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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관용의 시간을 위하여

박완서 문학에서의 기억과 망각의 싸움

 

 

염무웅 廉武雄

문학평론가, 영남대 명예교수. 저서로 『한국문학의 반성』 『민중시대의 문학』 『혼돈의 시대에 구상하는 문학의 논리』 『문학과 시대현실』 등이 있음.

mwyom@ynu.ac.kr

 

 

1

 

여든의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작가의 이미지로 우리들 마음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박완서(朴婉緖, 1931.10.20~2011.1.22) 선생의 갑작스런 부음은 동료 문인들에게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슬픔과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작고하기 불과 반년 전만 해도 새 산문집을 출간했고, 그 책에 실린 어느 글에서 “신이 나를 솎아낼 때까지는 이승에서 사랑받고 싶고, 필요한 사람이고 싶고, 좋은 글도 쓰고 싶으니 계속해서 정신의 탄력만은 유지하고 싶다”(『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현대문학 2010, 156면. 이하 『못 가본 길』로 약칭)고 말한 분이었으므로, 그리고 그러한 소망이 조금도 과욕으로 들리지 않을 만큼 꼿꼿한 자세와 풍요로운 감성을 보여주던 분이었으므로 그 죽음은 너무도 뜻밖이고 충격이었다.

그러나 근년에 발표한 몇몇 산문들을 읽어보면 그가 점점 더 강하게 자신의 노년을 의식하면서 다가오는 이승과의 결별을 예감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앞에 인용한 문장에서도 그런 낌새를 챌 수 있지만, 가령 산문집 『두부』(창작과비평사 2002)에 수록된 수필 「노년」의 마지막 대목에서 그는 초가을 마당의 살구나무 사이로 한잎 두잎 잎사귀들이 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런 감회를 토로하고 있다: “나도 내 몸하고 저렇게 소리도 없이 사뿐히, 뒤돌아보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헤어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육신의 고통 없이, 그리고 세속에 대한 미련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를 그는 바라는 것이다. 같은 책의 「모두모두 새가 되었네」라는 글에서는 어느 조각가의 작업실에 갔다가 그 조각가의 솜씨로 빚어진 수많은 새들을 보고 어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이렇게 쓰고 있다. “나도 죽으면 새가 되고 싶다. 짝짓고 알 낳고 새끼 키우고 총에 맞거나 독극물을 먹을 수도 있는 구체적인 새가 아니라 영혼이 육신을 떠날 때 순간적으로라도 지구의 중력과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황홀한 자유, 비상(飛翔)의 쾌감이 있었으면 좋겠다.” 작가에게 이것은 순간적으로 떠오른 즉흥적 소망이 아니라 지난날의 처절한 경험에서 유래한 오랜 비원일 것이다. 또다른 수필의 한 대목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지상의 삶에 대한 도저한 부정의 감정을 표출한다. 그는 선배작가 박경리(朴景利)의 유고시집을 읽고 그 시집에 실린 「일 잘하는 사내」라는 작품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은 감상을 적는다: “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으니까 다음 세상에 하고 싶은 것도 없는 대신 내가 십년만 더 젊어질 수 있다면 꼭 해보고 싶은 게 한가지 있긴 하다. (…) 깊고 깊은 산골에서 세금 걱정도 안하고 대통령이 누군지 얼굴도 이름도 모르고 살고 싶다. 신역(身役)이 고돼 몸보신하고 싶으면 기르던 누렁이라도 잡아먹으며 살다가 어느날 고요히 땅으로 스미고 싶다.”(『못 가본 길』 231~32면)

돌이켜보면 박완서는 지난 40년 동안 누구 못지않은 정력적인 집필활동을 통해 수많은 독자들과의 사이에 지적·정서적 교감의 공동체를 만들어냈고, 그럼으로써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국민작가로 떠올랐다. 이것은 그가 가장 뛰어난 소설의 작가였다는 것과는 좀 다른 이야기다. 흔히 예술적 탁월성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또 개인들의 취향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내용을 가리킬 수 있는 것이어서 한 사람의 소설가를 설명하는 개념으로서는 수사학적 찬사 이상의 구체적인 실체성을 갖기 어렵다. 그러나 한 시대의 국민작가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그의 문학이 작품에 이룩된 여러 특징들에 의해 동시대의 국민들 다수가 공감하고 애호하는 공공의 자산이 되었음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우리 문단에는 박완서보다 더 오래, 더 많은 작품을 써온 작가들이 적지 않고 심지어 대중적 인지도가 더 높은 작가도 있다. 그러나 박완서처럼 자기 나름의 문학적 품격과 수준을 견지하면서 줄기차게 한가지 일에 몰두함으로써 일종의 국민적 동의라고 할 만한 것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 소설가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 한가지 일이란 우리 시대의 평균적 한국인들이 실제의 삶 속에서 겪었음직한 생활현실의 세목을 그들이 실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방금 사용한 ‘우리 시대’란 말은 백낙청(白樂晴) 교수의 지적대로 상당히 융통성있는 개념인데, 백교수처럼 특정한 문맥에서 “19876월항쟁 이후의 20여년”으로 범위를 좁혀서 사용할 수도 있지만(「우리시대 한국문학의 활력과 빈곤」, 『창작과비평』 2010년 겨울호) 그보다 상한선을 올려서 훨씬 더 넓은 기간을 지칭할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글에서는 박완서가 살았던 시대이자 박완서의 문학이 주로 다루고 있는 시대, 즉 1930년대 중반부터 21세기가 열리는 시점까지를 ‘우리 시대’로 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일제시대와 6·25전쟁은 물론이고 4·19와 광주항쟁도 겪지 못한 세대들에게는 그 ‘우리 시대’가 너무 멀리 또 넓게 잡혀 있어서 당장 몸으로 느끼는 현재적 실감이 공허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박완서 문학의 시간 속에서 작가가 스무살 나이에 겪은 6·25전쟁의 경험은 다양한 형식으로 끊임없이 반추되는 데 비해 중년기 이후 민주화를 위한 투쟁 시대의 현실이나 좀더 가까이 외환위기 이후 시대의 각박한 현실은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동시대인들의 당면한 삶에 대해, 적어도 그 핵심적 문제점에 대해 말해주는 바가 있어야 우리 시대의 작가라는 호칭에 부합한다고 할 때 박완서를 그렇게 부르는 데는 저항감을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문학의 진정한 성취는 50년, 60년 전의 과거에 속한 지난날의 사건과 경험들을 그 시간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현실의 불가결한 일부로 절실하게 살려낸 데 있다고 생각된다.

 

 

2

 

알다시피 박완서는 불혹의 나이에 장편소설 『나목(裸木)(1970)으로 문단에 나왔다. 그때까지 전업주부로 있다가 “습작기를 거치지도 않고” 쓴 작품이 당선되었다고 하는데(『못 가본 길』 221면), 그것도 놀랍거니와, 등단 이후 후속타가 이어지는 것을 보더라도 그는 처음부터 ‘준비된 작가’였다. 그런데 그동안 그가 어떤 작품들을 얼마나 썼는지 알려고 자료를 찾아보니 그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동안 장편소설들은 세계사에서 『박완서 소설전집』의 이름으로 제1권 『휘청거리는 오후』(1993)부터 제17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2008)까지 순차적으로 간행되었고, 단편소설들은 문학동네에서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1999, 개정증보판 2006) 여섯권으로 정리되어 있다. 물론 전집(全集)이라고는 하지만 엄밀한 뜻에서 작품이 망라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장편소설 『아주 오래된 농담』(실천문학사 2000)과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문학과지성사 2007)가 따로 나와 있고 그후 발표된 작품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완서의 왕성한 문필작업은 소설에 국한되지 않았다. 꽁뜨집이 세권이고 동화책이 여덟권일뿐더러 박완서 문학에서 소설에 버금가는 중요성을 갖는 산문집 내지 에쎄이집도 스무권쯤이나 된다. 이 방대한 분량 이외에 박완서 연구자들에게 부과된 또 하나의 난점은 그의 작품들이 첫발표 이후 여러 출판사를 옮겨가면서 판을 달리했다는 사실이다. 가령, 장편 『목마른 계절』은 처음에 『한발기(旱魃記)』라는 제목으로 잡지(『여성동아』 1971.7~1972.11)에 연재되었다가 지금 제목의 단행본(수문서관 1978)으로 출판되면서 마지막 장이 추가되었고 다시 두군데 출판사(열린책들 1987, 세계사 1994)로 옮겨졌다. 역시 잡지(『여성동아』 1978.8~1979.11)에 연재된 장편 『욕망의 응달』은 초판(수문서관 1979)의 제목이 재판(1984) 때 『인간의 꽃』으로 개제되었다가 출판사를 옮기면서(우리문학사 1989, 세계사 1993) 다시 원래의 제목으로 돌아갔다. 거의 모든 작품들이 이렇게 두세군데 출판사를 옮기고 판을 달리해서 출판되었는데, 앞으로 본격적인 전집 기획자와 연구자 들은 개정판에서 어떤 의미있는 수정이 가해졌는지 꼼꼼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박완서의 저서들 가운데 일부밖에 읽지 못했다. 그나마 초판과 개정판을 비교하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어떤 것은 예전 잡지에서 읽은 기억만 가지고 있고 어떤 것은 최근의 단행본으로 만족했다. 단편소설은 적잖이 읽었다고 믿었으나 이번에 목록을 살펴보니 절반에도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이 드러났고, 『나목』(열화당 1976, 초판)과 『휘청거리는 오후』(창작과비평사 1977, 초판)는 수십년 전의 독서에 신뢰를 가질 수 없어 『나목』만 최신판(세계사 2002, 2판)으로 다시 훑어보았다. 『엄마의 말뚝』(세계사 2002, 2판)도 다시 읽어보니 처음 읽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음이 확인됐다. 그동안 벼르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 초판 1992, 한정판 2006; 이하 『그 많던 싱아』로 약칭)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웅진, 초판 1995, 한정판 2006; 이하 『그 산』으로 약칭)를 정독한 것은 모처럼 누린 큰 행복이었고, 곁들여 『목마른 계절』(세계사 2003, 2판)이 주는 아픔도 새삼스러웠다. 많은 산문집들 중에서는 겨우 『두부』와 『못 가본 길』만 새로 읽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진솔하게 토로된 작가의 일상과 의식을 손금 보듯 짐작할 수 있었다. 반면에 그의 동화와 꽁뜨를 통해 그것들이 어떻게 박완서 문학의 빈자리를 보완하는지 검토할 기회를 못 가진 것은 유감이다.

이상과 같은 제한된 독서만으로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6·25전쟁이 박완서 문학의 뿌리이고 원점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글쓰기는 언제나 전쟁의 경험에서 출발하여 전쟁의 기억으로 회귀한다. 글을 써서 이 기막힌 경험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사명감 자체가 바로 전쟁터 한복판에서 솟아올랐음을 그는 여러 곳에서 밝힌 바 있지만, 최근의 한 수필에서도 여전히 이렇게 털어놓고 있다: “6·25의 경험이 없었으면 내가 소설가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나도 느끼고 남들도 그렇게 알아줄 정도로 나는 전쟁경험을 줄기차게 울궈먹었고 앞으로도 할 말이 얼마든지 더 남아 있는 것처럼 느끼곤 한다.”(『못 가본 길』 24면) 또 그는 이렇게도 고백한다: “아직도 내 기억은 ‘6·25동란’에 못 박혀 있다. 못이 녹슬고 썩고 삭아서 흙이 되고도 남을 세월이 지났건만 못자국의 통증은 자주 도진다. 6·25는 내 기억의 원점이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고통이 도져서 혼자 신음하며 울 적이 있다.”(『두부』 201면) 저주인지 원한인지 분간 안되는 막막한 절망감이 ‘혼자 신음하며 우는’ 사람의 어깨를 흔들고 있음을 느끼고 우리는 그 섬뜩함에 망연자실한다. 1·4후퇴 무렵의 혹독한 추위를 회상하는 다른 산문에서도 그는 이렇게 치를 떨고 있다: “그 추위는 그후에 우리에게 닥친 온갖 고난의 역정까지를 얼어붙게 하는 무서운 추위였다. 그후에 일어난 일들을 나는 날짜별로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 겨울의 추위가 냉동보관시킨 기억은 마치 장구한 세월을 냉동보관된 식품처럼 썩은 것보다 더 기분나쁜 신선도를 유지하고 있으니, 이건 기억이 아니라 차라리 질병이다.”(『못 가본 길』 65면)

물론 그가 소설에서 전쟁경험만 다루었을 리는 없다. 주지하듯이 그는 1953년 휴전되기 조금 전에 결혼하여 다섯 아이를 낳아 키운 전형적인 주부로 살았으므로 그의 소설과 수필에는 한 사람의 주부가 보고 듣고 겪은 우리 시대 서민의 생활사가 예민하고도 풍성하게 녹아들어 있다. 그리고 그가 주부로서 가사에 전념했던 기간은 이 나라가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나 점차 안정을 되찾고 경제발전의 발걸음을 떼놓던 때이기도 했으므로 당연히 그러한 변화가 여성들의 생활과 의식에 가져온 인격적 주체로서의 각성이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많은 평자들의 지적처럼 이런 면들에서도 그의 소설은 남다른 성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단순한 세태소설 내지 풍속소설에 그칠 수도 있었을 그의 서사의 붓끝을 일상성의 더 깊은 심층 안으로 끌고 들어간 동력의 원천은 다름아닌 전쟁체험이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것은 벗어나려도 벗어날 길 없는 영혼의 질곡, 평생을 따라다닌 트라우마였다. 불치병과도 같은 그 끔찍한 기억들은 그러나 중산층 주부 박완서에게나 성공한 작가 박완서에게나 안일과 부패의 공세를 방어하는 무서운 냉동장치였다.

 

 

3

 

첫 작품 『나목』은 발표 당시 신선한 인상으로 독자를 매혹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읽어보면 원숙기의 박완서를 예감케 하는 섬세한 감각과 날카로운 관찰들 사이로 약간의 통속취향과 감상주의도 혼재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주인공 화자(이경)는 미8군 피엑스 내 한국물산 매장에 취직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처녀가장인데, 그의 시선에 포착된 다양한 풍경들은 전시(戰時) 서울의 일그러진 사회상을 생동감있게 재현하고 있다. 한 대목 인용해보기로 하자.

 

청소부 아줌마들이 쓰레기가 담긴 커다란 상자를 밀고 들어오더니 치마를 훌러덩 걷어올리고 내의는 종아리까지 내려 허연 속살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휴지통 속에서 치약이니 비누니 꾸역꾸역 꺼내더니 종아리서부터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한줄 쌓고는 내복을 그만큼 올려서 고무줄로 동이고 또 한층 쌓고는 내복을 그만큼 올려서 고무줄로 동이고 하여 삽시간에 종아리를 지나 엉덩이 허리를 입혀갔다.

그리고 치마를 내리고 코트를 걸치고는 어기죽어기죽 걸어나갔다. 점심시간에 한탕하러 나가는 꼴이었다. (『나목』, 세계사 2002, 33면)

 

피엑스에서 일하는 청소부 아줌마들이 감시원의 눈을 속여 물건을 반출하는 과정이 세밀하고도 거침없이 묘사되고 있다. 이 피엑스 물건은 훔친 건 아니지만 바깥 암시장에 나가면 비싸게 팔리기 때문에 반출이 금지되어 있고, 들키면 당장 해고였다. 그러나 미8군 피엑스와 주변 암시장은 당시 유일하게 활기를 띤 전시경제의 중심이었고, 따라서 도시가 파괴되고 정상적 시장기능이 마비된 상황에서 일반 서민들로서는 미군부대 근처에 빌붙어서라도 어떻게든 먹고사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였다. 그렇기에 몸에 잔뜩 물건을 감추고 어기적거리며 걸어나가는 청소부 아줌마들의 모습은 화자의 눈에 약간 코믹하면서도 마치 중무장하고 싸움터로 나가는 병사처럼 나름으로 위엄있게 비치는 것이다. 이 아줌마들 중의 한 사람은 뒷날 단편 「공항에서 만난 사람」(1978)에 다시 등장하여 기구한 인생유전을 전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나목』은 외부정경을 묘사할 때에는 이처럼 리얼리티에 가득 차 생기를 발한다. 아직 공식적인 환도(還都)가 허용되지 않던 1951년 초겨울의 서울 거리 풍경과 시민생활을 체험적 실감에 기초하여 증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사회사적 의의조차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이 목표하는 것은 소설의 형식으로 전쟁의 사회사를 쓰는 것이 아니고 전시상황의 불안 속에 던져진 여주인공의 실존의 모험을 추적하는 것이다. 내일을 확신할 수 없는 격동의 시대에 처녀 주인공의 감정세계가 혼란과 자기분열의 양상을 드러내는 것은 어쩌면 불가피했을지 모른다. 화가 박수근(朴壽根)을 모델로 했다는 작중의 옥희도에 대한 주인공의 태도에서 그 점은 특히 두드러져 보인다. 한두 대목 읽어보자.

 

그의 말끝을 다시 기침이 가로막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사기 재떨이를 그의 입에 대주고 등을 어루만지는 동작을 할 뻔했으나 그런 일은 벌써 부인이 당연히 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슴이 타는 듯했다.(85면)

“그림은 시각언어예요. 전 그분의 그림을 보고 곧 그분의 빈곤과 절망을 읽었어요. 아주머닌 좀더 그분에게 삶의 기쁨을 줄 수도 있었을 텐데.”

“아무도 나만큼은 그분을 모실 수는 없을걸.”

“전 할 수 있어요.”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저라면 선생님이 죽은 나무등걸 따위를 그리는 걸 보느니, 차라리 옷을 벗고 제 몸뚱이를 그리도록 하겠어요.”(198면)

 

주인공 이경은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중년의 화가 옥희도에게 연정을 느끼고 옥희도의 고향 후배이자 친구처럼 사귀는 청년 태수를 졸라서 함께 그의 집으로 찾아간다. 옥희도가 감기로 며칠째 결근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의 인용에서 화자는 이 장면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뒤의 인용에서 화자는 다시 옥희도의 집을 방문했다가 그의 나무 그림을 보고 나오면서 배웅하러 따라나온 부인과 그림에 관해 말다툼을 벌이고 있다. 1980년대 이후의 박완서라면 아무리 사랑의 미혹에 눈이 멀었더라도 이처럼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린 철없는 인물을 비평적 거리 없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목』 이후에도 화가 박수근은 박완서의 소설과 수필에 조금씩 모습을 바꿔가며 여러차례 등장한다. 내가 읽은 수필만 하더라도 「그는 그 잔혹한 시대를 어떻게 살아냈나」(『두부』)와 「보석처럼 빛나던 나무와 여인」(『못 가본 길』) 같은 글은 바로 박수근을 추모하기 위해 씌어진 것이다. 아마 수필에서는 소설적 변형이 없을 터인데, 거기 따르면 박완서는 박수근의 집을 방문한 적도 없고 그의 부인을 처음 본 것도 유작전이 열리는 자리에서였다. 유작전에서의 일을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부인은 내가 상상하던 것과는 딴판으로 미모와 교양과 품위를 고루 갖추고 있었다. 그때 나는 어찌나 놀랐는지 먼발치로 바라만 보다가 인사도 못하고 나왔다. 놀랐을 뿐 아니라 쓰라린 배신감까지 가졌던 것 같다. 그가 나에게 한번도 그의 부인을 나쁘게 말한 적이 없었으니 나는 순전히 내 상상력에 배신을 당한 셈이었다.”(『두부』 227면) 수필의 이 대목에도 미묘한 감정적 여운이 스며들어 있는데, 그러나 어쨌든 박수근과의 만남은 박완서의 인간적 성장에 중요한 계기의 하나였다. 박수근이 단순히 호구지책에 목을 맨 속된 간판쟁이가 아니라 선전(鮮展)에 입선한 적이 있는 어엿한 화가임을 알았을 때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내가 그동안 그다지도 열중한 불행감으로부터 문득 깨어나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리고 “비로소 내가 막되어가는 모습을 그가 얼마나 연민에 찬 시선으로 지켜보아주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못 가본 길』 264~65면) 그것은 폐허처럼 망가진 땅에서 운명처럼 다가온 고귀한 정신과의 만남이었고 그런 만남을 통한 획기적인 자아상승의 기회였다. 하지만 내면에서 진행되는 자아의 상승을 자각하고 그것을 언어예술의 형상 속에 담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앞에서 잠깐 살펴보았듯이 『나목』의 경우만 하더라도 주인공의 때때로 ‘막되어가는 모습’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성찰은 아직 충분히 숙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두번째 장편 『목마른 계절』에서 이제 작가는 6·25체험의 본격적 서사화에 착수한다. 『나목』에서 소설적 시간은 전선이 휴전선 근처로 올라간 뒤이고, 따라서 전쟁은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의식을 제약하는 원경으로서만 암시된다. 그리고 앞서 지적했듯이 소설의 초점도 전시 서울의 사회현실을 객관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있다기보다 그 현실 속에서 주인공이 어떻게 자기와해의 위험을 막고 정체성을 지켜내는가 하는 문제의식에 맞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목마른 계절』은 19506월 전쟁의 발발시점부터 19515월 피난에서 돌아오기까지의 기간을 월별(月別)로 연대기적인 서술을 해나간다. 『나목』의 이경과 『목마른 계절』의 하진을 비롯한 많은 박완서 소설의 여성주인공들이 한결같이 작가 자신의 분신 내지 소설적 대변자로 여겨지지만, 『나목』이 1인칭 서술임에 비해 『목마른 계절』이 3인칭 서술인 것도 두 작품의 대조적인 성격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당연한 얘기지만 3인칭 시점의 선택이 소설의 객관적 성취를 저절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번에 『그 많던 싱아』 『그 산』을 먼저 읽고 다음에 『엄마의 말뚝』 『나목』, 그리고 맨 나중에 『목마른 계절』을 읽었는데, 이런 순서로 읽은 것이 박완서처럼 동일한 소재를 반복 사용한 작가의 경우에는 작품 감상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왜냐하면 특히 『목마른 계절』에서는 이미 읽은 것을 또 읽는 것 같은 기시감이 독서를 방해했고 원본을 모방한 이본(異本) 또는 완성작 이전의 시작(試作)을 대하고 있다는 착각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만약 순서가 바뀌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틀림없이 1970년대의 『나목』 『목마른 계절』을 시발점으로 1980년대의 『엄마의 말뚝』 같은 중간단계를 거쳐 1990년대의 『그 많던 싱아』 『그 산』이라는 절정에 이르는 박완서 문학의 휴식 없는 발전의 노정에 경탄해 마지않았을 것이다.

 

 

4

 

내가 읽어본 한에서 『그 많던 싱아』와 『그 산』은 6·25 전쟁체험에서 태어난 최고의 걸작들 중 하나이다. ‘하나’라고 말한 것은 무심코 사용한 서양식 말투가 아니라 두 저서가 각각의 제목으로 따로 출간되었지만 완전히 한 작품이라는 뜻이다. 『그 산』 초판의 ‘작가의 말’에서 “미완으로 끝낸 『그 많던 싱아』를 이렇게 완결토록 꾸준히 격려해준”(강조는 인용자) 운운하고 출판사에 감사를 표한 것도 작가가 한 작품을 의도했다는 증거이지만, 그런 의도 여부를 떠나 작품의 됨됨이 자체가 본질적으로 하나의 구조물인 것이다. 그러나 작품의 서사가 일관된 맥락을 구성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맥락 안으로 흘러들어온 요소들의 기원은 단일하거나 단순한 것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박완서 문학의 한가지 특징은 동일한 일화들의 반복적인 출현이다. 박수근과의 인연이 소설과 수필에서 몇차례 다루어진 것도 하나의 예가 되지만, 결혼 전 피엑스에 근무할 때 잠시 사귄 청년의 이야기도 다양하게 변주되다가 장편 『그 남자네 집』(현대문학 2004)으로 종합되었고, 여고시절 담임선생이자 문학교사였던 소설가 박노갑(朴魯甲)의 말년도 전쟁중에 막연히 행방불명된 것이 아니라 형무소에서 처형된 막내삼촌과 마찬가지로 9·28수복 직후 터무니없는 마녀사냥에 걸려 억울하게 희생되었음이 집요하게 추적된다(「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 창작과비평 1989년 여름호). 물론 박완서의 문학세계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은 ‘엄마’이다. 엄마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서는 박완서의 작품을 읽는 것이 불가능하달 만큼 엄마는 유년기부터 중년에 이르도록 그의 삶에 깊이 밀착되어 그의 문학에 넓고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오빠 또한 박완서 문학의 근원에 자리한 존재이다. 오빠는 나이도 훨씬 위고 개성도 아주 다른 사람이었지만, 해방 전후부터 6·25에 이르는 격동기에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자존감(自尊感)을 상실하고 점점 허물어져 안타까운 죽음을 맞음으로써 그에게는 가족의 불행이자 시대의 비극을 상징하는 평생의 상처로 남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숙부와 숙모, 올케와 조카도 빠뜨릴 수 없는 박완서 문학세계의 구성원들이다. 그의 작품이 무엇보다도 가족사소설의 측면을 가지는 것은 이처럼 그의 눈길이 자신의 삶의 내력을 끊임없이 파고든다는 사실과 관계된다. 그런 점에서 기억이야말로 그의 소설작업의 무기였던 셈이다. ‘나는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에 대해 ‘나는 기억의 덩어리일 뿐이다’라는 것이 스스로 마련한 대답이라고 박완서는 말하는데(『못 가본 길』 226면), 그만큼 기억작용이야말로 소설가로서 그의 정체성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그 많던 싱아』 초판 머리말에서 그는 새삼스럽게 “순전히 기억력에만 의지해서 써보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그런 방식의 집필에 대해 이렇게도 부연한다: “쓰다 보니까 소설이나 수필 속에서 한두번씩 우려먹지 않은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때그때의 쓰임새에 따라 소설적인 윤색을 거치지 않은 경험 또한 없었으므로 이번에는 (…) 기억을 꾸미거나 다듬는 짓을 최대한으로 억제한 글짓기를 해보았다.” 그러나 변형과 윤색을 억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억의 불확실성이라는 미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고 자인하며, 따라서 과거사실의 문학적 복원에 있어서 기억이란 “결국은 각자의 상상력일 따름”이라고 한발 물러서는 것이다. 이것은 1945년 또는 1951년에 있었던 사건이라고 기억된 것에 대해 1992년 또는 1995년의 시점에서 글을 쓴다면 그 글 안에 씌어진 것들의 시간적 귀속은 언제인가라는 물음으로 우리에게 돌아옴을 뜻하는데, 그것은 박완서처럼 끊임없이 과거의 재구성을 시도해온 작가의 경우 피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그 많던 싱아』와 『그 산』의 소설적 성격이 ‘자전적’이라고 한 작가의 규정에 지나치게 구애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평화로운 농촌마을 박적골에서 보낸 주인공의 아름다운 유년기이다(여기서 ‘이 작품’이란 『그 많던 싱아』와 『그 산』을 합친 단일품을 지칭한다). 유년기의 중심에는 할아버지가 있다. 그러나 할아버지를 정점으로 한 농경사회의 가부장적 질서와 전통적 가치관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 불가피하게 해체될 운명에 놓인다. 할아버지에 대한 최초의 반란자는 아들(‘오빠’)을 관리로 출세시키고 딸(‘나’)을 ‘신여성’으로 키우고자 과감하게 ‘근대’의 깃발을 든 엄마였다. 그녀는 아들과 딸을 차례로 서울로 데려다가 억척스러운 삯바느질로 어려운 셋방살림을 꾸려가며 신교육을 시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오빠는 순종적이고 의젓한 모범생으로 자라는 반면 ‘나’는 엄마의 교육에 한편 적응하지만 다른 편으로는 엄마의 손아귀에 장악되지 않는 독립적 개성을 키워나간다. 이 작품은 이처럼 그들이 점차 서울에 ‘말뚝’을 박아가는 과정, 즉 할아버지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서술하면서도 방학 때마다 빠뜨리지 않는 귀향행사를 통해 박적골의 아름다운 자연과 정겨운 세시풍속을 거듭 환기시킨다. 한 대목을 읽어보자.

 

어른들은 한창 바쁠 때였다. 그래서 더욱 아이들의 천국이었다. 윗도리를 안 입거나 아예 고추까지 내놓고 사는 아이들의 맹꽁이처럼 부른 배 위로 참외 국물이 줄줄 흘러 그 위로 파리가 성가시게 엉겨붙으면, 개울로 풍덩 뛰어들면 그만이었다. 우리 집 뒷간 가는 길에 건너야 하는 실개천은 뛰어들 만큼 깊지는 않았지만 개울가에 당개나리가 한창이었다. 뒤란 안팎의 살구나무, 앵두나무, 돌배나무가 다 꽃이 진 뒤여서 주황색 꽃잎에 자주색 점이 박인 당개나리의 만개상태가 유난히 화려해 보였다.(『그 많던 싱아』 113면)

 

이 광경은 1940년대 초의 박적골을 그린 것이지만, 그 무렵 한국의 농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이 전원적 풍경은 오늘날 한반도 아무 데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박적골에서 멀지 않은 도시 개성의 머리 위로 삼팔선이 지나는 탓에 8·15 직후 소련군과 미군이 번갈아 주둔하는가 하면 6·25전쟁 때에는 그곳이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 되었는데, 그러나 알다시피 이 나라 농촌의 아름다움이 오늘처럼 철저히 청산된 것은 그 때문만이 아니라 그후의 산업화 때문이었다.

아무튼 할아버지가 대표하는 구시대적 권위의 균열은 이미 대가족주의의 질서 안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위세를 부릴 수 있는 근거는 ‘양반’이라는 것이었는데, 할머니부터가 할아버지 안 보이는 데서는 기탄없이 그의 양반타령을 조소했고, 소설가가 된 손녀딸은 후일 “양반타령만 유별났지 민족적 자부심이나 역사의식이 있는 분은 못되셨다”(같은 책 43면)고 냉정하게 판정을 내렸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권위의 추락과 가부장적 금기의 해체를 가장 통쾌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그가 남긴 한적(漢籍)들을 며느리 셋이 물에 담가 풀었다가 그릇을 만드는 이야기다. 작가는 1945년 초여름 엄마들이 모여앉아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 어린 험담을 주고받으며 “말끝마다 허리를 잡고 웃었던” 일화를 길게 묘사하면서, 엄마들이 없애버린 할아버지의 고서들 중에 설사 귀중본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때 며느리들이 누린 해방감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다”고 여성주의의 편에 서서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지난날의 자연풍경과 세시풍속을 한없는 그리움 속에 아름답게 묘사하면 할수록 그것은 조만간 다가올 역사의 부조리와 비극의 참혹성을 더욱 강화하는 대비효과를 발휘한다. 오빠의 졸업과 취직, 집 장만, 2차대전, 할아버지의 죽음, 개성으로의 소개(疏開), 해방, 서울 복귀와 복학 등으로 사건은 잇따르는데, 그런 가운데 ‘나’는 독서에 빠져 지내는 문학소녀로 성장해간다. 그러나 해방정국의 들뜬 분위기는 양심적 이상주의자였던 오빠로 하여금 좌익조직에 가입하게 만들었고, 그 때문에 그는 경찰에 쫓기는 처지가 된다. 결국 나약한 성격의 오빠는 조직에서 이탈하여 심한 갈등과 무력감에 시달린다. 반면에 ‘나’는 학교에서 활발하게 발언하고 행동하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당시의 사회적 혼란을 “좌익과 우익, 진보와 반동의 대립이라는 이념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려 들었고, 내가 박수치고 역성들어줘야 할 편은 좌익이라는 생각에 망설임이 없었다.”(같은 책 228면) 그렇게 된 데는 체질적인 정의감과 독서의 영향 이외에도 어려서부터 좋아하고 따르던 오빠의 영향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좌익이고 우익이고를 막론하고 집회나 시위, 구호 외치는 것 따위”를 싫어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이었다고 자인한다.(같은 책 235면)

그러는 동안 오빠는 똑똑하고 음전한 여자와 혼인해서 조카를 낳았고 보도연맹 가입으로 합법적 신분을 얻은 다음 중학교 교사로 취직을 한다. ‘나’는 마침내 대학생이 되어 자유의 예감에 가슴이 부푼다. 그러나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집안에 자유와 평화가 찾아왔다고 느끼는 순간 인민군이 삼팔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시도했다는 뉴스를 듣는다. 절대다수의 서울 시민들이 그러했듯이 ‘나’도 처음에는 그 뉴스를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앞으로 3년간 한반도 전체를 오르내리며 전국토를 피바다로 만들 끔찍한 전쟁의 시작이었다. 사학자 김성칠(金聖七)의 일기 『역사 앞에서』(창비 1993, 개정판 2009)1950627일자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라디오를 틀어놓으니 대한민국 공보처 발표라 하고 (…)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 근무하고 있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死守)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일선에서도 충용무쌍한 우리 국군이 한결같이 싸워서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중이니, 국민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직장을 사수하라고 거듭 외치었다. 그러나 자꾸만 가까워지는 총포성은 무엇을 의미함일까?(『역사 앞에서』, 개정판 76면)

 

실제로는 대통령 이승만은 이미 27일 새벽 비상국회가 열리는 중에 국회 요인들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서울을 떠났고, 도망치듯 대구까지 갔다가 낙관적인 보고를 받고는 도로 대전으로 올라와 밤 10시에 국민들에게 안심하라는 내용의 녹음방송을 했다(김동춘 『전쟁과 사회』, 돌베개 2000, 개정판 148~50면). 그리고 28일 새벽 230분경에는 한강교가 폭파되었고, 그날 오전 1130분에는 중앙청에 북한 인공기가 올랐다(전상인 「6·25전쟁의 사회사: 서울시민의 6·25전쟁」, 유영익·이채진 엮음 『한국과 6·25전쟁』, 연세대출판부 2002, 180~83면). 이런 급박한 사태진전을 대부분의 국민들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박완서 소설의 주인공들도 정보의 소외지대에 있었다. 오빠는 월요일(6.26)에 학교 출근을 위해 집을 떠나 구파발 쪽으로 갔고, 나머지 식구들은 포성이 가까워지자 돈암동 대로변에서 상점을 열고 있던 숙부네까지 한군데 모여 밤새 불안에 떨다가 28일 새벽을 맞았던 것이다. 다음은 그 순간의 기막힌 광경이다.

 

새벽녘에 전쟁의 소음이 한결 가라앉자 숙부는 이제 좀 마음이 놓인다는 듯이 우리더러 한숨 자자며 말했다.

“그러면 그렇지. 대통령이 수도 서울은 꼬옥 사수한다고 국민한테 철석같이 약속을 했으니까.”

이러면서 하품을 늘어지게 하는 숙부를 엄마는 딱하다는 듯이 바라보면서 말했다.

“서방님도 참, 그 늙은이 말을 어떻게 믿어요?”

날이 밝자 숙부와 숙모는 오늘은 상점을 열 수 있을 것 같다며 집으로 떠났다. 우리도 다들 밖이 조용해진 걸 전쟁이 진정된 것과 같이 생각했기 때문에 붙들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헐레벌떡 되돌아온 숙부는 몹시 얼뜬 목소리로 밤사이에 세상이 바뀐 걸 알려주었다.(『그 많던 싱아』 272~73면)

 

이 부분을 좀 자세히 살핀 까닭은 이 대목에서 박완서 가족의 삶이 급속도로 파탄의 계기를 맞았고 또 그것이 박완서 문학의 결정적인 원천이 되었기 때문이다. 소설의 진행을 더 따라가보자. 오빠는 귀가중 감옥에서 석방된 과거 좌익운동 시절의 동지들을 우연히 만나 부득이 그들을 집으로 데려온다. 그들은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한바탕 떠들썩한 석방 잔치를 벌였는데, 그 때문에 우리 집은 엉뚱하게도 이웃들한테 좌익의 거물 가정으로 오해를 받는다. 그러나 오빠는 곧 의용군에 끌려갔고 ‘나’는 오빠와 달리 “바뀐 세상에 서슴없이 공감했다. 그들이 이승만정부 욕하는 데 공감했고, 노동자 농민에 대한 약속에 공감했다.”(같은 책 285면) 아직 철없을 때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윽고 나는 새로운 체제에 생리적인 부적응을 느낀다. 그것은 그들의 주장이 옳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방식, 예컨대 수령에 대한 한없이 되풀이되는 예찬과 열광(같은 책 286면)에 기가 질렸기 때문이었다. 아마 이 점에서 박완서와 일맥상통하는 인물은 사학자 김성칠일 것이다. 6·25 당시 한 사람은 대학생이고 다른 사람은 그 대학교 교수로서 나이와 지적 수준에 큰 격차가 있었지만, 남북 정부에 대해 공히 비판적인 점, 그리고 근본적으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지지자들이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한 사람은 일기에 기록을 남겼고 다른 한 사람은 그것을 기억 속에 간직했던 점이 다르다면, 두 사람의 증언이 비슷한 시기에 책으로 간행된 것은 공교로운 일치일 것이다. 김성칠의 일기(1950.7.16)는 인공치하 서울 민심의 일단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상한 것은 이러한 맹폭(猛爆)이 있음에도 미제에 대한 일반시민의 적개심이 별로 불타오르는 것 같지 않고, 더러는 시민의 머리에 폭탄을 퍼부음이나 다름없는 이 폭격에 되레 일종의 희망을 품는 것 같아 보이니 이상한 일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소위 반동분자로 지목받는 사람이라거나 또는 대한민국 군경의 가족만이 아님을 보면 더욱 놀라지 아니할 수 없다.(김성칠, 앞의 책 122면)

 

이렇게 된 까닭은 여러가지겠지만, 그의 일기(1950.7.11)는 ①식량 부족, ②의용군 강제모집, 그리고 ③시민들에 대한 전출령(轉出令) 등을 당시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고 있다. 공산치하 석달 동안 서울에서만 8800~9500명의 민간인이 인민재판을 통해 처형된 것도 민심의 이반에 한몫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북한군은 처음에는 서울시민 앞에 “점령자가 아닌 해방자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나 시간이 갈수록 “해방자가 아니라 점차 약탈자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전상인, 앞의 글 193면) 시민들이 미군의 인천상륙 소식을 반기고 서울수복을 환영한 것은 그 귀결이었다.

그러나 9·28 이후의 상황은 박완서 가족을 포함해 서울에 남아 있던 시민들에게는 ‘참아내기 힘든 가혹한 고통의 시기’(『그 많던 싱아』 293면)가 닥쳤음을 의미했다. 시민들에게 군과 정부를 믿고 동요 없이 직장을 사수하라고 방송하고는 자기들끼리 도망쳤다 돌아온 권력자들이 남아서 고생한 시민들에게 사과와 위로는커녕 터무니없는 ‘부역의 혐의’를 걸었고, 심지어 “저기 빨갱이가 간다는 뒷손가락질 한번으로 그 자리에서 총을 맞고 즉사한 사례도 있었다.”(같은 책 292면) 엉뚱하게 좌익의 거물로 오해받은 박완서네 집은 ‘동네 사람의 고발에 의해’ 가택수색을 당했고, 그는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각종 우익단체에 끌려다니며 갖은 모욕을 당해야 했다.

 

그들은 나를 빨갱이년이라고 불렀다. (…) 그들은 마치 나를 짐승이나 벌레처럼 바라보았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돼주었다. 벌레처럼 기었다. (…) 나는 밤마다 벌레가 됐던 시간들을 내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며 몸부림쳤다. 그러다가도 문득 그들이 나를 벌레로 기억하는데 나만 기억상실증에 걸린다면 그야말로 정말 벌레가 되는 일이 아닐까 하는 공포감 때문에 어떡하든지 망각을 물리쳐야 한다는 정신이 들곤 했다.(같은 책 294~95면)

하지만 자신이 당한 것은 약과였다고 박완서는 말한다. 여름 동안 숙부네 집은 마당이 넓었던 탓에 인민군에게 강제로 수용되어 있었고, 그래서 숙모가 그들에게 밥해주는 것으로 두 사람이 얻어먹고 살았는데, 그 일로 고발이 되어 숙부가 부역죄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던 것이다. 수복 이후 서울과 각 지방 경찰서는 이렇게 부역혐의로 잡혀온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는바, “19501113일 당시 남한 각 도에서는 55900명의 부역자가 검거되었다.”(김동춘, 앞의 책 245면) 다른 책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한국전쟁 동안 벌어진 민간인 학살은 보도연맹원 학살 약 20만명, 형무소 수감자 학살 약 5만명, 북한군 및 인민위원회에 의한 학살 약 10만명 등으로 추산되고 있다. 아마 알려지지 않은 사건들을 합치면 훨씬 더 많은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박태균 『한국전쟁』, 책과함께 2005, 326면) 한마디로 그것은 지옥도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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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완서네 가족에게는 더 모진 지옥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군의 참전으로 다시 전선이 밀려 내려오고 이번에는 정식으로 대통령의 피난명령이 떨어진다(1950.12.24). 마침 그때 의용군에 잡혀갔던 오빠가 너무도 달라진 모습으로 돌아왔는데, 그는 심한 피해망상으로 온전한 정신상태가 아니었다. 그런데 피난을 가기 위해서는 시민증이 있어야 했고, 시민증을 만들려면 근무하던 학교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이 거기 갔다가 그는 주둔했던 군인의 오발사고로 다리에 관통상을 입는다. 그 상태로는 조금도 걸을 수가 없었다. 군인이고 민간인이고 다들 서울을 빠져나가는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은 결정적으로 기동력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그들은 부득이 피난을 포기하고 옛날 살던 동네(현저동) 꼭대기에 있는 어느 집에 숨어들어 다시 죽음 같은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때부터 오빠의 죽음에 이르는 8개월간의 처절한 생존투쟁 과정은 박완서 생애의 영원한 심연이다. 처음에 그들은 “오늘 우리가 안 죽었다는 것밖에는 앞으로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아무런 예측도 할 수 없었다. (…) 세상이 또 한번 바뀌었다면 우리는 인민공화국의 하늘 아래 있으련만 그 실감은 나지 않았다.”(『그 산』 21면) 그러나 세상이 어떻게 바뀌든 바뀔 수 없는 것은 먹는 일의 절대적 중요성이었다. 거의 굶다시피 며칠을 버틴 끝에 마침내 올케와 나는 밤마다 빈집을 더듬으며 남아 있는 양식을 훔쳐오기 시작한다. 얼마 후에는 동 인민위원회에 나가서 사무를 거드는 일도 맡게 된다. “나중에 빨갱이로 몰릴까봐 두렵다는 생각은 그닥 심각하지 않았다. 도둑질에 죄의식이 없어지고부터 후환을 근심하는 것까지 배부른 수작으로 여겨졌다. 오로지 배고픈 것만이 진실이고 그밖의 것은 모조리 엄살이요 가짜라고 여겨질 정도로 나는 악에 받쳐 있었다.”(같은 책 56면)

소설 『그 많던 싱아』 『그 산』은 작가 박완서가 이렇게 극한상황을 통과하면서 겪은 전쟁의 개인사적 증언이고 사회사적 기록이다. 그런 점에서도 이 작품은 탁월한 업적이다. 작품의 도처에서 그가 이념의 불모성과 권력의 잔학성에 대해 절망적 분노를 터뜨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지 않은 사람들을 더러 만날 수 있었고, 그런 행운 덕분에 인간에 대한 희망의 끈을 아예 놓지는 않았다. 가령, 동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강영구가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마지못해 그 직책을 맡고는 있었지만, 매사에 지쳐 있고 우울한 표정이었다. 소설에서 주인공이 더욱 그를 괜찮게 여기게 된 것은 혼자 살다 죽은 할머니를 장사지낼 때였다. 인민군 군관과 특무장은 “지금이 어느 땐데 관을 다 짜느냐”고 일소에 부쳤지만, 그는 그들과 싸우다시피 해서 못과 연장을 얻어다 관을 짜고 언 땅을 파서 나름으로 정중한 장례를 치른다. 인왕산 언덕바지 눈밭에서 치러진 이 보잘것없는 장례식은 화려하게 의전을 갖춘 평화시의 어떤 장례보다 더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그 자체가 전쟁의 반인간성에 대한 무언의 항의다. 강영구는 헤어진 가족들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이렇게 역설적인 탄식도 한다: “욕먹을 소리지만 이런저런 세상 다 겪어보고 나니 차라리 일제시대가 나았다 싶을 적이 다 있다니까요.” 이 말에 뒤이어 작가는 이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하고 싶었던 전언 하나를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오랜만에 사람 같은 사람을 만난 기분까지 들었다. 잘났다는 뜻이 아니라 적당히 못나서 좋았다. 사람의 생각 속에는 좌우의 이념보다는 거기 속할 수 없는 생각들이 훨씬 더 많은데, 누굴 만나면 우선 저 사람 속이 흴까 붉을까부터 분간해야 하는 관습화된 심보가 부드럽게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같은 책 82면)

그러나 『그 많던 싱아』 『그 산』은 단순한 이데올로기 비판소설이거나 상투적인 반전문학이 아니다. 작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리고 싶어한 것은 전쟁의 형식으로 폭발한 거대한 이념의 세계가 아니라 이름 없는 개인이 가족의 일원으로 자연에 조화되어 살아가는 소소한 풍경들, 그리고 그 안에서 구현되는 작은 인간적 가치들이었다. 그 점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사람이 먹어야 사는 존재라는 물질적 조건에 대해 말할 때, 그리하여 계절에 따른 갖가지 음식들의 조리법과 다양한 맛에 대해 서술할 때 그의 필치가 유난히 황홀한 빛을 발한다는 사실이다. “부엌에서 그릇 부딪치는 소리, 마당에서 펌프질하는 소리, 아이가 칭얼대는 소리, 여자들이 두런거리다가 킬킬대는 소리, 밥이 뜸 드는 냄새, 그리고 우리 집 된장만의 그 구뜰한 냄새, 이런 것들이 서로 어울려 집안을 자욱하게 채우고 있었다. 아, 이 자욱함, 그건 음향이나 냄새가 아니라 생활이요 평화였다.”(같은 책 130면) 전쟁을 겪으면서 작가가 발견한 것은 집안을 자욱하게 채운 저 사소한 것들의 어울림이 다름아닌 생활이고, 바로 그 안에 인간이 추구할 만한 적극적 목표로서의 평화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위협받고 파괴되는 비극을 목격하고 그 극한적 상황 속에서 결심한 것이 소설쓰기였다. 결심을 실천에 옮기는 데는 20년의 세월이 걸렸지만, 생각해보면 박완서의 경우에는 그가 기억을 불러오기보다 반대로 그가 끊임없이 기억에 호출되는 셈이었다. 소설의 법정에 소환된 그는 세속의 안일이 제공한 망각의 유혹과 싸우면서 허다한 자술서를 되풀이 써야 했다. 많은 이본들을 시험한 끝에 마침내 완성한 『그 많던 싱아』 『그 산』은 최후의 정본(定本)이다. 이제 그에게는 역사로부터의 관용의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