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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5806조효제趙孝濟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저서로 『인권의 문법』 『인권의 풍경』 등, 역서로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 『전지구적 변환』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 등이 있음. hyojecho@hotmail.com

 
 
 

1호선의 종결자들

 

 

벌써 몇해 전의 일이다. 늦가을 어느 금요일 저녁, 수업을 마치고 서울시청 근처에서 모임이 있어 시내로 나가는 전철을 탔다. 차 안은 붐비는 편이었지만 용케 자리를 잡아 앉아 갈 수 있었다. 시청역까지 약 반시간 거리니 신문을 읽거나 짤막한 글 한편을 읽기에 적당한 시간이었다. 전철이 한강을 건너 용산, 남영, 서울역을 지났다. 나는 읽던 글을 가방에 넣고 곧 내릴 준비를 했다. 그런데 서울역을 출발한 지 일이십초나 지났을까, 둔탁한 기계음으로 ‘툭’ 소리가 나더니 전동차가 별안간 멈춰서버렸다. 바닥에 풀썩 주저앉듯 갑자기 얼어붙은 전동차 안에는 일순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열차가 정지한 것보다 더 심각한 일은 전기가 모두 나가버렸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승객이 정말 칠흑 같은 어둠속에 순식간에 묻혀버렸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그 누구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내방송도 나오지 않았다. 승객들은 처음엔 놀라서인지 아무 말이 없다가 하나둘씩 휴대폰을 꺼내 여기저기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약속에 늦겠다, 터널 속에 갇혔는데 어쩌면 좋으냐, 텔레비전 틀어봐라 혹시 임시뉴스 나오는지 등등. 휴대폰이 없는 나로선 그저 심연 같은 앞만 우두커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내 마음속이 성인군자처럼 평온했다고 말한다면 진실과 거리가 멀다. 온갖 불안한 생각이 다 들었다. 대구 지하철 참사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때였다. 대체 무슨 일일까, 차라리 지금이라도 문을 열고 나가버릴까, 평소 전동차 문 여는 방법을 익혀놓을걸, 만일 화재사건이라면 이렇게 조용하진 않겠지, 여기서 변을 당한다면 이게 무슨 개죽음이냐 나는 대기만성형인데, 어쩐지 오늘 약속이 처음부터 내키지 않더라니, 평소 만나던 곳에서 만났더라면 서울역에서 갈아탔을 텐데 하여간 총무란 작자가 문제다, 살아 나가기만 한다면 좋은 선생 좋은 가장 좋은 인간 좋은 시민으로 다시 태어날 텐데, 설마 아무 일 없겠지…… 설상가상으로 내 앞에 서 있던 아주머니 한분이 119에 계속 전화를 하면서 왜 ‘구조대’가 오지 않는가 하고 큰 소리—거의 울먹이는—로 문의하는 통에 주변 사람들의 불안은 극에 달했다. 삼십분쯤 지나 마침내 첫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전기 고장으로 정차해 있으니 승객 여러분은 ‘안전한’ 실내에서 기다리라는 짤막한 메씨지였다. 그후 안내방송이 몇번 더 나왔고 결국 우리가 탄 전동차가 움직일 수 없으므로 구조열차가 와서 우리를 밀고 시청역으로 갈 것이라고 했다. 아닌게 아니라 얼마 후 우리 칸 뒤쪽으로 다른 열차가 와서 꽝 소리를 내면서 우리를 밀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열차가 급정거하더니 다급한 안내방송이 나왔다. 차문을 열고 철로로 내려간 승객이 있다는데 빨리 불러들이라고, 한 사람이라도 밖에 나가 있으면 열차가 움직일 수 없다고. 그 순간 오랫동안 끈기있게 기다리고 있던 승객들의 입에서 일제히 분통이 터져나왔다. “어떤 XX야!”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전동차는 시청역에 도착했고 나는 마침내 역 구내를 벗어나 지상에 올라올 수 있었다. 심호흡을 하면서 시계를 보니 내가 무려 75분이나 터널 속에 갇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다음날 조간신문에 단신으로 사건소식이 실렸다. 많은 승객들이 불편을 겪었다는, 단지 불편만(!) 겪었다는 한줄짜리 기사였다. 월요일에 출근해서 동료 선생들에게 사고 이야기를 했더니 대다수가 내 안위에 대해선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거봐라, 휴대폰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통화기록이 있어야 가족이 보상받을 수 있다더라”고 하는 게 아닌가. 내가 평소 학내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확실해진 순간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휴대폰에 대한 지적은 일리가 있어 보였다. 통화도 통화지만 휴대폰이 암흑 속에서 전등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는 걸 생생하게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제야 나는 지하철 행상들이 팔고 다니던 손전등 기억이 났다. 그걸 진작 구입하지 않은 게 뒤늦게야 후회가 됐다. “갑자기 정전이 되어 쩔쩔맬 때 구세주만큼 반가운” 거라고 하던 제품 말이다. 며칠 뒤 전철에서 손전등 행상을 다시 만났을 때 나는 즉시 거금을 쾌척하여 하나를 구입했다. 고맙게도 수은전지까지 여분으로 끼워주었다. 나는 지금도 가방 속에 이 손전등을 지니고 다닌다. 당장 쓸 일은 없지만 언젠간 요긴하게 사용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 사건 이후 나는 지하철의 예언자적인 행상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해온 지도 어언 십여 성상이 넘었다. “지난 십육년간 계속 지하철 행상을 관찰해오신 달인”이라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닌 셈이다. 관찰만 한 건 아니다. 구입한 적도 많다. 한 학기 동안 사모은 물품을 학기말에 학생들에게 상으로 나눠준 적도 있다. 크게 환영받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행상들은 대개 남자라고 보면 된다. 여자는 열에 겨우 두셋이나 될까. 나이는 일반적으로 중년에 가깝다. 말씨로 미루어보건대 출신지역에는 대중이 없다.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제주도 빼고 고루 다 섞여 있는 것 같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의 인터넷 토론방에 들어가 보면 서울의 지하철 행상들이 “2분 동안 정중한 프레젠테이션”을 한 후 물건을 판매한다는 묘사가 나온다. 달인의 분석에 따르면 행상들의 프레젠테이션은 일곱단계의 대동소이한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단히 논리적이어서 그 설득력의 수준이 장난 아니다. ①우선 깍듯한 양해의 인사로 시작한다(“복잡한 차내에서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②승객들에게 기쁜 소식이 도래했음을 알린다(“오늘 좋은 물건 하나 가지고 나와봤습니다”) ③모든 사람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중요한 이슈를 암시적으로 의제화한다(“씽크대, 욕조, 배관, 변기 자주 막히시죠?”) ④기존 해결방식의 미흡함을 지적한다(“화공약품 많이 부어보셨죠? 안 뚫리죠”) ⑤대안적인 시도 역시 서민의 형편상 녹록지 않음을 상기시킨다(“기술자 한번 부르면 무조건 만오천원 줘야 하죠”) ⑥제안하는 상품의 효과와 특성을 강조한다(“이 특수 플라스틱 꼬챙이로 쑤시면 시원하게 뚫리죠, 쓰신 후 걸어뒀다 또 쓰시면 되죠”) ⑦마지막으로 제품의 품질에 비추어 가격이 불가사의하게 저렴하다는 사실로 전체 서술을 마무리한다(“단돈 이천원, 기분 좋은 특별가에 모시겠습니다”) 독자들을 위해 예문 하나를 더 제시하니 직접 분석해보시기 바란다. 생략된 부분은 심층구조로 이해하시면 되겠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아주 좋은 정보 한가지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손발이 찬 아가씨, 아주머니, 할머니 많으시죠. 한여름에도 양말 신어야 하는 분, 주위에서 자주 보시죠. 하지만 일반 양말은 땀나고 일일이 세탁해야 하죠. 이 특수 커버를 신고 계시면 열이 나는데도 땀을 흡수해서 항상 발바닥이 보송보송합니다. 물량이 제한되어 있는 관계로 몇분께만 세켤레 단돈 오천원에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용 긴 목도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들이 다루는 물품의 종류는 극히 다종다양하다. 고전적인 제품에서부터 건강미용 용품, 생활용품, 계절상품, 아이디어 상품, 식품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몇가지만 들어보자. 손전등, 면도날, 전기면도기, 배터리, 음악 CD, 반창고, 무릎 압박붕대(손목밴드는 공짜로 끼워줌), 치약, 칫솔, 채소껍질 벗기는 채칼, 접착제, 수첩, 볼펜, 씽크대 구멍 뚫는 꼬챙이, 헝겊 걸레, 칼갈이, 선풍기 커버, 비옷, 부채, 털장갑, 털모자, 삶은 옥수수, 돋보기안경, 우산, 손 재봉기계, 양말, 돗자리까지. 잘 고르면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상품도 있다. 털장갑은 작년 겨울의 베를린 혹한으로부터 내 손을 보호해주었고, 극세사 걸레는 우리 집안의 광을 내는 데 없어선 안될 필수품이 되었다. 하지만 싼 게 비지떡인 경우도 적잖다. 면도날은 깎으라는 수염은 안 깎고 피부만 작살내기도 했고, 배터리는 제로였으며, 추억의 7080 CD는 중간에 먹통인가 하면, 하수도 막힌 걸 뚫는다는 꼬챙이는 꼬챙이 자체가 빠지지 않아서 애먹은 적도 있다. 결국 제품과 사람 사이에 인연이 맞아야 한다는 말인데, 일종의 지하철 연기론(緣起論)이라고 할까.

그렇다면 어떤 상품이 지하철 고객의 호응을 받을 수 있을까? 다년간의 관찰에 따르면 일단 가격이 싼 편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그리고 아이디어가 참신하거나 절기에 맞아야 한다. 예컨대 바깥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는데 단돈 천원짜리 털장갑이 나왔다 하면 그 즉시 대박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 그리고 요즘엔 설명서를 끼워주는 게 일종의 트렌드가 되었다. ‘신기한 칼갈이’라는 제품의 설명서를 살펴보자. “기막힌 칼갈이 꼭 한번 사용해보세요”라는 피켓을 든 예쁜 처자의 사진이 있고, ‘사용설명’이라는 항목은 손목에 너무 힘을 주지 말고 부드럽게 갈라고 하면서 5~10년에 걸쳐 5만번 정도 사용이 가능하다고 설명한다(이 말은 아무리 따져봐도 비현실적이다. 세상에 어떤 인간이 10년 동안 5만번, 하루 열세번씩 칼을 갈고 있을까?). ‘주의사항’ 부분에선 “설명서가 없는 것은 유사제품이오니 주의하세요”라고 친절하게 안내하면서 연락처까지 명기해두었다. 이제 지하철 행상도 일종의 기업처럼 되어간다는 증거인가 보다.

원래 행상이나 가판 같은 일을 학문적으로는 ‘사회적 주변성’ 이론으로 설명하곤 했다. 이는 국제노동기구(ILO)에서 채택한 입장이기도 하다. 요약하자면 불균형 산업화과정에서 인구변동이 일어나고 그것이 도시형 빈곤으로 이어진다는 말이다. 이농으로 말미암아 삶의 뿌리가 뽑혔지만 도시의 근대적 노동부문으로는 흡수되지 못한 계층이 비공식 경제부문을 형성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일찍이 맑스가 말한 룸펜프롤레타리아 계급과도 일맥상통한다. 맑스는 주변부 계급을 형성하는 이런 사람들을 “주거불명의 부랑자, 떠돌이, 건달, 걸인, 행상, 좀도둑, 온갖 범죄 유형들”이라고 불렀고, 결코 계급의식을 가질 수 없는 그러므로 혁명투쟁에 있어 무용지물적 존재라고 부정적으로 보았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비공식 경제부문을 설명하는 방식이 좀더 정교해져 이 부분은 국가가 규제하지 않는 경쟁분야이긴 하나 가난한 개발도상국의 전유물로만 보긴 어렵다는 설도 있다. 사회주의권 또는 서구 선진국에서도 등장하는 소상인 경제활동의 일환이라는 뜻이다. 비공식 경제부문에 아주 적극적인 의미 부여를 하는 사람도 있다. 존 크로스 같은 이는 비공식 부문이 근대 경제체제에서 부차적이고 비효율적이라서 결국 없어져야 하지만, 탈근대 경제체제에선 경제성장과 유연성의 원천이 된다고 주장한다. 비공식 부문은 이제 전세계적인 현상이 되었고 이것을 ‘경제의 비공식화’라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다는 주장이다. 이론들이야 어찌 됐건 나는 지하철 행상들을 나름대로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생활인 노동자로 본다. 어떻게든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아니겠는가. 공식 규제의 바깥에 존재하는 지하경제의 일부라는 둥, 세금도 안 내고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는 얌체 상혼이라는 둥 비판도 많지만 그런 거야 내가 알 바 아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지하철 행상에 대한 단속이 많이 심해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게다가 안내방송까지 나오곤 한다. “저급한 물건을 파는 사람들에게 현혹돼 불량상품을 구입하지 마시라”고 한다. 자주 만나는 어떤 행상이 한쪽 손에 붕대를 감고 나온 걸 보니 혹시 단속 피하려다 다쳤나 하는 걱정까지 드는 판이다. 최근엔 차량 안에 “고객행복을 창조하는 도시교통 글로벌 리더 서울메트로” 명의의 광고 포스터까지 등장했다. 개성상인을 연상시키는 갓을 쓴 전통 복장의 인물을 그려놓고 큰 글씨로 설명을 달아놓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상행위는 상도의에 어긋나는 일이오!”(나처럼 난시가 있는 사람은 ‘성행위’ 또는 ‘성도의’로 잘못 읽기 쉬우니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 아래엔 작은 글씨의 추가설명이 적혀 있다. “인정에 이끌려, 저렴한 가격에 혹 전동차 안에서 물건을 사신 적 있으신가요?” 그래, 당연히 산 적이 있다, 어쩔래. 그런 후 행상에 대해 직접적인 경고를 한다. “복잡한 전동차 안에서 다른 이에게 불편을 끼치며 물건을 팔고 계시나요?” 이런 경고문을 찾아 읽어가면서 물건을 파는 한가한 지하철 행상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러면서 훈계조의 호소가 뒤따른다. “전동차는 누군가에게는 사색과 휴식의 공간이자 또 누군가에게는 독서의 공간입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한 이야기라 할 수도 없다. 요즘 대다수 승객은 전동차 안에서 통화를 하거나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한다. 과문해서인지 전철 안에서 사색에 잠긴 사람은 일찍이 만나본 적 없고, 독서하는 사람은 가물에 콩 나듯 하며, 입을 벌리고 조는 사람은 봤어도 점잖게 ‘휴식’을 취하는 이는 잘 보지 못했다. 광고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경고와 호소로 끝맺는다. “그런 곳에서 함부로 물건을 사고파는 일은 지하철의 질서를 흩뜨리고 타인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지하철 내 불법적인 상행위 근절로 더욱더 편안하고 쾌적한 지하철을 만들어갑시다.” 상투구와 진부한 도덕률로 범벅이 된 천편일률적이고 불유쾌한 ‘공익’광고가 아닐 수 없다. 모든 행상과 모든 고객을 질서나 흩뜨리고 타인을 무시하는 형편없는 위인으로 폄하하다니, 이는 용서 못할 명예훼손이 아닐 수 없다. 잠깐,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흥분할까? 지하철 행상에게 동지의식을 느껴서인가? 가만 생각해보면 「행상의 포장마차」라는 시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윌리엄 브라이티 랜즈(William Brighty Rands)가 쓴 작품이다. 빅토리아 시대 ‘동요의 계관시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시인이었다. 엉터리 번역이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한번 읽어주시면 고맙겠다.

 

포장마차에서 살고 싶어라

저 행상처럼, 말이 끄는 포장마차에서!

행상은 안 가는 데가 없다네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 포장마차엔 창문이 나 있네, 둘이나 달려 있네

양철굴뚝 하나, 연기가 모락모락

아내랑 가무잡잡한 아이랑

이 장터 저 장터 안 가는 데가 없다네!

 

“의자 고쳐요, 그릇 팔아요!”

종을 치듯 대야를 두드리네

가지런히 놓여 있는 찻잔받침이랑 광주리랑

테두리에 알파벳이 적힌 쟁반이랑 정말 없는 게 없다네!

 

길은 황토빛 바다는 초록빛

하지만 포장마차는 욕조랑 꼭 같아 보인다네

둥그런 세상 위를 떠다닐 수 있으니

한쪽으로 덜커덕 철썩!

 

나도 저 행상처럼 온세상 돌아다닐 수 있다면

그러다 집으로 돌아오면 책을 써야지

사람들이 모두 그 책을 읽겠지

『쿡 선장의 여행기』 같은 책 말이야!

 

그래, 어찌 보면 나도 시인처럼 이 장터, 저 장터를 떠도는 행상에게 막연한 동경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이 노선, 저 노선을 마음대로 달리는 지하철 행상처럼 내게도 세상을 막 돌아다니고픈 욕구가 숨어 있는 걸까? 강의실을 벗어나 연구실을 탈출하여 장안을 활개 치고 다니고 싶은 마음 말이다. 하지만 포장마차 생활이 어디 만만하겠는가. 아빠를 따라 마차 위에 사느라 얼굴이 새까맣게 그은 아이, 덜커덕거리는 떠돌이 생활로 호구지책을 삼아야 하는 저 고달픈 여정, 사람들 사이 부대끼면서 한푼 두푼 어렵사리 모아야 하는 그 신산한 나날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나의 유치한 방랑욕구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하나의 상념만 남는다. 내 오랜 친구 같은 지하철 1호선의 행상들이 단속에 걸리지 않고 오늘도 무사히 귀가하기를 바라는 염원 말이다. 물론 전동차 프레젠테이션에서 필살기를 발휘하여 모든 승객의 지갑을 열게 하라는 응원은 기본이다. 또 생각해본다. 지하철 ‘상행위’의 종결자, 그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쯤이면 나도 귀가하겠지. 그리고 혼자 꿈꾸어온 책을 밤새워 써야지. 사람들이 모두 내 책을 읽어줄까? 글쎄, 순전히 희망사항이니 여러분 상상에 맡길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