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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브루노 라투르 외 지음, 홍성욱 엮음 『인간·사물·동맹』, 이음 2010
자연과 사물에도 행위주체성을
김상현 金湘顯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 과학사회학 shkim67@hanyang.ac.kr
지난해 9월, 영국의 교육 전문 주간지 『타임즈 고등교육』(Times Higher Education)은 흥미로운 자료 하나를 보도했다. 미국 과학정보연구소(Institute for Scientific Information, ISI)에 등록된 인문학·사회과학 분야 학술지의 수록논문들에서 2007년 한해 동안 인용한 책의 저자들을 그 빈도에 따라 나열한 목록이었다. 실제 연구동향을 평가하기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는 것이었지만, 북미 및 유럽의 인문사회과학계의 최근 경향을 대체적으로 보여주는 결과였다.
가장 많이 인용된 학자 열명 중에는 예상대로 푸꼬, 부르디외, 데리다, 기든스, 하버마스, 베버 등 익숙한 이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열번째 순위에는 들뢰즈, 칸트, 하이데거, 싸이드, 벤야민, 아렌트, 라깡, 맑스 등을 제치고 인류학자이자 이론가 브루노 라뚜르(Bruno Latour)가 선정되었다. 국내 지성계에 생소한 라뚜르가 북미 및 유럽에서 이처럼 많이 인용되는 배경은 무엇일까?
라뚜르는 과학기술에 관한 역사·철학·사회학·인류학적 탐구를 포괄하는 학제적 분과인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STS), 그중에서도 구성주의(constructivist) STS의 전통을 대표하는 학자다. 그의 작업에 대한 관심은 구성주의 STS가 인문사회과학의 중요한 일부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더 직접적으로는 그가 미셸 깔롱(Michell Callon), 존 로우(John Law) 등과 함께 구성주의 STS, 나아가 인문사회과학의 새로운 방향으로 주창해온 행위자연결망이론(actor-network theory, 이하 ANT)이 북미와 유럽 학계에서 상당한 반향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ANT는 사회학자 김환석(金煥錫)의 저술 등을 통해 국내에도 소개되어왔다. 하지만 그 함의와 쟁점이 심도있게 논의되거나 관련 저서와 논문이 활발히 번역되었던 것은 아니다(라뚜르의 대표저작 중 하나인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는 1991년 출간된 후 20여년이 지난 2009년에야 국역본이 출간되었다). 더욱이 ANT의 난해한 개념과 표현들은 일부 독자층의 흥미를 유발하는 데 기여했지만, 또다른 많은 이들에게는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그런 점에서 과학사학자 홍성욱(洪性旭)이 편역한 『인간·사물·동맹: 행위자네트워크 이론과 테크노사이언스』의 출간은 시의적절하다. 이 책의 전반부에 실린 로우, 깔롱과 라뚜르의 글들은 ANT의 주요 주장을 잘 정리하고 있으며, 홍성욱과 김환석의 글은 그 의의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후반부에는 ‘존재론적 정치’(ontological politics)나 들뢰즈의 용어를 발전시킨 ‘아장스망’(agencement) 같은 ANT의 새로운 개념도구들을 기술적 위험과 금융 등의 사례에 적용한 경험연구, 그리고 ANT의 시각에서 정치와 민주주의를 새롭게 조명한 라뚜르의 글이 소개되고 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홍성욱과 김환석의 글을 제외한 대부분의 수록논문들이 지난 20여년간 ANT와 구성주의 STS가 걸어온 궤적에 대한 사전지식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책의 곳곳에서 ANT가 ‘사회구성주의’ 접근과 차별성을 지닌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지만,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부족하다. 때문에 구성주의 STS의 학문적 계보를 알지 못하는 독자들은 그 차이의 의미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사회구성주의에 대한 많은 오해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는 가볍게 지나칠 문제가 아니다. 과학지식이 사회적으로 구성됨을 주장해온 사회구성주의에 대해 자주 제기되어온 오해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과학지식의 생산에 사회적 요인이 개입되는 것만을 강조하고 자연 실재의 역할을 부정하는 반실재론이라는 주장이다. 둘째, 사회적 요인 중에서도 계급관계 같은 거시적 측면을 편향되게 강조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셋째, 인식론적 주관주의나 ‘무엇이든 가능하다’(anything goes)는 식의 극단적 상대주의와 다를 바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이같은 오해의 이면에는 지식의 생산이 ‘지식〓자연+사회’의 제로썸 게임과 같다는 통념이 자리한다. ‘사회’는 자연 실재와 상호작용하는 개별 행위자의 추론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 요인일 뿐이며, 그 역할이 강조될수록 ‘자연’의 역할은 축소된다는 것이다. 반면, 사회구성주의는 지식의 생산을 자연과 사회의 벡터곱으로(지식〓자연×사회) 파악하고자 한다. 개별 행위자가 자연 실재와 상호작용하여 인지하는 경험은 그가 속한 공동체가 공유하는 언어, 개념, 이론 등의 사회적 렌즈를 경유하여 지식으로 구성된다. 즉 (언어화되지 않은) 자연 실재와 그에 대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사회 모두 지식의 필수 구성요소이며 둘 중 어느 쪽이라도 없다면 (과학)지식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종종 오해되는 것과 달리 사회구성주의는 (전통적 실재론과는 다르지만 그럼에도) 실재론에 입각해 있다. 개별 행위자의 자의적 선택에 모든 것을 귀속시키는 인식론적 주관주의와도 정반대에 위치한다. 과학지식이 ‘객관적’으로 생산된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성 자체가 사회적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사회적인 것’(the social)의 범위에 대해서도 과학 공동체 내부의 동학으로부터 거시적인 사회·정치적 맥락에 이르는 다양한 층위에 열려 있다. ANT의 독창성이 제대로 평가될 수 있기 위해서는 이같은 사회구성주의의 입장이 바로 ANT의 출발점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ANT가 사회구성주의에서 넘어서고자 했던 부분은 무엇인가? 사회구성주의 연구들은 사회적 범주들과 그 경계가 구성, 재구성된다는 점에는 주목했지만 사회 세계가 사물들에 의해 매개된다는 것이 갖는 함의는 (적어도 초기에는) 고려하지 못했다. 또한 지식의 객체로서 (언어화되지 않은) 자연적 실재의 역할은 충분히 인정했지만, 인식 주체인 인간이 그에 대해 제시하는 ‘해석’을 분석하는 데 치중해 있었다. 이에 대해 ANT는 자연(사물)의 재현과 표상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었음을 드러내는 것만큼 그 물질성을 인식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비인간(자연/사물)에게 인간과 마찬가지로 행위주체성을 부여할 것을 주장한다.
물론 ANT가 비인간에 행위주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기호학적 차원에서이지 다시금 사회로부터 독립된 자연 실재를 논하고자 함이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물질-기호학(material-semiotic)의 접근이 인간/비인간, 사회/자연, 주체/객체의 이분법이 가져오는 문제점들을 명쾌히 해결하기보다 또다른 혼선들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ANT가 사회구성주의에 비해 전통적 실재론에 더 가깝다고 여겨 선호된다거나, 반대로 화려한 언술의 포장을 걷어내면 결국 ANT는 전통적 실재론으로 회귀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 등이 그 예이다.
불필요한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인간·사물·동맹』을 2권으로 나눠 그중 한권에서는, 구성주의 STS내에서 ANT를 둘러싸고 진행되어온 주요 논쟁을 소개하면 어땠을까 싶다. 과학사학자 셰이핀과 셰퍼가 ANT에 행한 비판과 그에 대한 응답, 깔롱과 라뚜르 그리고 과학지식사회학자 콜린즈와 이얼리 사이에 벌어졌던 ‘인식론적 겁쟁이’(epistemological chicken) 논쟁,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자 해러웨이의 비판, 과학사학자 르누아의 물질-기호학 비판 등이 포함되었다면 ANT의 강점과 약점을 깊이있게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ANT처럼 야심차고 방대한 포괄적 지적 흐름을 한두권의 책으로 정리하고 평가한다는 것은 애초 가능한 일이 아니다. 가뜩이나 학제적 STS분과, 특히 구성주의 STS의 전통이 미약한 우리의 인문사회과학계의 풍토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인간·사물·동맹』의 출간이 출판사의 홍보문구처럼 ANT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서를 제공하는 것이 되기는 그리 쉽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이 책이 국내의 ANT논의를 풍부하게 하고 한단계 진전시키는 데 기여할 것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