상련, 우정의 형태로 말이다. 일견 모순이다. 양가적이고 분열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주목할 조해진 소설의 독특함이다. 지난 시절(이른바 80, 90년대라 칭해지는)의 소설들이‘우리’에 대한 편향에 이어‘나’에 대한 반대급부적 편향을 보여왔다면, 지금 조해진의 소설은 그 둘 사이에서 미묘하게 재조정되는 2000년대 소설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각 시절을 풍미한‘우리’나‘나’의 문제가 기존의 방식과는 다르게 탐색·형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나’와‘더불어 있는’타인 혹은 세계는, 조해진의 소설에서뿐 아니라 2000년대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서 다시금 환기되는 면이 있다. 그러나 거기서 어떤 근본적이고 실제적인 긴장, 갈등관계를 확인하기란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에 비하면 조해진의 소설은 아예‘나와 타인’혹은‘개인과 우리’사이의 좀처럼 풀리지 않는 딜레마와 거리에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대상과 시선 사이의 반성적(자각적) 거리에서 비롯하는 긴장과 자기확인이 자주 등장한다. 이런 장면을 보자.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강사가 있다. 대마초 투약 혐의로 곤경에 빠진 외국인 학생들은 그녀를 연루시킨다. 그러나 그녀는 억울해하지도, 분노를 호소하지도 않는다. 제각각인 그들의 반응을 살피며 대신 이렇게 말한다. “그들을 이해하기로 한다. 이곳의 불명확한 언어조차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들의 불안을, 나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그 순간의 절망을 이해한다.”(「천사들의 도시」)
이방인들의 불안을 가늠할 줄 아는 그녀는 분명 선하고 이타적이다. 그리고 다른 소설에서도 이런 인물은 낯설지 않게 등장한 바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어지는 말이다. “물론‘이해한다’는 말의 무력함을 잘 알고 있는 내 목소리는 함부로 그 말의 외피 속으로 들어가진 않는다.”
불행에 빠진 그들을 응시하는 그녀는‘이해한다는 말의 무력함’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하려고 노력은 하지만,‘함부로 그 말의 외피 속으로’들어가지 않는다. 지금 이것은‘이해한다’라는 발화의 책임에 대한 것이다.‘타자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말은 일종의 자기위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누구도 타자와 동일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들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 타자와 온전히 겹쳐질 수 있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불가능에 안주하지 않고‘그들의 불안을 이해한다’라고 발화하려고 노력한다. 불안한 이방인들이 이곳의 언어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에이즈 양성판정을 받은 주인공(「그리고, 일주일」)이 회사 동료들에게 죄책감을 느낄 때도 마찬가지다. 동료들과 함께 식당에 간 주인공은, 태연히 그들과 음식을 나눠먹지 못하고 핑계를 대며 식당을 빠져나온다. 그녀는‘죄책감’을 느끼며 타인을 배려하고 있다. 그러나 죄책감은 자기 바깥의 목소리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 문장이 중요하다. “죄책감을 느껴서였다기보다는 죄책감을 느끼는 스스로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여기에는 맹목적 도덕으로서의 이타심이 아니라, 무수한 개인들 사이 이기심과 이타심의 공모관계가 정직하게 놓여 있다. 즉, 이 작가에게는 타자를 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이나 강박이 없다. 그에게 언어는 불투명하고 무력하고 불완전하다. 기본적으로 그에게 언어는 재현의 도구가 아닌 것이다.
조해진 소설에서‘나’와‘그들’(시선과 대상)의 자리는 동등하다. 그들은 위계관계가 아니라 단독자 대 단독자의 자격으로서 마주보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 견디면서 느슨하게나마 공감을 꾀하려 한다. 그의 소설은‘나는 타자를 이해한다’고 쉽게 말하는 세계가 아니라, 단지‘나는 언제라도 다른 위치에서는 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세계다. 그의 소설들이 나와 타자 사이의 양가성을 지우지 못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뿐이라면 우리는 각각 얼마나 고독하고 아프고 슬플 것인가. 조해진의 소설은 정확하게 이 딜레마에서 출발하고 이를 극복하려 한다.‘나’와 타자는 온전히 겹쳐질 수 없다. 언어가 불완전한 한, 타인의 슬픔이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고 재현한다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하고 실패하더라도 견디며 서로에게 닿기를 갈망하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타자는 재현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재현의 노력만으로, 그리고 오로지 미끄러지면서만 증명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공감과 우정이란 그런 노력 속에서 가능할 것이다.
다른 무엇으로 환원되지 않는 무수한‘나’들의 세계에서, 그럼에도 만일‘우리’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해 우리는 지금 생각할 여지를 얻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