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최정례 시집 『레바논 감정』, 문학과지성사 2006

통곡을 멈추고 국숫발을 빠는 슬픔

 

 

김기택 金基澤

시인 needleeye@kornet.net

 

 

너는 칼자루를 쥐었고

그래 나는 재빨리 목을 들이민다

—「칼과 칸나꽃」 부분

 

레바논-감정시적 화자가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 세상에 발가벗겨진 채 던져졌을 때, “찬란한 웅덩이, 잠깐의 호텔 캘리포니아”인 길바닥 물웅덩이에 올챙이처럼 그를 “누군가 떨구고”(「웅덩이 호텔 캘리포니아」) 갔을 때, 그렇게 맞닥뜨린 삶이 자신을 향하여 칼자루를 쥐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한번 받으면 무조건 살아내지 않으면 안되는 삶. 일탈에는 혹독한 댓가가 기다리는 삶. 일방적으로 그를 세상에 던진 자는 모든 비난이나 책임에서 자유롭고, 던져진 자는 그것을 다 뒤집어써야 하는 삶. 그 삶과 시적 화자 ‘나’의 관계는 칼자루를 쥔 자와 칼날 앞에 선 자의 관계와 같다. 삶이 ‘칼’이라면, 그것을 살아내야 하는 자는 ‘칸나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화자가 칼날에 목을 들이대는 태도는 그가 용맹한 장수처럼 죽음 앞에서 추호의 흔들림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자신이 받은 삶의 억울함이나 비루함, 터무니없음을 견디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문을 걸어 잠그고

슬퍼하자 실컷

첫날은 슬프고

둘째 날도 슬프고

셋째 날 또한 슬플 테지만

슬픔의 첫째 날이 슬픔의 둘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둘째 날이 슬픔의 셋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셋째 날이 다시 쓰러지는 걸

슬픔의 넷째 날이 되어 바라보자

 

상갓집의 국숫발은 불어터지고

화투장의 사슴은 뛴다

울던 사람은 통곡을 멈추고

국숫발을 빤다

—「칼과 칸나꽃」 부분

 

칼은 웬만큼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차갑고 단단하고 날카로운 물성을 지닌 반면, 칸나꽃은 금방 시들어 아름다운 형체가 흉하게 변질되는 물성을 지니고 있다. “막 지고 있는 칸나꽃”(장례식장의 고인故人) 앞에 선 화자에게 주어진 ‘슬픔’이라는 것은 실컷 슬퍼하다가 “통곡을 멈추고/국숫발을”빠는 슬픔이다. 국숫발을 빨 때의 슬픔은 고인 앞에서 통곡하던 그 슬픔과는 다르다. 그것은 곧 시간이 지나면 시들어 본래의 형태를 잃는 칸나꽃처럼 폭력적인 시간에 의해 쉽게 변질되는 슬픔이다. 그 슬픔에는 시간의 폭력이 가해져 썩어문드러진 칸나꽃의 육체성이 깃들어 있다. 그 슬픔은 슬픔이라고 이름붙이면 곧 우스꽝스러워지고 상스러워지는 무엇이 된다. 첫째 날의 슬픔에 들어 있던 감정의 높은 순도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점점 약화되어 넷째 날의 슬픔에는 거의 이름만 남게 된다. 그 슬픔의 흉한 모습, 역한 냄새, 그 우스꽝스러움과 상스러움이야말로 몸이 곧 시간인 존재의 정체이다. 그러므로 “슬픔의 셋째 날이 다시 쓰러지는 걸/슬픔의 넷째 날이 되어 바라보자”는 권유에는 시간에 의해 변질되는 슬픔에 속지 않고 그것의 정체를 냉철하게 응시하려는 화자의 의지가 담겨 있다. “칸나꽃이 칸나꽃임을 이기기 위해/칸나꽃으로 지고 있다”고 했을 때, 칸나꽃이 이겨내야 하는 대상은 칼이 아니라 칸나꽃 자신이다. 삶과 시간의 폭력성에 울며 아우성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성과 육체성에 의해 죽는 죽음을 눈 똑바로 뜨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칼자루를 쥔 자에게 목을 들이미는 태도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화자는 “암놈 위에 붙은 두꺼비처럼” “늙은 엄마 등에 들러붙어”있는 “깜깜하고 악착한 아이”(「그늘」) 같은 삶, 또는 “자기 몸속에 갇혀 늑대처럼 괴성만 지르고” “먹기만 하고 싸기만 하고 신발은 늘 거꾸로 신고/아프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덕구”(「화물기차」)처럼 힘만 세고 막무가내이고 제멋대로인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런 삶은 낭비야, 이건 죄악이야,/날 놓아줘, 부탁해,”(「그녀의 입술은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라며, 사랑하지 않는데도 끈질기게 달라붙는 애인에게 이제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 있게 놓아달라는 팝송 가사는 바로 최정례(崔正禮)가 자기 삶에게 하는 호소이기도 하다.

때때로, 아니 빈번하게, “쏟아뜨린 것 주워 담을 수 없어/도저히 돌이킬 수 없어/매일이 그렇듯이 그날도/껌벅거리다/주머니 뒤적거리다/그냥 자리를 떠났듯이”(「껌벅이다가」) 화자는 속수무책으로 삶의 무게와 시간의 속도에 매몰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그런 어수룩한 자신의 모습을 어수룩하지 않게 들여다본다. 말하자면 알면서도 속는 것이다. 그래서 복숭아꽃이 활짝 핀 복숭아나무를 보면서 “길가에서 길 안쪽으로 쓰러지는 척/구릉 아래쪽으로 기울어/몸 가누지 못하는 척//허공에 진분홍 풀어/지나가는 사람 걸어 넘어뜨리려고//안 속는다, 안 속아”(「비스듬히」)라고 빈정대며, 버드나무를 보고는 “초록빛 혀를 내뿜”고 “가는 허리 긴 치마 늘어뜨”린 경국지색을 떠올리며 “쓸데없이/누구 또 넘어뜨리려고/흥, 봄이 와서”(「경국지색」)라고 냉소한다. 색과 향기와 자태로 위장한 사랑의 속임수를 이미 겪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속아 넘어지고 싶고, 가는 허리 긴 치마 늘어뜨리고 놀고 싶기도 한 것이 냉소 뒤에 감춰진 진짜 심정이기도 할 것이다. 다 잊고 쉬고 싶고 놀고 싶도록 하는, 그런 만큼 강퍅한 삶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리라.

그러면서도 시인은 삶과 시간의 폭력으로부터 경쾌한 일탈을 꿈꾼다. 벌판 한복판에 서서 “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熱心으로생각하는것처럼熱心으로꽃을피워가지고”있지만, “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는 이상(李箱)의 꽃나무를 오토바이에 태워 벌판 한복판을, 시간성과 육체성에 볼모잡힌 삶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통쾌하게 달려가보는 것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만이 살고 있던 거리로 그와 나 사이에 사무쳤던 거리로 내가 닥지닥지 꽃을 피워놓고 꼼짝없이 서 있을 수밖에 없었던 거리로 막 달아나고 싶었던 거리로 그와 나 사이 절해고도의 그곳으로

—「달려가는 꽃나무—李箱의 「꽃나무」를 위하여」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