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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랭던 위너 『길을 묻는 테크놀로지』, CIR 2010

첨단기술시대에 요구되는 인문사회과학의 반성

 

 

김상현 金湘顯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연구교수 shkim67@hanyang.ac.kr

 

 

10932오늘날 우리는 ‘기술사회’에서 살아간다.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자리에 들때까지 기술—기술적 지식, 실천, 인공물 그리고 씨스템—을 매개하지 않는 순간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회사에 출근해서 업무를 진행하고, 신문을 읽고, 은행에서 돈을 찾으며, 식사를 한 뒤 비용을 지불하고, 친지들에게 연락하는 등의 모든 과정이 그러하다. 개인의 일상에서 시야를 조금만 넓혀보면 ‘기술사회’의 면모는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페이스북, 트위터, 스마트폰의 열풍뿐 아니라 코스피지수의 변동부터 미 쇠고기 수입과 광우병의 위험, 구제역 확산, 저출산과 고령화, 핵발전 중심 에너지정책과 핵폐기물 저장, 경인운하와 4대강 개발, 세종시 이전, 천안함 침몰 논란, 북한의 핵무기 개발,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협약에 이르는 수많은 사안 중에서 과학과 기술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 경우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기술사회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 점은 인문학・사회과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때로 잘 모른다는 겸허의 외양을 띠거나 무관심한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과학과 기술에 아무런 입장도 없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다수의 인문학자·사회과학자들은 과학과 기술은 사회로부터 유리되어 내적논리에 의해 작동하는 중립적인 것이며 그러나 일단 도입이 이루어지면 사회를 특정한 (대개 긍정적인) 방향으로 필연적으로 변화시키리라는 ‘기술결정론’을 별다른 이의 없이 채택해왔다. 그리고 이는 종종 인간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가장 신뢰할 만한 길은 자연과학에 기반을 둔 원칙과 방법에 의존하는 것이라는 ‘과학주의’와 결합되곤 했다. 이러한 시각들은 그 자체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지만,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많은 인문학자·사회과학자들에 의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져왔다.

그 결과 기술사회에 대한 인문사회과학 논의의 폭은 크게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정작 과학과 기술은 탐구와 분석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단지 그것이 권력과 이해관계에 따라 오용되지 않도록 양심적이고 유능한 전문가, 관료, 정치인, 그리고 계몽된 시민이 필요하다는 수준의 비평만이 반복되어온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쿤(T. Kuhn), 푸꼬(M. Foucault)에서 라뚜르(B. Latour)에 이르는 여러 학자들이 이같은 인식적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졸고 「자연과 사물에도 행위주체성을」, 창작과비평 2010년 여름호 및 실라 재써노프 「테크놀로지, 정치의 공간이자 대상」, 창작과비평 2010년 가을호 참조), 한국에서 그 학문적 중요성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출간된 지 25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미국 정치학자 랭던 위너(Langdon Winner)의 『길을 묻는 테크놀로지』(The Whale and the Reactor: A Search for Limits in an Age of High Technology, 손화철 옮김)가 번역된 것이 반가운 이유는 한국 인문사회과학계의 그러한 사정 때문이다.

10편의 글로 구성된 이 책은 3부로 나뉘는데, 그중 1부는 기술결정론의 한계를 넘어 기술사회를 성찰하도록 돕는 대안적 사유의 틀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언어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논의를 확장하여 기술을 ‘삶의 형식’(forms of life)으로 이해할 것을 주장한다. 기술은 우리의 삶을 규제하고 변형시키지만 역으로 이를 가능케 하는 기술의 의미, 특성과 작동방식은 주어진 사회적 삶의 패턴에 따라 형성된다는 것이다(1장). 이는 선용/오용 여부를 떠나 기술이 그 자체로서 정치적 속성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 건설된 뉴욕 롱아일랜드 고가도로가 버스가 다닐 수 없도록 낮게 설계된 것은 흑인과 빈곤층을 차별하는 위계적 사회관계를 응축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2장). 위너는 기술이 어떠한 사회·정치질서를 반영하며 그리하여 어떠한 방향으로 사회를 구축해가는지의 문제를 인문학·사회과학이 더이상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법의 제정과 시행에서처럼 기술의 발전과 활용과 관련해서도 민주적인 정치실천이 모색되어야 함을 강조한다(3장).

2부에서는 기술사회의 도래에 직면하여 나름의 방식으로 기술의 정치를 상상했던 세가지 시도 혹은 비전을 검토한다. 거대 기술씨스템을 거부하고 환경친화적이며 지역공동체의 자급자족에 부합하는 연성(soft) 기술을 주창한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 운동(4장), 기술발전의 긍정적 효과를 수용하는 길이자 기술사회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되었던 ‘탈집중화’(decentralization)의 추구(5장),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정보기술의 확산이 참여민주주의를 강화하리라는 기대(6장)가 그것이다. 이 사례들은 모두 1970년대의 것이지만 여러 변형된 형태로 지속적으로 재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시의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세가지 사례가 각각 기술의 사회·정치적 함의를 주목하고는 있으되 기술이 단일한 파급효과를 낳을 것이라는 결정론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개별 기술에 집중하여 이들이 위치한 사회·정치·경제적 맥락을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어 3부에서는 기술에 관한 논의를 틀지우는 대표적 담론들을 다루고 있다. 기술이 야기하는 문제는 무엇이며 어떠한 대응이 요구되는가라는 질문에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의 답만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질문 자체가 어떻게 이해되고 정의되는가에 따라 다른 방향의 답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많은 경우 ‘자연’에의 순응(7장), ‘위험’의 평가(8장), 그리고 ‘가치’에의 호소(9장) 같은 담론틀에 의존하는데, 이 책은 이들 모두가 중대한 결함을 안고 있다고 비판한다. 자연을 ‘상품의 원료’로 파악하건 혹은 위협받는 ‘생태씨스템’이나 ‘선의 근원’으로 의미를 부여하건 그것은 인간사회를 떠나 이해될 수 없는 사회적 범주다. 그런데도 자연을 본질화, 절대화하여 사회·정치적 판단과 행동을 그에 종속시키려는 경향은 보수적인 기술의 정치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기술사회가 제기하는 복잡한 사회·정치적 의제들을 과학을 통해 위험의 여부와 정도를 평가하는 차원으로 환원해버리는 과학주의와 기술관료주의의 심각성도 결코 덜하지 않다. 막연하게 ‘사실’과 대비되는 ‘가치’를 상정함으로써 지배적 사회·정치질서가 오히려 가려지는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결론을 대신하는 저자의 자전적 에쎄이(10장)는 ‘우리가 좀더 나은 선택을 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글을 맺는다. 기술사회에 대한 대안적인 사유는 서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민주적 정치를 실천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저자의 생각이 잘 담겨 있다. 물론 아직까지 기술결정론과 과학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의 인문학・사회과학계로서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기술은 곧 정치적이며 정치는 다시 기술을 매개한다는 점을 설득력있게 보여줌으로써 우리 사회가 기술의 민주적 정치를 향해 한걸음 나아가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미 발표된 글들을 모아 편집한 탓에 각 장 사이의 연결이 매끄럽지 않고 논의 수준이 고르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말미에 실린 옮긴이 해제가 이러한 문제점을 어느정도 보완해주고 있다. 기술에 대한 정치철학 논의를 개척해온 위너의 작업을 더 살펴보고 싶은 독자라면 그의 『자율적 테크놀로지와 정치철학』(Autonomous Technology: Technics-out-of-Control as a Theme in Political Thought, 강정인 옮김, 아카넷 2000)을 함께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