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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세계의 블랙홀, 웜홀의 사랑

김사과 장편소설 『풀이 눕는다』

 

 

강동호 康棟晧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문학을 위한, 타자를 위한 변론: 박민규론」 「실패의 존재론: 김현의 문학론을 읽는 방법」 등이 있음. finhir@naver.com

 

 

19세기의 수도 빠리를 거닐었던 보들레르. 이 만보객(flâneur)은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근대적 시공간을 배회하며, 그 만발하는 도시적 이미지들을 삼키고 우울의 날숨(‘빠리의 우울’)을 토해냈다. 짐작건대 이 시인은 상품들의 진경(塵境)이 뿜어내는 모더니티의 현기(眩氣)로 인한 어떤 존재론적 조갈을 견뎌내기 위해, 근대적 삶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기보다는 세계의 속악함과 교묘하게 어울리고 뒤섞이는 일시적 공존방식을 택했을 것이다.

이러한 보들레르의 만보가 자본주의적 시공간을 수평적으로 주유하면서 삶의 각개 국면으로 비스듬히 입사(入射)해가는 방식이었다면, 김사과의 장편소설 『풀이 눕는다』(문학동네 2009)에서 발견되는 인물들의 걸음은 자본주의적 생존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려는 어떤 강렬한 의지의 수직적 분출로 읽힌다. 등단작 「영이」에서부터 장편 『미나』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소설을 지탱하던 사회와 현실에 대한 저 정념(분노)과 광기는 이번 작품에도 건재하다. 그런데 걸음이라니, 그녀의 소설은 두 남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조금 더 톺아본다면, 이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한편으로는 걸음에 대한 이야기와 겹쳐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소설의 첫 장면을 보자. 소설은 주인공(‘나’)이 어느날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하루 종일 걸어다”니는 것으로 시작된다. “왜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11면) 그녀의 걸음은 일종의 반복강박에 들린 신경증자의 그것처럼 목적 없이 스스로를 표류시킨다. 순수한 육체적 소모처럼 보이는 이 행위의 원인은 어떤 절망에 맞닿아 있는데, “가장 두려웠던 건 내 두려움의 원인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14면)라는 진술이 담고 있는 것처럼 그 절망은 자신의 이 강박적 걸음을 멈출 수 없다는 데서 비롯한다. 이것은 일종의 순환논리지만 이 순환논리가 직조하는 어떤 출구 없는 풍경이 김사과 소설의 기조(基調)를 이루고 있다. 에컨대 다음과 같은 세계관. “도시는 거대했다. 아니 끝이 없었다. 아무리 걸어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13면) 이른바 끝없이 팽창하는 우주의 그것처럼 세계의 바깥으로 나아가는 걸음 자체가 도리어 세계의 경계를 확장하는 데 복무할 뿐이니, 도시의 끝은 애당초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완강하면서도 유연한 도시의 괴물성은 개개인의 내부에 있는 “욕망이란 관념 그 자체”(146면)를 적시하거니와, 우리는 그야말로 견고한 모든 것을 대기 속으로 날려버리는 블랙홀 같은 자본주의의 시공간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녀가 삶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풀’과의 만남 덕분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녀는 ‘풀’의 걸음을 통해 “순수한 삶”“진짜 삶”(161면)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우연히 도시의 한가운데서 ‘나’는 무기력한 자신의 삶(걸음)과 달리 ‘풀’의 “끝까지 걷는 걸음”(26면)을 목격한다. 아무리 걸어도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던 이 세계에서 가히 끝을 향해 나아갈 것 같은 한 남자의 걸음으로 인해 ‘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꿈꾸게 된다. “나는 걷는 게 그렇게 좋은 건지 몰랐어요. 단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어요. 근데 당신이 나한테 느끼게 해줬어요. 맞는 표현인지 모르겠는데요, 당신이 날 구해준 거 같아요.”(32면)

그런데 앞서 모더니티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다시 말하자. 소설 속 인물들이 발견한 끝은 도시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어떤 가시적인 지대가 아니라, 기존의 삶 안에서 내 에너지를 모두 가열함으로써 발견되는 증류수 같은 순수한 삶이다.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사랑의 변주곡」)라고 김수영(金洙暎)은 썼거니와 김사과의 걸음은 실로 이를 닮아서, “굶주림 그 자체”(161면)인 세계의 위장 안으로 진입하여 그 출구 없는 세계의 블랙홀을 내파(內破)하고 다른 차원의 시공간으로 도약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른 세계로의 근본적인 차원 이동이라 할 만한 이러한 행보는 블랙홀의 강력한 중력을 기꺼이 온몸으로 감내하면서, 바로 그 암흑의 핵심 한가운데에 다른 차원으로의 웜홀(worm hole)을 뚫어내는 걸음이다. 그 걸음의 이름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책임을 뜻하지 않는다. 그건 가장 살아 있다는 걸 뜻했다. 그리고 살아 있다는 것은, 과거와 미래를 망각한다는 뜻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지금 이 순간만을 바라보겠다는 약속이다. 그게 바로 사랑이다.”(158면)

“생생하게 살아 있”(162면)다는 것을 느끼는 삶. 이렇게 사랑은 삶 그 자체, 즉 외부의 그 어떤 물질적 욕구에도 의지하지 않는 자율성을 뜻한다. 이 자율적 공동체를 구축하려는 김사과의 이상주의는 너무도 급진적이라서 급기야는 “사랑 안에서 굶어 죽겠다”(158면)는 말처럼 자기 목숨까지도 판돈으로 걸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선언은 철지난 유산처럼 비칠지도 모른다. 혁명의 역사가 가르쳐주듯, 자본주의가 쳐놓은 생존의 그물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길은 가뭇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기에 ‘나’는 ‘풀’에게 다음과 같이 비극적인 예언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너는 파괴당할 거야. 짓밟힐 거야. 너는 절대로 못 이겨. 절대로. 그리고, 그러니까, 풀.

너는 절대로 지면 안돼.

너는 절대로 파괴당하면 안돼. 너는 포기하면 안돼. 짓밟히더라도, 살아남아야 해. 이게 내가 널 사랑하는 이유야.(147면, 강조는 원문)

 

웜홀이란 수학이론상으로만 가능하다는 물리학자들의 진단처럼, 세계의 블랙홀로 뛰어들어 화이트홀로 나아가겠다는 혁명적 사랑은 어쩔 수 없이 현실의 기조력(起潮力)이 일으키는 파고에 의해 분쇄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세계로 나아가고자 했던 그들의 폐쇄적 사랑은 필연적으로 “빈곤에 도착”(152면)할 수밖에 없으며, 생존을 이어가기 위한 빈곤과의 투쟁을 결국 그들은 인정하게 된다. 소설 속 인물들의 사랑이 결국 무너지고 풀이 죽음에 이르는 것은 이 이상적 공동체를 지탱할 방법이 실상 존재할 수 없음을 환기한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자. 이 소설의 행보가 실질적으로 실현하는 것은 새로운 세계의 현재적 도래가 아니다. 그것은 “너는 파괴당할 거야”라는 예감과 “너는 절대로 파괴당하면 안돼”라는 당위 사이의 논리적 공백을 채워주는 뜨거운 의지, “그리고, 그러니까”를 지탱하는 어떤 강인한 의지이다. “난 살아 있으니까. 난 매번 더 깊이 후회할 것이고, 그러나 또다시 기적을 바랄 것이다”(282면)라는 ‘나’의 말처럼 순수한 삶을 향한 의지는 이토록 강렬하여, 설혹 스스로를 파괴하고 실패의 진창으로 밀어넣는다 할지라도 끊임없이 재생될 것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김사과는 이같은 삶의 필요성을 단순히 주장하려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의지를 최대한 살고자 한다. 바로 글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그러한 맥락에서 수식어를 최대한 배제한 채 자신이 목표로 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향해 최단거리를 확보하려는 김사과식 하드보일드 문체는 소설의 육체를 구성한다. 이 온몸의 서사는 일견 미성숙의 표지로 읽힐 여지도 있지만, 우리는 그녀를 통해 미성숙성 자체가 작가가 그토록 가닿으려는 세계, “삶 그 자체”를 체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물론 작가는 번번이 패배하고, 짓밟힐 것이다. “그리고, 그러니까” 감히 말하건대, 작가의 글쓰기가 멈추지 않는 이상 저 도래할 세계에 대한 김사과의 가열한 걸음 또한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세계와 더불어 작가의 글쓰기가 마멸하는 순간 그 글쓰기의 발걸음은 세계의 끝, 웜홀의 사랑에 이를 것이다. 그 도래할 웜홀 속으로 “우리는 함께할 것이다.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우리는 그곳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29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