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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연철 『냉전의 추억』, 후마니타스 2009

남북관계의 재구성, 그 흥미로운 역사 읽기

 

 

황준호 黃俊皓

『프레시안』 기자 anotherway@pressian.com

 

 

냉전의추억_표지북한문제에 대한 이명박정부의 대응을‘화해와 협력’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이들의 전략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첫째는 정부 출범 초기 몇개월 동안 드러난‘싹수’를 본 뒤부터 모든 기대를 접고 아예 뿌리째 부정해버리는 방식이다. 그런 이들에게는 대략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망사건 이후부터 더는 할 말이 없어졌다.‘거 봐라, 내가 뭐라더냐’를 되풀이하는 것밖에는. 둘째는 비판하면서도 희미하나마 보이는 긍정적인 요소를 짚어주는 방식이다. 비판의 끝에‘대통령이 이번에 이런 말을 했으니까 한번 기대해보자’는 말을 덧붙이는 것인데, 이명박정부는 결국 그 기대를 저버리기 때문에 비판할 거리가 다시 생기고, 그걸 지적하면서도 또‘이번만큼은…’하면서 다음 비판거리를 묻어두는 전략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자기 주장의 논거 확보란 면에서 영리할지는 몰라도 그 내용이 정확하지 않고 솔직하지도 않다는 결점이 있다. 그야말로 하나의‘전략’에 불과하다.

셋째는, 평자가 한반도문제를 다루는 기자로서 혼자 명명한 것이지만,‘김연철 방식’이 있다. 김연철(金鍊鐵) 한겨레평화연구소장은 이명박정부의 대북정책에 솔직하지 못한 기대 같은 건 품지 않으면서 근본적인 지점을 건드린다. 그러나 늘 새로운 논리를 적용함으로써 식상하지 않게 비판한다. 비판을 위한 비판도 물론 아니다. 김연철이 휘두르는 칼날은 무엇보다 미래지향적이라는 점이 미덕인데, 이명박정부의 남은 3년 반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후를 준비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화해와 협력을 주장하는 세력이라면 가깝게는 2012년 대선에서 한반도정책을 만들 때 반드시 김연철의 논리를 간추릴 필요가 있다. 그의 책 『냉전의 추억』만 읽어봐도 대충 답이 나온다.

‘김연철 방식’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은 풍부한 연구와 현장경험 때문일 것이다. 그는 박사학위를 받은 후 삼성경제연구소 북한연구팀에 있으면서 재계인사들과 함께 대북사업의 현장을 두루 다녔다. 이후 다시 학계(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로 돌아가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제정책을 비교하는 연구를 했다. 그리고 2004년 7월부터는 정동영 통일부장관 정책비서관으로 일하면서 김정일-정동영 면담, 200만kW대북송전 제안, 6자회담 재개와 9·19공동성명 채택 등으로 이어지는 참여정부 외교안보의‘황금기’를 지켜봤다. 그냥 지켜만 본 게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황금기의 주역은 정동영이었지만, 그에게 정책적‘급유’를 한 건 김연철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니‘김연철 방식’이 가능했던 진짜 이유는 실은 다른 데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분단을‘사람들이 살아낸 역사’로 이해한다. 북한의 대남전략을 고려하는 것도 필요하고 우리가 대북정책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이전에 분단의 남북한 관계란 수많은 사람들의 열망과 좌절, 원망과 기대, 만남과 적대, 증오와 희망의 서사를 담고 있는, 인간의 역사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인간과 역사가 없는 남북한 관계를 말할 때 그 속에서 그 어떤 인간적 상상력이 자라날 수 있을까.” 책날개에 씌어진 글대로 『냉전의 추억』은 역사적 문제의식과 인문학적 상상력의 바탕 속에서‘시범적으로’서술된 책이다. 유수의 전문가들이 쓴 남북관계 관련서들과는 결이 완전히 다르다. 무엇보다 장별 구성이 독특하다. 선물교환사(史), 예술경쟁사, 유감표명사, 호칭사 등으로 남북관계의 역사를 재구성했다. 그러나 냉전과 탈냉전 같은 세계사적 흐름과 정부정책이라는 컨텍스트 속에서 풀어냈기 때문에 맥락을 놓치지 않는다. 이명박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그의 비판이 늘 신선하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구석을 짚어내는 것은 이처럼 남북관계의 씨줄과 날줄을 새롭게 짜는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하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씌어진 책을 읽으면서, 남북관계에 대해 발언하고 글을 쓰는 이들은 “다양한 시선으로 분단문제를 다루었으면 좋겠다”(10면)는 말을 새겨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평자는 인터넷언론의 기자로서 기사나 칼럼을 몇명의 독자들이 클릭해 읽는지 실시간으로 확인해볼 수 있는데, 한반도문제를 다룬 글들의 초라한 조회수를 생각하면 남북관계에 대한 담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그래야 한다고 본다.

남북관계사를 새롭게 구성한 책이다 보니 과거에는 그냥 지나쳐버린 각종 에피쏘드에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재발견의 재미가 쏠쏠하다. 가요교류사(184~99면)가 대표적인데,‘심장에 남는 사람’이나‘임진강’처럼 책에 나오는 북한 노래들을 인터넷에서 찾아 들으면서 읽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에 몰입하게 된다. 댄스그룹 베이비복스와 신화가 출연했던 2003년 평양 류경체육관 개관식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당시 동영상을 찾아보면서 낄낄댈 수밖에 없었다. 영상에 나오는 평양의 관객들은 과연 “철없는 손녀의 미니스커트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시선이 되어 박수도 잊고, 굳은 표정으로 무대 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196면) 그 장면들이 특히 기억에 남는 이유는, 재미도 재미였지만 그것들이 이제 당분간은 재현될 것 같지 않은‘교류의 추억’이기 때문일 것이다. 금강산 온정각에서 기막힌 공연을 하던 모란봉 교예단은 지금 어디서 누구에게 써커스를 보여주고 있을까.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한국과 미국이 갈등하고, 한국이 동북아시아 정세와 따로 움직이면서 외교적 고립에 빠지는 상황은 남북관계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 바이다. 이에 대해서도 김연철은 김영삼정부 시절의 흔한 이야기만 내놓지 않는다. 『냉전의 추억』에 따르면,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 당시의 북미협상과 1970년대초 미·중 화해와 중·일 관계정상화 및 일본의 대북 접근과정에서 한국은 이미 그러한 역사를 분명히 경험했다. 김영삼정부 때 통미봉남(通美封南) 현상이 나타나고 한국이 동북아의 외톨이로 전락했던 것은 불과 20여년 전의 역사를 돌아보지 못한 데 따른 어리석은 재방송일뿐더러 우리 현대사에서 숱하게 많았던 외교적 고립의 교훈을 망각하는 처사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의 마지막 장‘협력의 미래’는 앞으로 계속 보강되어야 한다. 저자가 주목하는 개성공단과 서해 평화협력특별지대, 남북철도 연결이 한반도 평화의 미래에 어떤 역할을 할지, 이 책에서 다룬 다른 주제들처럼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새롭게 고찰하지 않으면 그 논리는 박제가 될수도 있기 때문이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평양 방문과 일본의 정권교체 가능성 등으로 또 한차례 동북아 질서의 지각변동이 예고되는 2009년 여름은 1970년대 데땅뜨와 1990년대 탈냉전에 이은 역사의 세번째 고비이다. “시대에 역행하는 자들은 역사의 기차가 굽잇길을 돌 때 떨어져나간다. 때로는 떨어져나간 자들이 역사의 기차를 탈취해 식상하고 희극적인 과거로의 역행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차는 돌아가기도 하지만, 뒤로 가지는 않는다.”(255면) 한국이 역사의 기차를 타고 그냥 갈지, 탈취하려다가 떨어져나갈지 이제는 이명박정부가 답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